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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y 한국사 ※

[개화기] 11. 동학 농민 운동 (교조 신원 운동, 삼례 집회, 보은 집회, 서울 복합상소, 고부 민란, 전봉준, 폐정 개혁안 12조, 시모노세키조약, 황토현 전투, 황룡촌 전투, 사발통문, 1차봉기, 남접,)

by 소이나는 201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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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발통문1) 군기고와 화약고 점령2) 고부성을 점령하고 조병갑을 죽일 것3) 전주 감령을 함락하고 서울로 나아갈 것 4) 탐관오리 엄하게 징벌할 것 시모노세키조약 [下關條約(하관조약) (1895.4. 17) ①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② 청국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타이완[臺灣] 및 펑후섬[澎湖島]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③ 청국은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④ 청국의 사스[沙市] •충칭[重慶]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양쯔강[揚子江]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폐정 개혁안 12조(1) 서정 합의 - 왕조자체를 타파하려 하진 않았다.(2) 봉건타파(지배층) - 탐관오리, 유림•양반 징벌(3) 봉건 신분제 폐지 - 노비문서 소각, 천인차별 개선, 개가 허용(4) 잡세 폐지 - 봉건 수탈 반대(5) 인재등용 - 관리등용개선(6) 반외세적 - 왜 엄징(7) 공사채 무효 - 부채 탕감으로 농민 생활 안정(8) 토지 균분, 분작 - 지주제 혁파 (9) 정부와 원환을 씻고 서정 협력(10) 천인차별 개정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 없앤다.(11) 고리채 무효화, 삼정개혁(12) 미곡의 일본 유출 금지“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다.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 및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은 원한이 깊은 자이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피고(전봉준)는 일본 군대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합하고자 하는 뜻인 줄 알고 일본병을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쫓아낼 마음으로 다시 기병을 도모하였다. 9월경 태인을 출발하여 삼례역에 이르러 그곳을 기병하는 핵심 본부로 삼았다.” 時來天地 皆同方  (시래천지 개동방) - 때를 만나서는 한울과 땅도 힘을 합하더니運去英雄 不自謨  (운거영웅 불자모) -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가 없구나愛民正義 我無失  (애민정의 아무실) -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愛國丹心 誰有知  (애국단심 수유지) -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때가 이르러서는 천지와 함께 힘을 썼으나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죄 할바가 없구나. 백성 사랑에 온몸을 바쳤으니 내 잘못은 없노라.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아 주겠나.” [공초 내용]문: 너의 성명은 무엇인가?답: 전봉준이다.문: 작년 3월 고부 등지에서 백성들을 크게 모았다고 하니 무슨 사연으로 그러하였는가?답: 군수가 정액 이외의 가렴이 수만 냥이므로 민심이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 의거가 있었다.문: 고부에서 기포할 적에 동학이 많았느냐, 원통한 사람이 많았느냐?답: 원통한 사람이 많았다.문: 다시 난을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인가?답: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의 a라도 공포함이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밤중에 왕궁을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 하는 마음으로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의병을 규합하여 일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묻고자 함이다.Ⅱ. 동학 농민군의 봉기1. 교조 신원 운동 [敎祖伸寃運動](1) 1차 - 삼례 집회 (1892) = 전라 감사의 거부로 실패“우리의 뜻은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풀고자 함입니다. 선사의 가르침은 오직 유∙불∙선이 도를 합하여 충군효친하며 지성 사대함에 있습니다. ~ 지금 각 지방에서 지목하는 화는 물보다 깊으며 불보다 사납습니다. 수령으로부터 이서, 군교, 향리, 토호까지 우리들의 가산을 탈취하여 자기 재산처럼 여기며 살상, 구타, 능멸, 학대함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슬퍼도 이 중생이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2) 2차 - 서울 복합 상소 (교조 신원 복합상소) (1893) - 국왕에 상소 = 실패(3) 3차 - 보은 집회 (1893) 1) 종교 운동 - 농민운동 전환2) 정치적 구호 - 일본 축출, 탐관오리 처벌3) 정부는 진압 + 달래기 (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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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을 양호선무사로 파견)“지금 왜양의 도적 떼가 나라 한 복판에 들어와 어지럽힘이 극에 달하였다. 진실로 오늘날 서울을 보건대 오랑캐의 소굴이나 다름없다. 오늘의 원수요, 병인년의 치욕을 차마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으며 어찌 잊을 수 가 있겠는가? ~ 무릇 왜양은 개와 양과 같다는 것은 비록 어린 애라 할지라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명석한 재상으로서 어찌하여 우리가 왜양을 배척하는 것을 도리어 사류라고 방해 하는가?” (4) 전라도 금구집회 - 전봉준 (척왜창의)(5) 밀양 집회2. 배경(1) 정부의 대책 미비(2) 농촌 파탄 - 농민 불안, 불만(3) 확산 - 3남 중심, 농민 요구에 부합, 조직정비 (포접제 조직)(4) ‘청’이 강세인 시기3. 전개1894. 1月고부민란 (만석보)→ 안핵사 파견 3月1차 봉기 (남접), 강령 3月~4月황토현 전투 승리4月전주 점령 5月전주화약체결, 집강소 설치  6月 1日 일본측 내정개혁안 제시6月11日 교정청설치 6月21日 경복궁 침입, 대원군 정권 수립 6月23日청일전쟁(수원풍도)6月25日군국기무처설치(갑오개혁)  9月2차 봉기 (재봉기, 남•북접) 11月10日우금치 전투 패배12月12日홍범14조 발표  1895. 4月시모노세키조약 1895. 4月삼국간섭1895. 10月 을미사변 을미개혁 (단발령, 태양력) 아관파천“비록 우리가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의 옷을 입는 자로서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는 없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어찌 앉아서 보겠는가!” - 동학 창의문(1) 제1기 - 고부 민란 시기 (1894. 1.)1) 원인 -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불필요한 ‘만석보’를 다시 쌓게 하여 수세를 강제 → 항거2) 10여일 후 해산 - 안핵사 파견(2) 제2기 - 절정기 (1차 봉기, 반봉건적, 남접 - 녹두장군)1) 원인 - 안핵사 ‘이용태’의 마을 약탈2) 무장봉기 - 보국안민, 제폭구민 =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오지영 → 사발통문을 사방에 보냄                              [사발통문]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3) 백산 봉기 - 전봉준의 격문, 4대 강령 발표a. 사람 죽이지 말고, 가축 잡아먹지 말라 b. 충효, 백성 편안c. 왜놈을 몰아내자. d. 권세가와 귀족을 없애라                    [남접 전봉준]4) 탐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 시정, 균전사를 없애라고 주장, 고리채 폐지, 전결세와 환곡 등 세를 줄이라, 시장에서 소상인을 억압하는 수탈 시정하라.cf) 균전사[均田使] - 고을 개간을 위해 파견한 관리5) 황토현 전투(최초 관군 격퇴 - 전라 감영군을 격파) - 정읍, 고창, 함평, 장성6) 황룡촌 전투(홍계훈 부대에 승리) → 전주 점령7) 전주 화약 (1894. 5. 8)(3) 제3기 - 폐정개혁안1) 집강소 설치 [執綱所] (1894. 6) - 자치권력 기구 (민정기관)a. 전라 53개 군에 설치한 민정 기관 → 농민군 내정 개혁 목적b. 총본부 - 전주에 집강소 총 본부인 ‘대도소’설치c. 민정 체결 = 1인 - 집강 + 서기, 성찰, 동몽d. 기능 - 행정적, 의결기관(의사원), 호위군 설치e. 한계- 정부의 실천 의지 미약2) 당시 사건a. 정부의 교정청[校正廳] 설치 - 자주적 개혁 추진b. 청일 전쟁 -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톈진 조약을 빙자 군대를 보냄 → 시모노세키 조약 (4) 제4기 - 재봉기 (2차 봉기, 반외세적, 남접, 북접)1) 개혁부진, 일제 침탈, 일본군을 상대로 싸움2) 남접 = 전봉준 / 북접 = 손병희 / 최시형3) 논산 → 공주 이인 전투 승리 → 공주 우금치 전투 (일본군에 패배) → 정봉준 체포 → 광주∙장흥 전투 → 영동∙보은 전투“논산 일대에서 결집한 농민군은 노성과 경천으로 다시 진출하여 전투를 준비하였다. 감영에는 일본군과 관군이 세부대로 나뉘어 두 부대는 판치와 이인으로 나가고 나머지 부대는 감영에 있었다. 오후 3시쯤 전투가 시작 되었다.”“일본이 구실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함을 어찌 그대로 참을 수가 있단 말이오, ~ 지금 조정의 대신은 망녕 되고 구차하게 생명을 유지하며, 위로는 군부를 위협하고 밑으로는 국민을 속여 왜이와 연결하여 삼남의 국민에게 원한을 사며 망녕 되게 친병을 움직여 선왕의 적자를 해하려 하니 참으로그 무슨 뜻이오, ~ 갑오 10월 16일 논산에서 삼가 올림” –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등지서Ⅲ.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1. 성격 - 반봉건, 반침략 2. 영향 - 갑오개혁, 구국의병투쟁 활성화 (영학당, 활빈당) 1) 영학당 [英學黨] 항쟁(1899) - 고부, 고창, 보국안민, 척 왜양2) 활빈당 [活貧黨] (1900) - 대한사설논민 13조목 실천 천명, 방곡령 요구, 토지 균등분배 요구cf) 반봉건 농민 민란 - 방성칠의 난 1898, 이재수의 난 1901 - 제주 : 관군과 천주교인 공격3. 한계(1) 근대 건설 방안 미비(2) 무력기반 열세(3) 신분간 갈등 - 양반은 민보군 [民保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4) 신분제 타파의식을 보였으나 근대적 사회 의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였다.cf) 대원군을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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