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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 유관순과 그녀의 흔적이 있는 유관순 열사 생가 (충남 천안 병천) 天安 柳寬順 烈士 生家 (Cheonan-si)

by 소이나는 201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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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 유관순과 그녀의 흔적이 있는 유관순 열사 생가

天安 柳寬順 烈士 生家 (Cheonan-si) (충남 천안 병천)

 


 

 

3.1절과 8.15 광복절 하면 쉽게 독립기념관이란 장소가 떠오른다.

독립기념관아우네 장터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아우네 장터하면 만세 운동을 했던 유관순 열사가 떠오를 것이다.

20세가 되기도 전에 생을 떠난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유관순 누나라 불리우고 있다.

 

 

 

 

 

 

 

유관순  18세의 나이로 만세를 부르다 떠나간 여인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부친 유중권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로서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자이고,

애국계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다.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봉기하여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유관순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이화 학당의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고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3․1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 후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유관순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우리 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부친인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유관순은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유관순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 헌병대로 압송하였다.

 


그 후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게 되었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선생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작고 조용한 유관순 열사의 생가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유관순 열사 기념관, 천안박물관, 천안 독립기념관,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 국립중앙박물관을 들려보면

이러한 유관순 열사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유관순 생가와 유관순 열사 유적은 천안과 청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간다면,

천안역 동부광장으로 나와 400번, 401번 버스를 이용하여 갈 수가 있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리다.

만약 부근에 있는 독립기념관과 함께 유관순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면,

천안 터미널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한번에 독립기념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독립기념관을 둘러본 후에

독립기념관에서 병천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유관순 생가지는 약간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함께 볼만한 것은 없지만, 순대로 유명한 병천 순대 거리가 아우네 장터에 있다.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生家址)는 봉화지(烽火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338-1

 

 

유관순 생가지와 열사유적은 아주 작은 공간이기에 관광이나 여행으로 오기에는 볼거리가 없다.

관광을 위해 간다기 보다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를 기리기 위해 들려본다는 마음을 가지고 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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