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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굽이 흐르는 안동 하회 옥연정사 (河回 玉淵精舍, Ogyeonjeongsa Pavilion in Hahoe (Andong), Hahoe Ogyeonjeongsa)

by 소이나는 201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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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回 玉淵精舍


낙동강 굽이 흐르는 안동 하회 옥연정사 

河回 玉淵精舍, Ogyeonjeongsa Pavilion in Hahoe, Hahoe Ogyeonjeongsa



하회 옥연정사


옥연정사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豊川面)에 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세운 정사]



 성  격 

 생활유적, 주택, 정사

 지정종목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지정일

 1979년 01월 23일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솔밭길 86(광덕리 20)

 시대, 연도

 조선 1586년

 크  기

 살림채(정면 4칸, 측면 2칸), 별당(정면 3칸, 측면 1칸반)

 홈페이지

  옥연정사 www.hahoehouse.co.kr





 가는 방법 

 승용차 이용

 ▷ 내비게이션 이용시 옥연정사 검색

 ▷ 서울 → 서안동 IC   하회마을 입구   풍천면사무소    광덕교    화천서원  → 옥연정사

 ▷ 풍천면사무소에서 광덕교를 지나 좌회전 후 500m 정도

 버스 이용

 안동 시외버스 터미널    맞은 편에서 76번 시내 버스 이용

 기차 이용

 안동역     맞은 편에서 76번 시내 버스 이용



안동의 하회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부용대에 오른 후에 산에서 내려와 화천서원을 지나 낙동강 옆으로 흐르고 있는 옥연정사로 향하였다.

강 넘어에 있는 하회마을에 비해 한적하고 조용한 산 아래 길을 따라 낙동강으로 향하니 어느 시골에서 많이 본 듯한 옛 한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사(精舍)라는 이름이 붙은 것 처럼 서원의 분위기라기 보다는 집의 분위기가 많이 나는 곳이다.

그래도 정사라는 곳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집이나 정신 수양을 위한 곳에 붙여지고 있고,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서원과는 달리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지만, 서당의 모습도 하고 있더 독특한 느낌이 든다.



화천서원은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 선생을 모시는 서원이라면, 옥연정사는 류성룡과 관계가 있는 정사이다.

1586년(선조 19) 화천(花川) 건너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세운 건물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류성룡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작은 서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걱정하던 중 탄홍(誕弘) 스님이 10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하여 완공하였다고 한다.


옥연정사를 지은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 들어보았을 유명한 학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를 쓰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인으로,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유성룡의 고향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다. 

대사헌·경상도관찰사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바로 이곳 하회 옥연정사에서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고, 도학과 문장, 덕행, 서예에 뛰어났다.

안동 출신이기에 안동에는 류성룡과 관련된 여러 장소가 있고, 옥연정사 또한 그중 한 곳이다.

가깝게는 옥연정사에서 강을 건너 하회마을을 지나 낙동강 넘어로 가면 병산서원이 나오는데 그 곳 또한 류성룡과 관련된 곳이다.


류성

(柳成龍, 1542~1607)



류성룡에 대한 일대의 흔적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류성룡은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문수학했으며, 21세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명종 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67년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9년 성균관전적과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홍문관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젊은 문인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였다. 

1588년(선조 21)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헌부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올랐고, 1591년 건저 문제(建儲問題: 왕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로 서인 정철(鄭澈)에 대한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에 올라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주어 실전에 활용하게 하였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도·경상도·전라도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중국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지은 병서)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 설치를 요청하는 등 명나라 및 일본과 화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군비를 보완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사건의 진상을 알리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그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케 했지만 유성룡은 6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에 수천 명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실록의 사관은 그를 평하여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라고 칭찬한 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한 적은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은 구해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저서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전한다. 그중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퇴계선생연보(退溪先生年譜)』를 편찬하였으며, 1585년(선조 18)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이듬해 『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그리고 1589년(선조 22)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정사이기에 옛 조상들의 집 모양이 어떤가를 보기에 참 좋은 곳이다.

옥연정사는 문간채·바깥채·안채·별당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문간채는 왼쪽 남쪽부터 차례로 측간과 대문을 두고 대문 오른쪽에 광을 3칸이나 둔 一자형이다. 

바깥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정사각형의 4칸짜리 대청의 오른쪽·왼쪽으로 1칸 반의 방을 두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8칸 겹집형식으로 부엌이 중앙에 있고 방이 부엌을 중심으로 가로·세로 2칸씩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별당채는 바깥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데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서쪽 모서리에 2칸 반의 방이 하나 있고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북쪽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앞뒤로 반 칸 폭의 퇴를 두었는데, 동쪽은 벽체로 막아 방에서 쓰고, 서쪽은 개방하였다. 온돌방 옆 남쪽에는 부엌간을 두고, 그 옆으로 온돌방을 동서로 연이어 배치하고, 서쪽과 남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살림채의 서쪽에는 별당채가 남향하여 하회마을을 굽어볼 수 있도록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별당은 동쪽에 대청을, 서쪽에 2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었다. 그리고 전면에 개방된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유성룡은 주로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별당채의 서남쪽에는 一자형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다.

옥연정사는 양반집이지만 경상북도 안동 지역 민가의 기본형인 도토마리(베틀에서 실을 감는 기구) 집 형식으로 가운데에 부엌을 두고 양쪽에 방을 둔 점이 독특하다. 



옥연정사는 화천이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玉沼)의 남쪽에 있다.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부른다.

옥연(玉淵)이란 정사 이름의 ‘옥’(玉)은 빛을 발함이요, ‘연’(淵)은 깊음을 말함이다. 


옥연(玉淵)


하회마을의 화천(花川) 북쪽 부용대(芙蓉臺) 동쪽 강가에 자리잡고 있어, 나룻배로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 있다.

옥연정사에서는 담 밖으로 낙동강이 보인다.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수려한 풍경이 너무 멋져 학문을 닦기에는 너무 마음이 설레이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옥연정사에서 바라본 낙동강]


옥연정사에서 옛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낙동강으로 내려가 보았다.


[옥연서당과 낙동강으로 내려가는 계단]


낙동강가에는 바다에 있는 듯한 고운 모래로 된 백사장이 있고, 강 넘어로는 하회마을이 보이고, 등 뒤로는 부용대의 절벽이 보인다.


[낙동강과 강 넘어에 있는 하회마을]


[하회마을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옥연정사로 올 수도 있다.]


옥연정사는 옥연정사대로 멋이 있는데, 낙동강으로 내려오면 그 풍경이 정말 수려하다.

그냥 한없이 그곳에서 경치를 바라보고 싶어 질 정도이다.

이 곳의 경치는 다음에 부용대를 소개하며 보여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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