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규칙 속에 조화감을 느낄 수 있는 <창경궁(昌慶宮) , changgyeonggung palace> [서울 종로 궁궐]
창경궁에 다녀왔습니다.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85 (우110-360) - 전화 : (02) 762-4868~9 - 팩스 : (02) 762-9514 |
교통편 |
지하철 |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출구로 나와 상가가 많은 골목으로 가면 있습니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출구 창덕궁을 지나 궁궐 담을 따라 걷다가 담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꺽으면 정문이 있습니다. <창경궁 돌담길> - 안국역보다는 혜화역이 조금 가깝습니다. |
버스 |
- 파랑버스(간선) : 101,104,106,107,108,140,143,149,150,161,162,171,172,272,301 - 초록버스(지선) : 1018 - 빨강버스(광역) : 9410 |
※ 자세한 버스노선은 서울시 홈페이지(http://bus.seoul.go.kr) |
자동차 |
경부고속도로 - 서초IC - 반포IC - 한남IC - 한남대교 - 남산1호터널 - 청계천2가 사거리 - 종로2가 사거리 - 재동교차로(안국역) 우회전 - 돈화문 교차로 - 원남사거리 좌회전 후 직진 - 혜화동 고가도로 밑으로 유턴 후 직진 200m(서울과학관 지나 바로 주차장) *문화재청 창경궁 홈페이지: http://cgg.cha.go.kr/ |
서울에는 참 많은 궁궐들이 있습니다. 경희궁,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그리고 창경궁이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궁궐하면 일단 경복궁을 떠올릴 것입니다.
전에 만원짜리 뒷면에 있는 경회루가 있었기에 더욱 경복궁이 가지는 상징성이 다른 궁궐에 비해 큰 것 같지만,
사실 경복궁이 아닌 다른 궁궐들을 들려보면 경복궁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희궁과 덕수궁은 훼손도 많고 해서인지 조금은 작게 느껴지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만큼이나 큰 궁궐입니다.
사실 경희궁도 엄청 컸지만 일제시대가 지내며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게 되었지요.
경복궁이 많은 건물과 체계적인 느낌이 든다면,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속에 큰 정원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창경궁은 바로 그 두가지의 스타일을 한대 모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창경궁은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후(세조·덕종·예종)의 거처를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 중반쯤으로 가던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때 지은 집이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과 양화당·여휘당 및 사성각 등이 있구요.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 정전(正殿)인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었습니다.
<명정전>
그러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고 나서도 몇 차례의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내전이 불탔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한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경춘전>
그러나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으며,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뒤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지요.
또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도로를 설치하였으며,
궁 안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수천 그루나 심어놓고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습니다. ㅠ.ㅠ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1980년대에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1983년 7월 1일부터 복원공사를 위하여 일반공개를 중단하였고,
그해 12월 30일에는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였습니다.
1984년부터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문정전 등을 복원하였으며,
벚꽃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원림(園林)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지요.
궁의 배치를 보면, 동쪽 한가운데에 ‘凸’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부분에 있는 중층삼간누문(重層三間樓門)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가 있고, 이를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상의 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으며.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이 명정전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명정문은 홍화문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예는 창덕궁과 개성(開城)의 만월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경궁을 보기로는
1번 입구로 들어가 4번 명정전을 보고 20번 관천대 쪽으로 돌아서 다시 6~8번이 있는 곳을 지나 22번 담길을 통해 14번으로 돌아나와
18번의 대온실을 보고 19번 관덕정 쪽으로 간후에 다시 1번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창경궁을 들어가는 곳은 바로 홍화문입니다.
입장료가 창덕궁 경복궁은 3000원이지만 창경궁은 1000원 밖에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멋진 공간을 단돈 천원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최고입니다.
가족과 함께 역사공부도 할겸 나들이를 나오기에도 좋고,
연인과 함께 분위기를 내기에도 좋은 장소입니다.
창경궁의 첫문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습니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공포를 짰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습니다.
홍화문의 문에서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오는 것을 보며
한 순간 오래된 조선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홍화문을 지나면 옥천교가 나옵니다.
옥천교 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입니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지요.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가보면 돈화문 등을 지나치며 바로 작은 물이 흐르는 공간이 나옵니다. 꼭 물이 흐르는 장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 궁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습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습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구요.
잡귀를 쫓는 조각상이 문 쪽이 아닌 안 쪽의 명정전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독특하게 느껴졌습니다.
옥천교를 지나면 명정문이 나옵니다.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입니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습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습니다.
그 명정문 넘어에 창경궁에서 가장 큰 건물인 명정전이 있지요.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습니다.
이때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었습니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었습니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습니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고 하는군요.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입니다.
명정전 앞의 관직이 쓰인 비석들 옆문을 지나 작은 정원을 지나다 보면
명정전 뒤편의 문정전도 보입니다.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고합니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 고증에 의하여 네모기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평)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습니다.
이 건물의 서쪽에서, 숭문당 남쪽면으로는
경사진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남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2단의 화계(花階)를 꾸몄고 동쪽행각사이에는 문정문이 있습니다.
작으 계단같은 것이 보이는 데 바로 관천대입니다.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입니다.
계동 현대건설 본부 건물 앞뜰에 남아 있는 15세기 초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의 천문대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지요.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습니다.
그런후에 다시 명정전 쪽으로 돌아갑니다. ^^
목재가 붉어 주목이란 이름이 붙은 묘한 분위기의 나무가 나옵니다.
수명은 300년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주목 뒤편에는 숭문당이 있습니다.
숭문당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하였습니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습니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짜았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습니다.
명정전에서 뒤편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있는 데 그 문 이름은 빈양문입니다.^^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있지요.
바로 보이는 것이 함인정입니다.
<함인정>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짰고, 주칸에는 화반 두 개씩을 놓여있구요.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내진주(內陳柱)로 구획된 마루는 한 단 높게 처리하여
그 위로는 우물천정을 하고 사방둘레의 툇간(退間)에는 연등천정을 하였습니다 .
함인정 뒤편에 있는 환경전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습니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처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사이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습니다.
환경전 옆에 탑도 하나 있네요 ^^
조금 더가면 통명전, 양화당, 집복헌이 나옵니다.
양화당 을 넘으면 뒤쪽의 연못과 온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양화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습니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지요.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 포작(包作)을 짰습니다.
기둥사이에는 화반(花盤)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간결한 장식을 하였습니다.
창경궁의 뒤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양화당 옆에 있는데 계단 아래 큰 바위가 무언가 의미가 있는 듯하지만 그건 잘 모르겠네요 ^^;
양화당 오른쪽으로는 양춘헌이 있습니다.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고합니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하였습니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 경춘전등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습니다.
또 양화당 왼쪽에는 통명전이 있습니다.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입니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지요.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 있니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습니다.
1984년의 발굴조사에서 연도지(煙道址)가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고 합니다.
통명전 옆에는 작은 조각들도 있습니다.
통영전 옆에 멀리 창덕궁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이 보입니다. 하지만 잠겨있지요 ^^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습니다.
궁을 지키는 감시카메라도 보이고,
지금까지 지나쳐온 궁궐과 도심의 모습이 보입니다.
위쪽을 걸어가다보니 풍기대가 보이네요.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는데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고 합니다.
전체 높이는 228.1센티미터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센티미터,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센티미터이지요.
바로 옆에도 측정을 하기 위한 것이 하나 있네요 ㅎㅎ
궁궐 건물이 있는 곳에서 춘당지로 가는 중간에 성종태실 및 태실비가 있습니다.
태실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石鍾形)의 몸체를 놓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보주로 장식하였습니다.
태실비는 태실 동쪽에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고 비신 앞면에는
"성종대왕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이들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태를 묻은 곳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에 있었던 것인데
1928년 전국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이봉하면서
원래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성종 은 세조 3년(1457) 덕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예종의 뒤를 이어 1469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지요.
그 뒤 25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성종태실의《경국대전(經國大典)》 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 제도를 완비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조각도 보며 창경궁의 북쪽 뒤편으로 가면 큰 연못인 춘당지 가 나옵니다.
춘당지는 1909년에 조성된 원지(苑池)입니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평방미터, 아래 것이 6,483평방미터입니다.
연못 속의 섬은 366평방미터입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습니다.
1909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한 것입니다.
춘당지 북쪽에 인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입니다.
( 아름다운 연못, 창경궁 춘당지 와 가을이 가는 창경궁의 마지막 단풍, 낙엽 - 보기 클릭)
연못 한 쪽에는 팔각7층석탑이 있습니다.
팔각칠층석탑 - 보물1119호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몸돌에 “遼陽重/ 開山都/ 綱挺玉/ 巖壽塔”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라고 기록되어 있어 1470년(성종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8각의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전체 모습은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지요.
라마교의 탑들이 대부분 둥근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라마교 에서는 흰색의 탑을 많이 만들고 있는데, 한국에 들어와서인지 그냥 돌색 그대로이네요.
춘당지를 넘으면 흰 온실이 나옵니다.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입니다.
건축 당시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 식물원이었으며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습니다.
1986년 창경궁 복원공사를 계기로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와 함께 전시하고 있지요.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궁궐 속의 하얀 유리건물, 창경궁 대온실 (식물원) [서울 종로] - 보기 클릭)
그렇게 온실까지 보고 단풍길을 따라 다시 명정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 들렸는데 해가 지려하고 있네요.^^
오늘 하루는 창경궁과 함께한 참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경복궁을 볼때에는 그냥 관광지에 간 기분이었는데
창덕궁은 궁궐과 함께 멋진 연못과 온실도 보아서 나들이 나온 분위기라
기분이 참 좋은 궁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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