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 개혁정치
1. 원 간섭기 고려의 상황 : 권문세족의 대두(부원세력), 사회 모순의 심화
2. 원 간섭기 개혁 정치
(1) 충선왕, 충목왕 때부터 시도
-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을 상대로 개혁을 추진할 만한 세력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실패
(2) 충렬왕의 개혁 정치
1) 홍자번의 편민 18사 건의
a. 국가 재정난, 민생 문제 해결 (無 - 토지개혁안)
b. 수취제도 모순 지적, 개혁정치의 효시
2) 세자의 대리정치
3) 필자적(비칙치)의 설치
4) ‘무비살해사건’으로 퇴위
(3) 충선왕의 개혁정치
1) 사림원 (예문관)설치 : 정방 폐지시도, 왕명 출납 담당, 고문기능
2) 정방폐지 → 한림원으로 이관
3) ‘조비무고사건’으로 폐위 → 충렬왕 재즉위 후 1308년에 충선왕 재위
4) 전지시행
5) 만권당 설치
6) 재정 개혁 : 의염창 (소금 전매제) / 전농사 설치 (농장, 노비 조사)
cf) 심양왕으로 봉해졌다가 고려국왕이 즉위
cf) 충렬왕과 충선왕 왕위계승은 원 무종의 옹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 충숙왕
1) 제폐사목소 설치 - 시폐 개혁 위한 교서 반포 → 찰리변위도감으로 명칭 변경 했으나 실패
2) 입성책동 - 고려를 원의 한 성으로 하려는 것 → 충렬왕 시기의 ‘세조구제’를 내세워 저지
* 세조구제 - 양국관계 변경말자 (원 세조)
(5) 충혜왕 (1344)
1) 편민조례추변도감 설치
2) 원의 기황후 세력은 충혜왕 정권을 크게 위협하였다.
(6) 충목왕의 개혁정치
1) 정치도감 : 토지·노비를 본인에게 돌려줌
(정치도감의 정치관 - 한미한 가문 출신 주류)
2) 권문세족의 견제
"환관 존속 및 권세가가 토양이 비옥한 곳에 다투어 농장을 설치하고, 간사한 이속이 이와 결탁하여 일을 도모하여 전토를 탈점하고
소`말을 탈취하니, 금 후로는 통렬히 추고 하옵소서."
(7) 실패 : 원의 간섭
3. 공민왕의 개혁 정치
(1) 14세기 중반 : 원 명 교체기
(2) 반원 정칙
1) 친원파 숙청 - 기철, 노책, 권겸 주살
2) 정동행성이문소 폐지
3) 관제 복구 (문종 때로)
4) 몽골풍 폐지
5) 쌍성총관부 회복 - 철령 이북 (함경도 원산지역)
cf) 의주, 초산, 강계, 갑주, 길주 지역 회복
6) 요동 수복 정책 : 지용수, 이성계(요양 점령)
7) 기자사 수축 - 자주의식 soy한국사
[공민왕의 영토 수복]
(3) 왕권 강화책
1) 권문세족을 견제
2) 정방 폐지 :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활성화 → 왕의 인사권 실시 (인사권을 전리사와 군분사로 이전)
3) 교육·과거제도 정비 : 성균관 부흥
4) 전민변정도감 설치 : 승려 신돈을 등용 ➝ 노비해방, 토지 돌려줌 ➝ 국가 재정 수입 기반 확대 (왕권강화)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두기를 청하였다. 스스로 판사(장관)가 되어 전국에 알렸다. “요즈음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탐욕스러움이 풍속으로 되었다. 종묘·학교·창고·사사·녹전·군수의 땅은 백성이 대대로 지어온
땅이나 권세가들이 거의 다 뺏었다. 돌려주라고 판결한 것도 그대로 가지며 양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
~ 이제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한을 지났는데도 고치지 않고
있다가 발각되면 조사하여 엄히 다스릴 것이다.”⌟ - 고려사
5) 성균관 강화 - 신진사대부 등용 (정치세력화) - 이색, 정몽주, 정도전
4. 군제 개편
(1) 중앙
1) ‘충용위’설치
2) 8위제 복설
3) 방리군, 한산군(전함관, 참설관 주축) - 신설
(2) 지방군
1) 진수군 - 5도 중심 / 지휘관 - 도순문사
2) 만호부, 익군 - 양계
3) 향촌에서 하층민을 괴롭히던 한량관ㅇ르 군사조직에 편입시켰다.
(3) 특수군
1) 연호군 - 왜구
2) 수군
5. 공민왕의 개혁 실패
1) 원의 간섭
2) 권문세족의 반발 (김용) : 신동 제거, 공민왕 시해
3) 신진 사대부 세력의 미약 → 근본적 실패 이유 (주체 세력 미약)
4) 홍건적, 왜구의 침입
cf) '자제위‘설치 - 개혁에 실패한 후 미소년을 가까이 함
* [고려] 11.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홍건적의 난, 왜구의 침입, 최영, 최무선, 정지, 이성계, 박위, 이방실) -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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