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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by 소이나는 2009.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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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비잔틴 제국의 흥망성쇠


(1)비잔틴 제국의 시작

 비잔틴 역사의 출발시기를 정확하게 꼬집어 말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잔틴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을 단절없이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학자들은    비잔틴 역사의 출발시기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비잔틴적인” 특징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동방화 정책의 결과 이미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역사가는 콘스탄티누스(306-337)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때부터  비잔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콘스탄티노플은 나중에 비잔틴 세계의 중심이 된 도시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은 비잔티움이었으며 비잔틴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는 통합된 하나의 로마제국을 계속하여 지배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제국의 서부가 게르만족의 수중에 넘어간 후인 6세기에도 동로마 황   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 는 자신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생각했고 서로마를 탈환   하기 위해 격렬히 싸웠다. 분명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는 비잔틴문명의 행로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의 치세에는 “로마적”이라기보다는 “비잔틴적인” 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사상과 예술이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2)비잔틴의 재기

 717년에 있었던 아랍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위협으로 비잔틴의 운명은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위기는 한 세기 전에 페르시아의 위협을 격파했던 헤라클리우스 만큼이   나 결단력있는 황제 레오 3세의 역습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리스의 불”로 알려진 비밀병   기와 강력한 군사력의 도움을 받아 레오는 바다와 육지에서 아랍의 군대를 격퇴할수 있었   다. 717년에 레오가 치른 콘스탄티노플 방어전은 유럽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   나였다. 비단 그 방어진 덕분에 비잔틴 제국이 향후 몇세기 동안 더 연명했기 때문만은 아   니다. 실로 그것은 서유럽 전체를 위험으로부터 구원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이슬람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더라면 그들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을 휩쓰는 것을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비잔틴은 그후 수십년동안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재정복할 수 있었다. 이 지역   은 그리스 지역과 더불어 그후 300년 동안 비잔틴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후 1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비잔틴이 약화된 이슬람 세력에 대해 공세를 취할수 있게 될 때가지 비잔   틴과 이슬람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그시기-비잔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에 비잔틴   군대는 시리아 대부분을 재정복했다. 그러나 11세기에는 또 다른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   르크족이 비잔틴에 종전에 획득한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말았다. 1071년에 셀주크족은 소아   시아의 만치케르트에서 비잔틴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 놀라운 승리로 말미암아 그들은 비   잔틴 동부의 남은 지역을 정복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헤라클리우스와 레오의 시대와    비슷한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3)비잔틴 제국의 종말

 만치케르트 전투이후 비잔틴 제국은 살아 남기는 했지만 결코 애초의 활력을 되찾지는 못   했다. 그 중요한 이유는 1071년부터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비잔틴의 운명은 서유럽의   흥기로 말미암아 대단히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유럽은 너무나 미약하여   비잔티움에 대해 이렇다 할 도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셀주크족이 비잔틴에 대해 승리를 거두던 1071년 바로 그해에   서유럽인-노르만인-은 비잔틴을 남이탈리아에 남은 그들의 마자막 점유지로부터 추방해    버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유럽의 명백한 적의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   네수스는 1095년에 투르크족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의 원조요청은   그야말로 최악의 실수였다. 그의 원조 요청은 서유럽의 십자군 운동을 촉발시켰고 이 십자   군 이야말로 비잔틴 제국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제 1차 십자군 원정에   서 서유럽인들은 비잔틴에게 소아시아를 되찾아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잔틴인들이 당연   히 자신들의 영토라고 여긴 시리아를 뚝 잘라내어 차지하고 말았다. 시일이 흐를수록 갈등   은 커져만 갔고 바야흐로 군사적으로 우월해진 서유럽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무자비   한 약탈을 감행했던 것이다. 극도로 위축된  비잔틴 정부는 시외곽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후 1261년 이후비잔틴 제국은 옛영화의 추억만을 간직한 이름만의 “제국”일뿐이었        다.1261년 이후 비잔틴은 그리스의 몇몇 지역에서 1453년까지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다. 그   러나 1453년에 셀주크 족의 뒤를 이은 오스만 투르크족은 제국의 마지막 흔적마저 정복하   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함으로써 십자군이 미처 못한 일을 완수했다. 투르크족은 지금도    콘스탄티노플-오늘의 이스탄불-을 지배하고 있다.


2. 비잔틴 제국의 종교와 문화


 (1) 종교

     ①종교적 집착

       비잔틴 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종교였다. 비잔틴 인들은 종교적인  신조와 관련한
       몇 구절을 놓고도 기꺼이 싸우려 했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었기 때문이다.

     ②황제의 종교 논쟁 참여

        비잔틴의 종교 분쟁은 황제들이 분쟁에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황제들은 종교 생활에서도 큰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 논쟁에 크
         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 성상 파괴 논쟁

     ③성상 파괴 논쟁 : 성상숭배에 대한 황제와 교회의 갈등

        ㄱ. 신학적 동기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이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일이며 그리스도는 너무나 신
          성한 존재여서 인간의 솜씨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십계명에서
         도 새긴 우상에 대한 숭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상 금지는 논의의 여지가 없
         는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ㄴ. 정치, 재정적 동기

            비잔틴의 황제들은 급진적인 새로운 종교 운동을 천명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황
            제의 통제권을 재확인하고, 아울러 점차 세력이 증대하던 수도원들을 제압하고
            자 했을 것이다.

     ④성상 파괴 논쟁의 결과

        ㄱ. 843년, 성상 숭배를 허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즉, 황제에 대해서 교회가 승리한 것이다.

        ㄴ. 황제의 명에 의해 많은 종교 예술품들이 파괴되었다.

        ㄷ. 동유럽과 서유럽 간에 종교적인 틈새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ㄹ. 신앙에서 전통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이것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
             된 지적인 문제에서도 자유로운 사고를 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ㅁ. 비잔틴 종교에는 명상적 경건성이 확립되었다. 성상 숭배 지지자들은 성상 자체
             의 숭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물질적인 데서 영적인 데로 이끄는 데 도움
             을 준다는 근거에서 성상의 효용을 옹호했다. 종교적 각성에 이르는 길로서 명
             상을 강조하는 태도는 그후 비잔틴 종교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2) 문화

     ①비잔틴의 고전주의

        비잔틴의 학교들은 그리스 고전 문학에 기초하여 교육을 베풀었다. 비잔틴의 학자
          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고 주해했고, 비잔틴의 작가들은 투
          키디데스의 산문을 모방했다. 그와 같은 헌신적 고전주의는 비잔틴의 지적, 문학적
          생활을 풍요롭게 했으며 그리스 고전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②비잔틴의 건축

       -돔(Dome)의 원리(십자가 원개교회)

         정방형적 기저도 상에 원개 및 궁형의 건축이다. 둥근 지붕은 아치식으로 벽돌
         을 세워 쌓음으로써 정방형 기저도 위에 건립되었다. 정방형의 각기 네 모퉁이
         마다에 아치형을 창안해 냈다. 둥근 지붕과 궁륭은 외부에서 볼 때 비록 기저로
         는 정방형이지만 건물에 대해 희랍의 십자가의 형태(동일한 길이의 탑이 있는
         십자가)를 제시해 주었다. : 성 소피아 대성당

     ③비잔틴 예술

        ㄱ. 비잔틴인은 상아 조각이나 필사본 도안, 보석 세공, 그리고 특히 모자이크 작품
             에서 탁월했다. : 극도의 경건성, 강렬한 장엄성을 표현             

        ㄴ. 대부분의 비잔틴 예술은 고도의 추상성, 형식성, 그리고 마치 보석과도 같은 특
             성을 갖는다.

        ㄷ. 로마네스크 예술

           전체 건축물과 조각 및 회화장식, 그리고 숭배 대상물들을 일체화하여 조화를
              겨냥했다. : 성 암브로시우스 성당, 생테티엔 성당, 성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성당


3.비잔틴 제국의 상업과 농업


(1)상업

 도시의 수공업과 상업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대부분 소기업가로 이들 또한 직업마다 하나   의 조직체로 되어있다. 생필품을 공급하거나 공공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직업. 전략상 중   요한 일을 하는 직업등 ‘에파르크’라 불리는 시장의 통제를 받았다. 직업교육도 조직화 되   어 있어 공증인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일반교사’의 일반적 교육과 동시에 ‘법률    교사’의 전문교육을 받는다. 직업단체에서는 장인에 지원하는 자들의 기술 숙련도를 평가하   고시에서 장인을 임명할 때 이들을 추천한다. 작업장 겸 상점은 대체로 가족 단위로 조직   화 되었고 사치품.금은세공품.그리고 특히 비단은 외국 여행자들이 좋아하여 손쉽게 수출    되었다. 이러한 수출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은 흑해와 동방에서 온 상품의 통행을 보장하는   동 지중해 상업의 요충지로 활약하면서 항만지역들은 인구가 밀집 되었고 다양한 외국상인   들을 수용하였다. 이슬람교도인들 ,이탈리아 상인들, 러시아인등등 많은 외국인들이 방문하   였다. 이러한 외국상인들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는 사람들은 비잔틴 무역업장와 선주들이었   으나 한 때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원로원직을 부여받기도 하였지만 1081년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즉위와 더불어 토지귀족이 권력을 장악하자 더 이상 상업에 종사 할 수 없   게 되었다. 귀족들은 더 이상 관직을 얻지 못하고 명예가 실추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지   방으로 은퇴하지만 반대로 지방 귀족이 출세하려면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정착하는 것   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들은 여기서 궁전을 얻고 고위 행정관이 되어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 빈자들의 도시가 함께 공존하였다.


(2)농업

 역사학자들은 비잔틴의 상업과 공업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 분야들이 얼마 동안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국가를 지탱한 경제 잉여를 대부분 제공 해줬지만 실제로는 농업이야말로    비잔틴 경제의 핵심이다. 비잔틴 농업사는 토지를 대규모의 농장으로 분배하여서 소작농과   농노들이 일을 하였는데 비잔틴 자유 농민들은 11세기에 이르기 까지 국가 입법의 도움으   로 가까스로 존립 할 수 있었지만 1025년 이후에 귀족 계급이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유 농민들은 가난한 소작 농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토지에서 생계를 유지하   기 어렵게 되자 농민들은 수도원을 도피처로 그들의 토지를 수도원이나 교회에 투탁하면서   교회는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농촌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4.서유럽 문명에 대한 비잔틴의 기여

 비잔틴 문명은 슬라브족, 특히 러시아인을 개종시킴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종교 예술에 영   향을 주었으며, 비잔틴의 사상은 근대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인 도스트예프스키와 톨스토   이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상 파괴 논쟁 이후로 동방 기독교와 서유럽의 기   독교의 관계가 긴장상태에 놓여있으면서 별로 좋지 않은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비잔   틴 제국은 7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고 서유   럽의 문화 또한 비잔틴 문명을 많이 받았다. 그 예로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이나 라벤   나와 팔레르모 같은 도시와 지오토와 엘 그레코 등 서유럽의 위대한 화가들 또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5.비잔틴 제국이 안정을 누린 이유


 (1)유능한 황제들의 등장

  콘스탄티노플이 마침내 함락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작 놀라운 것은    비잔틴 제국이 그처럼 많은 적대 세력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놀라움은 비잔틴 제국의 국내 정치가 극도로 혼미했다는 사실    에 접하면 더욱 커지게 된다. 비잔틴의 지배자들은 과거 로마제국의 전임 황제들과 마찬    가지로 신이 부여한 절대적 황제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음모와 폭력 이외에는 황제를 반대    할 길이 전혀 없었다. 그 결과 비잔틴의 역사는 거듭되는 음모와 반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신체일부를 절단해 내거나, 살해하거나, 혹은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다반    사로 벌어졌다. 비잔틴 제국은 막후 정치로 너무나도 유명해 오늘날의 영어에서 “비잔틴    적인” Byzantine이란 말은 고도의 지능적인 막후 공작을 일컫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제국에는 지극히 유능한 황제들이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여 절대 권    력을 효과적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더욱 다행스러웠던 것은 극심한 궁정 반란의 와중에서    도 관료기구가 항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2)효율적 관료제도

  효율적 관료제도 또한 실로 비잔틴의 성공과 장수의 비결이었다. 비잔틴인들은 그들의 관    료제를 위한 인력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비잔틴 문명은 속인 교육을 유    지하고 장려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잔틴 동유럽과 초기의 라틴 서유럽을 구별짓는 중요    한 차이점 중 하나였다. 600년경부터 1200년경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에는    사실상 속인 지식인이 전무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비잔틴에서는 속인 지식층이야말로     정치 업무의 주요 담당자였다. 비잔틴의 관료들은 오늘날 우리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범    위 이상으로 많은 부문을 통제했다. 관료들은 교육과 종교를 감독했으며 모든 형태의 경    제활동을 통할했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노플의 도시 관료들은 물가와 임금을 규제했으며,    면허제도를 관할했고, 수출을 통제했으며, 안식일의 준수까지도 강제했다. 더욱이 그들은    대개 이러한 이들을 꽤 효율적으로 시행하면서, 결코 기업의 창의성을 억누르지는 않았다.    또한 관료적 방식은 육군과 해군, 궁정, 그리고 외교 업무를 규제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    들 분야에 당시로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직력을 부여했다.


 (3)견실한 경제 기반

  비잔틴 제국이 오래 버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은, 11세기까지 제국의 경제 기반이     비교적 탄탄했다는 점이다. 역사가인 스티븐 런시먼의 지적처럼, “만일 비잔틴의 힘과 안    정이 관료들에 힘입은 것이라면, 그 관료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무    역” 이었다. 서유럽에서 원격지 무역과 도시 생활이 수백 년 동안 거의 소멸되었던 것과    는 대조적으로, 비잔틴 동유럽에서는 상업과 도시가 계속해서 번창했다. 특히 9세기와 10    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극동의 사치품과 서유럽의 원료를 거래하는 중요한 무역 시장이었    다. 제국은 또한 비단 제조 등 자국의 산업을 보호․장려했으며, 또한 11세기에 이르기까    지 안정된 금․은 화폐 제도로 유명했다. 한때 인구 1백만에 육박하는 대도시였던 콘스탄    티노플만이 제국의 중심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안티오크가, 그리고 비잔틴 역    사가 끝날 때까지는 테살로니카, 트레비존드와 같은 번잡한 도시들이 제국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다.


6.허약하지만 인상적인 비잔틴 문명의 업적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의해 “허약함과 불행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이야기” 라고 매도되었   던 비잔틴의 역사는 오늘날에는 가장 흥미롭고 인상 깊은 역사로 인정되고 있다. 물론 비   잔틴 제국이 여러모로 혁신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제국은 또한 심대한 외적 위협   과 내적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시달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무려1000년   동안을 존속했다. 실상 제국은 단순히 명맥을 유지한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오랜 동안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고, 주변 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비잔틴은 그   밖에도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특히 고대 그리스 사상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고, 위대한 예   술을 창조했으며 이교도, 특히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간단히 말해서 비잔틴 제   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지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제국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1. 비잔틴 제국의 흥망성쇠

 (1) 비잔틴 제국의 시작

 (2) 비잔틴 제국의 재기

 (3) 비잔틴 제국의 종말

2. 비잔틴 제국의 종교와 문화

 (1) 종교

   ①종교적 집착

   ②황제의 종교논쟁 참여 -신학적 동기

                          -정치 재정적 동기

 (2) 문화

    ①비잔틴의 고전주의

    ②비잔틴의 건축

    ③비잔틴의 예술


3. 비잔틴 제국의 상업과 농업

  (1) 상업

  (2) 농업


4. 서유럽문명에 대한 비잔틴의 기여


5. 비잔틴 제국이 안정을 누린 이유

  (1) 유능한 황제들의 등장

  (2) 효율적 관료제도

  (3) 견실한 경제기반


6. 비잔틴 문명의 업적


참고문헌

새유럽의 역사 -까치-

서양문명의 역사Ⅱ-소나무-

지성사로 본 세계사 -집문당-

동로마 제국사 -성서 연구사-



♧ 참 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결코 잠자지 않는 황제”

-우리가 매우 바라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나태함으로 잃어버린 옛로마 제국을 다시금 찾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①황제 권위의 재회복

    ②서방에 대한 강조

    ③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로마법 대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아마 비잔틴 제국에 있어서 그들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업적은 고대로마의 법을 개정하고 법전화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일단 완성된 로마법은 2-3세기 이후 아무런 새로운 철학이나 법학에 입각한 첨가나 변경이 없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527년 즉위하였을 때 그는 즉시 새로운 상황과 조화시키고 그의 통치권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기존의 법을 개정하고 법전화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법률가들의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그 위원회가 조직되어 이룩한 업적의 첫 번째 것이 [칙령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532년까지 [법률학 강요]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수정작업의 최종작품으로 [학설휘찬]인데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결과들을 연결한 것이 시민법의 체계로서의 {로마법 대전}입니다.


로마법이 후기 중세의 법으로 그리고 근대의 법으로 이전될 수 있게 만든 것은 유스티니아 누스의 로마법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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