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휴식의 기념 공원 - [대구 중구] 대구 2.28기념 중앙공원 (二二八記念中央公園), 국채보상운동공원(國債報償運動紀念公園) DaeGu-city : Feb. 28 Jungang Memorial Park, Gukchaebosang Memorial Park
by 소이나는201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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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휴식의 기념 공원
[대구 중구] [DaeGu JungGu]
대구 2.28기념 중앙공원 (二二八記念中央公園) [Feb. 28 Jungang Memorial Park] 국채보상운동공원 (國債報償運動紀念公園) [Gukchaebosang Memorial Park]
대구의 중심부인 동성로 근처에는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원이 두개 있습니다. 바로 2. 28 기념 중앙공원과 국채보상운동공원입니다. 모두 근`현대의 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입니다. 도시 안에 있는 공원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마음의 여유와 큰 힘을 줍니다.
대구 2.28기념 중앙공원 (二二八記念中央公園) [Feb. 28 Jungang Memorial Park]
2. 28기념 중앙공원은 2·28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여 만든 공원입니다. 2003년 12월 조성되었으며, 면적은 1만 4,279㎡입니다. 1960년 일어난 2·28학생민주의거는 부패한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여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민주화운동으로 3·15마산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만든 기폭제가 된 사건 입니다.
공원 부지는 예전에 대구중앙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으로, 2·28의거의 자취가 어려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대구초등학교가 만촌동으로 이전하면서 시민단체들이 <중앙초등학교의 공원화 및 공유지 녹색공간화 시민협의회>를 구성하여 도심근린공원을 조성케 하였는데 공원의 명칭은 2·28대구민주운동기념사업회와 중앙초등학교총동창회 사이의 논란 끝에 2·28기념중앙공원으로 결정되었다고 하는 군요.
대구 중앙로 주변,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공원에는 반원형 조형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앙분수대를 비롯해 조명이 설치된 3개의 분수대가 있고 산책로, 인공 실개천, 등의자 등 90여 점의 의자, 김윤식 시인의 시비, 광장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광장에서는 종종 공연이 펼쳐지곤 합니다. 28종의 나무 1,000여 그루와 20여 종의 관목류와 초화류 3만여 본과 잔디가 심어져 있어 도심 속 녹색공간으로서 쾌적한 휴식처를 제공하지요. 시내를 걷다가 다리가 아플때 잠시 쉬기에 좋습니다. ^^ 더운 대구에서는 특히 여름에 공원이 휴식의 공간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2. 28. 대구 학생의거 자세히 알기 (아래 더보기 클릭)
2.28학생의거
발단 [편집]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이자 일요일인 이날 당국이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사건 개요 [편집] 경북고는 일요일인 이날 등교지시를 내린다. 사유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사유였다. 대구시내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일요등교를 지시 한다. 사유는 토끼사냥, 영화관람과 같은 황당한 이유도 있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 전부 공산당"이라고 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 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결의문 [편집]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
운동 주체 [편집] 2.28 운동은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국채보상운동공원 (國債報償運動紀念公園) [Gukchaebosang Memorial Park]
국채보상운동공원은 면적 4만 3000㎡로, 1982년 도시계획상 동인공원으로 고시되었으며, 1997년 10월 10일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의 명칭은 한말에 고종 황제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담배를 끊고 금가락지를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며 벌인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IMF(국제통화기금)라는 외환위기를 맞아 신국채보상운동으로 이를 극복하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구광역시도시개발공사가 창사 10주년 기념사업으로 옛 대구여자고등학교와 대구시경찰서 자리에 4만 3000㎡ 규모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1999년 12월 21일 준공식을 갖고 모든 시설물을 개방하였지요.
255m 길이의 대왕참나무 오솔길과 소나무숲, 분수와 정자, 잔디광장, 향토 출신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시상의 오솔길, 선현들의 명언비로 꾸민 명언순례의 길 등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공원 곳곳에는 낙락장송 및 이팝나무·산벚나무 등 30종 1만 2300여 그루의 수목과 원추리·은방울꽃 등 5종 3만여 본의 꽃이 심어져 있습니다.
또한 무게 22.5t의 달구벌 대종이 있어 해마다 이곳에서 '제야의 종' 타종식을 거행합니다.
대구시민의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이용되며, 각종 전시회와 공연장으로도 활용되고도 있습니다.
*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 보기 (아래 더보기 클릭)
국채보상운동
1904년의 고문정치(顧問政治)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6월에 구채상환(舊債償還) 및 세계보충비(歲計捕充費)로 도쿄[東京]에서 200만 원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전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徐相敦)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金光濟) ·박해령(朴海齡)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는 김성희(金成喜) ·유문상(劉文相)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치하여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帝國新聞)》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설치, 한규설(韓圭卨) ·양기탁(梁起鐸)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 원 이상이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奪還會)가 결성되어 패물을 보상운동에 의연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大安洞國債報償婦人會)가 결성되어 《대한매일신보》에 자발적으로 의연할 것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이 외에도 서울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 ·대한부인회 ·원일부인회 등에서 보상금모집소(報償金募集所)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부산에서는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佐川里婦人會減膳義損會)를 조직하고, 진남포에서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三和港佩物廢止婦人會)를 결성하여 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사회계층 가운데 최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진주애국부인회(晋州愛國婦人會)를 결성하는 등, 서울 ·평양 ·진주 등지에서도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운동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유학중인 800여 명의 유학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였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으며, 송병준(宋秉畯)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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