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백제
1. 초기의 백제
(1) 백제의 건국 : 마한 지역 위례성(기원전 18년)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 아버지는 추모 또는 주몽이라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 부여에 왔다.
부여왕이 아들 없이 딸만 셋이라 주몽을 보고 그 사람됨이 비상함을 알고 둘째 딸로 짝을 이루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부여에서 주망이 낳은 아들(유리)이 와서 태자가 되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도지 못할까 염려하여
10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 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형제는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본 후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로 귀속하였다. 그 후에
처음 위례로 올때의 백성들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는 그 출신지가 부여라 하여
성을 부여씨로 불렀다.” - 삼국사기(2) 부여, 고구려계 이주민1) 백제 왕적의 성이 부여씨2)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아들 - 고씨
3) 초기 백제 무덤은 고구려식(3) 초고왕 - 하남 위례성 이동(4) 고이왕 (3세기 중반)
1) 국가 체제 정비 - 중앙집권국가 토대
a. 6좌평, 16관등제(자•비•청색), 관복 정비b. 율령반포(가장 먼저)
c. 남당(정사를 보는 관청), 좌당(군사일원화)d. 5부체계 (간접통치)
e. 왕위세습 (형제세습)2) 한강 유역 장악3) 목지국 정벌
2. 백제의 성쇠(1) 비류왕(2) 근초고왕 (4세기 후반)1) 영토확장
a. 전라도 장악 (마한 369) b. 고구려 공격 (고국원왕 전사 371) c. 가야 공격 [가장 큰 영토]
d. 황해도 진출2) 요서 진출, 산동, 규슈 - 고대 무역권 형성3) 부자 상속
4) 고흥 「서기」 편찬5) 칠지도 (368)6) 유교 - 왕인, 아직기
7) 동진과 수교8) 진씨의 왕비족화 [근초고왕의 대외 진출]
cf) 백제의 요서경략설 근거 - 송서, 양서, 남제서, 남사, 통전 (X- 백제와 북조의 사료)
- 위덕왕 → 혜왕 → 법왕 (왕흥사) → 의자왕* 의자왕1) 유교, 해동증자2) 왕권강화 → 사택지적, 성충, 흥수 등 처벌3) 신라공격
4) 정치문란5) 멸망 (660) - 소정방과 김유신의 공격
앞면]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辟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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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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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태화 4년(369년) 음력 5월 16일 병오날 대낮에 무수히 거듭 담금질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게 보내 주노라. □□□□ 작품
[뒷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귀수 세자는 성스로운 말씀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존토록 하라.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진평현)이라 한다.” – 송서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 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晋代)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두 군을 차지하였다.” – 통전, 양서
(3) 침류왕 (4세기 후반) : 불교전래 - 마라난타(동진)
(4) 아신왕, 전지왕(5) 비유왕 (5세기 전반) : 나제동맹 (433) - 고구려 장수왕 시기, 신라 눌지왕과
(6) 개로왕 (5세기 후반) : 북위에 국서를 보내고 장수왕과 싸우다 아차산성에서 전사(475)
☞ 개로왕의 국서 “신(백제)과 고구려는 그 근원이 부여로부터 함께 나왔으므로 선대 때는 옛 정이 돈독하였습니다. 그의 조상
소(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이웃 나라와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저희 국경에 함부로 침입하였을
때에 저의 조상 수(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내달아 ~ 머리를 베어 달았던 것입니다. ~ 고구려가
점차 성하여져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침략을 받게 되어 원한이 맺히고 ~ 재물이 다학 힘이 다하여 점차 저절로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황제의 인자와 간절한 긍휼이 멀리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 삼국사기(7) 문주왕 (5세기 후반) 1) 웅진 천도 (475)
2) 송에 사신 파견3) 왕권 약화 - 귀족세력의 분열, 갈등 ➝ 문주왕 피살(8) 삼근왕(9) 동성왕 (5세기 후반 ~ 6세기 초)
1) 결혼 동맹 : 신라 소지 마립간 때 이벌찬 비지의 딸과 결혼 (493)
2) 영토의 화장 : 탐라국 복속 (498)3) 국방강화4) 백가의 난5) 남제와 교류3. 백제의 중흥(1) 무령왕 (6세기 초반)1) 22담로 설치2) 외교 교섭의 강화 : 남조의 양과 수교 (6세기 백제 사신이 그려진 ‘양직공’ 그림)
3) 5경박사 파견 - 단양이, 고안무4) 민생안정5) 벽돌무덤 (전축분)6)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2) 성왕 (6세기 초반)
1) 사비천도(538), 국호 : 남부여 (南扶餘)2) 관제 정비 : 5부5방제도 정비, 22부의 중앙관서 설치
3) 불교 장려 : 노리사치계를 일본에 파견, 불교 전파(겸익)4) 나제동맹 결렬(554) - 진흥왕* 관산성전투 : 가야와 합세해 신라를 공격 - 패배5) 제의정비6) 방성군 체제 – 지방통치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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