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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by 소이나는 200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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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遺事>>란? -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의 명승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12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歷史書). 5권 2책. 인본(印本).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우리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임으로 해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우리의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신화가 수록된 본서는 뛰어난 하나의 설화문학서라고도 일컬을 만하며, 특히 향찰로 표기된 ≪혜성가≫등 14수의 신라 향가가 실려 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루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의 실증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 최남선은 일찌기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삼국유사≫의 체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에 <왕력> 제1과 <기이> 제1을, 권2에 <기이> 제2를, 권3에 <홍법> 제3과 <탑상> 제4를, 권4에 <의해> 제5를, 권5에 <신주> 제6과 <감통> 제7과 <피은> 제8 및 <효선> 제9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왕력>은 연표로서, 난을 다섯으로 갈라 위에 중국의 연대를 표시하고, 아래로 신라·고구려·백제 및 가락의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뒤에는 후삼국, 즉 신라·후고구려·후백제의 연대도 표시하였는데 ≪삼국사기≫연표의 경우와는 달리 역대 왕의 출생·즉위·치세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저자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았다. <기이>편에는 그 제1에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전설·신앙 등에 관한 유사 36편을 기록하였고, 제2에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이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 25편을 다루고 있다. <홍법>편에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전래의 유래와 고승들에 관한 행적을 서술한 7편의 글을, 다음의 <탑상>편에는 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 및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을 30편에 나누어 각각 실었다. <의해>편 역시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으로 14편의 설화를 실었고, <신주>편에는 밀교의 이적과 이승들의 전기 3편을, <감통>편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험이나 영이 등을 다룬 10편의 설화를 각각 실었으며, <피은>편에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은둔한 일승들의 이적을 10편에 나누어 실었다. 마지막 <효선>편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5편의 미담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저술은 저자가 사관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엇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내지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것도 눈에 뜨이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인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으며, 당시의 민속·고어휘·설씨록·지명 기원·사상·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금석 및 고적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우리 나라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 내지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빠졌거나, 혹은 빠뜨렸다고도 보여지는 고기의 기록들을 본서에는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이라 일컬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신간본으로는 1908년 간행된 일본 도오쿄 대학 문학부(東京大學文學部)의 사지총서본(史志叢書本)이 가장 오랜것이고,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과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이ㅡ 최남선 교감본 및 그의 증보본이 있으며, 그 밖에 1921년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하여 일본 교오토 대학 문학부총서 제6에 수록한 것과 고전간행회본(古典刊行會本)이 있다. 8·15 해방후로는 삼중당본, 1946년 사서연역회에서 번역하여 고려문화사에서 간행한 국역본, 이병도의 역주본 등 여러 가지가 있고, 동서문화센터의 이학수, 영역본과 54년 ≪역사학보≫ 제5집의 부록으로 이홍직의 삼국유사 색인이 발간된 바 있다.

- 2 『三國遺事』해제 -

 『삼국유사』는 13세기 고려의 저명한 불교승려 일연(一然:1206~1289)의 저작으로 5권 9편으로 된 역사서적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와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또 귀중한 역사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은 고조선의 건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사실을 수록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제목에 따라서는 그의 관련된 사실이 고려조의 중엽 사실에까지 미치고 있다.
 『삼국유사』는 그 표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봉건시대의 역사서적을 유별하는 표준에서 볼 때에 소위 정사(正史)가 아니요, 야사(野史)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의 대상자료·편찬체계·서술방향 등에 있어서 일정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주로 이 같은 특징들로부터 이 문헌이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결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은 정사의 경우와 같이 그 편찬에 있어서 지정된 집필제강이나 전통적인 편찬절차나 고전적 편집양식에 제약됨이 없이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서 많
은 경우, 정사가 대상으로 삼지 않고 남겨둔 자료들을, 바로 이 책의 명칭이 말하는 『유사』들을 추려모아 자기의 대상으로 삼은 개인저작이라는 점으로부터 이 문헌이 가지는 일반적 특징으로서의 우점들을 찾게된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이 같은 역사고전들로부터 추구하는 중심목표가 결코 해당문헌이 가지는 형식적 편집체제나 화려한 문장이나 저자의 역사관에 있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라도 그것은 자료적 가치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보다 거의 1세기 반 가까이 앞서 편찬되었으며, 그 대상사료가 꼭같은 삼국시대로 된 소위 정사로서의 『삼국사기』와 대비해 볼 때에 그 구체적인 특징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유교문화를 교조주의적으로 떠받들던 봉건왕조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도식적인 제도의 산물이라면 다시 말하여 그의 편찬 목적·절차·양식·자료의 선별표준·문장표현의 체식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전통적 규범에 복종하는 것을 편집제강으로 삼았던 문헌이라면, 이 『삼국유사』는 저자의 주관적 의도와는 별개문제로 이 같은 까다로운 제약들로부터 해방된 입장에서 일정한 교양을 가진 불교승려로서의 저자가 노년기에 자기의 정력을 다하여 삼국시대의 『유사』들을 들추어 '정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책임'하게 집필하였다는 조건이 바로 오늘에 와서 이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보다 높이는 조건으로 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저자가 이 책을 편술함에 있어서 자기의 의도를 밝힌 통권 서문이 없으나 저자가 명명한 이 책의 명칭에서 이미 이 책에 수록할 자료의 성격이 시사되어 있고, 한편으로 본문 서두에 실린  『기이(紀異)』편의 머리말에는 귀신·도깨비 이야기 같은허탄스러운 이적기사에 관한 이야기라도 그것이 역사적 전설이라면 써서 괴이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저자는 기사취급의 방향을 표명하고 있는바, 이 점이 또한  『삼국유사』의 사료적 내용을 보다 풍부히 만든 다른 조건으로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저자의 `우연'같은 의도에 의하여 이 책에는 아득한 원시시대를 포함한 우리 선조들의 고대 사회·경제·문화·사상·생활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여러가지 소박한 신화와 전설들이며, 오늘날까지도 직접 우리들의 생활문화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유서깊은 민속적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이 같은 기록들은 우선 오늘 우리나라 고대 사회경제사 연구를 비롯한 원시고고학·원시사상사·민속학 등 연구사업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문헌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통칭 향가라고 부르는 우리 말로된 신라시대의 노래 14편을 싣고 있다. 이 노래들은 한문글자의 음을 이용하여 우리나라 말을 적은 이른바 이두체(吏讀體) 글로 쓰여져 있다. 『삼국사기』이래로 많은 우리나라 고전의 저자들이 완미한 한문지상주의 입장에서 그것이 한문으로 기술된 자료가 아닐 경우에는 `사리부재(詞俚不載)'란 낙인 아래 이 같은 종류의 글을 취급대상으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삼국시대의 『유사』들을 되도록 알뜰하게 수록하겠다는 저자의 의도와 함께 이 노래들의 많은 부분이 저자의 신앙과 관련된 불교관계가 많다는 인연에서 `사설이 비속(詞俚)'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록했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우리나라 문학사상에 빛난 자리를 차지하는 귀중한 자료를 남겨주고 있다.   
 이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수많은 우리나라 지명의 고호·속명들과 함계 그의 연기(緣起)를 밝히고 있으며, 향가에 사용된 고어 이외에도 왕력에 나오는 인명들의 속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고어연구에 참고로 될 수 있는 자료들을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우리나라 고어연구에 참고로 될 수 있는 자료들을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우리나라 언어사 또는 고대지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얻기 어려운 문헌적 자료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저자가 불교승려이던 만큼 종래 신라관계 불교사적의 그릇되게 전한 부분을 시정한다는 목적에서 전편의 절반이나 되는 부분을 여기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이 부분 기사들도 다행히 불교의 교리를 해설하는 불경주석 따위가 아니라 주로는 우리나라의 저명한 사찰들의 사적과 이름난 중들의 행적 등에 관한 사료이므로 여기는 우리나라 명승고적에 관한 설화와 함께 고대 미술·조각·건축에 관한 자료이며, 당시 새로 수입된 외래 불교사상과 원주민들의 사상생활과의 모순 또는 동화과정을 보여주는 사상사적 자료들의 풍부히 실려 있다. 많은 불교 설화들도 흔히는 전래되던 이 땅의 고유신화들과 융합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것을 일괄적으로 불교설화로만 간과하거나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삼국유사』가 통사를 목적한 역사서적이 아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표제가 보여줌과 같이 삼국시대를 대상으로 한 단대사(斷代史)
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시대 이전까지의 문헌적 공적을 책의 머리부분에 주의깊게 보충함으로써 삼국의 역사적 전통을 뚜렷이 밝히고 있을 뿐더러 오늘 유존되고 있는 문헌의 범위내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집필된 이 시대 역사의 첫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바로 이 점은 같은 시대를 대상으로 삼은  『삼국사기』의 경우와 엄격히 구별하여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부분 기록은 많은 경우 중국문헌들로부터 그 사료를 인용하고 있으나 저자는 가능한 한 손을 뻗쳐 우리나라 전래 고기(古記)들의 남은 끝을 한쪽이라도 이용할 대로 이용하였고 선배들의 편언·척구라도 해당편목에 따서 보충하였으며, 인용한 중국문헌까지도 되도록 우리나라 고기들이 인용한 전거(典據)를 밝혀 재인용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역사문헌으로서의 주체성을 살리고 있다.
 이와같이 『삼국유사』편찬체계에서 저자는 고조선을 후일에 통일된 단일민족국가의 최고기원으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삼국 이전까지 흥망을 거듭한 수많은 `나라'명목을 붙인 종족들의 역사까지 이를 빈약한 사료로서나마 시대순 또는 지역단위로 일괄 나열하여 서두에 붙임으로써 삼국형성까지의 우리나라 역사전통을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는 분명히 저자의 의도 여하를 불문하고 현존문헌중 불완전 하나마 우리나라 통사편찬의 첫 예를 열어놓음으로써 후일 단일민족국가 전통의 역사적 개통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고조선을 조선족이 창건한 최초의 국가로 인식하는 저자의 역사전통관과 아울러 고조선과 병립 또는 이를 계승한 여러 나라들을 소개하면서 더러는 이 나라들의 건국설화를 통하여 그 혈연관계를 고증하고 더러는 `조선유민'이란 유대로 묶여진 이 나라들의 전통과 종족 `조선족'의식은 결코 저자의 창견이나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요, 그것은 인식일 것이며, 저자의 시대까지 남아 있던 여러가지 문헌들의 고증으로부터 얻어진 견해일 것이다.
 이리하여 저자는 대륙 깊이 동북방의 넓은 지역으로부터 반도지역의 최남단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공간과 이에 따르는 유구한 시간을 조선족의 역사무대로 고증하여 자기 저서의 편찬체계에 의하여서까지 이를 밝힘으로써 후대에 편찬된 여러 종류의 통사편찬에까지 하나의 표준과 전통을 지어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인용문들을 통하여 이미 실전된 『구삼국사』「본기」에도 단군·동명 등 이 기간 사료들이 실렸던 것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어떤 편찬체계로, 또 어떤 정도로 실렸는지 알 길이 없는 오늘에 있어서 이 부분 사료를 남긴 공적은 마땅히 『삼국유사』가 지녀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이래 우리나라의 많은 역사문헌들의 저술은 소위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입에 담지 않고 `황탄(荒誕)'과 `비리(鄙俚)'를 극력 배척하는 유교세계고나과 아울러 `사대(事大)'와 `존화(尊華)'의 정치도덕에 충실하였던 유학자들의 전업이요, 독무대로 되었던 만큼 『유사』보다 거의 한 세기 반 앞서 나온 『삼국사기』의 저자가 충실한 유교적 사상관점과 유교적 정치 도덕 관점에서 중요한 사료들을 무시 또는 간과하는 한편, 자기 나라의 역사 전통을 밝히는 데 관심이 적었으며, 이 같은 경향은 장래 유교의 일색화와 함께 더욱 그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을 시기에 그들과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는 일개 `이단(異端)'의 집필로 된 『삼국유사』의 출현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극히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삼국유사』보다 몇 해 뒤떨어져 저작된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는 별문제로 하더라고 조선조 초기의 저명한 유학자 권근(權近)의 저작으로 된 『동국사략』도 `황탄'과 `비리'를 불구하고 대체로 『삼국유사』의 편찬체계를 답습하게 되었으며, 1484년에 편찬된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도 비록 구차스럽게「외기」라는 편목을 따로 붙여서 이 부분 기사를 별도로 취급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거기는 역시 삼국 이전의 역사전통을 『삼국유사』의 편차에 준하여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기사들을 『삼국유사』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근세에 와서 자기 나라의 주체성을 살리려는 선진적 특징을 가진 학파로서 실학자들도 그들의 학문적 토대에 이르러는 유교적 세계관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삼국유사』에 대한 태도는 어디까지라도 부정적이었으며, 방법론적 관점에서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17세기 성호(星湖) 이익(李瀷)같은 학자도 그의 『사설(僿設)』에서 "맹랑한 속설들을 취급한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견식이 고루하다"는 의미로 『삼국유사』와 아울러 이 책 기사를 인용한 사가들을 규탄한 바 있으며, 바로 그의 제자인 18세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80)도 자기의 저서 『동사강목』 범례에서 이 책을 `이단허탄지설(異端虛誕之設)'로 가볍게 평가하고 말았다.
 물론 여기는 비현실적인 것, 관념적인 것을 배격하는 실학의 입장에서 그가 「고이(考異)」「괴설변(怪設辨)」등 부록까지 첨부하여 이를 변박하기에 노력한 다른 긍정적 측면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저서에서 그의 유교적인 정치도덕적 관점으로부터 출발한 역사방법론으로서의 소위 `정윤론(正閏論)'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자조선'을 조선적의 `정통'국가기원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렇듯 유교적 역사방법론에 철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 `기자조선'조 말미에는 단군설화를 간단히라도 첨부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삼국유사』로부터 수많은 기사들을 인용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공개한 저서에는 유교적 명분론에 서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자기가 가졌던 수택본 『삼국유사』 권두 공백에 자필로 쓴 감상문에는 "곤륜산의 옥돌 조각이 티끌 속에 묻힌 셈"이라고까지 이 문헌의 가치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역시 『삼국유사』가 가진 사료적 권위로부터 빚어진 후대 학계에까지 미치고 있는 커다란 영향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삼국유사』는 그 저자가 `이단'이건 그 내용이 `허탄'이건 그 자체가 갖춘바 일정한 역사전통관에 입각한 편찬체계나 그 내용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와 아울러 후대에 편찬된 역사고전들에 준 영향은 막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가 가진 다른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상에서 열거한 많은 종류의 사료들이 저자 자신의 기억이나 또는 지식으로 소화된 자료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서술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많은 부분에 해당하는 분량이 당시의 국내외 고전문헌들로부터 광범히 인용하고 있는 점이다.
 더구나 이 자료들을 인용한 국내외 고전들은 그 대부분이 오늘에 와서 실전 또는 인멸된 문헌이란 사실은 이 책의 문헌적 가치를 더욱 높이는 조건으로 되고 있다.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중국고전만 하더라도 27종에 달하며 우리나라 고전은 역사서적·불교서적 및 문집류를 합하여 책명이 확실한 것만 하더라도 실로 50여종에 미치고 있는 이외에 「고기(古記)」「향기(鄕記)」등 약칭·범칭으로 표시한 문헌도 무수하다. 이밖에도 비문(碑文)과 고문서 등으로부터 인용한 것이 20여종이요, 일정한 출전이 없이 개인의 말이나 시를 인용한 것도 적지 않다.
 이와같이 『삼국유사』는 오늘에 와서 이미 인멸되고 없어진 수많은 문헌들을 인용함으로써 고증과 소개의 풍부한 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문헌들의 인용된 편린(片鱗)들을 통하여 귀중한 우리나라 「고기」「향전」들을 더듬으면서 많은 전고자료(典故資料)와 아울러 문화사적 자료들을 딴 몫으로 찾게 된다.
 다른 일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고전인 『삼국사기』보다도 반세기 이상 앞서 저작되어 이미 실전된 지 오래인 『가락국기(駕洛國記)』와 같은 귀중한 문헌도 요약은 하였으나 그 전모를 남기고 있음은 풍부한 인용을 특징으로 삼은 이 책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와같이 『삼국유사』는 역사·지리·문학·미술·언어·고고·민속·사상·종교 등 각분야를 통하여 이 책이 없었더라면 영구히 얻어볼 수 없는 단벌자료들을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문헌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한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은 『삼국유사』가 가진 이와 같은 허다한 우점들을 저자의 주관적 기도나 의식적 노력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저명한 불교승려이면서도 한편 유교적 정치도덕을 어느 정도 정확히 비판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유학지식의 준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사상은 삼한(三韓)·해동(海東)등 개념의 연장으로 되는 오늘 개념에서의 `조선사람' 의식에 튼튼히 섰다고 볼 수 있었던 만큼 그는 유학자의 손으로 편찬된 『삼국사기』를 어디까지라도 비판적으로 대하였으며, 그의 결함을 『유사』로써 보충하였으며 `해동'적이요, `삼한'적인 자료는 그것이 속되든지 허황되든지를 불문하고 이를 배제하지 않고 힘써 수록하기에 노력하였다고 할 것이다.
 『삼국유사』가 이 같은 장점을 많이 가졌다 하여 이 책에서 결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함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역대 유학자·역사가들이 논편한 바와 같이 허탄한 기사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우점의 조건으로도 될 수 있는 반면에 결함으로 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이 가지는 하나하나의 특징은 그 평가에서 상반되는 두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학ㄱ에서 희귀하게도 저자가 불교승려라는 특징은 유교주의 역사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장점으로 되는 동시에 타방으로는 이 책의 절반부분을 불교관계 `유사'로 채운 결함을 가져왔으며, 때로는 저자의 신앙심으로부터 나온 강한 주관에서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래설화를 불교색체로 윤색함으로써 그 원형을 왜곡한 폐단도 없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은 역사전문가가 아닌 한낱 선승(禪僧)의 손으로 집필되었던 만큼 사료의 정리면에서 연대의 착오와 인용기사의 소루한 점 등 직업적 책임성의 결여로부터 나온 결함들이 왕왕 있다. 그 일례로 분명히 오간이 아닌 범위에서 첫편 왕력에서만 보더라도 전한 지황(地皇)원년 경진이 `병진'으로 오기되었으며 송 경평(景平)원년은 `계해'인데 `계유'로 되었으며, 백제 무녕왕(武寧王)조의 `융(隆)'은 의자왕의 태자인데 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의 태자로 기술하는 등등 이 같은 착오는 다른 편들에서도 가끔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그 취급기사의 범위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의 그것보다도 더 심하게 신라의 사적에 편중하고 있다. 이 결함은 『삼국사기』와 함께 문헌의 제약으로부터 오는 공통된 원인이기도 하려니와 더욱이 저자는 경주 장산현(獐山縣) 사람으로 그 생애의 대부분을 경상도 일원에서 시종하였으므로 그의 관심이나 견문에서 오는 제약은 저절로 이 지역을 중심한 자료에 편중함을 면치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자기 저서의 표제를 `삼국'으로 내세운 것도 어떤 과업으로부터 지정된 표제가 아닐 것이며, 삼국의 `유사'자료에 대하여 그 어떤 균형을 고려해 볼 책임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은 그 자료문헌의 제약을 별개문제로 하더라도 저자의 취미나 편향된 지식에 기초하여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 결과는 이 책이 오늘에 와서도 때로는 신라중심의 `유사', 또는 불교중심의 `유사'라는 평을 받게 된다.
 여기서 저자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그는 1206년(고려 희종 2년 병인) 6월 11일(음력) 경주 장산현(현재는 경북 경산군)의 한 평민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견명(見明)이었는데 뒤에 일연(一然)으로 개명하였으며, 자(字)는 회연(晦然)이요, 불교식 이름은 보각(普覺)이며, 그의 아버지는 김언필이다. 그는 아홉 살에 중이 되어 벌써 20세 때에 불교 국가시험에 최우등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그 후로 여러 곳 절에서 선공부(禪工夫)를 전문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그가 76세 때에는 당시의 충렬왕(忠列王)이 충조(沖照)라는 호를 그에게 주어 국가적으로 최고승적인 국존(國尊)으로 책봉하였다.
 그는 1287년 7월 8일 84세를 일기로 경북 의흥군(義興郡) 인각사(燐角寺)에서 별세하였다. 여기에는 지금도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으며, 그가 불경공부에만 심오했을뿐 아니라 유교서책도 광범히 섭렵하였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서는 불교관계 서적 1백여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저서들은 현품은 고사하여 책 이름마저 전하는 것도 몇종 못 되는 터에 이 비문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삼국유사』 한 종이 오늘에까지 전존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삼국유사』를 저작한 연대는 정확히 밝힌 기록이 없으나 이 책의 내용 기사와 관련된 최종연대가 고려 충렬왕 신사(1281), 즉 저자의 76세에 해당한 부분이 있으며, 저자는 86세에 사망하였으므로 이 책의 최종탈고는 이 사이 7~8년간으로 추정될 뿐이다.
 『삼국유사』가 일연의 저작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이 책 기사중에는 한 두 군데 저자의 제자 손으로 보충한 개소가 있다. 그것은 권3의 「前後所將舍利」제목과 권4의 「關東楓嶽鉢淵石記」 제목기사 끝에 `무극기(無極記)'라고 표시한 기사토막이 있다. 이 `무극'이란 인물은 바로 일연의 제자인 보감국사(寶鑑國師:混丘)의 별호로써 한 군데는 부록으로 한 군데는 안설(按說) 로 부충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편성내용을 고간본·정덕본에 의하여 살펴보면 전편을 5권 2분책으로 나뉘어 1~2권이 상권으로 되고 3~5권이 하권으로 되었으며, 다시 이것을 「왕력」「기이」「홍법」등 9개의 편목으로 나누고 있다. 첫장의 머리 제목으로는 권차의 표시가 없이 다만 첫 장부터 판심(版心)에만 『삼국유사』 권1이란 난외목록이 있을 뿐 `『삼국유사』「왕력」제1'이란 첫 편목을 제호로 달았으며, 이 편의 내용은 삼국과 가락국의 왕대와 연호를 횡간식(횡간식)으로 편찬하였다.
 다음 편차는 권차와 편목을 혼동하여 `「기이」권 제1'이란 애매한 제목을 붙이고 그 내용은 고조선 이하 상고 여러 나라들의 사적과 아울러 신라 각 왕대의 기사 등 36편을 채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권 제2'라는 제목 다음에는 편목을 따로 붙이지 않고 앞서 권의 기사를 게속하여 신라 말대왕까지의 사적과 백제·후백제·가락국 기를 합하여 23편의 기사로 되었다. `권 제3'의 내용은 `「홍법」제3'을 편목으로 하고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사적을 비롯하여 신라를 중심한 저명한 불탑·불상에 관한 기사 37편을 수록하였으며, `권 제4'에는 편목을 한 편 뛰어넘어 `「의해」제5'를 실었는데 여기는 신라시대 저명한 승려들의 전기 14편을 수록하였으며, `권 제5'에는 `「신주」제6' `「감통」제7' `「피은」제8' `「효선」제9'등 네개 편목으로 갈렸는바 「신주」편에는 밀교승려들의 사적 3편, 「피은」편에는 고승들의 사적 등 10편, 「효선」편에는 불교계와 속계의 효행과 과보(果報)에 관한 미담 5편이 실렸다.
 이상 과 같이 정덕본의 편차는 서두에 권목으로 제1의 표시가 없이 『삼국유사』 `왕력 제1'이란 편목을 붙였고, 다음 편에는 `「기이」권 제1'이란 편목을 붙였으나 여기에 책명이 붙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이」는 편목이 아니라 「왕력」과 함께 편목이었는데 「기이」편부터 줄글로 되었으므로 간각자가 「기이」를 권수처럼 절차를 잘못 집어넣은 것이 분명하며, 다음 편목이 `「홍법」제3'으로 된 것을 보아 `「기이」제2'의 오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이 정덕본에는 제4편목이 누락되어 있으나 `「홍법」제3'의 「동경흥륜사금당 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제목기사 끝 줄과 다음 기사제목 「가섭불연좌석(伽葉佛宴坐石)」이란 글줄 사이에는 `탑상(塔像)'이라는 두 글자가 연문처럼 끼어 있고 그 다음 31편 기사가 모두 불탑과 불상에 관한 기사임을 미루어보아 이 `탑상'은 편목의 명칭이요, 이 아래 붙을 `제4'라는 편차 글자가 결자로 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 대역본에는 이상의 견해대로 편차를 자로잡았다.
 『삼국유사』의 간행은 이 책이 저작된 이후 조선조 초기 이래 많은 역사 서적들이 저마다 인용했을 뿐 아니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등 권위 있는 타부분 서적들에서도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든지 저자가 저명한 불교의 고승이었고, 이 책을 일종의 불교서적으로 중시하였던 만큼 응당 일찍부터 관판(官版)으로나 사판(寺版)으로 간행되어 유전되었음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현존 고간본으로는 근세에 발견된 정덕본으로 이르는 1512년에 간직된 경주판이 있을 뿐이다.
 현존 고간본으로서의 정덕본은 중간자인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이 있을뿐 초간 당시의 서 발문이나 내용목차도 없으며, 저자의 서명조차 권 제5의 편두 한 군데에 간신히 표시되었을 뿐이며, 판각은 자획이 틀린 것, 떨어진 것, 변이 바뀐 것, `今 令, 于 干, 持 特, 民 氏, 妾 姜, 先 夫, 斤 斥, 改 攻, 幻 幼, 典 曲'등 무수한 오자와 아울러 글줄이 바뀐 것, 본문과 주각이 뒤섞인 것, 때로 나오는 결자 등등 각판의 어지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편차와 편목도 탈락과 불비가 있어서 정확한 편차조차 불분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덕본은 고간본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이것을 대본으로 삼는 영인본이 현재도 유일한 고간본의 면모로써 유통되고 있다.
 근대에 복각된 유통본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판본들이 있다.

        1. 日本東京文科大學史誌叢書活字本       1907년
        2. 京都帝國大學文部叢書景印本           1921년
        3. 京城啓明俱樂部刊『啓明』第18號特輯   1927년
        4. 朝鮮史學會活字本                     1928년
        5. 京城古典刊行會景印本                 1932년
        6. 京城三中堂活字本                     1944년

 이상과 같이 근년에 와서 이 책은 내외국에서 회를 거듭하여 중간을 보게 되었으나 현재에 와서는 일반 연구자나 독자들에게 있어서 구득하기 어려운 책으로 되었다. 따라서 본 고전연구실은 이 책의원문과 함께 역주본을 편찬하기로 하여 고간본인 정덕본을 대본으로 삼고 삼중당본과 사학회본을 참고로 세심한 교감을 실시한 위에 원문의 구두점을 정리한 기초 위에서 대역주해본을 편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기본고전중의 하나이요, 가장 중요한 역사문헌으로 손꼽아 온 『삼국유사』 전권 역주본을 오늘 우리 손으로 발간하게 되었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나라 고전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심심한 배려를 돌리고 있는 조선노동당의 정확한 과학문화 정책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성과임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된다.

 - 3.일연(一然) 찾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이해하기 -

 ≪삼국유사(三國遺事)≫만큼 많이 알면서도 ≪삼국유사≫만큼 모르는 책이 없다. 이런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누구나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교육을 통하여 ≪삼국유사≫라는 책의 이름을 들었다. 그 저자가 일연(一然)이라는 사실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시대를 다룬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다는 것가지 덤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제목을 알고 있다는 데 그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기에 조금 더 알려고 덤비다가 두 책을 함께 들먹이면 이 둘을 엇갈려 연결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다.
 ≪삼국유사≫가 이렇듯 많이 알려졌으면서 실제로 알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많이 알려진 까닭은 한마디로 ≪삼국유사≫가 우리의 고대사를 저변에서 있는 그대로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책이어서 그간 여러 방면의 연구자들이 이를 소중히 여기고 자주 인용했다는 데 있다. 인문과학에서 자연과학까지 ≪삼국유사≫는 가히 걸치지 않는 데가 없을 만큼 다양한 자료를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기실 우리는 ≪삼국유사≫를 이름뿐만이 아닌 내용에서도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인용되면서도 정작 원문을 찾아 읽는 노력은 소홀하여 출처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것이 알지 못하는 이유이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 너무 많이 알려져서 사실은 모르는 책, 그것이 ≪삼국유사≫이다. 13세기 한 승려에 의해서 저작된 ≪삼국유사≫의 실체는 우리가 그 원문을 한번쯤 직접 대해봄으로써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이 한 시대 지식인의 고뇌에 찬 기록임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1) 일연이라는 사람
 일연은 1206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고려 희종 때였는데, 실권은 최충헌이 쥐고 있던 무인정권 시기였다. 그곳 경산군 압량면에 가면 삼성산(三聖山)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세 분 성인이 태어난 산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믿고 있다. 세 분 성인이란 다름아닌 원효와 설총 그리고 일연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일연은 아홉 살 나던 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광주 무등산 밑 무량사(無量寺)로 공부를 하러 간다. 경상도 경산에서 전라도 광주까지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던 어떤 이유를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때는 굳이 승려가 되겠다는 뜻은 없었던 듯한데, 여느 어린 아이들과는 다른 풍모가 있던 그는 열네 살 되는 해에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정식 승려가 되었다. 진전사는 신라 말 이 땅에 처음으로 선종을 들여놓은 도의(道義) 스님이 거처했다는 유서깊은 절이다. 이런 연유로 일연은 고려 시대 아홉 개의 선문(禪門)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한 승려가 되었다.
 일연이 승려가 된 그해에 무인정권의 최충헌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이가 정권을 이어받고 있었다. 일연이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을 강원도에서 보내는 동안 정치현실은 암담해지기만 했다. 무인정권의 전횡도 그렇거니와 마침 중국 본토에 원나라를 세운 몽고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종내 일연이 스무 살 되던 때에는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밖에서 피살되어 두 나라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일연은 착실히 불법을 닦아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당당히 수석합격을 하였다. 그는 강원도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가까운 현풍의 비슬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당시 비슬산은 포산이라 불리었는데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오는 감회는 남다른 것이었겠으나 이미 몽고와의 전쟁이 터져 실제는 피신의 의미가 더 큰 귀향이었다. 그는 이 산에서 선승으로서 득도를 하고 20년을 은둔하다시피 살았다.
 일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나이 마흔네 살 때였다. 하동에 살며 최이와는 처남 매부 사이인 정안(鄭晏)이라는 이가 오랫동안 벼슬살이를 하다가 그 해에 최이가 죽고 최항이 집권을 하자 은퇴하여 남해로 내려왔는데, 불심이 깊었던 그는 개인 집을 내놓아 정림사라는 절을 만들고 그 절의 주지로 일연을 초빙하였다. 초빙도 그러려니와 정림사에서 6년가량 지내던 일연이 같은 남해의 길상암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정안과 관련되었다. 최항은 최이가 기생에게서 얻은 자식이므로 정안과는 친삼촌간이 아니었다. 정안의 누이 곧 최이의 부인은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최항은 성격이 난폭한데다 정안이 자기를 미원한다는 것을 알아 백령도로 유배를 보내 그곳에서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 말았다. 후원자를 잃은 일연은 그 길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길상암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라는 책을 낸 일연은 쉰다섯이 되는 해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다. 이때는 무인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이 복구되었으며 출륙(出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연은 이제 경상도에서 중앙 교단과 교분하는 위치로 오르게 되었다. 고종이 죽고 원종이 즉위한 이듬해의 일이다.
 그러나 본디 성품이 번잡한 도회 생활을 싫어한 일연은 강화 생활 3년을 갓 넘기자 임금께 청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 영일의 오어사에 거처하다 젊은 시절을 보낸 비슬산의 인흥사로 옮긴다. 그리고는 중앙정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수행과 불법을 편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쉰아홉에서 일흔한 살까지의 이 기간이 일연으로서는 가장 왕성하게 자신의 뜻을 펼쳐보인 기간이었다. 선종과 교종을 막론한 승려들을 모아 치른 대장경 낙성회에서 주맹을 맡아본 일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충렬왕이 즉위하자 또다시 그는 중앙 관료의 교섭을 받는다. 인홍사(仁弘寺)가 임금의 사액으로 중창되면서 인홍사(仁弘寺)로 개명되고, 그는 임금의 명으로 청도의 운문사로 옮긴다. 이때가 일연의 나이 이미 일흔두 살, 불도의 경지가 오를 대로 오른 다음이다. ≪삼국유사≫는 바로 이때부터 저술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곳에서 3년쯤 보낸 일연은 몽고군의 일본원정 때문에 경주에 와 있던 충렬왕을 모시러 나서야 했다. 1년을 경주에 머문 충렬와은 환궁하면서 일연은 개성으로 불러 올리고 광명사에 주석케 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국사로 책봉되었다.
 일연의 개성 생활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도회 생활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나이도 연만했다. 그가 하산소로 정해 내려온 곳이 군위의 인각사이다. 이곳에서 ≪삼국유사≫는 완성되고 그도 생애를 마감하였다. 향년 84세, 나라에서는 이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2) 歷史意識
 一然의 歷史意識은 무신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自覺과 反省에서 그 矛盾을 극복할 수 있는 精神的 기준을 찾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文化的 배경이 高麗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다.「三國遺事」의 특색은 저자 一然이 어떤 강한 목적의식을 갖고 「三國遺事」를 지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선택된 주제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典據에 의하여 뒷받침하려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遺事'라는 겸손한 제목으로 인하여 이를 한낱 한가한 저술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적어도 「三國遺事」의 저술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하는데 소요된 노력만도 적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 一然이 「三國遺事」를 통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이점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격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다. 「三國遺事」는 「三國史記」가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룬데 대해서 비합리적인 사실들만을 골라서 다루었다.「三國遺事」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 서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된 관심은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에 놓여 있었다. 가령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記事를 적되, 김유신이면 三仙女神과의 관계가, 김춘추면 文姬의 이야기라든가 一日의 식사분량이라던가 하는 것이 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一然 자신은 '神異'를 기록한다고 하였다.따라서 「三國遺事」는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인 것이다. 이같은 神異만을 적고자 한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첫째로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 풍조에 대하여 대항하고 나선 것이 「三國遺事」였다. 一然이 유교의 합리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紀異編의 序에서 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다. 이 동일한 입장은 孝善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一然은 현세에서의 孝만이 아니라 신앙면에서 선하기도 해야 즉 孝善雙美해야 내세에 가서까지 孝할 수 있어서 말하자면 가장 지극한 孝를 실천할 수 있다고 說하고 있다.  이같은 유교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두가지 주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歷史的인 神異에 대한 기록은 요컨대 韓國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에 의하면 韓國의 歷史는 中國이 아닌 天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韓國史의 기원에 대하여 古朝鮮 - 衛滿朝鮮 - 馬韓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그것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또 신이한 것임을 자랑스러이 기술하고 있다.
元의 정치적 간섭이 불가피하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一然이 지니고 있던 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적인 神異에 대한 서술은 요컨대 신앙의 擁護를 위한 것이었다. 불교관계 기록은 우선 양적으로도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적 잘 정돈된 불교문화사인 것이다.
이를 통하여 나타나려고 한 것은 합리주의를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앙의 세계이었던 것이다. 一然은 이같이 비합리주의인 설화로써 합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것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三國遺事」의 서술이 典據를 중요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三國遺事」의 세계는 그러므로 神話와 傳說의 世界이며 신앙의 世界였다. 이 세계는 당시의 사학계가 이루어 놓은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진적인 자세와는 다른 復古的인 것이었다.

 (3) ≪삼국유사≫의 체재와 내용
 ≪삼국유사≫는 분량으로 치면 그다지 대단한 책이 아니다.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는 ≪삼국사기≫에 비해서도 대략 4분의 1 정도이다. 더욱이 일연의 생애를 전하는 비문에 적힌 바 그의 저작 목록에 이 책은 들어있지 않다. 왜일까?
 한편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인가 하는 점에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당시 역사서를 기술한다면 의당 갖추어야 할 체재를 ≪삼국유사≫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저자 일연 또한 이에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쓴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역사서에 가까운 것이어서 우리는 흔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책을 다루어 왔다. 그러나 결코 ≪삼국유사≫는 역사서라고만 규정하기 어렵다.
 또 한가지, ≪삼국유사≫를 읽어가다 보면 이것이 과연 국사에까지 오른 고승이 다룰 이야깃거리들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모름지기 고승이라면 그의 저서 목록에 옛날 이야기 비슷한 따위의 책은 끼여들기 어렵다. 그런데 일연은 이런 곱지 않은 시선을 전혀 괘념치 않은 눈치이다. 괘념하기는커녕 그의 필생의 역작으로 여긴 것이나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의문이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떠오른다. 그에 대한 해답은 결국 ≪삼국유사≫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되어 있다. 권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다르므로 다만 한 권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내용상 보면 아홉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왕력, 기이, 홍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이다. 이는 크게 셋으로 의미구분된다. 첫째 연대기로서 왕력, 삼국의 역사를 다룬 기이 그리고 불교문화서적 관점으로 볼 수 있는 홍법 이하 기타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는 체재의 성격상 역사서와 불교서의 혼재라고 하겠는데, 왕력과 기이가 역사서의 그것이라면 홍법 이하의 ≪삼국유사≫ 후반부가 불교 관련의 그것이다. 이로 인해 연구자에 따라서 ≪삼국유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여러 가지 견해가 대두되었다. 특히 후반부의 과목들은 중국의 고승전에 보이는 이름과 같아 고대 삼국의 고승전이 아닌가 하고 의미를 축소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혼재양상을 뭉뚱그려 볼 때 ≪삼국유사≫는 일연에 의해 새롭게 조합된 독자적인 체재가 구축된 책이라 해야 할 듯하ㄷ.
 체재가 그렇다면 내용에서도 다른 일면을 보게 된다. 이는 ≪삼국유사≫가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쓰이게 되는 이유와 맞물린다. 민영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연은 삼국의 고승전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의 것을 바랐던 것이다. 고조선을 편차하고 가락국기를 전재하고, 그리고 14수라는 적지 않은 수의 향가를 수록 점철해 넣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예들이다. 홍법 이하가 온통 불교사라는 뜻은 앞에서 말했거니와, 그들을 다루는 솜시 도한 과도하다 하리만큼 강인하게 모든 문제를 본지수적사상(本地垂跡思想)으로 귀결시켜놓고 있다. 역시 일찍이 김부식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빛깔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차하는 시점에서 염두에 두었던 두 가지 책을 들라 한다면 먼저는 ≪삼국사기≫요 다음은 승전(僧傳)이다.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그가 ≪삼국사기≫를 은연중 의식하고 있음은 특히 기이면에서 드러나는 바이다. 삼국의 고대사를 보여주는 데에 ≪삼국사기≫가 지닌 강점과 맹점을 누구보다 일연 자신 깊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칠 수 없는 것이 일연이 가진 승려로서의 입장이다. 중국의 승전들과 우리 나라의 ≪해동고승전≫ 같은 책이 신앙과 생활에 관한 여러 값진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음을 그는 끝내 외면하기 어려웠다. 어떤 경전의 해설보다도 쉽게 불교를 알리는 알찬 교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두 책의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진다.
 ≪삼국유사≫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음은 시사하는바 매우 크다. 존재조차 부정했던 ≪삼국사기≫오하 달리 ≪삼국유사≫가 단군을 그 첫머리에 내세운 것은 일연 개인의 호사취미가 아니요 시대와 역사의 관점을 달리 보는 데서 출발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곧 13세기의 고려가 처한 역사적 환경과 연관되는 것이다.
 13세기 고려사회는 내적으로 무인정권, 외적으로 몽고전쟁이 의미규정의 축이다. 물론 이 둘은 하나로 연결된다. 무인정권이 몽고와의 전쟁을 자초했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인정권의 성립은 당대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는 사건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단단한 정권이 무인들의 칼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중국에서 더 크게 일어났다. 한족(漢族)의 지배 밖의 다른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관을 가지고서 변방 오랑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정권을 세우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같은 일련의 사태는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수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싹트는 것이 매우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주체으식이다. 민족에 대한 자각이요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정도라고 하겠다. 13세기에 들어 단군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가 관심의 대상이 되엇다는 점이 이같은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통해 특히 북방민족의 건국신화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고, 이승휴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단군신화를 ≪제왕운기≫에담고 있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서로 교분이 있기도 하였다. 그같은 처지에 나란히 자신들의 책에 단군조선을 올린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일연은 승려라는 입장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곧 불교를 통해 주체의식을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불교와 관련된 많은 설화를 실은 것은 승려라는 자신의 신분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이를 단순한 불교설화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와 밀접히 관련시킨 데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민 교수는 이를 본지수적사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를 싣다보니 오늘날 우리들이 다양한 자료를 제공받게 되었는데, 향가 14수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우리 고대문학은 한 시대를 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돌이키본다면 편자의 세심한 배려가 고맙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기서 ≪삼국유사≫의 체재와 내용에 관련하여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찬(讚)이다. 이는 ≪삼국유사≫ 후반부 곧 불교설화를 주로 다루고 있는 부분에 집중하려 실려 있는 시인데, 한편 한편 시로서 뛰어나고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면서 그 의미를 일정하게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받거니와, 일편 산만하게 편찬된 것 같은 체재에 통일성을 가져다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다른 구구한 설명보다 한 편의 찬시를 들어보면 그같은 분위기를 단박에 느낄 수 있다.

        鴨綠春深渚草鮮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白沙鷗鷺等閑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忽驚柔櫓一聲遠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나네
        何處漁舟客到煙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르른 손님

 이 시는 순도(順道)가 처음으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이야기를 적고 난 다음 쓴 것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시는 그러나 많은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1,2행은 고요한 봄풍경이다. 그것은 문명이 전해지기 이전의 미명상태라 할 수 있다. 3행에서 분위기는 달라진다. 노젓는 소리에 잠을 깨 갈매기가 날아간다. 이때 노젓는 소리와 갈매기의 비상은 하나의 파각(破慤)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징조이며 신호이다. 신호의 주인공은 바로 배에 타고 오는 손님인데, 4행에서 `손님'이라 표현한 그는 곧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순도이다.
 봄 깊어 풀빛 고운 강가는 어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정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적인 면은 다음 행까지 이어졌다. 갈매기와 왜가리 모두 한가히 졸고 있다. 이에 비해 3,4행은 동적이다. 홀연히 노젓는 소리가 들리고 고깃배가 다가온다. 이때 한가히 졸던 갈매기 왜가리들이 놀라 깨어 일제히 비상했으리라는 것은 상상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일순간의 깨뜨림이 아니라 매우 완만하면서도 점진적이다.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온다는 것과 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난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시초는 그렇게 신비롭고 엄숙했다. 안개에 가득한 강 저편에서 새로운 진리를 품고 미지의 땅을 향해 다가오는 전도자의 모습이 이 시 속에는 여실히 그려져 있다. 움직임과 고요함, 상승과 하강의 시적 긴장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4)당시의 歷史意識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의 歷史認識은 武臣亂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文化的 배경이 고려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다.
「三國遺事」보다 150年 가량 앞서 高麗文化의 난숙기에 편찬된 관찬사서인 「三國史記」는 정치제도 중심의 현실문제를 주로 다룬 것이었고, 그 편찬을 주도한 金富軾 등의 歷史意識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하는 유교적 정치사관이었다. 이러한 儒敎的 정치사관은 高麗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編纂史書를 중심으로 지배적인 조류를 이루었다.
이들 官撰史書들이 갖는 儒敎的 정치사관은 합리주의의 추구라는 긍정적인 일면을 갖는 동시에 「三國史記」에서 보듯이 古代 전통문화의 이해범위 축소와 社會矛盾에 대한 인식의 회피라는 문제점도 보여준다. 그런데 고려의 정치가 몽고의 간섭을 받는 시기에 이르면 儒敎的 정치사관은 현실의 矛盾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民族的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外勢의 압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사관적 歷史意識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사관을 강하게 반영하는 사서가 「三國遺事」인 것이다.


(5) 三國遺事의 편찬목적
「三國遺事」를 찬술한 일차적인 동기는 '유사(遺事)'라는 이름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遺事'가 사가(史家)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표현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三國遺事」는 「三國史記」나 「海東高僧傳」등의 기존 史書에 대한 補足의 의도에서 찬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一然이 「三國史記」를 '국사(國史)' 또는 '본사(本史)' 등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를 정사(正史)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일연은 이와같은 기존 사서에서 간과해버린 古代史와 佛敎史의 많은 부분을 다방면의 史料를 모아 폭넓게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補足的인 것이라 해서 「三國遺事」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자신이 구성한 의도에 따라 강한 歷史意識을 기반으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이룩한 것이 「三國遺事」이기 때문이다. 또 一然은 「三國史記」에서 제외된 고대문화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중에서도 특히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三國遺事」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일연의 관심이 불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연은 고기(古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사서, 승전(僧傳), 문집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함은 물론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발굴해낸 민간 전승의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도 주요 자료로 제시하였다. 이 때문에 「三國遺事」는 단순한 불교사 또는 불교문화사가 아닌 종합 사서인 것이다. 一然의 歷史意識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三國遺事」기이(紀異)편의 서문인데,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체로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 함에 부명(符命)을 받고 도록(圖 )을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르 점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대변(大變)을 타고 대기(大器)를 쥐어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인데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三國遺事」전편에 걸쳐 그 저변을 이루는 신이(神異)는 이처럼 一然이 가졌던 가장 중요한 歷史認識이었다.

(6) 三國遺事의 史學史的 위치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이 사관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佛敎 중심 내지 新羅 中心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引用 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뿐더러, 잘못전해지는 史籍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것도 눈에 띄나, 그것은 「三國遺事」라는 책명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逸事遺聞的)인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으며, 당시의 민속·고어휘(古語彙)·성씨록(姓氏錄)·지명 기원·사상·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金石 및 古籍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우리나라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敍事詩라 할 수 있겠다.
「三國遺事」가 지니는 사학사적 위치는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韓國의 現代史學에서 지니는 意義까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三國遺事」가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三國遺事」의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특히 典據를 밝혀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典據를 제시한 인용문은 一然이 이를 자의로 변경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三國史記」와는 달리 소박한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서 전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거의 무한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原典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둘째로는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이것은 근대사학도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는 과제였기 때문에 자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拜外的인 경향을 띤 中國中心의 사관에 대한 비판은 근대에 민족사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이점 또한 「三國遺事」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三國遺事」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三國遺事」에 대한 이와 같이 근대사학의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 우선 사료적 가친 그것이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一然이 전혀 예기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원사료들이 亡失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는 거론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甘山寺의 조상명은 실명이 남아있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되고 잘못된 판독이 섞여있는 「三國遺事」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三國遺事」와 근대사학이 軸을 같이하지만, 그렇다고 「三國遺事」에서 제시된 고대사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 4.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상호비교 -
⑴ 體裁의 성격
三國史記가 왕명을 받들고 金富軾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正史)였던 데 대해서, 三國遺事는 一然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였다. 이 점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체재(體裁)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三國史記」는 중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紀傳體)를 취하게 하였으나, 「三國遺事」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이다.
「三國遺事」의 體裁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史書類)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三國史記」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記事)를 선택하고 예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三國史記」에서 민중 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三國遺事」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이 점에서 三國遺事는 三國史記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신 자유로왔다고 볼 수 있다.

⑵ 서술방법
三國遺事는 三國史記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三國史記」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三國史記」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修正加筆)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三國遺事」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에 그는 상지론지 의왈(議曰) 등으로 분명히 자신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三國遺事」의 편찬은 전거(典據)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⑶ 史學史的 의의
「三國史記」는 仁宗 23年(1145)에 고려 귀족문화를 정리하고 강렬한 國家意識을 표출하는 가운데 中國의 歷史觀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성과 융통성을 강조하여 현실긍정과 합리성이 두드러진 사서이다.
그런데 一然이 「三國遺事」전편을 통해 강조하는 신이(神異)는 민족 自主性과 문화의 優位性을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외세의 압제에 대항하여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자기 전통이라는 강한 확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민족사를 파악하는 精神史觀에 의해 대단히 폭넓은 역사와 불교를 정리하였다. 一然이 각고 끝에 수집한 사료의 典據를 소박한 표현으로 명시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는 등의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고증한 수많은 서목(書目)이 실린 「三國遺事」는 다양함이나 치밀함에서 「三國史記」보다 훨씬 뛰어나며 원사료의 본모습을 더 많이 전해주어 그만큼 사료적 가치도 높다. 객관적 서술태도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撰述태도로 採錄한 많은 민간전승 자료들이 古代文化의 原型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一然이 차지하는 史學史的 의의는 대단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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