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은 한옥 속을 치장하고... 운현궁
(雲峴宮, Seoul unhyeongung)
(흥선대원군의 집, 궁궐보다 큰 권세의 한옥집)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궁궐들이 있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있어 옛 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한옥집의 작은 궁궐인 운현궁이 있습니다.
한옥집으로 만들어진 이곳을 궁궐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이름은 궁으로 끝이 납니다.
아마도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지배하던 시절에 궁궐보다 더 큰 권세를 누린 이곳을 호칭하기위하여
그렇게 이름을 만들었나 봅니다.
운현궁 개장시간
ㆍ 하절기 개장시간 : 9:00 부터 19:00 / 매표마감 18:30 (4월초~10월말)
ㆍ 동절기 개장시간 : 9:00 부터 18:00 / 매표마감 17:30 (11월초~3월말)
※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관일입니다.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 휴관합니다.)
운현궁 입장료 : 어른 700원, 청소년 300원
운현궁 홈페이지 (http://www.unhyeongung.or.kr/)
운현궁은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입니다.
조선 말기의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출생하고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세도시대의 마지막 왕인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이 되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습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니 이 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고 합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곳은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는데 담장의 둘레만도 수 리에 달했다고 하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의 왕래를 쉬이 하기 위해 운현궁과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이 집을 지키던 사람들이 머물던 수직사가 오른편에 있고 그곳을 지나면 노안당이 있습니다.
운현궁 수직사 [雲峴宮守直舍 ]
수직사는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입니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군복을 입은 경비병 모형을 전시하였습니다.
운현궁 노안당 [雲峴宮老安堂 ]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이곳에서 인사정책·중앙관제복구·서원철폐·복식개혁 등
나라의 주요 정책들이 논의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납치됐다 환국한 후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하고, 임종을 맞은 곳도 이 건물입니다.
1994년 5월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노안당(老安堂)의 당호는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글귀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게 되어 흡족하다는 의미입니다.
[노안당 편액]
노안당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서 만들었다 하며, 처마를 이중으로 두르고 있는 보첨도 이 건물의 볼거리입니다.
몸채가 정면 6칸·측면 3칸 규모인 ‘T’자형 구조로, 4칸의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이어집니다.
지금껏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양반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옆으로 이어지는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고종이 명성황후 민씨와 가례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 입니다.
운현궁 노락당 [雲峴宮老樂堂 ]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1864년(고종 1)에 건립되었습니다.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짓게 한 노락당기(老樂堂記)에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안 된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몸채는 정면 10칸·측면 3칸이고 건물 왼쪽으로 1칸, 오른쪽으로 2칸이 더 있으며 남쪽의 행각과도 연결됩니다.
운현궁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졌을 때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했다고 하며,
잔치 등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가 삼간택 후 왕비수업을 받은 곳으로 전해집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안채로 쓰였던 이로당이 있는데, 민씨가 살림을 하던 곳입니다.
운현궁 이로당 [雲峴宮二老堂 ]
이로당은 노락당(老樂堂)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 기능을 담당한 건물로, 1870년(고종 7)에 건립되었습니다.
[이로당]
남자들이 드나들지 못하는 여자들만의 공간이며,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입니다.
밖에서 보면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듯 보이나 계단을 올라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가운데 중정이라는 ‘ㅁ’자형의 작은 마당이 마루로 둘러싸여 있는데 안채가 가지는 성격에 따른
폐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정면 7칸·측면 7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건물 서쪽 부분에 덧붙인 칸으로 인해 정면이 8칸으로 되어 있다.
건물 가운데에는 중정(中庭)이 있습니다.
운현궁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로당의 안주인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였습니다.
[이로당 뒤편]
[이로당과 운현궁 뒤편에 있는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쪽의 운현궁 양관 (이준의 저택)]
이로당을 나서면 앞으로 작은 기념관이 있어
흥선대원군이 주장했던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등을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물전시관]
[흥선대원군의 모습]
흥선대원군은 누구나 아는 인물입니다.
쇄국정책으로 특히 많이 알지만, 개화기 시대에 여러번 재집권을 하며 여러 일을 했습니다.
[개화기] 2. 흥선 대원군 (이하응, 호포법, 동포제, 로드 암허스트호, 척화비, 오페르트 도굴,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박해, 당백전, 경복궁, 어재연 장군, 외규장각, 어재연 장군기) ☜ SOY 한국사 보기 클릭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 행세를 하여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면서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아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승하하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하여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민생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고 원납전(願納錢)을 강제로 징수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천주교도 박해를 비롯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집함으로써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초래하는 등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손 준용(埈鎔)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운현궁]
짧은 시간이면 운현궁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옥아래 앉아 바람을 즐기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관람뿐아니라 공간을 이용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위에 링크한 운현궁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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