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광성보
몽골에의 대항에서 신미양요의 격전까지... 강화도 광성보
廣城堡, Gwangseongbo in GangHwa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쌍충비각,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광성돈대
광성보 안해루(按海樓)
廣城堡
유 형 |
유적 |
시 대 |
조선/조선 후기 |
성 격 |
성곽시설, 진보 |
건립시기·연도 |
1679년(숙종 5) |
규모(면적) |
6,102㎡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27호 |
문화재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
관람요금 : 어른 개인 1,100원
관람기간 : 0:00 ~ 18:00
내비게이션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
전화번호 : 032-930-7070
강화도로 연결하는 두개의 다리인 북쪽에 있는 강화대교와 남쪽에 강화초지대교가 있다.
경기도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를 지나는 염하강을 건너는 다리이다.
염하강은 강화해협이라고도 부르는데 물살이 빨라 육지에서 섬으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강화해협
그래서인지 강화도의 해협에는 초지진, 덕진진, 용진진, 곱곶돈대, 월곧돈대, 숙릉돈대, 화도돈대, 오두 돈대 등 많은 요새들이 있다.
광성보도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 중의 하나로 육지에서 강화대교 통해 강화도로 들어와 해협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면 초지진, 덕진진을 지나면 도착할 수 있다.
초지진은 낮은 구릉에 만들어진 작은 요새이기에 격전이 치루어진 곳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아담한 요새이다.
초지진에서 차를 타고 5분 정도 북쪽으로 향하면 도착하는 덕진진은 초지진에 비해 요새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고,
포를 쏘던 돈대도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치가 가까웠던 만큼 초지진과 덕진진은 유기적으로 연대를하여 침입을 막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덕진진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5분 정도 가면 이곳 광성보가 나온다.
광성보는 초지진, 덕진진 과 같은 '진압하다'는 한자인 '진(鎭)'에서 '작은 성'이란 뜻인 '보(堡) '를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진보다 규모가 더욱 큰 요새이다.
광성보의 입구에는 사적 제227호인 '안해루'가 있는데, 바다를 누르다는 뜻의 누각의 현판을 보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해루 (按海樓)
안해루의 홍예문을 통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침략을 받은 곳이 강화도인데,
강화도를 역사에서 떠올린다면 크게 두번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몽골의 침입에 최씨 무인 정권이 수도를 강화로 천도한 것이고,
두번째는 개화기 시절에 제국 열강인 미국과 프랑스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이다.
광성보는 이 두 사건과 모두 연관이 되어 있는 곳이다.
광성보에서 바라본 염하강
광성보의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해협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였는데,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 때(1679)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날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당시 미군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더너 것에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가 세워졌다.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또한 어재연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신원을 알 수 없는 51인의 시신을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순절을 기리고도 있다.
신미순의총
또한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쌍충비각이 있다.
쌍충비각 (향토유적 제10호)
어재연 장군 (魚在淵 )
어재연 장군의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를 쓰고 있고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하여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고,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바로 이곳인 광성보에 있는 둥근 포대인 손돌목(孫乭項)에 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2007년에는 어재연 장군기가 미국으로 부터 한국으로 돌아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냥 반환이 아닌 장기 반환 형식으로 이루어져 아쉽기도 했다.
언덕 길을 따라 무명용사비, 쌍충비각, 신미순위총을 지나면 높은 곳에 동그란 모양의 성벽이 보이는데 그곳은 포대였던 손돌목돈대이다.
손돌목돈대는 일명 손석항돈대라고도 하며, 용두돈대에 못미쳐 구릉 정상부에 쌓은 돈대이다.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손돌목돈대
이 돈대는 조선 숙종(1674-1729, 재위)때 축조된 돈대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처가 있었다.
손돌목돈대는 성곽 길이가 108m이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손돌목돈대에서 해협쪽으로 내려가면 해협으로 튀어나온 장소에 돈대가 나온다.
해협쪽으로 길게 늘어선 성벽이 인상적인데, 돈대로 향하는 길은 다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곳을 용두돈대라고 하는데,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로, 1679년에 세워졌다.
용두돈대
용두돈대 중앙에는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 선생이 짓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용두돈대는 물 위에 떠있는 듯한 느낌으로 사방으로 해협을 바라 볼 수가 있어 수려한 경치를 즐길 수도 있다.
1998년에는 해변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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