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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과 충청이 갈라지는 문경새제 제3관문 조령관 (鳥嶺山 鳥嶺關, Mt. JoRyeong)

by 소이나는 2015.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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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과 충청이 갈라지는

문경새제 제3관문

조령관

鳥嶺山 鳥嶺關,  Mt. JoRyeong




문경새재 제3관문


조령산에서 늦은 새벽에 잠에 들었는데, 새벽 일찍 눈이 떠진다. 전날 밤새 정신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놀던 탓에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었는데, 낯선 곳에서의 잠자리 때문인지 얼마 잠을 자지 않았지만 새벽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몸이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에서 깨지 못해 꿈자리를 헤메이는 걸 보니, 밖으로 나가고 싶어, 카메라 챙겨 들고 조령산 중턱에서 조금더 올라 문경새재 3관문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문경새재는 문경 쪽의 제1관문인 주흘관을 지나 사극 드라마 세트장이 있는 곳을 지나쳐 산으로 올라 제2관문인 조곡관 그리고 제3관문인 조령관으로 이루어져있다. 사실 1관문부터 2관문 3관문으로 차근 차근 올라와야겠지만, 이번에는 문경새재의 반대편인 고사리 마을에서 조령산을 올라 제3관문으로 바로 올라갔다. 전에 1관문만 보고 지나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3관문만 보고 내려온 것이되어서, 중간의 2관문은 아직도 들리지 못하게 되었다. 뭔가 하나를 빼먹으면 계속 마음 속으로 찜찜한 기분이 들던데... 언제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어 2관문도 꼭 들려보아야 겠다. 산의 높이가 1,000m 정도이니 그리 낮은 것은 아니지만, 당일로도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문경새재 등산로 코스인 것 같으니, 차근히 1~2~3관문을 돌아봐야겠다. ^^



내가 잠을 잤던 조령산식당 건물에서는 15분 정도만 걸으면 령의 분위기가 나는 산 위의 공원이 나온다. 경상도에서 대구, 상주, 문경을 통해 충청도로 들어가 충북의 지도가 비어진 모습의 조형물을 보니, 이곳이 경상도가 아닌 충청도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조령산에서 잠에 들때까지도 경상도에 있는 줄 알았다. 문경새재에 있으니 당연히 경상도라고 생각을 했는데, 제3관문 넘어에 있으니 충북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공원을 지나 걷다보니, 이곳은 장원급제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지나던 길이라고 한다. 전날 낮에 지나온 고사리 마을이 선비들의 쉼터가 있다고 하니, 다시 고사리 마을을 떠올려보게 된다. 조용하고 차분한 마을의 분위기에 마음의 평안을 찾고 쉼을 이루기에 충분한 분위기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경새재가 보인다. 현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제3관문의 뒤쪽의 길을 이용하여 문경새재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문경새재 3관문은 문경새재 정상에 세워진 관문으로, 이곳을 기준으로 영남과 충청이 갈라진다. 문을 쏙 지나면 경상도, 지금 이 곳은 충청도... 그 경계에 멋드러진 성벽이 인상적이다.



차곡 차곡 쌓은 불규칙한 크기의 돌들이 균형을 이루어 성벽을 완성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긴 여러 사람들이 얽혀 살아가는 세상과 다를바 없는 성벽에서 사람들이 애환을 느끼게 된다.



문경새재 3관문인 조령관의 홍예문을 지나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넘어갔다.



경상도로 넘어가니 현판이 보인다. 영남의 관문이니 만큼 경상도 쪽이 정문이 되는 것인가 보다.



이른 새벽 6시 문경새재의 정상에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다. 옛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부산히 이동하였을 텐데, 요즘 사람들은 그저 등산이나 관광으로 이 관문을 지날 뿐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 곳을 지날 사람이 없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이려나...



한적한 곳에서 혼자의 시간을 보내니 기분이 상쾌하다. 요즘은 이렇게 사람이 없는 곳이 좋다. 너무 많은 사람과의 만남, 비정상적인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오는 혼란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사람은 없지만, 관문에는 사람이 남긴 비문이 있어 혼자가 아닌것이 되었다.

새재에 올라, 새재를 넘으며, 등조령 등 조령을 넘는 사람들의 마음이 가지련히 놓여 마음의 동반자가 된다.



성벽에 오르니 다람쥐 한 마리가 사람이 없는 관문을 지키고 있다.



새벽 일찍 부지런히 먹을 것을 물고 성벽을 뛰어 오르는 다람쥐 만이 새벽의 친구가 되어주는 구나...



약수 위쪽에 있는 조그마한 전각이 산신각인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새재가 개척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조정에 올릴 장계를 지니고 가던 군졸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 장계가 전달되지 않자 충주 목사가 사람을 풀어 찾아보니 피 묻은 옷이 발견되었다. 



그대로 조정에 보고했더니 임금이 노해서 “호랑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군사 100인이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자 대신 제를 올리고 임금의 교지를 그곳에 놓고 왔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보니 교지를 본 호랑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때부터 호랑이의 넋을 기려 산신각을 짓고 해마다 제를 지냈으며, 이후 새재에 호랑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새재 곳곳에는 산신각, 성황당이 많다. 지금도 새재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정성껏 산신과 성황신에게 제를 지낸다. 이런 마을 풍속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곳이 변치 않았다는 뜻도 될 터이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경새재는 가벼운 산행을 하기에 제격이어서 철이 바뀔 때마다 많은 이들이 찾는다.



성벽과 함께 어울린 산을 보니 그 분위기에 압도 당한다. 백두대간이 동해안을 타고 뻗어내려 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서남으로 방향을 튼다. 그 백두대간의 북쪽 한강 유역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잇는 고개로,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늦게 개통된 ‘새 길’이었다. 이화령은 새재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 닦은 ‘신작로’다. 다른 고개들도 그렇지만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양을 중심으로 온 나라를 잇는 길의 체계를 만들었는데, 여섯 대로 가운데 하나인 이 길이 동래와 한양을 잇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428㎞인 데 견주어 새재를 통해 충주를 거쳐가면 380㎞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새재는 조선시대 내내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일본 등 외지의 사신들, 우마차를 끄는 소들의 발길까지도 묵묵히 받아내며 ‘영남대로’의 대동맥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조선 초기에 새재를 열고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곳곳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새재 넘어 첫번째에 있는 가장 큰 역은 유곡(幽谷)이었다. 유곡역의 중요성을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한편 조령산과 주흘산의 깎아지른 골짜기 ‘새’로 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경상도에서 ‘쌔’라고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불렀다고도 하는데, 그 이름에 연유하여 한자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했다. 아마 이 모두가 저마다 ‘새재’로 부르게 된 까닭이 되었을 것이다.



새재 일대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니만큼 삼국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끊이질 않았으니, 삼국시대 이래로 축성된 산성도 많다. 그중 조령성은 임진왜란 후에 공사가 시작되어 숙종 연간에 완공되었다.



새재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아주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임란 전에 왜군에 대비해 산세가 험한 새재에 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왜군은 죽령·새재·추풍령 세 갈래로 나뉘어 북상했다. 그중 주력부대는 새재 방면으로 길을 잡았는데, 새재에 이르러 그 험준함에 놀랐으나 정작 방비가 전혀 없었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그곳을 통과하였다. 탄금대에 이르러서야 신립 부대와 접전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신립 장군은 목숨을 바쳐 싸웠으나 결국 대패하였고 왜군은 곧장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 새재가 뚫리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에서 수도가 함락당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새재는 한양을 사수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것이다.



새재길에는 임란을 겪은 뒤인 1594년, 충주 수문장 신충원의 건의에 따라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였다. 관문 자리로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으나 가장 험준한 곳, 곧 깎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아 있고 나무를 걸치고 물을 건너야 하는 곳이 24곳이나 되는 응암(鷹巖)이 관문을 설치할 자리로 선정되었다. 그곳이 고개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는 지금의 제2관인 조곡관(鳥谷關)이다. 이어 숙종 때에 이르러 고개 정상 가까이에 제3관인 조령관(鳥嶺關)과, 문경에서 새재를 넘는 초입에 제1관인 주흘관(主屹關)을 두고 성을 쌓았다. 그 뒤로 이 새재길은 과거보러 가는 뭇 영남 선비들, 서울로 향하는 영남의 각종 물산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특히 영남의 선비들은, 남쪽의 추풍령으로 가면 과거에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주르륵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새재길을 가장 애용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새재를 더는 걸어서 넘지 않는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기차라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수안보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이화령이 1925년에 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로 닦이면서 이 새재길은 길손을 잃고 ‘옛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히려 옛모습을 잃어버린 죽령이나 이화령과는 달리 걸어서 넘을 수 있는 길의 면모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981년에 이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산책로가 단장되면서 가벼운 등산이나 산림욕장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문경관문3)은 사적 제147호로,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가 서서히 뜨며 안개가 짙게 내려 앉으니, 관문 주변의 풍경이 신비스럽게 보인다. 이렇게 이른 새벽이 아니면 쉽게 보지 못했을 풍경이다. 



혼자 이렇게 안개 낀 조령을 지나 다시 마을로 내려 왔다. 잠에 들었던 친구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혼자만의 조용한 산책은 꿈 처럼 과거로 지나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도 이곳을 걷던 기분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개 낀 조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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