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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식당 ♠/전라 제주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 된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Gyeonggijeon in Jeonju-city)

by 소이나는 2015.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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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인 된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Gyeonggijeon in Jeonju-city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진 웅장한 전동성당의 감동을 느끼고 나니 이제 주변으로는 지극히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전주의 유명한 여행지인 한옥마을이 전동성당 옆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전라 감영이 있던 풍남문을 지나 전동성당에 도착하면 그곳이 전주 한옥마을의 시작이 된다. 





전동성당의 맞은 편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 된 경기전이 있다.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고,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국보 제317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이성계 어진(왕의 초상화), 유형 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등의 유적이 있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있으며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모사본 대신 별도로 보관 중인 태조 어진을 제자리에 모시기를 희망하는 전주시민의 바람이 크다.

 


전주는 원래 이왕조의 시조인 신라 사공 이한 공의 발상지라 하여 전주 이씨 후손들이 조상을 받드는 성역으로 삼아온 터전이기도 하다. 



태종은 1410년에 완산(전주), 계림(경주), 평양 3개소에 태조 강헌대왕의 영정을 봉안하여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그후 세종 24년(1442)에는 전주에 경기전(慶基殿), 경주에 집경전(集慶殿), 평양에 영숭전(永崇殿)이란 호칭을 붙였다. 그러나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후 광해군 6년(1614)에 중건된 것이다. 한편 영조 47년(1771)에는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를 세워 이왕조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인 경주 김씨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현존하는 경기전 건물의 배치는 남쪽의 홍전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 양측에 문간체의 익사를 달아낸 내삼문에 면하게 되는데 그 통로는 전(塼)으로 바르게 깐 신도(神道)이다. 외삼문 내정 좌우로는 사고석 담장을 돌렸는데 동측에는 협문을 두고 포장도를 전기 신도에서 이곳으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내삼문 문간체에 양측으로 연결되는 담장에도 각기 1개소씩 일각문을 두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그 북쪽에 내·외삼문과 남북축을 맞추어 정전이 놓이고 그 동·서 양측에 익사 또는 행각이 연결되어 꺾이어 남향하다가 끊기어 그 나머지 부분을 담장으로 연결하여 폐쇄공간을 이루고 있다. 내삼문에서 바라본 정전 모습이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중앙으로는 전돌 복도가 나 있고 건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어 권위와 엄숙성이 돋보인다.



정전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인데 그 전면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 위에 첨각을 두어 마치 능침의 丁자각과 같은 평면을 하였다.



이 첨각기단의 동·서·남면에는 각 1개소씩 계단을 두어 전을 깐 포도와 연결되게 하였는데 남쪽에는 폭이 넓은 신도와 연결되고 동·서쪽은 폭이 아주 좁은 도로로 연결되어 한번 꺾이어 내삼문 쪽으로 향하였다. 정전은 전면에는 띠살 사분합을 달고 측면에는 전퇴 쪽으로 외짝의 띠살문을 달았으며 그외의 면은 심벽을 쳤다. 



공포는 창방과 평방 위에 배열한 내·외 3출목의 다포형식인데 측면에는 포작을 배열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또 전면의 첨각은 전·측면이 단칸으로 벽 없이 트였다. 공포는 주심포 형식이고 지붕은 전면에 풍판을 두고 정전 처마 밑으로 연결시켰다. 



정전 양측에 접속된 익사는 동서로 2칸씩 연결되다가 남북으로 뻗은 4칸짜리 행각과 연결되었는데 이들은 내정 쪽으로는 트인 열주를 보이고 외측으로는 벽체로 막혀 있다. 또 정, 익사, 행각의 기단을 약간씩 단차를 두어 위계를 나타낸 것 같다. 이 행각의 공포는 초익공 형식이다.



경기전의 건물배치에 대하여 상세한 그림으로 그린 ‘경기전, 조경묘도형’이 있는데 여기에는 현재 없어진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있고 서남쪽에 전사청, 동·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었으며 동북쪽에는 별전과 그 앞에 조산(造山)을 두고 있는 광역의 범위를 조영하였다.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 전화를 피해 아산과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어 다시 돌아왔으며 동학혁명 때는 위봉산성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한 왕이다. 과거 나라들의 성립과 폐망을 살펴보면, 개혁에 의한 나라의 성립, 공신들의 위세, 평화와 발전의 시기, 고인 물이 되어 썩어 들어가는 정치판과 내부 갈등, 외세의 침입과 정파의 분열, 그리고 새로운 나라의 재 성립이 연결된다. 고려 후기 또한 원 간섭기를 지나 정계 내부에서 시작된 개혁의 의지가 살아났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


정몽주가 주도하는 고려 왕조를 유지한 개혁파인 온건 개화파와 정도전이 주도하는 왕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의 급진 개화파 세력으로 나뉘고, 고려 말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인 이성게가 급진 개혁파에 뜻을 같이하였다. 급직 개화파인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나라, 조선왕조를 열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반란이고, 조선왕조 500여년의 나라를 세운 것을 보면, 개혁이다. 역사는 지나고 지나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고, 역사의 한 획을 그린 인물의 어진을 보고 있다. 생각해보니, 이름을 남겨도 남기지 않아도, 지구에서 떠난 생은 다를바 없지 않나하는 생각도 든다. 



경기전 주변의 높게 자란 나무들은 나와는 다르게 오랜 세월 제자리에서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았고, 또 지켜 볼 것이다. 어쩜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게 푸르른 나무 한 그루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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