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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西大門獨立公園的 獨立門, Seodaemun independence park and Seoul's Independence Gate (서울 서대문구)

by 소이나는 201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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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西大門獨立公園的 獨立門
Seodaemun independence park and Seoul's Independence Gate
(서울 서대문구)





홍대 쪽에 있다가 홍제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잠시 쉬려 서대문 독립공원에 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더군요.

서대문 공원은 그래도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가 있는 뜻깊은 자리인지,
외국인도 많고, 단체로 온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벤츠에 앉아 책을 읽기에 좋아보이더군요.
쉬기에도 좋구요.


 

서대문 독립공원
(西大門獨立公園, Seodaemun independence park)

일제강점기에 의병투쟁, 3·1독립만세운동, 항일투쟁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이곳의 옥사는 1908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경성감옥이라는 명칭으로 문을 열었는데
항일투사들이 늘어나자 일제가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지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후 1923년에는 서대문형무소로,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등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건립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으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에 있는 8개 감옥의 총수용인원이 300명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구치소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아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이때 서울시가 법무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1988년 조성공사를 시작하였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공원 규모는 10만 9193.8㎡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제9~13 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옥사를 포함하고 있고
그외 시설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문, 독립관 등이다. 1908년에 지어진 옥사는 일제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될 당시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모두 없애고
보존가치가 있는 제9~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보안과청사, 사형장, 담장, 망루는 보존하고 있다.
그 중 순국선열들이 옥고를 치른 제10~12옥사와 사형장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으며
9사, 13사와 구여사(舊女舍) 및 지하감옥은 매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구여사는 1920년 유관순이 고문 끝에 숨진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한다.
순국선열추념탑은 이봉창·윤봉길·유관순·안중근 등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고
3·1독립선언기념탑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것인데 1992년 복원했다.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사적 32)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는 의미에서 만든 기념물이다.
서재필(徐載弼)이 제안하고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아 완공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남동쪽 70m 지점인 도로 가운데 있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영은문(迎恩門)은 1407년(태종 7)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세운 사대주의 상징물인데
1896년(고종 32) 김홍집 내각 때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2기(사적 제33호)가 남아 있다.
독립관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들에게 영접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후에 독립협회가 사무실 겸 집회실로 사용하였다 하여 일제가 강제 철거하였다.
1997년에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서대문 공원은 독립문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과 비슷하게 생긴 문이지요.





독립문 (獨立門, Seoul's Independence Gate)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창건 당시의 면적 2,800㎡였으며, 총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소요되었다.
완공일은 1897년 11월 20일이다. 현재의 면적은 2,640㎡이다.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工役)은 건축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고 노역(勞役)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舊)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독립문 바로 옆에는 독립협회의 송재 서재필의 동상도 있습니다.




서재필(徐載弼)에 대하여

1864년(고종 1)∼1951년. 개화기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son, P.). 전라남도 보성 출신.

1. 가계와 출사
광효(光孝)의 둘째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칠촌 아저씨 광하(光夏)에게 입양되었다.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고종 19)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2. 일본유학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여 점점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군사훈련을 공부하고, 1884년 7월 귀국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 국왕의 승낙을 받고, 조련국(操鍊局)의 사관장이 되었다.

3. 갑신정변 참가

1884년 12월에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진행중에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에 의한 새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4. 해외망명

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살 된 아들은 굶어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 1889년 6월 이 학교의 졸업생대표로 고별연설자가 될 정도로 특출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가졌는데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이 모두 희생되었으며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서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하였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에 2등으로 졸업한 뒤 이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다음해 6월에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행위를 하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5. 귀국과 개화운동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경장이 일어나 대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갑신정변 뒤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뒤이어 갑오경장 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다가 실각하여 미국에 들렀던 박영효가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6.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사상 고취

귀국 직후 1896년 1월에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고 신문의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의 재정자금 4,400원의 지원을 받고 국내의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마침내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신문으로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이어 국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큰 소임을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국민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아 1897년 11월에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는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는데,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가르쳤고, 민족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민주주의사상을 가르쳤다.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의 발전에 그가 끼친 공헌은 매우 큰 것이었다.

7. 미국망명과 해외독립운동

그러나 수구파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막대한 영향력을 꺼려한 우리나라의 수구파정부와 국제열강들은 합의하여 그를 다시 미국으로 추방하였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 독립운동자금으로 바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여론에 호소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하여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를 간행하면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활동과 외교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에의 헌신으로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하여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강의에 종사하고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였다.

8. 광복후 군정참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에게 패하여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인물종합정보 서재필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KOR_A1864_1_0005493)
 




독립관 [獨立館]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은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모화관 옆에 세운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이것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 후에 사용하지 않다가 1897년 독립협회가 건물을 고쳐 집회장소로 사용하였다. 독립협회는 사대주의를 외형적으로 청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서대문독립공원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기에, 공원만을 보러 찾아올 필요는 없으나,
서대문형무소를 함께 보면, 시간을 내어도 될 것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西大門刑務所歷史館, Seodaemun Prison History Hall] 구서울구치소 [舊─拘置所] (서울 서대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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