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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한 희생을 기리는 유관순열사유적지 (천안 유관순열사기념관, 유관순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 天安 柳寬順烈士記念館, 天安 柳寬順 烈士 遺蹟)

by 소이나는 201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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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한 희생을 기리는 천안 유관순열사기념관, 유관순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

유관순열사유적지

天安 柳寬順烈士記念館,  天安 柳寬順 烈士 遺蹟




유관순 열사 추모각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는 평화만세 시위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3.1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아우네 장터가 위치하고 있으며, 아우네 장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유관순일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와 추모각, 기념관을 만들어 추모를 하고 있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338-1


홈페이지 : 유관순열사기념관 yugwansun.cheonan.go.kr


 




유관순(柳寬順)



유관순(柳寬順)[1902~1920]은 1919년 3·1 운동 때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1년생으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어 3월 13일에 귀향하여 부친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및 조인원(趙仁元) 등에게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였다. 지역 인사와 기독교인들의 협력으로 사전 준비를 하여 3월 31일 저녁에 매봉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으로 생가터, 매봉 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는데,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병천 아우내 장터 3·1 만세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柳寬順)[1902~1920]은 천안 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1학년이었고, 한 달 후에는 2학년이 될 예정이었다. 유관순은 공주 감리교회의 제이 햄몬드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도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1년 먼저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이때 3학년 졸업반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 행렬이 “대한 독립 만세!”를 연달아 외치며 정동 덕수궁 뒤편에 있는 이화 학당 교문 앞에 이르자 시위대는 이화 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프라이 교장은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았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은 항의했고,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내 만세 운동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 주도하에 수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의 제2차 대규모 만세 운동이 있었다. 유관순은 이때에도 참여했다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다행히 이화 학당 당국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시위가 있기 전에도 유관순은 평소 태극기를 그려 교실과 기숙사 벽에 붙인다든가, 다섯 명의 친구들과 5인의 결사대를 만들어 태극기와 애국가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등의 애국 의식을 보여 주었다.


3월 13일 유관순과 유예도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함께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동리라 모을 돈이 없었다. 어른들이 “우리도 차라리 만세 운동을 벌이자.”라고 하였고,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동네 어른 조인원(趙仁元)[조병옥의 아버지]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 병천[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유관순은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 대표와 유력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천안, 청주, 진천 방면의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고, 다른 마을의 산봉우리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횃불이 올랐다.



4월 1일 천안 인근 지역 곳곳에서 약 3천 명의 장꾼이 아우내 장터에 모여들었다.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든 채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병천 일본 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그 상황에서 유중무는 빈사 상태에 빠진 유중권을 업고 김용이·조인원·조병호·유관순 등 약 40명과 함께 주재소에 몰려갔다.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헤치고 일본 헌병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다. 조인원도 저고리를 벗고 주재소장과 헌병의 총을 잡아 제쳤다. 유관순은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을 죽이느냐?”고 외쳤고, 헌병이 총을 들이대자 “죽이려면 죽여 보라.”고 하며 달려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는 동안 주재소 근처에는 약 1천 5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총기를 사용하려는 헌병들의 총부리에 달라붙어 군중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조인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왼쪽 팔이 칼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으며, 다수의 사상자와 체포자를 남기고 시위대는 후퇴하였다. 후퇴한 군중은 천안·병천 간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1개도 쓰러뜨렸으며, 갈전면 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한 뒤 부근의 산 위와 시장에서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였다.


얼마 안 있어 지원병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는 일순간 흩어졌으나 곧 다시 몰려들었다. 여성들은 치마에 냇가의 돌을 담아 나르고 남자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일제의 발포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주 지방 법원은 유관순, 유중무, 조인원 세 사람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손병희도 징역 3년을 언도받은 것을 볼 때 평화적인 시위로 받은 5년형은 엄청난 중형이 아닐 수 없었다. 아우내 만세 운동 주도자들은 서울 복심 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경성 복심 법원에서 유관순은 징역 3년형이 확정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에 불복하여 다시 최종심인 고등 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며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계속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화 학당 박인덕 교사의 만류로 한동안 잠잠해졌다가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자 유관순은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 만세를 주도하였고, 이때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었다. 아우내 만세 운동 당시 입은 상처와 그간의 잦은 고문과 방광 파열이 겹친 유관순에게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하였다.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는 유관순이 배고픔과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화 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마지막으로 면회했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약 보름이 지나서야 이화 학당에서 시신을 인계받아 정동 교회에서 간략한 장례 의식을 거행하고 수레에 실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 후 유관순의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복원된 생가와 기념 교회가 있고, 탑원리에 유관순 사우와 기념관이 있다.



이러한 3.1 만세운동의 상징이신 유관순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서있는 모습으로 유관순열 사 사적지 광장내에 유관순열사동상이 1983년 10월 12일에 건립되었다. 재료는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7.1m의 높이이다. 조각은 이종각 교수의 작품이다. 동상 뒷면에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는데 시는 유제한, 글씨는 인영선이 썼다.







유관순열사유적


 


유관순열사사적지에는 유관순열사 동상, 유관순 공원, 유관순 기념관, 유관순 추모각, 순국자 추모각으로 이루어져있다. 1972년 10월 14일 유관순 열사 추모각이 준공되었고, 1977년 10월 14일 매봉산에 봉화탑을 건립하고, 11월 12일 유관순 열사 사우 관리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 열사 동상을 유관순 사우 광장에 건립하였고, 매봉산 중턱에 초혼 묘를 봉안하였다. 1990년 4월 1일에는 초혼 묘 및 존영상 봉안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1996년 12월 30일 유관순 열사 생가를 복원하는 등의 사업으로 유관순 열사를 기리고 있다. 또한 2003년 4월 1일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개관하고, 2007년에 석천 윤여환 화백의 유관순 열사 영정을 봉안하였다. 2009년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 순국자 추모각을 준공하였고,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 기념 공원을 조성하는 등의 발전을 이룬다.





 


유관순열사기념관


 

유관순 열사 기념관은 유관순 열사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있는 기념관으로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있으며, 탄신 100주년을 맞아 2003년 4월 1일에 건립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 등본, 재판 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재판 과정을 담은 매직 비젼, 열사의 생애를 재현한 닥종이 인형 등 출생에서 순국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영상, 다양한 체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고, 일제의 고문 도구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체험공간에는 유관순 열사가 고문당하던 상황을 체험해볼 수 있는 벽관 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007년 2월 28일에는 석천 윤여환이 그린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을 봉안하였다.

 

유관순열사기념관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건물로 되어 있고, 건물 안에는 영상실·체험공간·뮤지엄숍 등이 있다.

 

 

기념관 앞의 타임캡슐

 

기념관의 입구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부조가 만들어져 있다. 이는 호서지방 최대 민족운동인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부조로 표현현 것으로 태극기를 들고 평화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과 이들을 향해 총칼을 휘두르며 위협하는 일본 헌병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민중의 모습은 3ㆍ1운동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천안 병천의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3,0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19명이 순국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부조

 

입구를 지나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연보를 볼 수 있다.

이곳을 보며 학창시절을 거쳐 독립운동에 이르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을 하던 아우네 장터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놓아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유관순 열사의 옷, 당시 태극기 등의 전시를 보면 유관순 열사의 흔적을 기리는 시간이 된다.

 

 

평일 낮에 찾은 유관순열사기념관에는 관리인도 없고, 이곳을 둘러보는 사람 또한 없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하여 사람의 발길이 뜸하여 기념관은 조용하기만 하다. 기념과 주변에는 인근에 사적 제230호인 유관순열사 생가지와 봉화지가 있고, 아우내 독립만세 기념비가 아우내 장터 뒷산에 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옛 헌병주재소 자리에는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 기념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 추모각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추모각이 나온다.

 

 

 

 

추모각은 유관순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열사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2년 건립되었다. 1986년 8월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하였고, 11월 19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와 함께 충청남도 기념물 제58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맞배지붕의 한식 목조 건물이며 주위에는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다. 중요 무형문화재 신응수 대목장에 의해 건축되었고,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서예가가 쓰셨다. 추모각에 모셔진 영정은 윤여환 화백의 작품으로 2007년 2월 28일 봉안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 제78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곳에서 매년 유관순열사의 순국일(9월 28일)에 맞춰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2월 28일에 3·1절 경축 전야제를 개최하고, 매봉산 정상 봉화대에서는 매년 3월 31일 봉화를 올려 독립 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추모각의 천정

추모각에서 바라본 병천

 



순국자 추모각


 

유관순 열사 추모각의 오른 편에는 아우내 장터에서 함께 했던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순국자 추목각이 따로 만들어져있다.

 

 

순국자 추모각은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신 48위 애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유관순열사 추모각 옆에 세워져 협문, 생태 연못, 휴게 쉼터, 야외조형가벽과 광장을 갖추고 있고, 특히 야외조형가벽에는 순국지사의 신상기록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전개과정을 새겨 놓아 관람객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곳이기에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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