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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 李彦迪과 忘機堂 曺漢輔와의 「無極 太極 論辨」에 대한 考察

by 소이나는 2009.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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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 李彦迪과 忘機堂 曺漢輔와의 「無極 太極 論辨」에 대한 考察


Ⅰ. 조선조 유학사에 있어서 회재의 망기당 사이에 있었던 무극태극을 중심한 본체론과 수양론에 관한 논변은 한국성리학의 성숙되는 전개라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희재는 퇴계에 앞서 주자학의 핵심사상인 무극태극론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한 점에서 사상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특히 망기당과의 논쟁이 조선조에 있어 최초의 학적 논쟁인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논변은 조선조 유학사나 주자학사에서 볼 때 최초의 이론 논쟁이란 점과 그 주제가 형이상학적인 문제, 즉 고차원의 이론 문제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는 당시에 와서 주자학의 이해가 이론적으로 심화된 것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회재의 이 무극태극논변은 그의 외숙인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을 논한 것을 얻어 보고 평하여 4차례 서한이 왕복하며 논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망기당의 서한은 전해지는 바 없어, 그 논쟁의 온전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회재의 논설 중 쟁점이 되었던 망기당의 견해를 찾을 수 있음으로 그를 통해 성리학적 논쟁의 모습을 살피기로 한다.


Ⅱ.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망재와 망기당사이에 있었던 무극태극 논에 대한 비판적 논설이다.

 (1) 無極太極에 대한 망기당의 견해

 無極太極에 대한 본체론적 논변은 송대 성리학의 전개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대두되는 문제이다. 성리학적 해석은 「無極而太極」이 정․주를 거치면서 「有生於無」의 이원적 견해는 부정되고 일원적 양면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왔다.

 망기당에 있어서도 無極太極을 이원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無極而太極」을 「太極卽無極」이라 하여 본질적 一者로서의 절대적 세계로 보았으며 이를 太虛라고도 하였다. 회재의 글을 통하여 망기당의 본체에 대한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태극은 곧 무극이다. 어찌 유를 논하고 무를 논하고 무를 논하며, 외와 내를 가르고 명수에 말을 구애할 수 있겠는가.

②대본을 체득하면 人倫日用의 수작만변함에 있어서 일마다 달도 아닌 것이 없다. 大本과 達道가 흔연히 하나가 된 즉 어디서 無極太極․有中無中의 구별을 논할 수 있으리오.

③태허의 체는 본래 寂滅하다.․․․․허하기에 靈하고 寂하니, 靈妙의 체가 太虛에 충만하여 곧곧마다 露呈된다.

 이상과 같이 망기당은 본체의 초탈적 입장에 치중하여 현실과 단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초연한 태도는 가진 것으로 보인 것이다. 그러한 망기당의 견해에 대하여 회재는 부분적으로 긍정을 하면서도 반대논리로 일괄한다. 결국 회재는 그의 학적태도에 대하여 「무극태극의 체로 五心의 主를 삼고 천지만물로 하여금 나에게 조종되어 원활히 운용되도록 함」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虛遠의 영역에 빠질 것이라고 평하였다. 하여튼 망기당에 있어서는 그의 號에서도 짐작 될 수 있는 것처럼 한 고원한 도가적 사유와 선학적 불가의 견해가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순수정주학적 입장에서 볼 때 논쟁의 여지가 있게 된다.

(2) 망기당의 견해에 대한 회재의 비평

 회재는 서두에서 「無極而太極이란 것은 이 道의 처음부터 어떤 物이 있는 것이 아니면서, 실은 萬物의 根柢가 되는 것」이라 하여 순수 정주학적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비판하는 바를 다시 정리하면

첫째, 無極太極에 관한 것이다. 주돈의 표현인 無極而太極은 그의 圖說이 발표된 이후 륙구연에 의해 최초의 반론을 받은 바 있으나 대체로 주자의 견해가 정통유가의 이론으로 정탁되어 왔다. 회재는 주자의 관점에 서서 망기당의 주장을 변석하게 된다. 대게 無極과 太極을 현실적으로 則해 있는 하나라는 것까지는 동의가 가지만 논리상으로 分內分外가 무시되어 名數之末에 집착되어서는 아니 되며 大本과 達道가 혼연히 하나라는 것은 가상하지만 체용(體用)․동정(動靜)․선후(先後)․본말(本末)의 윤서(倫序)가 무시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中正仁義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無極太極에 대한 주돈이의 體得 工夫인데 망기당이 이 공부를 저버리고 無極太虛의 體를 가지고 오심의 주로 삼는다고 한 데 대해 하늘에 오르는 데 계단이 없으며 바다를 건너는데 다리가 없는 주장이라고 비난한다.

 셋째는, 寂滅에 관한 것이다. 太極의 體는 본래 寂滅이라고 하여 滅자를 가지고 太虛體라고 말한다면 이는 결단토 儒家說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無나 虛는 전통유가에는 없다. 주돈이․장제 이후로 유자학설에도 잠입되어 거론되기에 이르렀으나 노․불의 유무․허실과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왔다.

 곧 上天의 무성(無聲) 무취(無臭)를 적(寂)이라고 함은 옳지만. 멸(滅)이라고 하면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적한 가운데 목(穆)이있고 未發之中에 희노애락의 혼연함이 있으니, 적감과 중절은 上下 昭著와 本然의묘이고 보면 滅이란 結木死灰(나무가 말라 죽어 재가됨)가 되어 滅 天理의 결과가 된다. 망기당의 일생 학술의 언어와 논리의 오류가 이 멸(滅)자에 원인이 있다고 통박하고 있다. 요컨대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에서는 無極太極의 존재와 당위의 양면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答忘機堂書

(1) 제 1 서

 이언적의 답서에 따르면 조한보는 전체적으로 태극의 본질을 적멸로 보아야 한다는 本體論에 대한 이해와 存養上達 공부를 통해 태극의 본체를 터득한다는 修養論을 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한보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無極而太極을 유무로 이해할 때 무라고 정의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에 신령스러운 극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有라고 정의하더라도 정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점점 줄어들어 없어지게 된다. 2)모든 사물의 이치는 다 같다. 3)감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본 마음을 敬으로 바로잡아 본체를 체득하고, 무극의 참세상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며 빈 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본체를 내 마음의 주체로 삼는다. 따라서 存心養性을 통한 형이상학적(上達) 공부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언적은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1) 이 같은 견해는 노자가 無에서 나와 有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나 부처가 말한 空과 같다. 氣의 변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이 이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면 도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들 속에 원리로서 들어 있다. 그래서 지극히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 理는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으면서 만물이 다 없어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 불변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寂滅이라고 할 수 없다. 2) 모든 사물의 이치가 다 같다는 견해는 아주 훌륭한 것 같지만 옳지 못하다. 예를 들어 말․소․닭․개를 보면 그 각각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맡은 일이 달라지는 것이 다. 3)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는 無極太極을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서 노닌 뒤에 주체로 삼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하늘의 이치가 사람이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형이하학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가는 하학상달공부가 마땅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언적인 조한보의 견해가 유가 이론과 불교 이론을 하나로 뒤섞은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2) 제 2 서

 이언적의 두 번째 답장에 따르면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무극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던 주장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遊心)는 표현을 빼 버렸으며, 아울러 ‘본체는 寂滅’이라고 했던 데서도 滅자를 뺀 답서를 보내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한보가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조한보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빈 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무극의 본체(虛靈無極之眞)를 말한다면 虛無가 바로 적멸이며 적멸이 바로 허무이다. 2)敬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여 위로 천리에 이른다.

 이러한 조한보의 생각에 대해 이언적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1) 이것은 유가의 말을 빌려 이단의 학설을 말하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허는 빈 듯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虛而無)이지만 유가의 허는 빈 듯하면서도 있는 것(虛而有)이며, 노자이나 불교의 적은 고요하면서 마침내 없어지는 것(寂滅)이지만 유가의 적은 고요한 듯하면서도 감응하는 것(寂感)이다. 2) 하학 공부 없이 바로 상달천리 한다는 주장은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이론과 같다. 유가 이론은 상달천리 위에 반드시 하학인사를 말한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잘 배우면 저절로 천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일이란 형이하학적인 것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이치가 천리이기 때문에 그 일을 배워 그 속에 담긴 이치에 통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다.

(3) 제 3 서

 두 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앎과 실천의 문제는 세 번째 논쟁을 통해 완전히 수양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언적의 세 번째 편지에 나타난 조한보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여(敬以直內) 내 안에 들어있는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 내 마음이 굳게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 2) 내가 적멸이라고 한 까닭은 사람들이 헛된 환영을 참된 현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쓴 것이다. 3) 하학을 통해 상달하는 일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요 호걸 같은 선비는 그렇지 아니하다.

 조한보의 견해에 대한 이언적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여 내 안에 들어 있는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 내 마음이 굳게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는 아직 마음이 밖에 사물에 대해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공부로는 좋지만, 그렇다고 하학공부를 소홀히 하면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되돌아 살피는 실천이 부족하게 되어 일상 생활이 인욕에 빠질수도 있다. 그러므로 의로써 밖을 절제해야(義以方外) 한다. 물론 성인의 경지에 이르면 의로써 밖을 절제하는 것도 불필요해 지겠지만, 그렇다고 이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문을 나서지 않고 천리길을 가려는 것이며 발을 옮기지 않고서 태산에 오르려 하는 것과 같다. 2) 형체를 떠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형기를 떠나 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형체는 하늘이 준 것이며, 그 속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 있다. 3) 공자도 노담에게 예를 물었으며 태묘에 들어갔을때에는 모든 일을 물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공자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이 논쟁의 끝에 이언적은 조한보의 견해가 불교의 돈오와 같으므로 잘못을 깨닫고 유가의 설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4) 제 4 서

 마지막 논쟁은 다음과 같다. 이언적의 편지에 따르면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적멸이라는 표현을 빼버렸고, 상달천리 아래 하학인사를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1) 나와 모든 것은 같다.(物我無間) 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는(主敬存心) 공부를 해야 한다. 3) 공부순서는 본체를 먼저 확립한 뒤에 하학인사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한 조한보의 견해에 대해 이언적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이러한 논리는 그물의 윗줄만을 보고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그물의 눈들을 따지지 않는 것이며 피부를 빼놓고 뼈만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만물이 같은 이치에서 나오지만 이것과 저것, 취할것과 버릴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오른 것과 그른 것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 2) 경을 주로 삼아 내 면을 한결 같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밖을 제어 하는 것이며, 밖을 가지런히 해서 다시 내면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 밖에 모두 이루어 지게 되니 어느 한 쪽의 공부도 그만 둘 수 없다. 3) 하학인사 경우에도 언제나 경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만일 조한보의 말대로 본체를 확립한 뒤에도 더 노력할 것이 있다면 이는 아직 본체를 확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Ⅲ. 회제와 망기당의 논쟁은 중국의 아호논쟁과 비교된다. 그러나 아호논쟁의 핵심주제는 존재론적 범주에 있었다. 그러나 이언적과 조한보의 태극논쟁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인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아호논쟁의 주제들과 같았지만 무극과 태극으로 표현되는 절대를 어떻게 체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체득이 실천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를 따지는 수양과 실천의 문제로 발전되어 갔다.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철학 논쟁으로 꼽히는 태극논쟁이 한국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조 성리학 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 관학파였던 정도전과 권근은 고려의 이데올로기인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정착시켰으며 조선왕조는 이를 바탕으로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그런 연장에서 보면 이언적은 이 논쟁을 통해 같은 성리학 범주에 속하기는 하면서도 주희의 이론에 철저하지 못하고 불교와 노장적 견해를 바탕으로 성리학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척해 냄으로써 성리학 내부의 주자학적 기초를 튼튼하게 세운 셈이다. 둘째, 성리학적 한국 특성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이 태극 논쟁은 중국의 아호논쟁과 달리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이해와 실천문제로 집약되어 들어갔다. 특히 태극을 리로  규정하면서 그 리의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도덕성을 부여한 이언적의 주장은 훗날 리를 우위에 두고 심성론을 철학의 주축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 퇴계 철학에 토대를 제공한 셈이다. 이 처럼 이 논쟁에는 주자학적 이론의 깊이와 아울러 한국적 전개가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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