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華島 草芝鎭
개화기 시대의 격전지, 강화도 초지진
Chojijin Fortress in Ganghwa island
江華島 草芝鎭, 江華草芝大橋
강화도 초지진
육지에서 초지대교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이 초지진이다.
강화 초지대교
강화초지대교 [江華草芝大橋]
강화도로 들어가는 다리는 북쪽에 있는 강화대교와 남쪽에 있는 초지대교 두 곳이 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초지대교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가 초지대교를 바라보니 그 모습이 제법 훌륭하다.
2002년 8월 28일 개통한 초지대교는 교각 우물통공법으로 만들어져,
총 590억 원의 사업비가 들었다고 하고, 4차선 교량으로, 하루에 3만 5000대의 교통량을 처리할 수 있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초지대교
교각(橋脚)은 12개이며, 아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각 건설공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빨라 이를 견뎌 낼 수 있도록 거대한 우물통공법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즉 강재로 제작한 우물통을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바다에 집어넣고, 콘크리트를 타설한 뒤 그 내부를 굴착해 바다 밑 암석에 2m 정도까지 심는 공법을 채택하였는데, 교각 지름은 16m, 높이는 30m, 무게는 5,000~6,000톤이다. 그 밖에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도 함께 건설되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경기도 부천시·김포시 등 수도권 서부지역 주민들이 기존의 강화대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차로 30여 분 빨리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고, 강화도에서 인천까지는 출퇴근이 가능한 1시간대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이 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해안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있는 덕진진(德津鎭)이 있고, 그 주위로 마리산 국민관광지, 화도면 철새도래지 등 관광명소가 많다.
초지대교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가장 먼저 맡이하는 곳이 초지진이다.
유 형 | 유 적 |
시 대 | 조 선 : 1716년(숙종 42) |
성 격 | 국방유적, 고지명 |
건립시기·연도 | 1716년(숙종 42) |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25호 |
문화재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
초지진에서 바라본 염하
강화도는 고려시대 몽골과의 항쟁으로 많은 군사요충지가 있는데, 초지진은 고려때 만들어지지 않고 조선시대 후기인 1716년(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 후에 개화기 시대인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적지로 유명하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 시절 천주교인 박해로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로 왔고, 강화도의 갑곶진, 정족산성 등에서 격전을 치루었다.
그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프랑스 군이 강탈해 가기도 했다.
신미양요는 대동강에서 미국 제너널 셔먼호가 격추 당한게 원인이 되서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을 때에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고,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일본의 운요호 사건 이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염하와 초지진
초지진은『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軍官)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사적 제225호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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