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윤휴가 사상 논쟁을 했던 강경 죽림서원
江景 竹林書院
Jungnim Seowon in Ganggyeong
죽림서원
금강의 풍경을 둘러보는 전망대를 내려와 송시열이 만든 팔괘정을 보고 다음에 들릴 곳인 죽림서원으로 향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8(황산리 95)
골목을 돌아 내려가면 보이는 서원
죽림서원은 황산리에서 북쪽에 솟은 동산을 두고 금강 쪽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논산시에서 익산 방향으로 국도 23호선을 타고 약 9.71㎝ 가면 강경읍이 나온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약 0.72㎞ 가다보면 황산리가 나온다.
전망대에서 팔괘정으로 내려가던 골목의 내리막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죽림서원에 도착할 수 있다.
이렇게 전망대 쪽에서 걸어 내려갈 수 있지만, 황산대교 쪽에서 금강변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하거나, 젓갈전시장 앞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도 죽림서원으로 갈 수 있다.
죽림서원으로 가는 내리막 길
골목에 있던 폐가
골목의 정겨운 집
골목길 집의 대문
내리막을 다 내려오니 죽림서원이 보인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성리학을 論하던 서원
죽림서원의 입구
죽림서원은 조선시대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665년(현종 6) ‘죽림’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또한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죽림서원의 창건에 최초 발의하고 건의한 인물들은 김장생의 문인인 최명룡, 송흥주 등이었다.
이들이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황산사(黃山祠)가 죽림서원의 기원이다.
황산사는 후에 황산서원이라 불리다가 1665년 사액이 되면서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져,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까지 배향하고이 후, 1695년(숙종 21)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제단의 위치는 좌측으로부터 조광조·이황·이이·성혼·김장생·송시열의 순으로 설치되어 있고, 해마다 3월 15일과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은 1653년(효종4년) 송시열과 윤선거((尹宣擧)가 만나 주희(朱熹)의 사상을 비판하고 개혁적 사상을 가진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윤휴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사서의 경전을 주희와는 다르게 해석을 내렸는데 주희의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때문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지만 윤선거는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윤휴의 학문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때문에 두사람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기 이후 죽림서원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정비 때 훼철되어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 향사를 계속하였는데 1910년 국권피탈과 함께 이것마저 중단되었다.
해방 후 1946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단소(壇所)가 설치되고 196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은 광복 후인 1946년 복원한 제단, 그리고 유도문(由道門), 홍문(紅門), 각각 4칸으로 된 족리정(足履亭)과 팔괘정(八卦亭), 정기비각(亭記碑閣) 등이다.
족리정과 팔괘정은 유림의 회합 및 제관(祭官)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현재는 문이 닫혀 있어 일반인들이 안을 살펴보기에는 어렵다.
죽림서원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아기자기한 구조
죽림사
죽림서원의 앞면은 평지로 이루어졌고, 배면에 약한 구릉을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작은 마당을 두고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으며, 마당을 지나 안으로 진입하면 낮게 한 단을 조성하여 신문(神門)을 두었고, 사우인 죽림사가 위치해 있다.
죽림사(竹林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열은 내부 공간으로 꾸몄다.
이곳에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고주 5량가 구조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아 두었다.
죽림서원과 전망대
강학 공간의 동·서 양재는 마주보고 있어 형태가 다른 서원들과는 다르다.
보통 양재는 수평, 수직을 맞춰 대면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재가 사선으로 틀어진 채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고종 때 훼철당한 뒤, 후에 복원하면서 대지의 조건에 따라 배치하려다 현재의 형태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배치 형태가 질서 정연하지 못하다.
사우의 앞면 좌우측에는 공적비와 중건비 등이 세워져 있으나 좌대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헌장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면 열은 퇴간이고, 뒷면 열은 온돌방을 두었다.
1고주 5량가 구조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측면에는 박공으로 처리를 하였다. 서재는 수직사를 겸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외삼문 쪽 1칸은 부엌, 나머지 2칸은 온돌방이다.
1고주 5량가 구조로 홑처마 우진각 지붕이다.
기둥머리는 민도리집 구조이다.
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가 함께 제향된 장소
죽림정
충청남도 남부 공주목에 속하였던 논산은 거의 서인계, 또는 노론계의 일색이었는데 죽림서원의 경우 영남학파인 조광조와 이황, 기호학파의 거유인 노·소론의 이이와 성혼, 노론의 조종(祖宗)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어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이황이 어떠한 연유로 서인 및 노론의 대표 인물들과 함께 제향될 수 있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북인, 서인, 동인, 남인, 벽파 노론, 시파 노론, 소론, 기호학파, 영남학파 등 역사 공부를 하며 머리 좀 아파했던 사람들이라면 함께 궁금함을 생각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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