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대한을 연결하는 덕수궁
[德壽宮, Deoksugung, Deoksu palaces in Seoul]
(석조전, 대한문, 중화문, 중화전, 석아당, 정관헌, 당홍관, 함녕전, 광명전, 신기전, 앙부일구, 흥천사종, 덕수궁 연못, 카페 돌담길)
[덕수궁 덕홍전]
[중화전과 석어당 사이의 문]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의 순서로 성종은 9대 조선의 왕이었습니다.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고 세조가 된 후 다음을 아들인 예종을 왕으로 세웠으나
일찍 병으로 죽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성종은 특히 유학의 보급에 큰 성과를 올린 왕입니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 慶運宮)의 시작이 었습니다.
[중화전 뒷 마당에서 본 석어당]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구한말 경복궁에서 지내던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쳐를 옮기고 (아관파천(俄館播遷) )
다시 국가의 제건을 위해 광무개혁을 하며 대한제국을 세우고,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습니다.
1904년에는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습니다.
1906년에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에,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고종이 이 곳에 거주하였다.
1910년에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습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종이 커피를 즐기던 정관헌]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 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습니다.
현재 6만 1500㎡의 면적에 대한문(大漢門), 중화문(中和門), 광명문(光明門)이 있으며,
중화전(中和殿), 석어당(昔御堂), 준명당(俊明堂), 즉조당(卽祚堂),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석조전(石造殿) 등의 전각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적 124 덕수궁 일원 - 1962.07.25
국보 229 보루각 자격루 - 1985.03.03
보물 819 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 - 1985.01.08
보물 820 덕수궁 함녕전 - 1985.01.08
보물 1460 흥천사종 - 2006.01.17
[덕수궁 대한문] (德壽宮 大漢門)
덕수궁의 입구인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우진각지붕집입니다.
원래 정전(正殿)인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의 정면에 있었던 것을 나중에 동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4월에 그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쳤습니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각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얹었습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습니다.
대한문 앞에서는 수문장 교대의식을 하고 있어 볼거리가 있습니다.
(11시, 13시, 15시 30분)
대한문 오른쪽에 매표소에서 표를 사 덕수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장료의 가격은 1000원 입니다.
대한문을 지나 조금 앞으로 가면 대한문과 중화전 사이에 함녕전과 덕홍전이 있습니다.
[덕홍전과 뒤의 함녕전] [德壽宮 德弘殿, 咸寧殿 ]
덕홍전은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우측(동쪽)에 위치하며 편전(便殿)으로 사용한 건물로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함녕전과 나란히 남향으로 지어졌으며 정무를 맡아보던 곳입니다.
1904년 덕수궁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경복궁과 창덕궁에 지어진 편전과는 다르게 거의 정방형을 갖추고 있는 독특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함녕전은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고,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익공계(翼工系) 양식의 팔작지붕이다.
1897년(건양 2)에 창건되었으나, 1904년(광무 8) 화재로 불탔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 직후에 중건된 것입니다.
이 전각은 고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임금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준 후 잠시 수옥헌(漱玉軒)에서 거처하였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후 다시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여기에서 승하하였습니다.
건물은 커다란 기단(基壇) 위에 앉혔고, 집 둘레에는 거느림집[行廊]과 흙벽이 둘려 있습니다.
집의 평면은 한쪽 뒷면에 4칸이 더 붙여진 ㄱ자형인데, 기둥 사이는 대개 동일하고, 좌우의 한 칸씩만 협간(夾間)처럼 되어 있습니다.
바른편 끝에는 높직한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 밖으로 툇마루가 달렸는데,
이것이 뒷면으로 이어져 ㄱ자형으로 꺾어져서 난간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앞면 가운데 3칸의 퇴간은 트였고 나머지 전부는 거실로 사용하도록 꾸몄습니다.
또 4면 벽에는 토벽이 없고, 교창문(交窓門)과 정자살[井字箭] 및 띠살창문(가는 살창문의 상중하에 가로살을 댄 창문)의
사분합(四分閤) 문짝만이 달려 있습니다.
처마는 겹처마로,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이 놓여 있습니다.
합각 부분에는 나무엮음을 하지 않고 화문장(花文墻)처럼 무늬를 놓은 흙벽이 처졌습니다.
집은 매우 크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장식은 매우 간소합니다.
대한문을 지나 금천교를 넘어 함녕전과 덕홍전 옆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중화문이 나오고,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이 나옵니다.
[덕수궁 중화문] (德壽宮 中和門)
중화문과 중화전은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중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5량가구(五樑架構)로 되어 있는 다포계 팔작지붕구조입니다.
[중화문을 지나서]
[덕수궁 중화전] (中和殿)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입니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되었습니다.
공포(栱包)는 내사출목(內四出目) ·외삼출목(外三出目)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천장 한가운데에 다포(多包)로 천개(天蓋)가 새겨졌고,
천장 널판에 휘황한 금색의 쌍봉이 구름사이를 나는 모습으로 돋을새김[浮彫]되었습니다.
[중화전]
고주(高柱) 사이의 우물천장 밑 가구(架構)는 다포집이면서도 다포집답지 않은 익공계(翼工系)의 양식을 혼용하였습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의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놓았으며, 토수(吐首)를 끼웠습니다.
단청은 모로단청(毛老丹靑:부재의 끝 부분에만 여러 무늬를 놓아 갖가지 색으로 그린 단청)으로 하였고,
광창(光窓)과 문짝에는 소슬 꽃살문을 새겨 짜서 위관(偉觀)을 돋우었습니다.
중화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앞으로 간다면 광명문이 나옵니다.
[광명문, 흥천사종, 앙부일구, 신기전, 물시계] [光明門, 興天寺鍾, 神機箭, 仰釜日晷]
광명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八作)집으로 1904년(광무 8) 함녕전은 소실되고 이 문만 남았다고 합니다.
미술관을 개관할 때 이 문을 흥천사(興天寺) 종과 누각(漏刻)을 진열하기 위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는데
공포는 2익공이며 겹처마에 단청을 칠했습니다.
광명문 아래에는 흥천사종과 앙부일구, 신기전, 물시계가 있습니다.
흥천사종은 높이 2.82m, 지름 7m, 두께 3㎝입니다.
흥천사명 동종이라고도 합니다.
1462년 7월 조선 태조(太組)가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덕수궁 부근에 유폐된 신덕황후의 무덤 근처인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1510년(중종 5)에 화재로 소실되자, 1747년(영조 23)에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에 의해 창경궁으로 옮겨졌고 나중에야 현 위치로 옮겨왔습니다.
이 종은 규모와 문양, 주조기술이 탁월하며, 종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주성시(鑄成時)의 조직체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 말부터 들어온 중국 종의 요소를 첨가하여 새로운 조선 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어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전기 범종의 기준이 됩니다.
2006년 1월 17일 보물 제146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기전은 1448년(세종 30년) 제작된 병기(兵器)로서 고려 말기에 최무선(崔茂宣)이 화약국에서 제조한
로켓형 화기(火器)인 주화(走火)를 개량한 것입니다.
대신기전(大神機箭)·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중신기전(中神機箭)·소신기전(小神機箭) 등의 여러 종류가 있는데,
병기도설에 기록된 신기전에 관한 내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병기의 기록입니다.
대신기전은 총 길이 5583㎜, 안정막대 길이는 5310.8㎜이며,
지금의 로켓엔진에 해당하는 약통은 길이 695㎜, 직경 102㎜, 두께 16.2㎜, 내경 63.1㎜, 분사구멍 직경 37.5㎜입니다.
대나무로 만든 화살대의 윗부분에 한지로 만든 약통을 부착하고,
폭탄에 해당되는 방화통을 약통 위에 올려놓고 도화선을 약통과 연결하여 신기전이 목표지점에 가까워지면 자동으로 폭발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약통에는 화약을 채우고 바닥에 지름 37.5mm 크기의 구멍을 뚫어 화약이 연소되면서
가스를 분출시켜 로켓처럼 날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정거리는 약 2㎞에 달하였습니다.
세종 때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습니다.
산화신기전은 총 길이와 안정막대 길이가 5310.8㎜로 같고, 약통의 제원은 대신기전과 같으나
발화통을 변형하여 윗부분이 지화(地火)와 발화(發火)를 함께 넣어 적을 혼란에 빠뜨릴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신기전은 총 길이 1455㎜, 안정막대 길이는 1406㎜이며, 약통은 길이 200㎜, 직경 28㎜, 두께 5.7㎜, 내경 16.6㎜, 분사구멍 직경 7.2㎜입니다.
약통과 발화통의 구조는 대신기전과 같은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소신기전은 총 길이 1152㎜, 안정막대 길이는 1103㎜이며, 약통은 길이 147㎜, 직경 22㎜, 두께 4.2㎜, 내경 11.6㎜, 분사구멍 직경 4㎜입니다.
신기전 가운데 가장 작은 형태로서 대신기전 ·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장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150m, 소신기전이 100m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중 ·소신기전의 발사는 1개씩 빈 화살통 같은 곳에 꽂아 발사했으나
1451년(문종 1년) 화차가 제작된 이후로는 화차의 신기전기(神機箭機)에서 주로 발사하였습니다.
1434년(세종 16) 장영실이 처음 만든 앙부일구는 종로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쌓은 석대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 되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2개의 앙부일구는 그로부터 2∼3세기 후에 만든 것으로 전의 것과 제작 기법이 같습니다.
반구형(半球型)의 대접 모양에 네 발이 달려 있는데,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계절선(季節線:緯線)으로 나타내고,
이에 수직으로 7개의 시각선(時刻線:子午線)을 그었다. 동쪽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질 때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고,
연중 해의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비추는 그림자 길이를 보고 절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표(時標)는 북극을 향해 비스듬히 세워졌는데, 선과 글은 은상감(銀象嵌)으로 새겨, 그 모습이 우아합니다.
광명문 아래에 있는 유물을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군요.
광명문을 따라 계속 걸으면 덕수궁 미술관이 나옵니다.
[석어당]
광명문 쪽으로 가지 않고 중화전에서 왼편이 있는 건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석어당이 있습니다.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
석어당은 1904년(광무 8) 화재로 원래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그해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1층 정면 8칸, 측면 3칸, 2층 정면 6칸, 측면 1칸, 중층 팔작지붕 익공(翼工)집입니다.
[석어당]
석어당을 정면에서 보면 8칸 중 가운데 있는 2칸은 툇마루를 깔고 뒷면 역시 쪽마루를 달아내었습니다.
기둥은 모두 각주(角柱)를 썼으며 두공(枓栱)은 간결한 익공입니다.
상층은 퇴량(退樑)과 대량(大樑) 위에 올려 세운 각주로 구성되고 우물마루를 깔았습니다.
처마는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고, 지붕에는 망와(望瓦)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습니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중층건물이며, 궁전건축이지만 권위주의적인 형식을 벗어나 순수한 재래식 민간건물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석어당]
석어당을 지나 근대식 건물이 보이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두개의 건물이 있는데 하나는 석조전이고 하나는 덕수궁 미술관 건물입니다.
[석조전과 중화전]
[덕수궁 미술관과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德壽宮 石造殿 ]
석조전은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광무 4)에 착공하여 1910년(융희 3)에 완공하였습니다.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습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특이합니다.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92~2004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하였습니다.
왼편의 건물은 현재 덕수궁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덕수궁 미술관] [德壽宮美術館]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서관은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8·15광복 후 동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입니다.
근대미술전문기관으로, 근대미술관련 기획전과 소장품 전시회를 비롯해
근대미술 관련 조사·연구·출판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을 위한 작품설명회, 강연회, 미술강좌도 열고 있습니다.
넓이는 3,428㎡로, 4개의 전시실과 휴게공간, 아트숍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분수대]
[중화전과 석어당 사이의 문과 덕수궁 미술관 앞의 해시계]
그리고 석조전의 오른편이고 중화전의 뒷쪽으로 가면 정관헌이란 곳이 나옵니다.
[정관헌 올라가는 계단]
[정관헌 앞에서 본 당홍전]
덕수궁 정관헌 [德壽宮 靜觀軒]
덕수궁 정관헌은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덕수궁 안에 지은 회랑 건축물입니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정관헌]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 등 화려하고 이색적인 느낌이 듭니다.
[정관헌]
다양한 건축재를 사용하여 지은 건축물로 서양풍의 건축 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 요소가 가미된 독특한 모습입니다.
한때 태조·고종·순종의 영정과 어진을 모시기도 한 곳입니다.
'정관헌'이란 솔밭과 어우러진 함녕전(咸寧殿) 등의 고 건축물을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입니다.
커피를 좋아하던 고종이 정관헌에서 자주 커피와 차를 즐겼다고 합니다.
[정관헌 내부]
정관헌은 개방형이기에 준비되어있는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바람과 여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정관헌 근처의 녹림을 지나면 덕수궁의 작은 연못이 나옵니다.
작고 아름다운 연못은 평소에 살며 느끼던 복잡함과 번잡함을 잊게 해주는 곳 같습니다.
연못 근처의 벤치에 앉아 숨을 쉬고, 책을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이런 소중한 공간을 1천원으로 즐긴다는 것이 과분하기도 합니다.
[덕수궁 연못]
연못 바로 옆에는 기념품가게이면서 동시에 카페인 건물이 있습니다.
덕수궁을 구경하지 않더라도,
궁안으로 들어와 카페에서 마실것을 산 후에 연못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연못과 카페]
[기념품 카페점인 돌담길]
[돌담길 실내]
[기념품]
이래 저래 덕수궁은 작지만 참 묘한 매력이 있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옛 건물과 유물, 근대화 건물과 카페가 어울려 종합 휴식공간인 것 같습니다.
위치도 서울의 중심인 시청 옆에 있으니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덕수궁을 본 후에 그 유명한 돌담길도 한번 걷고,
근처의 서울시립미술관도 들려보고, 정동길을 걸으면 참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예쁜 문과 중화전 내부]
[바람이 통하는 창살]
[덕수궁 수문장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중화전 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광명문 뒤에서 그늘에 앉아있는 사람들]
[미술관 옆 등나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덕수궁 나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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