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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궁궐의 기본, 경복궁 [景福宮, GyeongBok palace]

by 소이나는 201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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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궁궐의 기본, 경복궁 [景福宮, GyeongBok palace, GyeongBokGung]



우리 나라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이 있지만,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바로 경복궁일 것입니다.
전에 만원짜리의 뒷면에 경복궁의 경회루가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광화문 뒤에 있어 더욱 한국에서 궁궐은? 하면  여지 없이 경복궁이라고 할 만합니다.

지하철 3호선에 경복궁역이 있기에 찾아가기도 쉽습니다. ^^


경복궁 http://www.royalpalace.go.kr/


생각보다 구경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2~4시간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천히 살펴보면 오랜 시간을 볼 수 있지만, 짧게 후딱 살펴보고 나올와도 괜찮습니다.




경복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습니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습니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습니다.
 

 입장료는 3천원입니다.
궁궐가격에서는 가장 비싼 가격입니다.
창덕궁도 3천원이고, 창경궁은 1천원, 경희궁, 덕수궁은 그냥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는 시간은 창덕궁, 경복궁, 창경궁이 비슷하고,
덕수궁과 경희궁은 작은 편이라 금방 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을 넘어 바로 뒤에 있는 흥례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경복궁에는 궁을 지키기 위해 궁성이 있습니다.
궁성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이룹니다.
경복궁의 궁성은 1398년(태조7)에 동쪽, 남쪽, 서쪽이 조성되었으며, 이때 궁성문인 건춘, 광화, 영추문도 세워졌습니다.
이 보다 뒤에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북문인 신무문도 갖추어졌습니다.
궁성은 거의 네모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전면 좌우 끝에는 각루(角樓)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에도 일반 백성들로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종 년간 경복궁 중건 시 궁성이 새 단장을 하게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앞부분이 헐려 나가고 또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습니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 쌓은 상태입니다.
그 궁성 안에 경복궁이 있는 것이지요.

경복궁 문 앞에서는 궁을 지키는 수비대가 있습니다.
다른 궁궐에는 이렇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다른 궁궐에는 없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의 상징인 궁궐이 경복궁이라 그런가 봅니다. ^^




덥고, 추운 날씨에도 늘 이렇게 궁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형식적이고 관광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언가 든든해 보입니다. ㅎㅎ



그렇게 궁궐 수비대가 있는 흥례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흥례문>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입니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흥례문 중앙에서 경복궁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근정전이 차례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정전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근정문 뒷편의 사정전과 강령전, 교태전도 모두 일자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경복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은 한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하면서
원래의 위치가 아닌 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다시 그 위치를 일자로 바꾸기 위해 광화문이 공사중입니다.
빨리 공사를 마치고 멋진 광화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을 지나면 가장 큰 건물인 근정전이 나옵니다.



<근정전 - 국가의식을 치르고 신하들의 하례와 사신을 맞이하던 곳>


근정전은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하던 곳으로, 1
395년(태조 4)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중건(重建)한 것입니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지요.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입니다.
기단의 4면은 석란(石欄)으로 둘려지고, 전후좌우면에는 쌍봉운무늬[雙鳳雲文]를 조각한 돌계단이 있어 화강암판을 깐 뜰과 연결되며,
정원 좌우에는 정1품 이하의 품석(品石)을 세웠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습니다.

중앙간 북쪽 후면에 방형(方形)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御座)와 그 뒤에 오악일월(五嶽日月)을 그린 병장(屛障)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두공(枓栱  )은 상·하층이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이며
내출목에서는 수설(垂舌)이나 앙설(仰舌)이 구름무늬처럼 새겨진 운궁(雲宮)으로 되었고,
살미[山彌] 표면의 초화각무늬[草花刻文]나 단청(丹靑)·금색쌍룡(金色雙龍)과 조화되어 화려한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장식적 의장(意匠)을 마음껏 담고 있어, 다소 과식(過飾)의 감이 있기는 하나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입니다.

근정전 주변에 작은 조각들도 많이 있습니다. 용, 해태,말, 쥐 등 궁궐을 지키는 멋진 조각들이 근정전의 멋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근정전 서편으로는 경회루가 있습니다.

<경회루 - 외국사신 접대, 연회장소>

경회루는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습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습니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石橋)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습니다.

경회루는 중루(重樓), 팔작지붕의 2익공(二翼工) 집으로, 누마루를 받는 48개의 높직한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외진주(外陣柱)는 방형석주(方形石柱)이고 내진주(內陣柱)는 원형석주(圓形石柱)입니다.
기둥 둘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졌는데 그 체감률이 경쾌하여 조화적이지요.
이 석주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중루를 만들었는데, 마루 밑은 우물천장을 하여 단청을 하였고, 위쪽 마루는 외곽 퇴간부분이 가장 낮고,
그 다음 고주(高柱)와 내고주(內高柱) 사이가 1단 높으며, 내고주 안의 깊은 오간(奧間)이 또 1단 높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연회를 베풀 때 품계(品階)대로 앉는 자리 구분이지요.

고주와 내고주 사이에 하방을 돌리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서 문을 내리면 방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마루 끝 바깥 기둥에 낙양각이 장식되고 기둥 밖으로 계자난간(鷄子欄干)이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고,
이 난간은 시각적(視覺的)으로 높은 기둥을 짧게 보이도록 끊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처마는 겹처마지붕이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가 설치되었고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이 설치되었습니다.

용마루를 높여 웅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지붕의 물매가 급하고,
측면 지붕에는 큰 합각의 삼각형이 생겼는데 건물 평면이 커서 시각적으로 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습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가 화려한 단청의 집 그림자를 연못 속에 드리우면 그 영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또한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입니다. ㅎㅎ

경회루와 근정전 옆에는 수정전이 있습니다.

<수정전 - 고종때는 침실, 세종때는 집현전이 있던 장소>

수정전은 경복궁 근정전 서쪽에 있고, 넓은 월대(越臺) 위에 세워졌습니다.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익공식(翼工式) 팔작기와 지붕으로 지붕 마루에는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이 얹혀 있습니다.
세종 때 집현전으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에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재건 당시에는 주변에 약 200칸의 행각(行閣)과 전각(殿閣)이 있었는데, 1910년 이후 일본인에 의해 모두 헐렸는 군요. ㅠ.ㅠ 

좀더 서쪽을 보면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태원전 -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던 건물>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입니다.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습니다.
이곳은 궁 안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고 합니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새건물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건물은 제사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원전을 지나 경복궁의 북쪽으로 향하면, 건청궁이 있습니다.

<건천궁 - 고종 내외가 거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별궁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곳>



건천궁은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해에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되기도 합니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습니다.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습니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洋官)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습니다.

건청궁은 이처럼 신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산실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 의지가 외세에 의하여 꺾인 곳이기도 합니다.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건청군 안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습니다.   ㅠ.ㅠ
명성황후의 시신은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습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건청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습니다.

광복 후 건청궁 자리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워졌고,
동쪽에 명성황후가 난을 당한 곳이라는 뜻의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는 표석과 함께 당시의 참상을 그린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가
2007년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건물 배치는 크게 장안당(長安堂)·곤녕합·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과 그 안에 만들어진 섬과 향원정(香遠亭) 등이 있습니다.

또한 경복궁 중앙 쪽에는 자경전 등이 있습니다.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입니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연루의 동측으로 협경당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경전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된 만세문이 있습니다.



또한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입니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습니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습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습니다.

건청궁과 자선당 사이에는 향원지와 항원각이 있습니다.

향원정은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1·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습니다.다.
공포는 내외일출목(內外一出目)이며, 일출목의 행공첨차에 소로[小累]를 두었고, 외목도리(外目道里) 밑에 장설(長舌)을 받쳤습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에 별다른 장식은 없습니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궁궐을 보니 기분좋게 나올 수 있습니다.^^*




<문고리?



<굴뚝 등>


<향로 등>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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