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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백제왕 들의 무덤,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송산리 5호분, 송산리 6호분, 무령왕, 公州 宋山里 古墳群, 武寧王陵)

by 소이나는 201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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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과 송산리고분군


고대 백제왕 들의 무덤, 공주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5호분, 송산리 6호분, 무령왕

公州 宋山里 古墳群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송산리 고분군이다.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 백제시대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공주 터미널에서 금강교를 넘어 가면 가까운 곳에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연중무휴(설과 추석 당일 제외)로 개방, 주차장 사용은 무료. 

입장료는 성인 1,500원(단체 1,400원), 청소년 1,000원(단체 900원), 어린이 700원(단체 600원). 단체 기준은 20인 이상, 경로우대증 소지자, 장애우 무료. 

대형 주차장 완비. 

041-856-3151 무령왕릉 관광안내소




백제가 문주왕(475~477), 삼근왕(477~478),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까지 64년간 도읍지로 삼았던 곳인 웅진(지금의 공주)에 조성된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해발고도 130m의 송산(宋山)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무령왕릉을 기준으로 위 북동쪽에 1~4호분이 자리하고 있고, 5호분과 6호분은 무령왕릉과 인접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들은 모두가 표고 약120m 정도되는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主山)으로 한 중턱 남쪽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데,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내용을 기억하며 고분군의 전시 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송산리 고분군은 오래 전에는 무덤 안을 개방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직접 들어갈 수가 없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할때에 직접 무령왕릉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데, 이제는 보존을 위해 들어가지 못하고 모형 전시로만 무령왕릉을 볼 수 있다.

송산리고분군모형전시관에는 송산리 5호분,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고, 그 밖에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다.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벽에는 무령왕릉의 벽면의 벽돌무덤의 형태가 그대로 만들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전시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송산리 5호분을 볼 수 있다.


송산리 5호분


송산리 고분군 5호분은 읍기(475~538)에 축조된 백제고분으로 1932년도에 발굴조사 되었다.

내부구조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현실의 동벽쪽에 현실로 들어가는 길인 연도가 달린 ㄱ자형 평면의 횡혈식 석실고분이다. 

현실 바닥에는 전돌로 쌓은 2개의 목관 받침대가 동서로 배치되어 있어 부부 합장용의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 4벽은 네모꼴로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천장은 현실의 4벽이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정상에 1장의 큰 판석을 덮은 궁륭식 천장으로 되었다. 

원래 각 벽면과 바닥은 모두 두껍게 회를 칠하였던 것이나, 지금은 거의 모두 벗겨져 흔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발굴조사 전에 이미 도굴을 당하였기 때문에 유물은 목관에 박았던 쇠못과 유리구슬 등 극소수가 수습되었을 뿐이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5호분


5호분의 무덤 양식은 삼국시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 졌던, 굴식 돌방무덤의 형식이다.
굴식돌방무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도 만들어졌는데, 들어가는 좁은 입구가 있고, 통로를 지나면 안 쪽으로 넓은 돌방이 나오는 구조이다.
초기 백제 시대에는 위례성에 고구려의 장군총과 비슷한 계단식 돌무덤이 만들어지고, 그 후에 굴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졌으며,
웅진 백제 시대의 무령왕은 이와 다르게 벽돌로 쌓아 만들어 다른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다.


공주 송산리 6호분(公州 宋山里 6號墳)


5호분을 지나면 공주 송산리 고분군 6호분을 볼 수 있다.

6호분은 백제 고분 중대에 속하는 벽화전축분(壁畵塼築墳)이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면에 그림을 그릴 부문만 진흙을 칠하고, 채색으로 그린 벽화는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과 주작 좌우에 해와 달을 그렸던 것이나 지금은 퇴색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연도부는 현실과는 달리 채색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

또한 전축분 발견 당시 이미 전벽의 내측, 즉 연도의 천정이 이미 파괴, 도굴된 상태였기에 고분 내에서 출토된 유물은 없다.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과 현실의 구조가 중국 화남(華南) 지방의 남조시대 전축분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 특이한 묘제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당시 백제가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벽돌무덤에는 벽화가 없는 것이 많은데, 벽화가 그려져 있어 독특하다.

석실분과 마찬가지로 남면한 구릉의 경사지대에 있으며 평면은 장방형이고 남쪽 벽의 중앙에 연문이 뚫렸으며 연도 바닥에는 배수구가 있다. 

벽과 천장은 모두 크기 32×14×15cm 정도의 무늬벽돌(文樣塼)을 5-6열(列)씩 가로로 퇴적하고 그 위에 한 열을 세로로 쌓고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여 퇴적하는 축법(築法)을 써서 쌓았는데 천장궁륭의 축성을 위해 미리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벽돌을 만들어 쓰고 있다.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남북의 짧은 양벽은 수직으로 되었으나 동서의 긴 벽은 천장 부근에서 기차 터널처럼 안으로 좁혀져 아치형 천장을 이룬다. 

네 벽의 일부는 토벽으로 하여 그 위에 사신(四神)의 벽화를 장식했고 따로 광배형(光背形)의 감(龕)을 두고 있다. 

1938년 일본인 가루베(輕部慈恩)에 의해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무령왕릉


그리고 드디어 무령왕릉의 모형이 보인다.


 칭별칭

 송산리고분군 제7호분

 건립시기·연도

 백제시대(6세기 전반)

 크기(높이, 길이, 둘레, 깊이)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13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송산리고분군은 대부분이 위에서 말한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고분군에는 당시 중국 양(梁)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塼築墳〕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피장자가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구조를 보면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무덤에 들어가는 연도(羨道)가 부설되어 있는 철(凸)자형의 전축(塼築) 단실묘(單室墓)이다. 

입지한 지형은 남향한 경사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원형인 분구(墳丘)의 지름은 약 20m 이며, 무덤의 상면에 호석(護石)으로 추정되는 잡석으로 쌓은 석축도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였으나,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편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다.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이다. 무덤의 현실은 남쪽의 벽면에서 109㎝ 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보다 21㎝ 정도 한단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후면의 관대는 동서 너비 293㎝, 남북 간 너비 315㎝의 규모이다. 

관대와 바닥의 경계는 벽돌쌓기의 차이, 즉 관대와 바닥 전면의 벽돌쌓기는 삿자리문 형태로 장방형의 벽돌을 깔면서 경계에 해당하는 관대 외곽은 벽돌을 길이로 늘어 쌓아 구분하였다. 

이 바닥의 벽돌 아래는 묘실에서 연도를 지나 묘도로 빠져나가는 배수시설이 있다.


묘실의 남벽 중앙에 시설된 연도는 길이 290㎝, 너비 104㎝, 높이 145㎝의 규모이고, 그 앞으로 묘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묘실의 축소판으로 터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용한 벽돌이나 축조방법도 묘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천정 이하의 벽면에는 반으로 자른 연꽃이 있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바닥도 묘실처럼 벽돌을 삿자리문으로 깔았으나 묘실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 묘실 내의 관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



연도 외부는 묘도로 이어지지만 바깥에 벽돌을 쌓아 304㎝의 높이로 연도 전면의 벽체를 갖추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문양이 있는 것과 문양이 없는 것, 그리고 무령왕릉에 사용된 연꽃무늬가 있는 것 외에도 제6호 벽돌무덤에서 사용된 동전무늬가 있는 전범문(錢范文)의 벽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에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벽체는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만들었다.

벽면은 좌우 벽을 상부에서 곡률을 주어 정상부에서 만나고, 전·후벽은 수직으로 하여 터널형 천정을 축조하였다. 

전축은 뉘어쌓기와 세워쌓기를 반복하여 사평일수(四平一垂) 방식으로 축조되어 중국의 삼평일수(三平一垂)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벽돌쌓기 방법은 네 벽면이 동일하지만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둥근 형상이 표현되는 부분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 있으며,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장식되었으며, 위치에 따라 사격자의 망상문(網狀紋)과 연화문을 다르게 배열하였다.



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작은 화염문을 채색한 보주형 벽감과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한 살창(유자창)을 시설하였다. 

이외에 묘실 벽에는 대형의 철정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고, 묘실 바닥을 1단 높여 관대를 시설하면서 그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특히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연화문이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의 막음벽돌 중에는 무문전과 제6호 벽돌무덤의 벽돌과 동일한 전범문 벽돌이 꽤 많이 있다.



출토유물은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데, 연도 입구에서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誌石) 2매와 오수전 한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발견되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쓰러져 있었으며, 관대 위에는 동쪽에 있는 왕의 목관과 서쪽에 있는 왕비의 목관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유물이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로는 왕이 소지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金製冠飾) 1쌍(국보 154호), 금귀걸이〔金製耳飾〕1쌍(국보 156호), 금제 뒤꽂이〔金製釵〕1점(국보 159호), 은제과대 외 요패 1벌, 금동식리 1쌍,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와 금은제도자(金銀製刀子) 각 1점, 발받침〔足座〕 1점(국보 165호) 등과 왕비가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국보 155호), 금귀걸이 2쌍(국보 157호), 금목걸이〔金製頸飾〕2개(국보 158호), 은팔찌〔銀製釧〕1쌍(국보 160호),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2개, 금동식리 1쌍, 베개〔頭枕〕1점(국보 164호)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지석 2매(국보 163호)과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수대문경(獸帶文鏡: 이상 국보 161호) 등의 각종 거울과 청동제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있고, 기타 도자제품으로서 등잔이 있다. 이 가운데 1974년 7월 9일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목 17건에 이른다.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고대의 무덤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피장자가 백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훌륭한 군주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金松)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하여 당시 중국·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이 백제 묘제의 전개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벽돌무덤으로서 중국 묘제라는 특수성을 지녔지만, 백제의 묘제 변화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백제의 묘제 측면에서 살펴볼 경우 한강유역 궁륭식 천정의 굴식 돌방무덤이 웅진천도와 더불어 송산리 제1~4호분과 같은 형태로 도입되었다가, 이후 무령왕릉과 제6호 벽돌무덤의 출현에 영향을 받아 터널형의 천정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이와 같이 외래의 벽돌무덤이 기존의 백제 묘제 속에 무리 없이 수용되고 전통적 묘제 자체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령왕릉의 영향이 단순한 묘제의 변화뿐만 아니라 백제의 사회·문화에 걸쳐 전반적인 변화상을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무령왕릉과 출토유물을 통하여 웅진기 백제문화는 중국 남조문화의 직접적 영향 관계에 있으며,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백제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백제 제25대 국왕[생몰년: 462(개로왕 8)∼523(무령왕 23), 재위 501∼523].


송산리 고분군 7호분에 잠든 무령왕은 501년 12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정변에는 왕족과 한성(漢城)에서부터 내려온 귀족, 웅진(熊津)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연루되었다.

501년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고, 503년 마수책(馬首柵)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해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는데, 이 때 이를 독려하기 위해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무령왕은 지배층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했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망(流亡)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진휼을 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고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완비함으로써 금강유역권을 개발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왕정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제반정책의 추진으로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고 한다.


한편, 무령왕은 백제의 왕들 가운데 출생과 사망 연대가 처음으로 정확히 확인되는 왕이기도 하다. 

공주 송산지 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지석(誌石)에는 무령왕을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고 나타내고 있으며, 그가 62세 때인 계묘년(癸卯年) 오월병술삭칠일(五月丙戌朔七日)에 죽었고, 2년 뒤인 을사년(乙巳年, 525년) 팔월계유삭십이일(八月癸酉朔十二日)에 대묘에 안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을 둘러보고 완만한 구릉이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니, 송산리 고분군이 보인다.

지금은 보존을 위해 무덤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저 입구 위로 둥글게 올라간 모습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분군에 오르면 송산 서쪽으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동쪽으로는 공산성이 보인다. 



왕릉을 모두 보고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려 했는데,

고분군이 있는 송산의 정상에서 국립공주박물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여 계속 산길을 걸어 갔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길을 걸어 내려가니 박물관의 뒷편이 나와 쉽게 국립공주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다음에 ^^~~


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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