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부
⊙ 심각한 환경파괴에 대한 공감대가 전세계로 확산 - UNCED 준비모임 이후 지구경제체제 내에서의 환경적 개혁은 매우 빠른 속도로 추진되고 있음
·환경적 개혁의 예 : 환경산업의 발전, 새로운 전문분야의 등장(환경생태경제학, 환경사회학등), 개발산업 분야에서의 환경에 대한 높은 관심(FAO, 세계은행 등)
⊙ 환경적 개혁의 특징 - 현체제를 개선하려는 것이 목적이며, 현재의 개발양식의 근거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지 못함.
·현재의 세계 정치·경제 권력구조체계가 그저 '녹색화'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는(권력관계의 실질적 변화)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이UNCED 과정에 드러남. 그러나 상반된 입장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님
⊙ 자연에 대한 인간지배를 합리화하는 전제나 입장(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도전 - 근본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및 에코페미니즘 등.
·환경적 개혁(체제가 도구의 개선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이 중요하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을 따지는 것이 중요. 위기의 근본적인 문화적 뿌리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등한 관계에 기반한 개발이라는 새로운 개념정립이 필요.
생태학적 운동의 투쟁의 장은 인위적 환경인데, 이 영역에는 반문화운동이 포함된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녹색' 운동의 선구적 형태도 역시 19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에서의 가장 초기 형태의 생태학적 운동은 낭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기본적으로는 근대산업이 전통적인 생산양식과 환경모습에 끼친 영향에 반발하는 경향을 보였다. 생태학적 운동은 아주 종종 노동운동과 연계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운동이 분리된 것은 자본주의 영향과는 별도로 산업발달이 초래한 강도 높은 위험에 대한 자각이 높아졌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생태학적 관심이 전적으로 강도 높은 위험으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니며 인위적 환경의 다른 위험의 측면에도 주목한다.(기든스, 1991)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와 공단을 벗어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들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인들은 이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자가용승용차를 갖게 되고 자연과 만나기 위해 대기 오염으로 찌든 도시를 벗어나 야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런데 정작 도시인들이 찾아가서 만나는 자연은 쓰레기로 덮여 있는 유흥지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대기의 오염, 하천과 해양의 오염, 상수원 질의 저하, 쓰레기 처리문제 등의 환경문제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생산과 소비활동의 부산물이다. 경제성장이라는 가치의 최우선성은 환경문제를 유발할 수 밖에 없었고 경제성장의 가속화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크게 하는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환경문제는 이제 우리나라 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제적 아니 전지구적인 문제로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 오존층의 파괴, 산성비, 개발도강국의 열대림 파괴,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불평등 관계, 개발과 환경 사이의 우선순위문제 등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깊은 생태학] 사상가들은, 현재의 사회와 문명방식을 전제로 한 환경보전운동을 부정한다. 현재의 지구규모의 환경문제는 바로 현재의 사회체제와 문명이 잉태한 것이므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회체제와 문명 그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꿔 의식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바꿔 새로운 생활방식을 기초부터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사상은 구체적인 실천을 동반해야만 의미를 갖는다.
또 [깊은 생태학]은 대략 다음과 같은 자연관을 채용한다. 즉, 현재의 지구환경문제는 근대이래, 인간이 자연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취한 결과이다. 자연이란, 근대인이 생각해 온 그런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란 처음부터 하나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에 의지해 살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올바른 세계관을 우리들이 재발견함이 없이, 결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이 먼저 변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잃어 온 '자연의 소리' '지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다시 얻어, 그것들과 호응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우리들 자신이 변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의식변혁이 있고 나서야 진정한 자연보호가 가능하다. 이 자연관은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인간비중심주의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그와 같은 태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발 밑의 지역의 자연에 좀더 진지한 시선을 지향하고, 그 지역 특유의 자연에 근거한 다정한 생활방식을 모색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네스를 시조로 하는 깊은 생태학은 네스의 공동연구자인 드발과 세숀스(Bill Devall & George Sessions, 1985)에 의해 [깊은 생태학]으로 체계화되었으며, 현재까지 유일한 [깊은 생태학] 교과서가 되고 있다. 이 책자는 네스의 사상에 충실히 따르면서 깊은 생태학 사상의 기본이념을 교과서적으로 정리하였다.
[깊은 생태학]이 많은 부분에서 윤리적인 해결책을 암시하지만, '깊은 생태학'에 '얕은 생태학'을 대치시키는 개념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무엇과 관련해서 '깊은'인가? 가령, 사회생태주의자들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실상 얕은 것이 되고 있는 '깊은' 생태학을 비난한다. 왜냐 하면, 사회의 뿌리 깊은 경제 구조를 그 분석의 중심에 놓지 않기 때문에 문화와 신념체계의 작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둘째로, 그 용어는 자칭 '깊은 생태주의자'라는 사람들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얕은' 사람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중심주의 역시 '녹색 이론의 실질적·실용적·도덕적 기반'을 형성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오염과 자원고갈에 대한 투쟁과 같은 '얕은 생태학'도 하나의 가능한 접근방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동물해방론자 또는 동물권리옹호론자들은 '깊은 생태주의자'를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생물권 평등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대부분 육식을 즐기고 있고, 극단 채식주의자는 훨씬 적다. 지구환경을 고려해서 공장축산은 반대하면서 가축이 살고 있을 동안만큼은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생태계의 안정에 치중한 나머지 동물에게는 가장 불평등한 행위인 사냥도 사안별로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생태중심주의의 가장 취약점이자 보완해야 할 과제로 대두된다.
상대적인 무명 상태로부터 생태학자들의 출현은 우리의 과학계에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왜곡되고 악용되었다. 깊이는 없으나 현재 더 영향력 있는 운동과, 깊으나 덜 영향력이 있는 운동이 우리의 관심을 두고 경쟁한다. 나는 이 두 가지 운동의 특성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1. 얕은 생태운동(Shallow Ecology movement): 오염과 자원고갈에 대한 투쟁. 중심 목표는 선진국 사람들의 보건과 풍요.
2. 깊은 생태운동(Deep Ecology movement):
(1) 상호연관적인 완전한 현장(現場) 이미지. 이를 위해서, '환경 속 사람'이란 이미지를 거부한다. 생물권 그물 또는 터라는 본질적 관계 속에서, 이것을 결합하는 마디로서의 유기체의 역할. <갑>과 <을> 사이의 본질적 관계는, <갑>과 <을>의 정의 또는 기본 구조에 딸린 그런 관계다. 따라서 그런 관계가 없이는, <갑>과 <을>은 더 이상 같은 존재가 아니다. [완전한 현장 이미지]에는, 피상적 또는 초보적 수준에서 대화할 때가 아니라면, '환경 속 사람'이란 이미지는 물론 '환경 속 존재'라는 모든 함축적인 이미지가 녹아들어 있다.
(2) 생물권 평등주의-원칙적으로. '원칙적'이란 말을 붙인 것은, 어떤 현실적인 문제도 살육, 착취, 억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현장연구가는 여러 생활방식과 생활형에 대해 깊은 존경 내지는 심지어 숭배까지도 요구한다. 그는 내면으로부터 이해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동료에게, 그리고 한정된 형태의 생활방식과 생활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와 마찬가지다. 생태학적 현장연구가에게는, 삶과 번영을 누릴 평등권은 논리가 필요치 않은 아주 분명한 가치원칙이다. 인간에 대한 평등권의 제한은 인간 자신의 생활의 질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인간중심주의다. 생활의 질이란 것은 우리가 다른 생명체와의 친밀한 동반자 관계를 인정할 때 느끼는 깊은 즐거움과 만족감에 어느 정도 좌우되는 것이다. 신뢰를 무시하고 주인-노예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 기여했다.
생태학적 평등주의에는 변동이 심한 예측연구인 '과밀도'의 재해석이 뒤따른다. 왜냐 하면, 일반 포유류의 과밀과 이로 인한 생활평등권의 손실도, 인간의 인구과밀과 마찬가지로 심각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정 포유류들이 여유공간에 대해 높은 요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는, 도시주의 이론가들이 인간의 생활공간 요구도를 크게 경시해 왔음을 아울러 시사한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경질·공격성·전통의 상실 등의 과밀증후군은 포유류 사이에 흔히 있는 공통적인 증후다.)
(3) 다양성과 공생의 원칙. 다양성은 생존잠재력, 새로운 생활방식의 모색, 형태의 풍부성을 드높인다. 그리고 이른바 생존경쟁과 최적의 생존이란 것은 살육, 착취, 억압보다는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공존하고 서로 돕는 능력이란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살아가라, 그리고 살게 두라'라는 말은 '너든 나든'이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생태원칙인 것이다.
후자는 여러 종류의 생명형태의 다양성을 축소할 뿐만 아니라, 같은 종으로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도 파괴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생태학적으로 고취된 자세는 인간의 생활·문화·직업·경제방식 등의 다양성을 지지한다. 그것은 군사적인 침략과 지배에 대한 투쟁만큼이나, 경제적·문화적 침략과 지배에 대한 투쟁을 지지한다. 또 그것은 인간 종족 또는 문화 파괴만큼이나, 물개나 고래를 멸종시키는 데 반대한다.
(4) 반계급적 자세. 인간의 생활방식의 다양성은 (그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일부 성원에 대한 특정 집단의 착취와 억압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와는 다르게 살아가며, 두 집단 모두 그들의 자기실현 가능성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영향을 받는다. 다양성의 원칙은 단지 강압적으로 봉쇄되고 제한된 어떤 자세 또는 행동에 기인한 불화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생태학적 평등주의와 공생의 원칙도 마찬가지로 반계급적 자세를 견지한다. 생태학적 자세는, 오늘날의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충돌을 포함해, 어떤 집단적 충돌이 있든 앞의 세 가지 원칙의 확대에 찬성한다. 세 가지 원칙은, 폭이 넓거나 폭을 넓히는 무계급적 다양성과 조화를 이룬 계획이 아닐 경우, 미래 종합계획에 대한 어떠한 극단적인 경고도 지지한다.
(5) 오염과 자원고갈에 대한 투쟁. 이 투쟁에서, 생태학자들은 강력한 지지자들을 찾아냈으나, 간혹 그들의 전반적인 자세가 흔들린다. 다른 요소들보다는 오히려 오염이나 자원고갈에 관심이 집중될 때, 혹은 오염은 줄이지만 다른 종류의 해악을 증가시키는 계획이 시행될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반오염 장치의 설비로 인해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올라간다면, 이로 인해 계급 격차도 함께 벌어진다. 따라서, 책임감의 윤리가 의미하는 바는, 생태학자들이 얕은 생태운동이 아니라 깊은 생태운동에 종사하라는 것이다. 즉, 오염과 자원고갈에 대한 투쟁뿐만 아니라, 여기서 열거한 7 가지 요소들이 모두 고려되어야만 한다.
생태학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 무엇이든, 어느 사회에서나 둘도 없는 정보 제공자들이다. 잘 조직화만 된다면, 생태학자들은 제한된 생태학적 시각을 가진 조직 또는 정책입안자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세력을 얻는다. 지금 그러하듯이, 생태학자들은 좀더 넓은 시야를 교묘히 외면하는 그들의 주인을 위해 종사하는 일이 종종 있다.
(6) 복잡성이 아닌 복합성. 생태계 이론에는, 혼돈의 도시를 빠져나오는 길을 찾듯이 어떤 게슈탈트(심리적 형태)나 통일원칙 없이 복잡한 것과, 복합적인 것을 가르는 중요한 구분이 포함된다. 어느 정도 합법적이면서 상호작용적인 요소들이 지닌 복합성은, 하나의 통합체, 즉 체계를 이루는 데 함께 작용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루 노동시간대에 신발을 만들거나 지도를 이용하거나 다양한 활동들을 통합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기체, 생활방식, 보편적인 생태계의 상호작용들은 생태학자들의 일반 시각을 채색하도록 놀랄만큼 높은 수준의 복합성을 제공한다. 이런 복합성은 거대 체계에 관한 생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또한, 생물권과의 관계와 이에 따른 교란(攪亂)의 영향에 대한 인간의 깊은 무지를 날카롭고 꾸준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인간에게 적용할 때, 이 '복잡성 아닌 복합성' 원리는 분업이 아닌 노동의 분할을 지지한다. 이 원리는 전체 개인이 단지 반응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활발한 행위를 할 것을 지지한다. 이 원리는 복합경제, 즉 하나로 통합된 다양한 생활수단을 지지한다. (공업 및 농업 활동, 사무와 단순 노동, 전문업 및 비전문업, 도시 및 비도시 활동, 도시에서의 노동과 자연에서의 휴양 및 도시에서의 휴양 및 자연에서의 노동 등의 조합.)
이 이론은 덜 예측적이면서 보다 가능성이 확실한, 수월한 기술과 '수월한 미래연구'에 찬성한다. 연속성과 생활전통에 대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의 무지 상태에 대해 보다 많은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는 데 찬성한다.
생태학적으로 책임 있는 정책의 시행은, 금세기에서는 기술적 재능과 발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방향, 즉 오늘날 우리의 국립정책연구기관들이 일관되고도 자유롭게 주장하지 못한 그런 방향을 요구한다.
(7) 지방자치와 지방분권. 한 생명형태의 취약성은, 그 형태가 생태학적 균형을 획득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고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부터 가해진 영향의 무게와 대략적으로 비례한다. 이것은 지방정부와 물질 및 정신적 자급자족을 강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원조를 보낸다. 하지만 이 노력들은 탈집중화를 향한 운동력을 전제로 한다. 열 오염 및 물질의 재순환을 포함한 오염 문제 역시 이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왜냐 하면, 우리가 다른 요소는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면 지방자치가 향상되기 때문이다. (비교적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방과, 다른 대륙으로부터 식량, 건축자재, 연료, 숙련노동의 수입을 필요로 하는 지방을 서로 비교해보자. 전자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후자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5퍼센트에도 못미친다.) 지방자치는 결정을 내리는 계급사슬의 결합 숫자를 줄임으로써 강화된다. (예를 들어 도청-시위원회-지방의 최고위 결정권자-연방정부기관-연방정부-국가연합-유럽경제공동체 집행위 등 연합기구 또는 국제기구로 이어지는 사슬은, 도청-국가기관-국제기구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슬로 축소할 수 있다.) 하나의 결정은 매 단계마다 다수결원칙을 따르더라도, 여러 지역의 관심사는 너무 사슬이 길 경우, 이 계통을 따라 다루어질 수도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첫째, 깊은 생태운동의 규범과 경향은 생태학으로부터 논리나 귀납이 유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태학적 현장연구가들의 생태지식과 생활양식이 바로 이 [깊은 생태운동]이란 시각을 제공했고 영감을 주었고 강화시켰다. 위의 7가지 연구로 공식화된 해설의 대부분은, 어떤 방향에서 좀더 명확히 할 경우에만 타당하다고 간주되는 어쩌면 모호한 일반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도처에서 생태학으로부터 얻은 영감들을 확실하게 수렴(收斂)한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이런 수렴을 글로써 축약시킨 것 이상의 무엇이 있는 양하지는 않는다.
둘째, [깊은 생태운동]의 중요한 신조들이 분명하고 강력하고 규범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신조들은, 어느 정도 과학적인 연구결과(또는 결과의 부족, 제6항 참조)를 기초로 할 때만 가치 있는 우선 체계임이 드러난다. 오늘날의 생태학자들은 정책입안자들이 보건이나 단지 분포와 관련된 최소한의 어떤 기준치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개 위협을 통해, 그리고 오염물질과 자원고갈에 관한 예측을 통해 정책기관들을 다그치려고 한다. 하지만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상당수의 권력을 쥔 사람들마저도, [깊은 생태운동]의 특징인, 기준치와 가치와 확대를 논리적인 사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시되어서도 안되며 오염과 자원고갈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 이 운동에는 정치적 잠재력이 있다. 예측가능한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서, 그 기준치는 자유롭게 사용되고 가감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생태운동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생태학적(ecological)이라기보다 생태철학적(ecophilosophical)이기 때문이다. 생태학은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과학에 한정된다. 하지만 철학은 기본원칙을 다루는 가장 보편적인 토론광장으로서 지시적일 뿐 아니라 서술적이다. 정치철학은 그것에 딸린 한 부분이다. 나는 '생태지혜(ecosophy)'를 생태적 조화 또는 균형의 철학으로 풀이하고자 한다. 소피아(sofia, 지혜)로서의 철학은 일종의 열린 규범으로서, 규범·규칙·자세·우선순위를 밝히는 것과, 우주만물의 현상에 관한 이론 모두를 포함한다. 지혜는 정치적 지혜와 명령을 뜻하며, 단지 과학적 설명과 예측만은 아닌 것이다.
생태지혜의 세부 내용은 오염·자원·인구 등의 '사실' 뿐만 아니라, 우선순위와 관련된 중요한 차이로 인해 많은 변화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열거한 7가지 항목은 오늘날 생태지혜 체계에 관한 하나의 통일구조를 제시한다.
일반적인 체계론에서는, 체계는 대개 우연히 또는 기능적으로 서로 작용하거나 서로 연관되는 항목이란 의미로 인식된다. 하지만 생태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가 구축한 종류의 체계에 더 가깝다. 그것은 서술적이고 지시적이면서 다양한 기능을 갖춘 문단으로 성문화(成文化)된다. 그 기본 관계는 가정이라는 부분과 결론이라는 부분 사이의 관계, 즉 추론화의 관계다. 추론화와 관련되는 개념들은, 앞에 열거한 항목을 뛰어넘는, 논리적·수리적 추론을 동반하는 논증의 정밀성에 따라 분류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로 절대적 타당성이 있느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질지도 모른다. 생태지혜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다방면에 걸친 관련 생태학적 및 규범적(사회적·정치적·윤리적) 소재를 비교적 엄정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그 때, 생태지혜는 지구의 계통체계와 유사한 '체계 모형(models of systems)'을 유효 적절히 사용할 수도 있다. 체계모형은 생태지혜를 특징짓는, 내용이 정해지지 않은 지구의 성격인 것이다. 그것은 거의 전 분야의 학자들 뿐 아니라 정치학도와 정책입안자들도 포함되는 이상적인 생태동아리의 노력을 명확히 하고 한 데 묶는 역할을 한다.
생태학이란 이름 하에, [깊은 생태학]으로부터 벗어난 여러 일탈 행위들이 옹호를 받아 왔다. 여기에는 일차적으로 오염과 자원고갈에 관한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과, 모호한 지구적 접근방식에 찬성해 저개발국가와 과개발국가간의 격차를 무시하는 것이 포함된다. 지구적 접근방식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역 격차가 주로 앞으로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한다.
"녹색평론의 지향점은 삶에 대한 철학의 변화입니다. 성장 속에서의 환경보호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절제된 삶, 자연과의 공생등 생태학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환경 문제를 성장 논리의 보조 개념 정도이 아니라 생명, 생태의 위기와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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