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입구를 지키던 갑곶돈대
강화도 갑곶돈대
江華 甲串墩
Gapgot Dondae in Ganghwa island
갑곶돈대
갑곶돈대
건립시기·연도 | 1679년(숙종 5) |
규모(면적) | 4만 5339㎡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306호 |
문화재 지정일 | 1984년 8월 13일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40 |
관람요금 : 어른 900원
관람시간 : 09:00 ~ 18:00 (연중무휴)
문의전화 : 032-930-7076
주 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18
초지대교를 넘어 만났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강화도로 들어가는 두개의 대교 중 남쪽의 초지대교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가 초지대교 옆의 초지진을 둘러보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덕진진과 광성보를 본 후에 북쪽으로 향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북쪽의 다른 다리인 강화대교 옆의 갑곶 돈대를 둘러 보았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자리 잡은 첫 유적지가 갑곶돈이다.
역사와 함께 공원이 되어진 갑곶돈대
양헌수 장군
갑곶돈대는 초지진, 광성보 처럼 요새라는 명칭을 받지 못하고 단지 '돈대'라는 명칭으로 남아있다.
돈대라는 것은 경사면을 절토(切土)하거나 성토(盛土)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擁壁)으로 받친 부분을 말하는데, 본디 분수·연못·화목(花木) 등이 조성되는 정원시설로서의 것과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춘 방위시설로서의 것이 있다.
위에 소개한 광성보에는 손돌목 돈대와 용두돈대가 있어 광성보를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갑곶돈대 또한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강화도에서 육지와 가까운 돌출형 구릉에 위치하여 강화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에 옮겨 몽골과 줄기차게 싸울 때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조선 인조 22년(1644) 강화의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돈대로 상륙하여 강화성, 문수산성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같은 해 10월 13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주하였다.
양헌수 장군은 강화도 남쪽 해협을 지킨 어재연 장군과 함께 강화도를 지킨 명장으로 남아 있다.
어재연 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순국을 하였지만 양헌수 장군은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병마사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한다.
우리 선조의 생명으로 지킨 이 곳은 지금은 공원처럼 시설이 꾸며있어 부담 없이 산책을 할 수 있다.
갑곶돈대의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금속활자 중흥비이다.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한 고려인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알리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아무래도 강화도가 몽골과의 항쟁을 위해 고려가 천도를 하였고, 고려의 진정한 수도인 개성은 남한의 지역이 아니기에, 강화도에 이러한 비석을 만들게 되었나보다.
그리고 금속활자 중흥기념비 옆으로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있다.
비석군
이러한 비석군은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의 영세불망비 및 선정비와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禁標), 삼충신(三忠臣)을 기리는 삼충사적비 등 총 67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석인 금표는 1703년(숙종 29년) 강화유수부 앞 등지에 세웠던 것으로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비석의 맞은 편으로는 건축물이 하나 보이는 데 그곳은 강화 역사관이다.
강화 역사관
강화역사관은 석기 시대부터 고려·조선·근현대에 이르는 강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모두 4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석기 시대부터 이어진 선조들의 생활 흔적, 팔만대장경 제작 모습 등의 문화 전시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운요호 사건에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현대에 이르는 강화의 역사가 망라되어 있다.
강화를 찾는 이라면 한번은 반드시 들러 보아야 할 곳으로사적 제306호로도 지정되어 있다.
역사관를 지나 강화 해협 쪽으로 향하면 갑곶돈대의 성곽이 보인다.
갑곶돈은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의 유래는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돈대 안에는 조선 시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갑곶돈대에 전시된 대포에는 홍이포라는 것이 있다.
홍이포(紅夷砲)는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군대에서 사용하던 대포 중의 하나인데, 유럽사람들이 사용했던 화포라고 하여 "붉은 오랭카의 화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명나라를 통해 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의 길이는 대개 250cm 정도, 구멍의 지름은 대개 10cm 정도, 무게는 3톤이다.
홍이포는 700m 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맞출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위에서 말한 몽골과의 항쟁, 병인양요 말고도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다(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이곳으로 상륙한 다음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일명 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유적이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서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복원하고 그 뒤로 계속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갑곶돈의 성벽을 따라 강화해협을 바라보다 좀더 좋은 경치를 즐기기 위해 이섭정에 올랐다.
이섭정(利涉亭)은 1398년(조선 태종 7) 강화부사 이성이 세웠으나 무너진지 오래되었다가 1976년 강화 국방유적 복원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갑곶돈대 안에 팔각의 2층 정자를 세워 이섭정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다.
이섭정
이섭정에 올라 유구한 세월을 담은 소금으로 된 강을 바라보며 역사에 남았던 무수한 전쟁을 떠올리며 인간의 씁쓸한 뒷 모습을 떠올리며..
발길을 뒤로했다.
강화도의 갑곶돈대는 화려한 모습보다는 오랜 역사의 자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었다.
적은 백성과 작은 땅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우리의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장소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