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oy 한국사 ※

[조선] 20. 정묘호란, 병자호란, 광해군, 중립 외교, 인조 반정 (가도 사건, 이괄의 난, 최명길, 김상헌)

by 소이나는 2014. 2. 12.
반응형


Ⅵ. 광해군의 중립 외교1. 광해군의 내치- 북인 정권이 성립, 부국책, 강병책, 문화시책 (동의보감, 허준), 대동법 시행 (선혜청)2. 광해군의 대외 정책(1) 후금 건국 - 누르하치 (1616)(2) 명의 원군 요청(3) 중립 외교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들의 노여움을도발하여, 마침내는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 지천집     “지금 우리가 계책으로 삼는 것은 군신 상하가 모든 일에 힘써 정벌할 준비에 온 생각을 쏟아서 군사를 기르고, 장수를      뽑으며, 인재를 거두어 쓰고, 백성의 걱정을 펴 주어 인심을 기쁘게 하며, 크게 둔전을 개간하고, 병기를 조련하며,      성지를 잘 수리하여 모든 것을 정리한 뒤에야 정세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로다. 그렇게 하지 않고 혹 태만히 하면      큰 화가 곧바로 이를 것이다. 경들은 임진년의 일을 벌써 잊었는가? 어찌 두렵지도 않은가?” – 광해군일기(4)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명을 지원, 상황에 따른 대처 명 - 사르흐 전투에서 패(5) 조명 연합군의 후금 군에 패배, 금과도 친선으로 중립적 정책 추진(6) 일본 - 기유약조 : 세사미두 100석, 세견석 20척3. 인조반정 (1623)(1) 광해군의 현실적이고 실리 있는 외교 정책은 복구에 큰 기여 그러나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약점“역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그의 악행을 부추겨 형(임해군)과 아우 (영창대군)를 섬에 가두어 죽이고, 연흥 부원군 김제남을 멸족하는 등 ~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 인조실록(2) 서인이 주도한 반정 (이괄, 김류, 이귀)(3) 인조1) 서인 정권에 



한국사, 국사, soy 한국사, 소이 한국사, soy블로그, 임엉봉미, 교육, 사회, 역사, 조선,

soy 블로그

(http://desert.tistory.com by 소이나는)

- 재배포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법 복제를 하지 말아주세요.

남인 참여2) 호위청, 어영청, 총융청 설치3) 서원을 중심으로 공론 형성4) 산림의 영향력cf) 인조 – 영정법Ⅶ. 호란 (胡亂)1.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 - 후금(1) 원인1) 친명배금 정책 - 서인 정권은 중립 외교를 비판2) 가도 사건 -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요동을 빼앗기 위해 평안도 가도에 주둔3) 이괄의 난 (1624) - 후금과 내통, 2등공신이 되고 좌천 되자 불만(2)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평안도 의주를 거쳐 황해도 평산으로 침입 (1627)(3) 철산 용골 산성의 정봉수, 의주 이립이 의병으로 싸움(4) 결과 - 형제관계를 맺게 됨(5) 정묘약조 : 형제 맹약, 형님인 후금에 조공, 중강 개시와 회령 개시를 연다. 조선은 엄정 중립을 지킨다.(6) 이후 상황1) 수어청 설치2) 영정법 시행 3) 정초군 설치2.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1) 후금이 청으로 바꾸고 군신관계 요구(2)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립1) 주전파 (척화론) - 김상헌, 3학사(윤집, 홍익한, 오달제) ➝ 대의명분, 성리학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은 우리나라에는 부모의 나라입니다.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임진왜란의 일은 터럭만한 것도 황제의 힘이어서 우리나라가 살아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 어찌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 인조실록 (윤집)2) 주화파 (강화론) - 최명길 ➝ 외교적 교섭, 양명학 “허점을 노리는 것이 최상의 계책 ~” – 지천집 (최명길 주화)3) 대세가 주전론에 기울자 청이 침입 (1636)(3) 청 태종은 서울 점령 ➝ 최명길 등 주화파의 건의에 따라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 – 인조실록 (삼전도의 굴욕)(4) 결과 - 청과 군신 관계 ➝ 두 왕자(소현 세자, 봉림 대군)와 3학사를 인질로 잡아감.3. 영향(1) 국토의 황폐화 (2) 청에 대한 반감 (3) 북벌론 제기 * 광해군 중립 → 인조반정 →서인 (친명배금) → 정묘효란 (정봉수, 이립) → 청의 군신 요구 → 주화 vs 주전 → 병자호란 (청 태종) → 한양 함락 → 남한 산성 피신 → 삼전도 굴욕 → 북벌론 → 북학 → 나선 정벌[남한산성 북문, 경기 광주] – 인조가 병자호란 중 피신한 곳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