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풍경의 독립운동가 조병옥의 생가, 천안 조병옥 박사 생가
조병옥 박사 생가
天安 維石 趙炳玉 博士 生家, Birthplace of Jo Byungok
여유로운 시간이 남아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먹으러 천안 병천으로 가다가 병천에 도착한 것이 좀 이른 시간이기에 잠깐 유관순 생가에 들렸다 병천의 순대국밥 집에 가려고, 유관순 생가 쪽으로 가는 길에 조병옥 박사의 생가가 보이기에 잠시 들려보았다. 조병옥 박사 생가를 들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우연치 않게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띄어 볼 수 있었다. 충남 천안에서 출생을 하였다고, 천안의 홍보물에서 본 적은 있다. 조병옥 박사 말고도, 김시민 장군의 생가 유허지도 있고, 어사 박문수의 묘, 홍대용과학관도 근처에 있다고 한 기억이 난다. 유관순 생가도 근처에 있고, 시골인 천안의 병천 주변에 이렇게 나라의 영웅들이 많이 출생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조병옥 박사 생가
유석(維石) 조병옥(1894.5.21~1960.2.15) 박사는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면서 정치가이다. 역사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단체인 신간회의 창립위원이기도 하다.
이 생가지는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95년 4월 20일, 문중의 고증을 받아 기와집으로 변형되어 있던 가옥을 다시 초가로 복원한 것이고, 1,600㎡의 부지에 ‘一’자형 목조초가와 헛간·외양간으로 이루어진 부속건물이 있으며, 본채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다.
가옥 바깥 주차장에는 조병옥의 생애를 기록한 기념비가 있다. 내가 들리려고 했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는 이곳에서 약 1km 정도 거리에 있어 두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초가집의 모습이나 규모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조병옥[趙炳玉]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조병옥 박사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영명학교(公州永明學校)를 거쳐 1911년 평양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를 졸업, 1914년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곧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주(州) 킹스턴의 와이오밍고교에 입학, 1918년 졸업하였다. 유학 중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어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韓人會)·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YMCA 이사와 비밀독립단체 그리스도신우회 회원이 되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창립위원·재정총무를 역임하였다. 신간회의 활동으로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로 검거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하였으며, 귀국 후 윤치호를 만나기도 했지만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사건으로 2년간 투옥되었다. 그 후 정당이 난립하던 시기인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여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친미적인 성향으로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에 취임, 치안유지에 힘을 썼다.
외교적인 활동도 활발하여 1948년 대통령특사·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고, 1950년 6·25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하였다. 그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의 의견충돌로 사직하고, 반독재(反獨裁)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고, 이듬해 민주당(民主黨)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야당을 지도하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육군의료센터에서 가료 중 심장마비로 병사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일제 말기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창립연설을 한 사실과 광복 후 군정청 경무부장 시절 친일파 경찰을 채용했던 점, 제주 4·3 사건 당시, 과잉 진압했던 점들 들어 그의 친일 의혹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역사적인 자취를 남긴 조병옥의 생가는 그의 활동과는 반대되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조 초가집의 정면
목조 초가집의 측면초가집의 뒷문
마구간, 헛간.마굿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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