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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서울의 역사? 대한민국의 역사? 서울역사박물관 [Seoul Museum of History, 首尔歷史博物館]

by 소이나는 201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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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서울의 역사? 대한민국의 역사? 


서울역사박물관 

[Seoul Museum of History, 首尔歷史博物館]


1901년 종로, 체코인 브라즈 촬영


서울역사박물관에 있는 소소한 재미를 찾아 추억이 가득한 옛 물건의 모습을 보고,

변해가는 서울의 모형을 살펴보고 이제는 진짜 박물관의 모습을 살펴볼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왕경인 개경에서 남경이었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1391년...

600여년이 넘게 우리의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는 서울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를 함축해 놓은 것과 같다.

서울역사박물관에는 서울의 오랜 역사적인 변화를 살펴 볼 수가 있다.


강북의 옛 지도


옛 서울의 지도를 보니 남산과 삼각산, 한강 등으로 둘러싸인 한양이 과연 지리적으로 훌륭한 도읍이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도성판화


지도 중에 시선을 끄는 옛 지도가 하나 있는데, 수선전도라는 지도였다. '수선(首善)'은 서울을 뜻하므로 수선전도는 서울지도를 말한다.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옛 지도하면 모두가 떠올릴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지도의 내용과 구도 및 필치로 보아 김정호의 '청구도'에 단독으로 들어가 있는 서울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840년대 만들어 진 것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목판본 지도로서 판화로서의 가치도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이고, 크기는 80.3×65㎝로 

진짜 수선전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지도의 인쇄를 위해 제작된 판목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수선전도


수선전도는 남쪽으로 한강을 한계로 하여 북쪽으로 도봉산, 서쪽으로 마포·성산리, 동쪽으로 안암동·답십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도봉산, 북한산에서 뻗어내린 산세가 잘 표현되어 있고 도성 내부를 흐르는 청계천의 모습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북한산의 세 봉우리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어 지도에서 눈에 띈다. 

한강이 흘러나가는 방향이 실제와는 달리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도성 공간을 하나의 소우주로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도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그려지다가 점차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 그려지기도 한데,

조선 후기에 조성을 수비하는 영역을 보여주는 지도가 있기도 했다.


도성삼군문 분계지도


도성삼군문 분계지도라는 지도였는데,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이 각각 한양의 한 부분을 맡아 관리를 했나보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조선 후기 중앙군의 군사체계의 하나로 총융청, 수어청과 함께 5군영이라고 불렸다.

5군영은 위에서 말했듯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 ·수어청(守禦廳)이다. 

이들 가운데 위 지도에 나온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을 중앙군영이라 하여 지도에서 처럼 삼군문(三軍門)이라 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수도 서울의 수비와 방어를 한 것이도 나머지 총융청과 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5군영 중에 훈련도감이 가장 먼저 생겼는데, 임진왜란 때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가 병자호란을 거쳐 점차 상설기구화 되었고, 영조시대에 법제화가 되었다.

어영청은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군사를 정예병으로 선발하여 조직한 것이 시초가 되어, 인조 말부터 효종 초 사이에 군영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총융청은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경기 지역의 방어막이 쉽게 뚫리면서 수도 외곽의 방어 필요성에 따라 제도화되었다. 

그리하여 1624년 경기도 내의 정군과 속오군(束伍軍), 그리고 별마대군(別馬隊軍)을 통합하여 2만여명의 규모로 조직되었다. 

이후 수어청이 조직되면서 경기 지역 일원에 대한 방어를 분담하여 남한산성 쪽은 수어청이, 경기 서남북 지역의 방어는 총융청이 담당하였다. 

수어청은 1626년(인조 4) 서울 동남쪽의 방어선인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5군영은 수도의 방위를 위한 군대이기는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권의 다툼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서인과 남인이 서로의 권세를 위해 5군영을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했던 씁쓸한 역사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지도가 있는 공간을 뒤로 하고 좀더 안으로 들어가면 조상들의 생활을 살펴 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상점의 모습부채마포나루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개화기의 서울을 보여주는 전시관이 나온다.

조선은 세도 정치 시대가 끝나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있었지만, 

서구 열강의 침투를 막기에는 부족한 조선은 문을 열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서양의 문화가 흘러들어왔다.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거쳐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이 개방의 첫 시초였다.


개항하는 조선


태극기(太極旗)가 등장한 것도 개화를 시작하는 이때 즈음이었다.

태극기는 1883년(고종 20)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되고 있는데,

국기 제정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다.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측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砲擊)을 가하였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도일할 때, 

박영효가 태극사괘(太極四卦)를 창안하고 도안한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박영효는 대표적인 개화파 인물로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이 난 후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러시아 공사관


개항 이후에는 많은 근대식 서구 건축물도 많이 만들어 진다. 그 중에 인상적인 건축가는 러시아인인 '사바찐'이 있다.

사바찐은 위에 사진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을 건축한 사람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많은 건축물과 관련이 되어 있는 인물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찐은 개화기 조선의 근대 건축물에 큰 영향을 준 대표적인 서양인이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서 보낸 묄렌도르프를 따라 1883년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 때부터 러일전쟁 후 조선을 떠날 때까지 22년 동안 조선의 토목과 건축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1885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인천 세관 소속의 시설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러시아공사관을 비롯하여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저 등 각국 외교사절을 위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또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을 설계하기도 했고, 명동성당의 신축공사 때 자문을 했으며,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설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바찐은 독립문도 설계했다. 


손탁호텔


조선의 근대건축에 남긴 사바찐의 족적은 특히 덕수궁 궁전계획에 담겨있다. 

그는 덕수궁의 중명전(重名殿), 정관현(靜觀軒), 구성헌(九成軒), 돈덕전(惇德殿) 등 조선의 근대식 궁전 건물의 설계자였던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남아있는 중명전은 1896년 공종이 ‘궁궐도서관(King's Library)’으로 건립한 서양식 건물로서 건축사적 의미와 더불어 역사적 의미를 갖는 중요한 건물이다.

사바찐은 다른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더불어 상하이로 도피하였다.

그의 건축물은 수도인 서울과 개항장이었던 제물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화기의 건축물을 보고 싶다면, 인천 중구에서 관광의 목적으로 조성해 놓은 '개항 누리길'에 들려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개화기 시대인 만큼 사진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다.

개화기 시대의 여러 모습을 흑백 사진으로 볼 수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광화문개항 그리고 변하는 조선

고종과 순종의 사진


개화기 수많은 열강의 수탈이 있으며 고종은 부단의 노력을 한다.

갑오개혁, 을미개혁 등을 단행하던 고종은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897년 광무개혁을 실시하며, 드디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되게 된다.

광무개혁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을미개혁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서울의 방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발표되었다. 

청국을 비롯한 각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이주민을 보호하고, 도문강(圖們江) 이남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꾀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 경제 분야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추진되던 광무개혁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을 추진하며 고종은 지금의 덕수궁인 당시의 경운궁으로 환궁하며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는데, 

그 원구단도 박물관에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경운궁 원구단


이러한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그 고종의 아버지었던 흥선대원군의 모습은 서울 종로에 있는 운현궁에 들리면 다시 살펴 볼 수가 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흔적을 따라



 # 1. 구름은 한옥 속을 치장하고... 운현궁 (雲峴宮, Seoul unhyeongung) (흥선대원군의 집, 궁궐보다 큰 권세의 한옥집)    ☜ 보기 클릭


운현궁





 #. 2 우리 궁궐의 기본, 경복궁 [景福宮, GyeongBok palace]  ☜ 보기 클릭


조선의 성립과 함께 정도전이 지은,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역사를 담은 경복궁



그리고 이제는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이 되었다. 

한양은 경성이 되고, 나라는 일제의 수탈에 아파하며, 민족은 끈기를 가지고 이겨내고, 발전한다.


광복 그리고 미군정 시대, 남북의 분단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이 시작하며 서양의 문물이 대한에 들어와 지극히 동양적이던 한반도는 점차 변해간다.


다방과 까페


남한에는 이승만 정부가 생기고, 북한에는 김일성의 나라가 생기고, 남북은 전쟁을 하고, 분단이 되어 아직도 이 모양으로 분단국으로 남아있다.

대통령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으로 벌써 10대에 이르고,

급변하는 경제 속에 4.19, 6.10만세 등 많은 민주화 속에 세계로 가는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어찌 보면 변한 것은 경제 말고는 별로 없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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