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변화
Ⅰ. 성리학의 교조화 경향
1. 성리학의 교조화
(1) 서인 주도 - 인조반정 이후 = 주자 중심 성리학 절대화
(2) 김장생 「가례집람」
(3) 우암 송시열 -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송시열]
2. 성리학의 비판
(1) 17세기 후반부터
(2) 6경, 제자백가등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
* 6경 - 서경, 시경, 역경, 예기 춘추, 악기
(3) 윤휴 - 서경덕의 영향, 유교 경전에 대해 독자적 해석, 주자 비판
(4) 박세당 - 사변록 / 노자의 도덕경을 적극적으로 해석, 포용성과 개방성을 강조
(5) 이들은 사문난적으로 몰려 제거
(6) 정약용 - 성리학과 다른 독자적 철학을 수립
(7) 이익, 정제두, 최한기, 안정복
Ⅱ. 양명학의 수용
사 림 |
동인 (이황) |
남인(이황) |
영남 - 위정척사 |
이익 실학 | |||
북인(조식) |
정인홍, 주자 성리학 비판 | ||
서인 (이이) |
노론(송시열) |
경기(낙론) → 북학(주리) | |
충청(호론) → 위정척사 (주기) | |||
소론(윤증) |
양명학 → 강화학파 |
1. 수용 (16세기) - 왜란 전후
(1) 성리학의 교조화와 형식화를 비판, 실천성을 강조
(2) 중종 때 전래
(3) 재야의 소론 계열 학자
(4) 성리학의 한계성을 극복·보완하려는 사상 (soy 한국사)
2. 사상 체계
(1) 심즉리 - 인간의 마음이 곧 이이다.
(2) 치양지설 - 인간의 존비의 차별이 없다. “心은 곧 理”
(3) 지행합일설 - 알았다 하여도 행하지 아니하였다면 그 앎은 참앎이 아니다.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
3. 양명학의 확산 (17세기)
(1) 서경덕 학파, 종친들 사이 확산, 소론에 의해 연구
(2) 이황이 ‘전습록변’에서 이단으로 비판
(3) 정제두는 ‘변퇴계전습록변’을 지어 전습록변과 성리학을 비판
* 전습록 - 왕양명의 철학어록을 서애가 잡록 - 왕문성공전서에 들어있다. 치양지, 지행합일 기술
4. 학파의 형성 (18세기 초 - 본격적으로 연구)
(1) 강화학파 형성 - 정제두
(2) 계승 - 인천 중심으로 가학의 형태
5. 정제두의 활동
(1) 학문적 체계 확립 - 「종언」, 「만물일체설」
(2) 양반 신분제의 폐지를 주장
6. 양명학의 영향
(1) 실학자에 영향
(2) 국학자에 계승 - 이건창, 박은식, 정인보
☞ 강화학파
“인간의 마음이 곧 이(理)이며, 인간은 상하 존비의 차별없이 본래 타고난 양지를 실현하여 사물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앎과 행함이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은 행함을 통하여 성립한다.”
정제두→ |
정후일→ |
신작 |
| |||
이광명→ |
이충익→ |
이면백→ |
이지원→ |
이상기→ |
이건방 | |
이광사→ |
이긍익→ |
이시원→ |
이상학→ |
이건창 | ||
이건승 |
cf. 비판서
불교 |
불씨잡변 |
정도전 |
양명학 |
전습록변 |
이황 |
성리학 |
사변록 |
박세당 |
존언 |
정제두 | |
천주교 |
천학고 |
안정복 |
서학변 |
신후담 |
☞ “송나라 때에 와서 정자·주자 두 선생이 6경의 뜻을 다시 환하게 밝혔다. 그러나 경(經”)에 실린 말의 근본은
비록 하나이지만 실마리는 천 갈래 만 갈래이다. 이 때문에 나는 좁은 소견으로 얻은 것을 대강 기술하여
그 이름을 사변록이라 하였다.” ➝ 이후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림 <사변록>
☞ “그는 ‘사변록’을 지어 주자의 ‘사서집주’를 공격하고, 심지어 ‘중용’의 문장 단락을 멋대로 고쳤으니 한결같이
윤휴의 투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 송시열이 박세당을 비판 <송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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