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제일교회는 1901년 궁도장인 덕유정에서 예배를 시작하였고, 1908년 윌리엄 선교사에 의해 지역 최초 사립학교인 만동하굑를 세워 애국애족의 정신을 가르쳤다.
1913년 만동 여학교가 엘리스 샤프 선교사에 의해 강경의 팔괘정에서 시작되었으며 1921년 5월 18일 임이정에서 지역 최초 유치원을 시작하였고 1961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강성중학교를 서립하였다.
가르치고 배우는 말씀에 붙잡힌 성숙한 모범교회로서 미래의 위대한 꿈나무를 위한 비전센타설립과 어린이집과 어학원을 운영하고 국외선교를 위하여 필리핀 웨슬레대학 건축협력과 오로라 새싹 초등학교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인도 빤뿔 고아원을 운영하여 복음선교와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감리교 [Methodist Church, 監理敎]
창시자는 웨슬리(Wesley,J.)이다. 영국교회의 사제였던 웨슬리는 그의 선교에 대한 영국교회의 반대가 심해지자, 영국교회를 떠나 순회전도를 하며 그가 믿는 복음을 설교하는 데 전념하였다. 여기에 그의 동생과 동료인 휘트필드(Whitefield,G.)가 가세하여 감리회(Methodist Society)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미국감리회를 위하여 신앙 25개 조를 채택한 1744년의 제1연회(年會) 이후 웨슬리와 휘트필드는 칼뱅(Calvin,J.)의 예정설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분리되어 웨슬리파는 감리교로, 휘트필드파는 칼뱅감리교로 각각 분리되었다. 한편, 미국에 전파된 감리교는 1784년에 독립교파를 형성하였으나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노선을 따르는 감리교인들은 웨슬리의 표어인 ‘기독자의 완전’을 향한 체험신앙을 강조하면서 말보다는 사랑의 행동을 앞세운다.
즉, 개인의 신앙체험을 중요시하며, 여기에서 모든 교회활동과 사회활동이 시작된다. 이러한 체험적 신앙성격이 감리교회의 신앙형태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구체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인구원론이다. 개인에 따라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칼뱅의 조건부 구원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예정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신앙이다. 이 체험신앙은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나온 핵심적인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가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고 부활한 구세주임을 확인하고 감격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셋째,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구원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일방적 의사나 행동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넷째, 감리교회는 교리를 노래와 찬송으로 고백한다.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Wesley,C.)는 형의 순회전도 때, 영감에 넘치는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고 불러서 감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다섯째, 평신도들에게 교회를 개방한다. 평신도 전도인 제도와 야외전도·순회전도에 평신도들을 선교에 동참시켜 평신도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동원한다.
여섯째,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한다. 웨슬리의 관심은 완전에 관한 이론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에 있는데, 도덕적 완전이 아니고 사랑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곱째, 교육을 중요시한다.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으로 훈련시킬 것을 강조한다.
여덟째, 사회적 관심을 고양시킨다. 웨슬리는 고아·노인·빈민·노동자들의 영혼 구원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에 대한 복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한 사회제도의 개선을 역설하였다.
즉, 노예제도의 폐지, 절제, 미성년자 노동폐지, 8시간 노동제 엄수, 대금업 폐지 등 사회개혁운동을 일으켜 산업혁명에 따른 영국의 각종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갈등 해소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홉째, 교회연합정신을 강조한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의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말에 따라 점점 일치를 이루어가고 있듯이, 20세기의 교회운동의 하나인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복음과 봉사를 위하여 연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감리교의 선교 시작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 시작이 된다. 1884년 6월 2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Maclay,R.S.)가 서울에 와서 당시 개화당의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고종에게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시켜 이를 허락하였는데, 그 날이 1884년 7월 3일이었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계획과 준비는 급진전을 이루어,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 부부가 장로교의 언더우드(Underwood,H.G.)와 함께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Scranton,W.B.)이 서울에 도착하였고, 아펜젤러는 정동의 그의 집에서 그 해 8월 3일부터 한국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이다.
이 학교는 급속히 성장하여 한때는 정부의 국비장학생까지 맡아 위탁교육을 하였고, 여기에 감명을 받은 고종은 1887년 6월 8일 그의 사업을 격려하는 뜻에서 학교 이름을 배재학당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한편, 스크랜턴은 그 해 9월 10일부터 정동의 자택에서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정동감리교병원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5개월 전에 개원한 정부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은 주로 정부 고관과 그 가족과 친지들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정동병원에서는 한약을 쓸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음으로써, 이러한 의료혜택을 통하여 기독교복음은 대중에게 퍼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스크랜턴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치료와 무료투약을 하였고, 1년 동안 혼자서 2천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여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스크랜턴과 더불어 선교사로 왔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Scranton, M.F.)은 1886년 5월 30일에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서 한 명의 한국인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이화학당이 시작되었다.
이 때의 여성교육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화학당은 초기 한국여성운동의 요람지이며 여권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감리교의 교육정책은 처음부터 교회 중심적인 교인양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고양된 민족계몽교육에 치중하였다.
이렇게 감리교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민족의 과제였던 근대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여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1888년에 있었던 ‘아기 소동’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핍박 없이 선교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95년에는 윤치호(尹致昊)의 노력으로 미국 남감리교회가 북감리교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하여, 주로 개성·원산·춘천·고양군 등 중부지방에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배화학당(培花學堂), 개성의 한영서원(漢英書院 : 지금의 松都高等學校), 호수돈여학교 등을 세웠다. 이 두 남·북감리교회는 1930년에 통합되어,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1년에는 1889년 이래 전도사 임명을 받고, 그 뒤 12년 동안 목사후보 훈련을 받아온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이 선교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인 목사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에 교세는 급성장하여 1901년에는 전국을 세 지방으로 분할, 관장하였고, 1904년에는 조선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조선연회(Korea Conference)가 조직되어 중국연회에서 완전히 독립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면서 감리교회는 교세의 증가와 더불어 교회조직과 활동분야가 전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교회의 민족에 대한 영향력도 커져갔다.
특히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1898년 해산되면서 독립협회의 주요 간부들이 대거 기독교에 입교함으로써, 주요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서울 남대문에 있던 상동 감리교회가 그 대표적 교회가 되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김구(金九)·이준(李儁) 등이 전국감리교청년연합회를 소집하고 보호조약무효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일제의 무력으로 무산되었으나, 그 뒤에도 이회영(李會榮)·김구·이동녕(李東寧)·이준·이갑(李甲)·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承薰)·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김진호(金鎭浩) 등이 모여들어 독립운동을 모의하였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또한, 같은 해 이 곳에서 이준의 헤이그 특사파견을 모의하고 실행하였다. 이렇듯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된 상동교회는 그 안에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젊고 유능한 민족운동가를 양성하였다.
한편, 주시경(周時經)·최남선(崔南善)·장도빈(張道斌) 등이 한글보급운동과 국사지식의 보급운동을 펴, 민족의식과 올바른 사관 확립에 힘썼다.
이와 같은 민족운동의 전통은 3·1운동으로 이어져, 33인의 민족대표 중 16명의 기독교측 대표 가운데 이필주·최성모·오화영(吳華英)·김창준(金昌俊)·박희도(朴熙道)·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정춘수(鄭春洙) 등 9명이 참여함으로써, 더욱 감리교회의 민족정신을 빛나게 했다.
그러므로 3·1운동으로 인한 일제의 감리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가중되었는데, 수원지방 제암리감리교회의 대학살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시기의 감리교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잃어버린 민족의 주권회복에 힘씀으로써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또한 많은 유능한 청년들이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민족운동과 목회가 하나이던 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종교탄압과 일본식 기독교화에 따른 신앙의 변질을 강요당하여,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이 결국 이에 편승하여 교회를 일본의 어용단체로 전락시킨 예도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았지만, 교회는 질서를 확립하지 못하고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교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친일적 행동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계속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자, 핍박을 받았던 재야인사들이 교회 지도부에 대결함으로써 감리교회는 처음으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이른바 부흥파와 재건파의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6·25전쟁 1년 전에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극적으로 화해가 되어 하나로 다시 통합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교회에 인적·물질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고, 특히 이북의 교회는 완전파멸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와 교단본부가 서울에 복귀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감리교회의 복구작업이 시작되었다.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희생된 목사가족 구제와 교회지도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사회참여에는 많은 관심을 보일 수가 없었다. 1955년부터 1958년에 호헌파 분열이 있었으나 곧 수습되었다.
4·19혁명은 감리교회에도 혁신의 바람을 일으켜, 그 동안 교회재건에 열중하던 교회지도부로 하여금 교회의 영향력과 그 저력을 사회 구원에 돌리도록 요구하였다.
1974년 총회에서는 10년 뒤에 맞이할 감리교 선교 1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야심적인 5천 교회, 1백만 신도를 목표로 하는 양적인 성장계획을 세웠으나, 교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즉, 감리교회가 한말과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과제를 선교의 과제로 삼아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던 전통을 저버리고 교회의 건축과 교세의 확충에만 주력한다는 것은 민족을 위한 교회의 길이 아니라는 비판의 소리였다. 이로 인하여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 갱신파의 분열이 있었으나 이 또한 곧 치유되어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78년 교파주의적 선교를 지양하고, 순수선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13회 합동총회에서 실질적으로 다원제 감독제도(多元制監督制度)를 채택하고, 연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구와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다시 1980년 총회에서는 연회를 행정구 단위로 개편, 조직하였다.
또한 1997년 10월 제22회 총회 정기 입법의회에서 총회를 입법총회와 행정총회로 분리, 각각 2년에 1회 격년제로 개최하도록 하였다. 입법총회에서는 교회법 개정과 입법 및 주요 행정사항을 심의, 의결하며 행정총회에서는 감독회장과 감독을 선출한다.
총회 밑에는 1998년 현재 서울·서울남·중부·경기·동부·충북·남부·충청·삼남·국외선교 등 10개의 연회가 있으며, 1년에 한 번 모여서 연회 산하의 구체적인 선교정책을 결정하고, 목사 안수식을 실행한다. 10개의 연회 밑에는 217개의 지방회가 있으며, 각 지방회는 감리사의 관리 감독을 받는다.
지방회 밑에는 당회가 있는데, 당회는 자립할 수 있는 교회, 즉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 몇이 합하여 조직되고, 감리교 기본의회가 되는 당회는 개체교회 중심으로 세례교인으로 조직된 의회이다.
여기에서 구역회 대표를 선출하고, 구역회의에서 지방회 대표를, 지방회에서 연회 대표를, 연회에서 총회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의회제도를 택하고 있다.
감리교회는 1984년으로 선교 1세기를 맞아 북한선교와 동양선교를 위한 도약적인 태세확립과 선교방법 개발에 힘쓰는 한편, 교권 싸움을 지양하여 현대 실정에 맞는 선교신학을 확립하는 방향을 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민주화작업은 우리의 전민족적 과제이므로 이런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하여 먼저 감리교회 안에서 민주화와 의식화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산업화 과정에서 권력과 부에서 소외되는 다수의 민중편에 서서 그들의 고난과 소외에 동참하면서 그들의 복지와 영혼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교회선교를 지양하고, 하나님 선교체제로 그 선교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즉, 감리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종이므로 교회의 프로그램과 교회 건물까지도 지역 주민을 위한 봉사와 그 봉사기관으로 개방하여야 한다.
넷째, 평신도들을 잘 훈련시켜 삶의 현장에서 그들로 하여금 능력 있는 생활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성속(聖俗)의 이원론을 버려야 한다.
다섯째, 교회의 질적 향상이 교회의 물량적 발전에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교역자들의 신앙적 훈련과 신학적 연수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부단의 자기반성을 통한 갱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감리교회의 당면과제로 삼고 있다.
강경 중앙감리교회
강경 제일감리교회의 근대화역사전시관이 강경을 여행의 컨셉을 잡을 수 있는 곳이었고,
역사적인 시작을 알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인 한옥집이 강경에 존재하고 있다.
충남 논산 강경과 부여의 경계를 나누며 멋지게 흐르고 있는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강경의 옥녀봉 아래 위치한 국내 최초의 침례교 예배지는 훼손되어 폐가같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7년에 다시 보존하였다.
지금은 초가집의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건물 자체의 역사적 의미보다는 장소적인 의미가 큰 곳이다.
16세기에 시작된 자유교회의 전통이 근대사회에 이르러 기독교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은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Baptists)에 의해서였다. 첫 번째 침례교도들은 청교도들 가운데 영국국교회 내에서의 개혁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스스로 분리하여 독립적인 교회를 설립했던 분리주의자들 가운데서 나왔다. 분리주의 전통에 있었던 그들은 또 다른 분리를 시도한 셈인데, 그것은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연유하였다. 그들의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16세기 재침례파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흡사한 것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 시작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독립된 무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시작의 시기도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 침례교회는 당시의 대표적인 분리주의교회들 중의 하나로 존 로빈슨이 목회하였던 게인스보로교회의 한 무리에서 비롯되었다. 1607년경에 그 교회는 평화적 분리를 하였는데, 새로 분리된 스크루비교회는 로빈슨이 주도하였고 남은 게인스보로교회는 그 교회에 나중에 가입했던 존 스미스가 주도하였다. 이 두 교회는 비슷한 시기에 박해를 피하여 네덜란드로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침례교회는 스미스의 무리들이 암스테르담에서 '신자의 교회'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아니라 자발적 신앙고백을 근거로 하는 신자의 침례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영국 땅에서의 최초의 침례교회는 1612년경에 이들 중에서 토마스 헬위스와 그의 일행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런던에 설립한 교회였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일반침례교회'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흘려졌다고 믿는 '일반속죄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침례교의 또 하나의 시작은 헨리 제이콥이라는 반(半)분리주의 청교도가 세운 JLJ 교회에서 비롯되었다.1) 1616년에 설립된 이 교회는 아직 침례교회가 아니었고 국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던 독립회중교회였다. 1630년대에 이 교회로부터 몇 차례의 분리의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1638년에 존 스필스베리를 중심으로 분리해 나간 무리들이 구체적으로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한 것이 또 다른 침례교의 시작이 되었다. 이 무리는 당시 영국 청교도의 칼빈주의적 성향에 따라 그리스도의 피는 특별히 택자를 위해서만 흘려졌다고 믿는 '특수속죄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특수침례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영국의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는 1891년에 통합하기까지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의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교단은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에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다가 1689년의 '종교관용령' 이후부터 18세기 전반부까지 내부적 진통을 겪으면서 쇠퇴하는 위기에 처하였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자극을 받으면서였다. 특히 영국 침례교는 1792년에 설립된 '침례교 선교회'와 윌리엄 캐리의 활약으로 근대 개신교 선교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891년의 양교단의 통합은 신학적 차이를 극복한 쾌거였다.
미국의 침례교는 주로 영국에서 건너온 침례교도들에 의하여 세워졌는데 최초의 침례교회는 1639년에 로저 윌리엄스가 설립한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교회였다. 18세기 초까지 미국의 침례교는 식민지 곳곳에 산발적으로 세워진 독립된 소수의 지역교회들에 불과하였으나, 18세기의 대각성운동 이후 회중교회에서 넘어온 자들에 의하여 남부와 북부에서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1800년경에는 신대륙에서 가장 큰 교단이 되기도 하였다. 1814년에는 해외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전국 단위의 총회가 형성되었으나 다른 교단과 마찬가지로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 갈등으로 1845년에 남침례교와 북침례교로 분열하였다.
두 교단은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발전해 왔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남침례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미국에서 단일 개신교 교단으로는 최대의 교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유럽대륙에서 침례교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영국과 미국의 침례교회들의 선교활동과 함께 '대륙 침례교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요한 온켄과 함부르크 침례교회의 헌신적 선교사역의 결과에 기인하였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말콤 펜윅이라는 독립 선교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침례교가 시작되었으며, 1950년대 초부터 미국 남침례교와 교단적 교류를 해왔다.
침례교와 다른 개신교 교단들과의 차이점은 역사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있다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다. 16세기의 주요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적 관심은 구원론에 있었지 교회론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주 관심사는 가톨릭의 반(半)펠라기우스적 구원론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적 구원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심각한 방향 전환을 시도하였던 무리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재침례교도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침례교는 17세기 영국에서 그와 유사한 관심사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교회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재침례교와 침례교는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거의 어려울 정도이다. 침례교 역시 유아세례가 아니라 '신자의 침례'를 근거로 하는 '신자의 교회'를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교회라고 보았으며 철저한 정교분리와 완전한 종교자유를 표방하였다. 가장 초기의 침례교 신앙고백서들은 이러한 자유교회 전통의 기본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교회정치의 형태는 전신자제사장의 이론을 반영하는 회중주의를 지향하였으며 지역교회의 자치주의를 중요시하였다.
그들은 지역교회 위에 군림하는 어떠한 기구나 조직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방회와 총회는 교회 간의 교제와 공동사역의 장으로 이해하였지 권위기관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신조를 만들지 않았으며 신앙고백서만 발표하였다. 성경이 아닌 어떠한 문서도 개인의 신앙에 대하여 구속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신앙고백서는 항상 성경에 종속적이며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침례교의 직위는 목사와 집사 두 직위가 있다. 침례의 방식은 침수례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동교단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중에 하나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침례교 안에는 다양한 신학이 공존한다. 영국의 침례교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룬 것이 그 예이다. 미국의 침례교는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같은 교회 안에서 공존하는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대체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융합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침례교 안에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도 있고 극단적 알미니우스주의자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적인 구원론과 감리교적인 구원론이 공존하는 곳이 침례교이다.
강경침례교회
강경침례교회는 미국침례교단에서 파송된 파울링 선교사 부부가 지병석씨를 전도하고, 1896년 2월 9일 주민 5명이 예배르르 드린 후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교회를 설립하였다.
1950년 9월 28일 담임목사인 이종덕 목사가 강경천변에서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침례교회터와 가옥이 현존하고 있으며 침례교 전국 총회에서는 강경읍 북옥리 136번지를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하였고 남교리 82-12번재에 현재 침례교 선교역사 기념교회를 건축하였다.
기독교 한국침례회 강경제일교회
세번째로 들릴만한 장소는 개신교 교회 중 유일한 한옥교회이자 주일학교 최초의 신사참배거부를 하였던 북옥감리교회이다.
한옥으로 된 이 교회는 문이 양쪽에 있는데, 조선후기 유교의 영향이 크다.
개신교로 들어온 종교이지만 당시의 문화적 영향때문에 한 쪽 문으로는 남자가, 다른 문으로는 여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북옥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6.25 전쟁 중에도 한번도 예배를 멈추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 교회이다.
북옥감리교회는 1923년 이인범 목사가 한식으로 대지 92평에 건평 36평으로 지어진 현존하는 유일한 정사각형 한옥교회이다.
강단을 중심으로 2개의 큰 기둥이 남녀를 구별하여 예배드리는 교회의 형태이다.
초기의 한옥교회는 대부분 소멸되거나 개축 또는 신축되어 현존하는 한옥교회는 극히 드물며 특히 감리교회로 남아있는 것으로서 더욱 그 희소적 가치가 크다.
북옥교회는 현재는 강경성결교회에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강경성결교회
강경성결교회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10월 11일에 일어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한 역사적인 곳이다.
강경성결교회 집사와 학새들이 주역으로 선도하였다.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던 일본 총독부의 정책을 10년은 후퇴시킨 사건이였으며 일제에 항거한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이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당국으로 부터 면직을 당하고 퇴학처분되는 등 불이익을 당하였다.
신식 건물을 가지고 있는 강경성결교회 앞에는 최초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를 만들어 역사를 기리고 있다.
성결교 [The Holyness Church, 聖潔敎]
19세기 말 미국에서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Wesley,J.)의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며 형성된 교파이다. 완전주의적 입장이란 기독교인은 내적인 죄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완전한 성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 없이 완전한 기독교적 삶을 이루게 해주는 회심(回心)의 경험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대체로 성서의 무오류성·축자영감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등을 신뢰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지니고 있으며, 세속적 관습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20세기 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은 성결교운동과 맥을 같이하다가 완전주의를 보다 급진적으로 적용시켜 성령(holy spirit)의 은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결교 교단에서는 나사렛교회가 1919년 총회에서 ‘오순절’이란 명칭을 삭제한 이래 오순절교회와의 차이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성결교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897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국제성결연합과 기도연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이 창설되었고, 순례성결교회(Pilgrim Holiness Church)라는 교단이 형성되었다.
1900년 같은 곳에서 하느님의 성서학교(God○s Bible School)와 선교사훈련원이 설립되었는데, 국제성결연합과 성서학교는 한국의 성결교운동의 모체가 되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동양선교회는 미국 오하이오주 전신기술자 출신의 카우만(Cowman,C.E.)과 그의 회사 동료인 킬보른(Kilbourne,E.A.)이 중심이 되어 창설, 의료나 교육 등을 통한 간접선교가 아니라 개인선교와 노방선교 등의 직접선교방법을 활용하였다. 동양선교회는 주로 서민층을 중심으로 신자층을 형성해 나갔으며, 곳곳에 복음전도관(福音傳道館)을 세워 전도집회를 열고 성서를 가르쳤다.
한국 성결교의 역사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金相濬)·정빈(鄭彬)에 의해 1907년 5월 서울에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東洋宣敎會福音傳道館)이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영국의 토머스(Thomas,J.) 목사가 초대 감독으로 파견되어 동양선교회의 사업을 관장하였고, 1911년에는 구리개〔銅峴:지금의 무교동〕에 전도관을 개축하고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였다.
1921년 3월에는 제2대 총리인 킬보른이 내한, 한국 감독직을 겸임하게 되면서 한국이 동양선교회의 중심역할을 하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전국 33개소의 교회와 기도처를 통괄할 교회조직이 요구되어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1917년에 조직된 일본보다 4년이 늦은 것이지만 중국보다는 4년이 앞선 것으로, 1929년 연회(年會)가 창립될 때에는 75개 교회와 남녀교역자가 2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22년부터는 교단잡지인 『활천(活泉)』이 발행되어 문서선교활동이 활발해졌다. 1930년대는 조직을 정비한 성결교회가 한국 목사들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시대였다.
남만주(南滿洲)와 일본의 선교도 이때 이루어져 보다 앞서 개척된 동만주(東滿洲)지역과 더불어 활발한 해외선교가 행해졌으며, 1933년 4월에는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박현명(朴炫明)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최고의결권은 이사회에 위임하는 등 교단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1936년에는 교단분열이 일어나 일부 평양 출신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교단을 분립하였다.
1930년대 말부터 일제가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키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40년에는 선교사들을 강제추방했으며, 교단지인 『활천』을 폐간하였다. 그리고 1943년 12월에는 교회를 해산시켰다.
8·15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재건총회가 소집되어,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基督敎大韓聖潔敎會)로 바꾸고 경성신학교도 서울신학교로 개칭하였으며, 폐간되었던 『활천』도 복간하였다.
1947년에는 그때까지 사용되던 이사회제도와 총회제도의 두 체제를 완전한 의회제도로 개정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면서, 자주적으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었고 155명의 교인들이 순교했으며, 서울신학교 교장 이건 목사를 비롯한 다수의 교직자들이 납북당했다. 그 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피난갔던 교인들이 환도하여 교회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57년에는 교단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관 설립·기념출판사업 등이 이루어졌으며, 교육사업에도 많은 역점을 두어 몇몇 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0년대 말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를 중심으로 교회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에큐메니컬운동을 둘러싸고 교회가 양분되어 1961년 제16회 총회 때 기독교복음수호를 내걸고 다수의 목사들이 퇴장하여 교단이 분열되었다.
이들은 1962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명칭을 확정하고 새로운 신학교설립과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가입을 결정하여 또 다른 교단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복음동지회(NAE)로부터 동시탈퇴가 이루어져 분열명분이 사라지자, 계속해서 합동노력이 이루어져 1965년 7월에는 하나의 교단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그러나 예수교성결교회의 일부 세력들은 계속 합동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단존속을 강력히 주장하여 완전한 합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72년에는 예수교성결교회 내에서 신학노선을 둘러싸고 다시 분열이 일어나, 기존의 예수교성결교회는 웨슬리안 알마니안 신학에서 이탈하여 장로교도 성결교도 아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세력에 의해 1973년 6월 또 다른 교단이 분립되었다.
이를 혁신파예수교대한성결교회 혹은 예수교대한성결교회혁신총회라 부르며 독자적인 성결신학교를 세우는 등 3개 교단으로 분리되었으나, 1988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두 교단이 재결합함으로써, 현재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두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는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의 역사로 빼놓을 수 없는 김대건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의 흔적을 남은 성지는 충청도 주변과 인천 지역에 있는 편인데, 강경 쪽에는 두곳을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가 예전에는 충남의 행정구역이었지만 지금은 전북 익산의 행정구역이 된 나바위 성지이다.
나바위 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청나라에서 신부가 된 후에 최초로 한국에 도착한 장소이다.
청나라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타고 올라와 포구에서 내린 곳으로 나바위 성지와 나바위 성당은 한국 천주교인들에게 성지 순례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 J.J .J. 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M.N.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할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청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가 단지 2주만 머무른 곳인데도 성지로 되어 기념을 하고 있다.
유숙지라고는 하나 현대적인 건물로 되어 역사적인 감흥을 찾기에는 어려운 장소가되었다.
성 김대건 신부 유숙지의 우편함
강경의 이러한 개신교와 천주교의 역사를 찾아 길을 걷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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