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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 거대한 석굴암의 연속. 용문석굴 (뤄양 龍門石窟 : 롱먼스쿠, Longmen Caves)

by 소이나는 201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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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
  거대한 석굴암의 연속. 용문석굴
  (뤄양 龍門石窟 : 롱먼스쿠, Longmen Caves)

 

 


여행을 하며 북경에서 시간을 보내고 뤄양(낙양)으로 향했습니다.
전에 여행을 하며 북경에서 장안(시안)으로 바로 이동을 해서
중간에 있는 중국 고대 도시인 낙양을 거르고 지나쳤던 것이 못내 아쉬워서 다음에는 꼭 들려야지 했던 것을 실천에 옮기는 날이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이거나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낙양이란 도시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중국어로는 뤄양(洛陽(낙양), Luoyang) 이라고 하고 있지요.

낙양은 황허강[黃河]의 지류인 중국 허난성 서부 뤄허강[洛河] 유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와의 거리는 140km에 있습니다.
장안(長安:지금의 西安)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하지요.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되며,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하였고,
그뒤 BC 770년에 주왕조가 현재의 산시성[陝西省]의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 한 도시 입니다.
한편 정식명칭은 전한(前漢) 때에 낙읍(洛邑)으로 불리다가, 후한이 AD 25년에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뤄양으로 고쳤습니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493년에 효문제(孝文帝)가 산시[山西]의 다퉁[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지요.
호수(戶數) 약 11만, 불사(佛寺) 1,378을 헤아렸던 당시의 모습이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605년에 병란으로 황폐한 북위의 뤄양성 서쪽 15km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뤄양의 전신입니다.
당(唐)나라도 부도로서의 뤄양의 지위를 이어받아 동도하남부(東都河南府)라고 불렀으나, 수·당시대에는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인데 대하여 뤄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지요.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 쇠퇴하여 오대(五代) 때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에는 지방도시로 일관하였습니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한때 성도가 되었고, 1933년에는 난징[南京] 정부가 이전해 왔던 적도 있습니다. 1948년에 시(市)로 승격되었습니다.
오늘날 뤄양은 다시 발전하여, 정저우와 더불어 허난성의 2대 공업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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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 의 뤄양 정보]

중국 최대의 트랙터공장을 비롯하여, 베어링·유리·화학비료 등의 공장이 입지하고, 대규모의 면방직 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있다. 한편 부근에는 석탄 및 기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또 대도시 중에서는 싼먼샤[三門峽]댐의 수력전기를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한편, 미사일·항공기지 등이 있어서 군사적으로도 크게 중요시된다. 부근 농촌에서는 밀·옥수수·콩·목화 등의 농산물을 산출하며, 특히 무단화[牡丹花]가 유명하다.

룽하이철도[連雲港~蘭州]와 쟈오즈철도[焦枝鐵道:焦作∼枝城]의 교차점이며, 310·207국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고, 민항(民航)도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뤄양대학·뤄양의학원·뤄양중의학원[洛陽中醫學院]·뤄양공학원 등 3,551개의 고·중·소학교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바이마사[白馬寺]·중국 미술사상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 이밖에 톈진교[天津橋]·관린[關林]·뤄양구무[洛陽古墓]박물관·무단[牡丹]공원·백거이묘(白居易墓) 등 명승지가 많다.

연평균기온 14℃, 연평균강수량 703.9mm이다. 부근 일대는 뤄허강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베이평원[華北平原]과 웨이수이[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요지를 이루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낙양(뤄양)과 장안(시안) 두 고대의 도시를 들려보았을 때
좀더 보전이 잘되어있고 역사적이며 관광시설이 잘 되어있는 곳은 장안이었습니다.
장안에는 아직도 옛 성곽이 도시를 둘러쌓고 있으며, 중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온 백마사와 함께 성곽 남문 아래있는
자은사의 탑이며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와 그 유명한 진시황릉과 병마용이 있는 곳이고, 양귀비의 목욕탕의 화청지에
검술로 유명한 산인 화산이 있습니다. 또한 명필들과 조각가가 만든 비석의 숲인 비림도 유명하지요.
도시 전체가 아직도 과거속에 살아 숨쉬는 느낌이 들며 동시에 현대도시와의 조화도 잘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시안이라면

낙양은 더 오래된 도시이라 그런지 시안에 비해 약간은 낙후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는 상당히 넓은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침울해 보이기도 하더군요.
예전의 명성이 사라진 낙양의 현대를 보니 亡國之歎 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낙양 사람들은 예전의 명품 도시의 사람이라 그런지 인심도 좋고 정이 많아 참 좋았습니다.



 






[위의 표시는 관우묘, 아래 표시는 용문석굴]


북경에서 밤에 기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 낙양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역광장을 타고 조금 내려오니 빙관(여관)이 보이기에 그곳에 짐을 풀었습니다.
기차역에서 다음 행선지인 쑤저우에 가는 기차표를 못구했기에 여관의 로비에서 열차표를 구해달라고 하니 저녁까지 구해 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며 여관에서 운영하는 소림사 투어가 있으니 해보라고 하기에 내용을 들어보니
꽤 가격도 저렴하고 알차보여 낙양에서의 첫날에는 소림사에 다녀오고, 다음 날에 용문석굴과 백거이 묘, 관림(관우 묘)을 들렸습니다.

낙양에서의 둘째날 용문석굴을 가기위해 숙소를 나섰습니다. 용문석굴과 관림은 뤄양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습니다.
낙양역 앞에서 버스 표지판을 잘 보니 Longmen(용문)이라는 정거장이 써있는 버스를 탔습니다.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넓게 퍼진 중심가를 지나 약간의 외곽으로 들어서니 용문석굴 정거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버스는 관우묘도 지나가는 버스이더군요.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관우묘도 볼 수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용문석굴 주변의 상점거리가 있고 그곳을 지나니 용문이 보입니다.
용문은 리강에 있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석굴이름도 용문석굴이 되었나 봅니다.




[용문다리]

다리 아래에 유네스코 표시를 보며 다리를 지나니 용문석굴이 보입니다.
강 건너편에는 향산사라는 절이 있고, 그 근처에 '백원'이라는 정원이 있습니다.




[용문다리를 지나 보이는 풍경]


[뤄양 龍門石窟 : 롱먼스쿠, Longmen Caves]

롱먼스쿠는 살면서 꼭 가봐야지 하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 데, 이번 겨울 중국 여행을 하며 기여코 들리게 되었습니다.
롱먼스쿠는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대동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히고 있습니다.

둔황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사막지역으로 가는 지역에 있어서 좀 먼 곳에 있습니다. 사막의 황토색의 물결속에 커다란 석굴이 있는 곳으로 장관이지요.
그리고 대동의 운강석굴은 북경에서 내몽고 쪽으로 가는 곳의 대동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북경에서 가까워서 만약 내몽고의 초원을 보기 위해 북으로 향한다면 중간에 대동에 들려 운강석굴을 보라고 하고 싶네요.

롱먼스쿠가 북위의 수도인 낙양에 용먼석굴이 만들어지고, 대동 또한 북위의 수도이었지요. 그곳에도 석굴이 만들어 진 것 같습니다.
460년 쯤에 윈강스쿠가 만들어졌지요. 북위가 중국의 거대 석굴을 2개나 만들어 버렸더군요.



룽먼석굴은 뤄양 교외를 흐르는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룽먼산(龍門山)과 샹산(香山)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조성되어 있습니다.
북위 시대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壁龕)이 조성되었고,
내부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명문, 40여 개의 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술성이 높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합니다.



암벽을 따라 벌집처럼 늘어선 크고 작은 굴 안에 불상이나 불탑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은 10여 미터가 넘는 것부터 수 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입니다.
10만여 점이 넘는 불상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표정에 뛰어난 솜씨와 멋을 자랑하고 있다니 정말 멋집니다.
다만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머리가 떨어져나간 불상이 특히 많고,
이외에도 도굴단에 의한 불법반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한 파손 흔적도 뚜렷합니다.
문화혁명이란 것이 그중에 가장 큰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북경의 북해공원에 엄청난 수의 불상 조각으로 만들어진 탑이 있는데 그 탑의 부처들의 머리가 모두 잘려져 있지요.
그것은 불법반출이나 얼굴만 팔려고 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문화혁명의 중에 신을 부정하며 자른 것 같습니다.
중국은 공산당의 국가이지요. 아직 신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유보 조항을 두어 제한도 가능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헌법에 그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지요.
역사적으로 교류가 많았고 가까운 나라이지만, 그 특성은 한국과 여러 분야에서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래도 용문석굴과 같은 역사의 유산을 보면 예술과 종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같은 것 같습니다.




[비로자나불]

 10만 점이 넘는 불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을 들 수 있습니다.
폭 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은 전체높이가 17.4m에 이르며, 귀 길이만도 1.9m나 됩니다.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인데,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고있습니다.
가오양둥(古陽洞)은 가장 오래된 동굴이자 예술적 가치가 높은 동굴로 유명하지요.
길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석굴의 천장과 벽면에 불상이 수도 없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 같이 빼어난 작품들입니다.
직접보면 그 거대함과 예술성에 할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밖에 북위 때 총 8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투입해 24년에 걸쳐 건설했다는
빈양싼둥(賓陽三洞)은 남동, 중동, 북동 세 개의 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 11개의 대형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3cm의 작은 불상이 15,000개나 조각되어 있는 완포둥(萬佛洞), 천장의 연꽃이 아름다운 롄화둥(蓮華洞),
당나라 때의 약 조제법이 새겨진 석탑이 있는 야오팡둥(藥房洞)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의 시작은 북위 효문제 때에 대동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운강석굴을 계승하는 형식으로 처음 뚫어졌고 그 작업이
동서위, 북제, 북주, 수, 당에 이르는 40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현재는 2345여 개의 석굴,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남아있습니다.
용문석굴은 현존하는 종교, 미술, 서예, 음악, 의료, 건축 등 방면의 살아있는 역사 자료이기에
'대형 돌조각 예술 박물관'이라고도 칭해질 정도 입니다.



용문석굴은 이제 하남성과 낙양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하며,
명성에 걸맞는 규모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을 보러 낙양에 들르는 여행객이 대부분일 정도이지요. 낙양에서 이것만 본다고해도 후회는 하지않을 것입니다.



산을 오르며 내리며 석굴을 보면, 평생 볼 석굴의 수보다 많은 석굴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부처님의 세상에 인간인 내가 잠시 놀러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용문석굴은 백거이 묘가 있는 향산용문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리강변의 석굴을 본 후에 강을 건너가 보았습니다.



용문석굴 맞은 편 향산에는 향산사가 있습니다.
향산사의 풍경 또한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하기에 충분합니다.
리강과 함께 보이는 용문석굴의 웅장함이 향산사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용문석굴에서 바라보는 향산사]


[향산사에서 바라 본 용문석굴]

향산사에는 하나의 종이 있는데, 저 종이 울린다면 리강를 흐르는 소리는 어느 석굴에 부딪쳐 다시 올아올지 궁금하더군요.
용문석굴과 향산사,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한 자리에서 서로의 멋을 뽐내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용문석굴을 보고 강을 건너 향산사를 보며, 용문을 지나면 백거이의 묘가 있는 백원(白園)이 있습니다.
입장표를 하나 사면 용문석굴에서 향산사, 백원까지 한번에 볼 수 있습니다.

백원은 작은 정원입니다. 약간은 구릉을 오르면 백거이의 묘가 보입니다.


[백원 입구]

 
백거이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 백거이의 장한가 ◇

칠흙같은 검은 머리 옆으로 쏠려 있어

지금 막 단잠에서 깨어난 듯 하였소

꽃 수놓은 머리띠 헝클어진 그대로

정신없이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었소

산들바람이 마침 불자 선녀 옷깃이 나풀거리는 게

그 모습 완연히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가 아닐손가

옥같은 얼굴엔 시름이 한가득

배꽃 한가지에 봄비가 맺혀있듯

 


[白居易墓]

수많은 부처님과 함께 잠들어 있는 백공은 저승에서도 시를 쓸 수 있겠더군요.

오랜시간 용문석굴을 본 후에 낙양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숙소로 오는 중간 쯤에 있던 관림(관우묘)에도 잠시 들렸습니다.



관림은 삼국지에서 그 유명한 관우의 묘라고 보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낙양에 관우묘가 있는 것은 그 당시 삼국의 외교상의 문제가 가장 켰습니다.
유비가 중원을 떠나 멀리 촉으로 향하며 마지막 중원 땅인 형주를 가장 믿을 만한 관우에게 맡겼습니다.
빠른시간에 촉을 점령하고 성도에 입성하여 승승장구 하지만, 문제는 바로 외롭게 홀로 있는 형주이었지요.
형주 땅은 중원의 한 가운데로 인재도 많이 나오고 농토도 비옥해 삼국의 분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유비와 장비, 제갈량이 그렇게 형주를 떠나 촉으로 향한 사이에
원래 형주땅을 받기로 약속을 받았던 오나라는 심기가 불편했고 그 기회를 노려 형주를 공격하였고,
그러던 중 관우가 죽게 됩니다. 그렇게 오나라가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차지하지만,
또 막상 그렇게 되니 유비의 의형제인 관우를 죽이고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지요.
그래서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습니다. 화근을 위나라로 돌려보고자 하는 것이였습니다.
조조는 원래 관우의 성품과 무예, 정치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관우의 머리를 받자 위나라 땅이었던 낙양에서 후하게 장사를 치뤄주어 낙양에 관우의 묘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관우상]





그렇게 관우는 죽었지만 요즘 시대에도 상당히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마치 신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중국의 상인 거리나 상점에 가면 요즘시대에도 관우상이 많이 있습니다.
재물을 불러오는 것 또한 관우라고 믿고 있지요.
관우가 죽은 후에도 그의 귀신을 본 사람이 많다고도 합니다.
삼국지에 그 유명한 조조, 손권, 유비, 제갈량도 이렇게 신격화 되지는 않았지만 관우가 신격화 된 것은
그의 인품과 충직 우예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용문석굴, 향산사, 백원, 관림을 보니 하루가 지나갑니다.
시내에서 맛있는 탕추리지와 위쌍러스에 맥주 한 잔을 마시니 낙양을 떠날 시간이 다가옵니다.
오래된 역사의 현장인 낙양에 다녀와 보니,
화려한 석굴과 소림사 이런 것을 본 기억보다는 왠지 모르게 옛 명성이 사라진 낙양에 아쉬움이 더한 곳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용문석굴은 그 자체 만으로더 거대하며 강렬한 경험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차갑게 흐르는 이허의 깊은 물이 가슴을 흘러가며 롱먼스쿠의 웅장함을 다시 떠올리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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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인공호수의 중국 북경 이화원 (베이징 이화원) 이허위안 [Summer Palace and Imperial Garden in Beijing, 頤和園(Yiheyuan)]  (6) 2012.10.22
중국 사람들의 여가 활동하는 모습 (체조, 무술, 운동, 카드놀이, 음악)  (10) 201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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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레이져 쇼와 함께 하는 중국 북경 더 플레이스, 中国 北京 世贸天阶, China Beijing - THE PLACE  (6) 201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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