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論介)의 흔적이 남아있는 촉석루(矗石樓), 의암(義巖)
[촉석루]
경상남도 진주는 오랜 역사의 도시 입니다.
남강변에 있는 진주성은 아직도 그 모습을 잘 갖추고 있어 옛 성을 보기에 좋습니다.
진주성 안에는 조선의 3대 누각 중에 하나인 촉석루가 있습니다.
촉석루는 고려 말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입니다.
처음은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하였습니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을 정도로 그 누각의 모습이 아릅답습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촉석루에서 도도한 남강으로 흐르는 물을 보다 논개가 몸을 던진 의암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논개]
논개는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합니다.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되고,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습니다.
[논개가 몸을 던진, 의암]
논개가 뛰어내린 이 바위를 이 후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바위 근처에는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1629년(인조 7) 정대륭(鄭大隆)이 바위벽에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의암의 강 쪽 절벽에는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고 새겨 충의를 기리고자 하였습니다.
2001년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촉석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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