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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긍심을 일께워주는 강화도 고려궁지와 강화 외규장각(江華 高麗宮址, 外奎章閣, Palace site of Korea, OeGyujanggak in Ganghwa island)

by 소이나는 201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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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긍심을 일께워주는 강화도 

고려궁지와 외규장각




고려(高麗)... 

한번도를 꼬레아로 부르게 만들었던 우리 선조들이 지내던 국가의 이름... 어지럽던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재편성하고, 우수한 문화로 작지만 강했던 나라... 그리고 몽골의 침입으로 무릎을 꿇으며 아파했던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곳에서 고려의 역사적인 장소들은 많이 남아있지만, 진정한 수도인 개경이 북한에 있기에,  남한에서 고려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으려 한다면 강화도로 와야할 것이다.

강화도는 몽골과의 항쟁을 위하여 무신정권이 천도를 하여 오랜 기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던 곳이다.




江華 高麗宮址


승평문


 정번호

 사적 제133호

 지정일

 1963년 06월 10일

 수량/면적

 7,534㎡



어른 입장료 : 900원

관 람  시 간 : 09:00 ~ 18:00

문          의 : 032 - 9930 - 7078

소    재   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북문길 42(강화읍 관청리 743-1)



강화도에서 고려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가장 먼저 들려보아야 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고려 궁지이다.



이 곳은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몽골은 고려를 총 8차례에 걸쳐 침입을 하였고, 고려는 끈질긴 항쟁을 하였으나, 수도를 섬인 강화도로 옮긴 후에 한반도의 백성은 몽골에게 유린당하고 황폐해져 결국 화의를 맺게 된다.


고려궁지 건립 연혁


고려궁지


1244년(고종31) 8월 : 이미 건립되어 있었던 강안전(康安殿)을 고쳐서 수리하고 황색비단으로 후벽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

1245년(고종32) 3월 : 견자북리(見子北里)에 있던 8백여 호의 민가가 화재를 당했는데, 견자산 중턱에 있던 연경궁(延慶宮)에까지 불이 번져서 소실

1246년(고종33) 5월 : 고종이 수창궁(壽昌宮)으로 이동

1250년(고종37) 1월 :  승천부(昇天府)의 임해원(臨海院) 옛터에다가 궁궐을 조영(造營)

1253년(고종40) 6월 :  최항(崔沆)이 궁궐의 서에 구요당(九曜堂)을 건립

1259년(고종46) 2월 :  마니산에 이궁(離宮)을 창건

            같은 해 4월 : 삼랑성과 신니동(神泥洞)에 가궐을 짓도록 명령

1264년(원종  5) 5월 : 가궐을 창건

           같은 해 6월 : 삼랑성 가궐이 완성




고려 궁지는 정문인 승평문(昇平門)을 지나 고려궁지로 들어갈 수 있다. 


고려궁지로 들어가며...


강화 고려궁은 처음부터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 궁궐이지만 유구한 세월이 지나며 소실되어 지금은 몇채의 건축물만이 남아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은 궁궐이었다기 보다는 관아 정도의 크기로만 남아 있어 궁지가 아담하게 느껴진다.



이 궁은 1270년송도로 환도할 때에 모두 허물어졌는데, 조선시대에도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여 1631년(인조 9) 고려 옛 궁터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명위(明威軒)



명위헌


전각과 강화유수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고, 현재 관아건물인 명위헌(明威軒)·이방청(吏房廳) 등이 남아 있다. 



명휘헌이라는 현판이 붙은 곳은 현윤관이라고 하는데 현윤관은 조선 영조 45년인 1769년에 크게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글씨는 당시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尹淳)이 썼다.



명위헌은 강화유수부동헌으로 조선시대에 관아였다. 

강화지방의 중심 업무를 보던 동헌은 오날의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곳이다.



동헌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며, 2층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꼴의 주초석을 놓고 네모로 가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이방청(吏房廳)



이방청은 가화유수부이방청이라고도 하는데 고려궁지의 좌측 아래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유수부 안에 있는 6방인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건물 중에 이방청이인 곳이다.



이방청은 조선 효종 5년(1654년)에 유수정세규가 세웠고, 조선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쳤다.



1층의 기와집으로 e자형이며, 지붕 옆면이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져 있다.



고려 궁지의 건축물들이 계속 되는 소실에 1654년에 세운 이방청도 대대적인 보수가 여러 번 거듭되었고 1977년에도 크게 보수하였다.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 정화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고려궁지 진입로 옆에 있었던 강화동종을 옮기고 경역에 보도를 설치해 경내를 조경했지만 아직도 궁지의 빈터가 많이 남아 있어 아쉬움을 갖게 한다.








외규장각 (外奎章閣)



고려궁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이는 데, 그곳이 외규장각이다.


외규장각


외규장각은 1782년 2월 정조(正祖)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종(유일본 30종 포함)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에 조선시대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대학교는 1991년에 정부에 도서 191종 279권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1992년에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목록을 프랑스에 전하여 도서 반환을 요청했다. 



1993년 9월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경부고속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테제베(TGV)가 따 내기 위한 의도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1권을 가지고 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는 약속과 달리 반환되지 않았고 2000년 10월 다시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을 '대등한 문화재 교환 전시' 형식으로 2001년까지 한국에 반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반환 협상이 연기되거나 프랑스 측에서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의 힘을 빌리더라도 무조건 반환시켜야 한다는 역사·학술·시민 단체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확산되는 등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고, 2011년 6월 11일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규장각이란 곳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가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에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이다. 



이후 1782년에 강화도 행궁(行宮)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왕실의 중요한 자료들을 옮겨서 보다 체계적이며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임금이 보던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띄게 되어 이곳을 ‘규장외각(奎章外閣)’, 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행궁이 많이 소실되어서 그런지 고려궁지의 중앙쪽에 위치하고 있다.



외규장각에는 어보(御寶), 교명(敎命), 어책(御冊), 어필(御筆), 의궤, 지도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보관되게 되었으며, 철종 연간에 파악된 외규장각 소장 도서는 약 6천권 정도에 이르렀다.



외규장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서적은 의궤이다.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림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궤의 제작 배경에는 의식이나 행사의 모범적인 전례(典例)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있는 한편 사업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후에 참고하여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뜻이 있었다. 

이처럼 의궤는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로서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문화권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국가의 통치 철학 및 운영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의궤는 조선의 건국 초기인 15세기부터 만들어졌으나 현재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만 남아 있다. 

17세기 이후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었고, 18세기에 들어오면 그 종류와 숫자가 더욱 늘어난다. 

의궤는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과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되어 5~9부 내외가 제작되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1부외에 나머지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봉화 태백산(奉化 太白山), 무주 적상산(茂朱 赤裳山), 평창 오대산(平昌 五臺山), 강화도 정족산(江華島 鼎足山) 등의 사고에 보내졌다. 

통상 어람용은 1부를 제작하는데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이라는데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외규장각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진다.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빈터로 남아 있는 궁지의 지금의 모습을 보니 지려하는 태양의 모습과 닮아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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