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여행, 식당 ♠/전라 제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소, 전주사고 (全州史庫)

by 소이나는 2015. 7. 5.
반응형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소

전주사고

全州史庫






전주사고는 경기전(慶基殿)의 내부에 설치되었던 사고(史庫)로 '사고'란 쉽게 역사서 창고라고 보면 된다. 전주 한옥마을의 경기전에 들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전을 본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내게는 그것보다 전주사고를 들린 것이 더욱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에 이르게 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전주사고는 조선 전기 1439년 설치된 조선전기 4사고 중의 하나로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장소다. 조선왕조 실록은 한양, 충주, 성주의 사고와 함께 한 권씩 보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지켜낼 수 있었다. 유일한 실록은 14개월 만에 조정에 전달되어 다시 한양,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되었다. 전주사고의 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결국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만이 현재에 남겨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의로, 1,893권 888책. 필사본·인본.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실록은 정치의 잘잘못과 왕의 선악 및 신하들의 간위(奸僞) 등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고, 왕 또한 자신의 기록을 볼 수 없었다. 



실록은 권질(卷秩)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사회·풍속·천문·지리·음양·과학·의약·문학·음악·미술·공예·학문·사상·윤리·도덕·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이러한 가치있는 우리의 유산인 실록이 현존하게 해준 곳이 전주사고이기에 작은 책 창고인 전주사고의 의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용(御容)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는 전라도에 명해 실록각을 건립하도록 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성종 3) 봄,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 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을 건립하고자, 양성지와 더불어 경기전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전주사고는 경기전 안에 남아있는 기념적인 공간으로만 남게 되었다. 전주사고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건축물이고, 이곳이 그 역사적인 장소인가 할 정도로 왜소하였지만 경기전의 어느 큰 건축물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