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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어울리는 조화, 안동 병산서원 [安東 屛山書院] (Byeongsanseowon in Andong-city, Byeongsan Private Confucian Academy)

by 소이나는 201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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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 屛山書院


자연과 어울리는 조화

Byeongsanseowon in Andong-city,

Byeongsan Private Confucian Academy





병산서원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시   대

  조선 중기

 종   목

  사적 제260호

 지정(등록)일

  1978년 3월 31일

 면   적

  22,620m2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문의전화

  054-858-5929

 병산서원 홈페이지

  www.byeongsan.net

 소유자(단체) 

  병산교육재단

 관리자(단체)

  안동시





 가는 방법

 대중교통

 안동버스터미널, 안동역 맞은 편에서 46번 버스(10 : 30, 14 : 50, 시내버스가 하루 2회) 이용 (소요시간 : 약 60분)

 자가용

 서안동 I.C에서 내려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 방면으로 이동하다가 하회마을로 우회전하여 하회마을 방면으로 가다가 병산서원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된다.

(서안동 I.C에서 약 15분 소요)





병산서원


안동의 유명한 여행지인 하회마을을 향해 가다보면 갈림길이 하나가 나온다.

한 쪽은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한 쪽은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이다.

도로도 잘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낮은 산길을 지나 낙동강을 따라 좀 더 들어가면 한적한 병산서원이 나온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병산서원은 화산의 동쪽 기슭에, 하회마을은 그 반대쪽에 있다.

'병산'은 강원도 산간 지방을 돌아 나온 낙동강 물줄기가 모처럼 넓게 트인 곳을 만나 센 물살을 만들며 항아리 모양으로 돌아 나가는 강변에 병풍[屛]처럼 산이 펼쳐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


서원은 병산이 기암 벼랑 밑으로 흐르는 낙동강물에 깊게 그림자를 드리운 절경을 마주보며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정갈하게 자리 잡은 각 건물들의 조형미가 빼어나 안동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라 할 수 있다. 

류성룡의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 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병산서원은 안동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류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로,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냈다.



류성룡과 관련된 병산서원은 원래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으로  풍악서당으로 불렸는데,

이 서당은 읍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러워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류성룡이 조선 중기인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와 제자들을 길러냈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존덕사를 세우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셨다. 

이 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7년 재건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지난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 시대인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해내었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 꼽힌다.

2010년 8월 1일,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병산서원은 서원 건축의 백미라 불리는데, 건물의 배치를 통해 병풍 속 그림처럼 주변의 풍광을 끌어들인 건축술은 놀랍기 그지없다. 

위와 같이 서원 앞쪽의 화산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여 병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복례문을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계단 위에 자리 잡은 만대루가 보이고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존덕사, 서원의 중심으로 학생들이 강의를 듣던 입교당과 책을 인쇄하던 장판각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동재와 서재 등이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며 들어서 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세월이 흘러 희끗희끗한 청동색 반점의 기와지붕과 퇴락한 짙은 갈색 나무 기둥들로 찾는 사람들에게 회고(懷古)의 정을 불러일으키며 탄성을 자아낸다. 

흔히들 한국건축의 특징을 주변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고 하지만, 그 조화란 이미 있던 자연 환경을 읽어내어 거기에 합당한 건축을 어떻게 잘 앉히고 배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병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 자체는 제향을 지내는 사당과 학문을 돈독히 하며 심신을 정진하는 강당, 재사 등 건물들로 되어 있어서 여타 서원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병산서원은 성리학적인 원칙에 바탕을 둔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러한 건물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빼어난 공간감을 보여주고 있다.



병산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면 마주하는 문이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克己復禮’에서 따온 듯한데, 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삼문 안쪽은 물건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서쪽 칸의 가마는 향사 때 제수를 운반하는 의례용 가마이다.


복례문


서원 정문(正門)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있고 맞은 편 한 단 높은 곳에 옆으로 기다랗게 만대루(晩對褸)가 서 있다. 

서원의 앞쪽에 위치한 만대루는 병산서원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대강당 역할을 하던 곳이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인용한 것으로, '병산의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서야 대할 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누 밑은 휘어진 자연 상태 그대로의 꾸불꾸불한 기둥이 받치고 있고, 2층 누마루에는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사방을 둘러쌌는데 벽은 두르지 않고 트여 있다.


병산서원 강당인 입교당에서 앞으로 내다본 전경, 만대루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면,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얽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는데,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7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라고 불리운다.

만대루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그것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극적인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 바로 나 자신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누마루


만대루 위층 누마루에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형성하는 정제된 공간은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유학의 꼿꼿하고 청청한 맥이 건물에 살아나 있는 듯하다.

이곳에 서면 한쪽으로는 병산과 낙동강이 펼쳐지는 주변 풍광을 다 끌어안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원 일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병산서원 앞의 풍경낙동강의 백사장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강당 건물인 입교당(立敎堂)이 서 있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번 추스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立敎]'는 뜻에 걸맞게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입교당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는 반칸 목을 퇴(退)로 개방하였으나,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앞은 좁은 툇마루를 내달아 언뜻 보면 대칭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비대칭의 구도로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하였다. 


병산서원 입교당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으로 대청의 전면은 창호나 벽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하여 만대루의 트인 공간 사이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병산서원은 입교당 앞뜰을 건물과 울타리 담으로 막아서 경내와 경외를 뚜렷이 구분하였지만, 만대루의 트인 공간을 통하여 시각적으로는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꾸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인 특이한 조원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서재도 각각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들였다. 

이 건물들은 남향하지 않고 동향 또는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강당을 향하도록 한 것이니, 서원이 지녀야 할 엄격성을 고려한 배치이다.

입교당의 앞마당은 가로 세로 12미터 내외의 마당이다. 안동 사대부 종가의 ㅁ자집 안마당을 보는 듯하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보편적 미감의 결과물이리라. 마당 동쪽에는 ‘동직재(動直齋)’, 서쪽에는 ‘장서실(藏書室)’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동·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동재는 고학년, 서재는 신참 유생이 사용하는 곳이다. 언뜻 보기에는 양쪽 입면이 비슷해 보이나 실은 엄격한 비대칭이다. 문살의 칸수도 틀리고, 퇴의 개방도 다르다. 한국 미의 특징 중 하나인 비대칭의 대칭이다.


동재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들어가면, 잘생긴 배롱나무가 심어진 언덕 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배롱나무는 서원 마당 곳곳에 심어져 있다. 

특히 복례문에 들어서서 만대루로 오르는 계단 앞의 화단과 사당 계단 양옆, 장판각 주위에 많다. 


배롱나무


사당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북벽에 유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유진(柳袗, 1582∼1635)을 종향(從享)하고 있다. 

사당은 강당과 함께 맞은편 병산을 향하고 있는데, 산봉우리를 마주 대하지 않고, 산 능선의 약 7부쯤 되는 곳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건물과 자연이 하나가 되게 하는 한국건축의 특성으로, 산봉우리를 마주보며 향하게 건물을 배치하는 중국건축과 차이를 이룬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신문에는 태극 문양을 그렸고, 길게 다듬은 기둥 초석에는 팔괘를 그려놓았다.


존덕사 출입문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빠져나가면 정면에 길고 높은 계단이 마주한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祀)로 오르는 길이다. 

사당은 문과 담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데, 단청이 칠해져 있는 문은 아무 장식이 없는 다른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삼문으로 된 신문(神門)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음력 4월과 10월의 첫째 정일(丁日)의 향사 때에만 열린다. 

장판각


존덕사 동쪽에는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서쪽에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전사청이나 장판각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촐한 집들이다.

장판각 앞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을 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얘기에서부터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져오던 나무이니 서원과 잘 어울린다. 

병산서원에 그밖에 별다른 조경시설이 없는 것은, 주변 풍광 자체가 뛰어나서 보기만 해도 자연을 가득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한가운데 들어감으로써,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자연을 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동재와 고직사 사이고직사로 가는 문고직사의 지붕


병산서원에는 정문말고도 옆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그 옆집이 바로 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사는 고직사이다. 

지금은 서애의 후손이 살면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이 집도 꽤 오래된 집이라 민가로서 해묵은 맛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직사


서원을 올라가면서 건물을 보았고, 건물에 앉아서 직접 이곳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사람의 눈으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를 더할 것이다.

병산서원의 건물들은 겉에서 보면 매우 무심히 지어진 듯 보이지만 실은 기거하는 사람의 눈이나 마음을 곳곳에 담고 있었다.

서원 입구 돌담 모서리에 있는 단정한 뒷간과는 달리 고직사 앞에는 짚과 대나무로 둘러친 야외용 뒷간이 있어 눈길을 끈다. 

서원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사용하였을 것이라 여겨 ‘머슴뒷간’이라고도 부른다.



오후 늦은 시간에 병산서원을 들려 둘러보니 해가 서산으로 지며 노을이 화산을 감싼다.


복례문에서 바라본 풍경


병산서원에서 나와 낙동강의 백사장을 걸으니 바닷가의 백사장인듯 고운 모래가 있고,

잔잔히 흐르는 낙동강은 옛 인들의 마음을 담고 담대히 흐르고 있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智者樂水)라.”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더니, 산 좋고 물 좋은 병산서원에서 공부했던 유생들은 모두 어질고 지혜로웠을까.

지금도 풍광이 아름다운데, 그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절집 경치가 너무 아름다우면 고승이 안 나고, 서원 경치가 너무 좋으면 공부가 안 된다는데, 이곳 유생들은 공부가 잘되었을까. 아니면 산천경개의 빼어남에 취해 학문의 열정을 날려 보냈을까.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산수가 없으면 감정을 순화하지 못하여 사람이 거칠어진다. 

산수란 멀리서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큰 포부를 갖게 하여 인물을 만들어내고, 가까이 대하면 심지를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서원이 산수경치가 빼어난 곳에 위치한 것도 이런 연유에가 아닐까.

유유히 흐르는 낙동 강물 위로 병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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