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플라톤
PAMELA M. HUBY
소크라테스(470-399)는 아테네 출생이며, 아내와 두 자녀가 있다. 다소 가난했으나 젊었을때 유행하는 자연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Delphic oracle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고 선언했을때, 소크라테스는 그의 동료시민들 중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무지를 밝히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윤리학과 정치학의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골치아픈 질문을 하는 기술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기술의 사용은 모든 당의 정치인들에게서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는 못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후에 플라톤을 포함하여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다.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파괴시키고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로 재판을받아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그의 군인으로서, 시민으로서 둘다 용기가 있었고 공동의 의무를 수행해 내었다. 그리고 그가 잘못된 것을 하려 했을때 그를 지배하는 내부의 목소리에 의해 안내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에 대한 지식은 플라톤의 대화, 크세노폰의 작품들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THE CLOUDS"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일치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해석도 매우 다양하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가문출신이며 사람들은 그가 정치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메료되어 있었는데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에 충격을 받았다. 플라톤은 실질적인 정치학을 포기하고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개혁임무를 수행했다. 약 385년에 아테네에 아카데미를 세워 그리스 도시의 미래 지도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켰다. 늙어서 플라톤은 마지못해 무지한 디오니시오스 2세인 시라쿠세를 시실리안 그리스의 통치자가 되기에 적당하게 만들기 위해 교육에 착수했으나 그는 그것은 겁내했고 그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의 명성을 담고있는 수많은 대화편과 약간의 편지들이 있으며 그것들의 대다수가 정말 훌륭한 것이다.
B.C. 5세기 중엽에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아테네인들은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고 그리스 출신의 현자들이 아테네를 방문했다. 이러한 많은 현자들 중에는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철학자도 있었으며 제자에게 수업료를 받아 다양하고 새롭게 개발된 주제들을 가르치는 소피스트들 도 있었다. 이러한 주제들의 대부분, 특히 웅변술은 정치적 힘을 얻는데 사용되거나 법정에서 재판에 이기기 위해 사용되었다. 소피스트가 가르쳤던 것의 대부분이 건전하고 가치있는 것이었으나 남의 이목을 끌려는 기만적인 것이어서 소피스트는 보수적인 아테네인들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스트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데 그 이유는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말과 논쟁을 가지고 할수 있었던것과 없었던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사상가들에게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가 그들의 위치를 얻기위해 구두적 묘기의 기술에 관심을 두었다. 소피스트의 스타일은 프로타고라스에 의한 이야기에 의해 잘 설명된다. 프로타고라스는 어떤 제자를 수업료를 지불하지 않아서 소송했는데 그 제자는 그의 첫번째 재판에서 이겼을때 수업료를 갚기로 약속했었다. 만일 프로타고라스가 이겼으면 그 제자는 수업료를 갚아야만 하며, 제자가 이겼을 경우에도 그는 여전히 수업료를 내야만했다.(제자가 그 논쟁을 뒤엎을 수 있는 현명한 자를 피할수 없으며 그 소송에 질 경우 의무로부터 벗어난다고 주장) 대체로 프로타고라스는 좋은 평판을 얻었으나 많은 소피스트들이 역설과 궤변을 다루었으며 그들의 활동은 논리적 논쟁에 의해 전체적 합리과정을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것이든 모든것이 그러한 의미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미덕은 신념을 이성적 추론의 힘에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형태의 논쟁이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은가에 대한 엄청난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리를 연구를 위한 분리된 주제로서 선발하려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논리적 문제가 윤리적,정치적,형이상학적 문제와 혼합되어있으며 즉시 많은 부분에서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소크라테스 : 정의의 탐구
소크라테스의 공헌과 플라톤의 공헌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라톤의 제일초기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의 방법의 강한 인상을 보인다. 그리고 토론하기 위해서 선택한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대화자체가 실제대화의 기록인것 같지는 않을지라도 소크라테스가 지식이 미덕과 행복의 열쇠임을 믿었고 그것은 정의의 탐구방법에 의해 얻어진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단어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언급하는 사물에 대한 본질적인 성격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정의,용기,미가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 그의 친구들에게 물었으며, 좀처럼 성공적이지는 못했으나 그들을 적절한 정의로 인도하려 했다. 만일 그들이 일단 이것을 성최하게 되면 그들의 행동은 그렇게 얻어진 지식의 견지에서 발전한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 형식적인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으나, 많은 방법으로 제시된 정의를 시험했다. 그는 목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즉 단순한 행동들, 예를 들어 정의에 대한 정의로써 그는 그 행복의 모든 요소들이 정당하다고 불리워지기때문에, 이름과는 별개로 일반적인 어떤것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정의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게다가 그는 이것 자체가 말이 규정됨을 포함하는 정의 문장 같은 것을 명백하게 아무말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Teaetetus의 기하학 구두제조자같은 지식의 정의 비판에 의해 예증된다. Socrates에 의하면 이같은 정의는 단지 목록이라는 이유에서 그리고 구두제조 기술은 구두 만드는 방법을 아는 것같이 정의를 내릴수 있다라는 이유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제안은 막연함의 또는 모호함의 근거 또는 너무 넓거나 너무 좁게 보이기 쉽기 대문에 실패했다.
만일 제안이 이같은 입장 어디서도 실패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후에 추론에 의해 시험된다. Socrates는 논쟁의 전제들 중 하나같이 정의를 잡고, 남긴 전제를 동의하고 확실하게 말없이 그와 그의 대화자 사이에 몇몇을 잡는다. 영역은 전제들의 구성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결과는 반대가 나올때 또는 추리가 명확한 사실과 대립되는 이유로 만족치 못할때가 있다. 다른 경우로 전제와 틀린 어떤것을 따라 갈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나머지가 동의될때 정의 자체는 오류가 되고 거부된다.
여기에 꽤 단축된 예가 있다. 고르기아스에서 Socrates는 Callicles의 관점인 선과 즐거움을 생각했다. 처음으로 칼리클리스는 같은 때에 같은 것에 대하여 살기 좋은 것과 살기 나쁜것은 될 수 없다. 또는 어느 목마른 사람이 술을 마실때 동시에 행복과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만일 선한것과 행복함이 동시라면 이것은 참이 되는 진술을 동의하기에 불가능하다. 다시 칼리클리스는 선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 그리고 나쁜 사람과 겁장이를 구분했고 그는 선한 사람은 좋은 것으로 가득차있는 덕에서 선하고 나쁜 사람은 악의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나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람은 단지 행복함을 맛보기를 기대할 수 있고 나쁜 사람은 악의 고통을 맛보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로 우리는 칼리클리스가 보여주는 선함의 용감한 사람과 나쁨의 겁장이가 동일한 범위의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임을 발견한다. 여기서 제시된 정의의 결과가 사실에 반대됨에 있어 명확하고, 정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그처럼 정의의 본성을 결코 의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진정한"정의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찾는 그의 행동을 명백히 했다. 다양한 것들은 정의에 의해서 겨냥되어진다. 어떤 사람은 그 자신의 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분별력이라고 말하거나 그가 다른것은 그것은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혹은 다시 그는 사전에서 하는 것처럼 단어가 거떻게 말하고 쓰는중에 사용된 사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할런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 그는 이름뿐인 정의를 주고 있다. 그는 말이 어떻게 보고 있고 혹은 그의 견해에서 있었다. 그는 말이 언급되는 것들과 간접적으로 제외시키고 관련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절차는 언어 의 지식을 제외하고 지식을 돕기위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들이 물체와 단지 말에 대한 어떤 것을 진술한다면, 정의가 단지 우리에게 지식을 명확하게 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거나 거짓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당연시 했다. 그리고 예를 들면 그는 덕을 물어보는 데 옳은 답은 "억"으로 정의 했다.
여러가지 점들은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1. 소크라테스는 단어가 대표되는 무엇이거나 질이거나 어떤것을 마음에 품고 있거나 그가 현재를 인식하기때문에 그는 단어를 사용하는 때를 가정한다. 그러나 같은때에 그는 적당한 정의를 줄 때까지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고 가정한다.
2.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두가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어떤 때 그는 만약에 그것이 눈에 띌 부호를 가리킬때 만족한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을 직면해서 확실히 인식할 때 어떤 특징 ;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혼자 불변의 색을 동반하는 것으로 숫자를 메모에서 정의했다. 그러나 어떤때엔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는 후에 전문용어는 물체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어떤 진술을 원한다. 본질에 의하면 어떤것은 그것의 특히 중심에 있음을 의미하고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정말로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느낄 충분한 정보를 통해 견과의 껍질안에 놓여있다. 일단 우리는 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정의된 것에 직면해서 항상 인식할 뿐더러 우리는 또한 그것에 대한 더 많은 정보의 정의로부터 연역할 수 있다.
모든 이것들은 실수이다. 우리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한정해야 할 것을 지적하고 말은 특별히 하나를 빼내고 항상 애매하고 아마도 공통으로 작은 경우의 수를 쉽게 적용할런지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이 여습에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인식했다. 그가 Laches를 말할 때 그것은 할 옳은 일로 보여지는 첫번째를 통해서 "용기"의 현명하지 못한 저지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리가 예하의 용법의 혼란으로부터 말의 진정한 의미를 가려낼 수 있는지도 모르는 더 높은 통찰력의 어떤 종류에 의해 그것을 느꼈다. 이것의 "진정한"의미에 있어서 신념은 죽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판단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은 단지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이 하는 방법에 있어 그들을 사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긔록 우리는 활동적이고 제한된 용법을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정의에 대한 연구는 완전히 잘못 인도되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어울리는 정의를 찾는 것은 명백히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 것에 있고 말의 사용의 설명을 ....???? 우리는 단지 그들이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말을 사용하는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몇몇의 이름있는 정의는 더 말하는 것에 의해 다른 방법의 점을 지적할런지도 모른다. 좋은 정의는 우리에게 유용한 방식안에 우리의 생각을 조직화 한다.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복잡한 분석은 - 예를 들면 "점토의 토양, 모래와 동물과 야채"로써 "옥토"의 정의는 극단적으로 조명한다. gencra와 종의 이해된 체계안에서 식물과 동물을 두는 생물학적 정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예들은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용어의 적용의 꽤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경우이다. 후에 작은 경험은 우리가 만약 하나를 만난다면 어떤 족제비나 옥토의 한 점을 항상 인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그가 적용이 그렇게 명확하지만은 않고 추상적인 용어를 다루고 그가 그르고 그가 사람들이 같은 하나의 명백한 용어를 궁극적으로 가질수 있다고 여전히 믿기 때문에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옥토"와 "정의"에 있어서 어려움은 정도의 하나로 남아 있고 약간은 아니다. 아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거이 명백하거나 옥토가 아닌 흙의 한 점의 모든 경우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많은 다른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의" 혹은 "부정한"것을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던 어떤 행동이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 시작은 우리는 결실적인 토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제안된 정의가 거절된다 할 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는 것 안에 여전히 도울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들을 성취향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극단적으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접근의 이러한 형태의 훌륭한 예는 플라톤의 Theaetetus안에서 후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업적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업적을 어떤 식으로 수행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의 연대기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은 거의 없으나, 그의 스타일과 언어의 발전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로 하여금 추정에 대한 상대적인 체계에 대해 실질적인 동의를 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정돈은 플라톤의 철학적 발전에 대한 일관된 구조를 제시한다. 다음에 대한 그룹지어 제시한다.
1.Laches, Charmides, Lysis, Crio, Euthyphro, Apology.
2.Protagoras, Gorgias, Meno.
3.Symposium and Phaedo.
4.Republic and Phaedrus.
5.Theaetetus(about367),Parmenides, Timaeus.
6.Sophist and Statesman.
7.Phiebus and Laws.
크라틸루스의 연대는 불분명하다. 현재 진본이라 여겨지는 대부분의 저술은 360년 후의 시대에 속한다. 초기의 대화는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죽은 399년 후에 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의 대화인 '법률'은 플라톤이 죽은 347년에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그 제목은 대화편에 있는 화자들의 이름에서 대부분 채택된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 있어서는 소크라테스가 주도적인 화자였으나 많은 견해들이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 초상화와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인물들은 화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논쟁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만일 플라톤이 심각하게 논쟁을 받아들였을 경우엔 결정하려는 논쟁의 일반적 어조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심지어 소크라테스가 말한 모든것들도 심각하지 않다. 때때로 그는 명백하고 진지한 기술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문제에 대한 실험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이건 다른 어떤 사람이건 플라톤 고유견해를 나타내는 후기의 대화에서 주된 화자를 생각하는 것은 종종 분별있는 행동이 된다.
플라톤 철학의 상설을 두가지 다른 관점에 의해 복잡하게 되었다. 가끔씩 그는 씌여진 단어는 철학적 가르침을 적절하게 수반할 수 없다고 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생략되고 단순화된 대화를 유명한 작품으로 여겨야 한다. 그의 견해는 아카데미에서 오로지 구두에 의한 가르침만이 완전하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의 재구성은 상당히 다르며 심지어 그에는 어떠한 가르침도 없다고 거부되어 왔다. 그러나 대화들 자체가 풍부한 가치가 있기때문에 이런 난점들은 중요치 않다.
다른 난점은 플라톤이 소개하는 그림과 같은 많은 논쟁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알려진 것으로써, 그는 좀 더 정돈된 형태로 제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표현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대화는 교과서와는 아주 거리가 멀고, 플라톤에 대한 설명은 다른 많은 작품들을 같이 해석하고 위치하는 것에 의존해야 한다.
이 연구를 두 부분으로 나누기는 쉽다. 하나는 '공화국'을 통해 대화를 보충하는 것인데, 플라톤은 일관된 이론 또는 이론들의 묶음을 섞는 것을 개발하고 있다. 그가 나중에 쓴 '공화국'은 아마도 아카데미에서의 토론의 결과일 것이고, 그의 초기작품보다 더 기술적이면서 덜 극적인 "비판적"대화형식의 결과인 것이다. 이들 대부분을 우리는 부분적으로 공부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초기철학
플라톤의 철학의 핵심부에는, 우리가 오관을 토애 알고 있는 일상세계란 온전히 실재하는 것일 수 없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상이한 방식으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일상세계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며 변화와 생멸로 가득하다고 느꼈다. 한편 확실하고 오류가 없는 인식이란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는 견고하고 완전한 어떤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식이란 전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유동하는 감관의 대상들 너머에 견고하고 완전한 대상들의 세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철학자의 궁극적인 과업은 이 세계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플라톤 사상의 많은 측면들이 이 문제와 관련된다.
첫번째 측면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유래하는 정의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는 초기의 대화편들에서 아마도 소크라테스를 매우 가깝게 따르고 있다. 이들 대화편들은 "용기란 무엇인가?"와 같이 주로 윤리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의들의 발견에 중점을 두고 있는 사용된 방법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다른 분야들에로 이끌었다. 이 대화편들에서는 우리가 정의하려고 하는 정의나 용기나 덕이 참으로 있다는 것은 문제되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역랑부족일 뿐이다. 플라톤이 의당 인식과 그것의 대상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리 커다란 진일보는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의 계보는 쉽사리 윤리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설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언급하고자 하는 어떤 것에 대해 정의를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페넬로페와 헬렌은 모두 여자이다'라고 또는 '이 연필과 저 연필이 같은 것은 이 막대기와 저 막대기가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할 때처럼, 하나의 단어가 여러가지 상이한 사물이나 상황에 적용될 적마다 우리는 이러한 사물들 또는 상황들에 공유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여자' 또는 '같다'고 규정할 때 우리가 正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정의들에 대한 탐구를 넒히는 것이 플라톤 사상의 한계점은 아니었다. 그는 X에 대한 정의로 답할 수 있는 "X는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 이 X는 그러한 것인가?"를 묻고자 하였다. 즉 '이 X'가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대상을 가리킬때, 예를 들어 "이 아름다운 조각품은 왜 아름다운가?"를 묻고자 하였다. 이는 별난 종류의 질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희랍 철학의 일반적인 조류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엇인 것은 왜인가?"라는 질문은 대부분의 초기의 자연철학자들의 마음속에도 있었으며 플라톤은 같은 종류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완전히 깨닫고 있었듯이 그는 새로운 종류의 대답을 발견하고 있었다.『파이돈』편에서 그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두 형식의 인과적 설명을 대조시키게 하는데, [하나는] 자연적 혹은 기계론적인 설명으로 모두가 아낙사고라스도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복적을 통한 설명으로써 그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었다. 아낙사고라스와 그와 비슷한 사람들은 모든ㄴ 인과율이 예를 들면 한 당구공이 다른 것에 부딪힐 때 발견되는 그러한 종류에 귀결되기를 원하였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정신의 활동속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형탱의 인과율을 발견하였는데, 특히 어떤 사람이 어떤 확실한 목적을 추구해야 할까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선하기때문이다. 플라톤은 순서에 따라 모든 인과적 설명 즉 왜 사물이 그렇게 있듯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인간의 정신적 사건들을 넘어서까지 확장되는 목적의 관념(이데아)를 통하여 이런 하나의 형식으로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여 플라톤은 "이 X는 왜 X인가?"라는 질문에까지 대답하였는데, "이 X가 X인 것은 그것이 X의 이데아를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하얀 꽃이 하얀것은 그것이 정의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정의'와 '흼'과 같은 말들을 대상들의 명칭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이 하얀 꽃'이나 '이 정의로운 행위'에서 언급되는 것들과는 다른 질서를 갖는 대상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플라톤은 정의와 흼과 같은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정의와 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속하는 대상들의 부류에까지 묻도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이 이것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형상론' 혹은 '이데아론'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이 대화편들속의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며, 여러가지 점에서 대화편들은 정보가 불확실하고 일관되지 못하다. 그러나 그 이론은 핵심적인 내용들에 있어서는 어려움없이 재구성될 수 있다. 형상들은 보편자들이긴 했지만 단순한 보편자들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현실세계로부터 벗어나 따로 존재하며 그것보다 더욱 실재적이며 불변하는 대상들이었고, 감각들에 반대된 것들로서의 정신에 의해서 알 수 있으며 현실세계의 특수한 각 부분들을 따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를 [말하기 전에] 플라톤의 특수용어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는 전문적인 어휘를 엄격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하는 방식을 어떻든 간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가장 명석하게 되도록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외적인 대상들을 말하기 위하여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려고 하자마자, 어떤 철학자가 하려고 하듯이 단어들은 전문적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은 동시에 적어도 그것들의 상식적인 의미와 용법의 어떤 것은 유지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전개하는 이론의 형식에 매우 미묘하게 영향을 주게 된다. 셀라스는 말한다.
형상이론의 창조는 형상이론의 언어를 창조한 것과 같다. 단어들의 일상적인 의미와 철학적 의미의 차이란, 이 차이점들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데아들에 대한 철학적 논증과정이 천천히 익어가는 열매이며, 그것들이 해결되기 위해 도입되는 난처함과의 자유형 레슬링의 열매와 같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사용했던 전문용어들을 개괄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다. 먼저 그는 '이데아들'또는 '형상들'에 대해 말하였다. 이들 두 단어들은 워해는 '형태'와 같은 것을 의미했고, 플라톤의 시기에는 '이데아'란 정신속의 사상에 대한 지칭을 갖지 않았다. 두번째로 개별적인 형상을 말하고 있을 때에는, 그는 하나가 존재할 때 예를 들어 '정의'와 같은 표준적인 추상명사를 사용하든가 또는 그 밖에 'X 그자체'식의 표현을 사용하든가 둘 중에 하나였다. 이때 'X'는 예를 들어 '정의로움 그 자체'와 같이 중성형용사를 나타낸다. 때때로 이것은 '정의로움'이나 '성스러움'과 같이 짧게 쓰이기도 한다. 그는 항상 자신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명석하게 하기 위해 문맥에 의존하고자 하였다.
이 두번째의 말하는 방식은 아마도 다른 계통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듯 한데, 그것은 또한 형상들에 대한 믿음에로 이끌었다. 이 개념은 하위의 특수자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형상들을 취한다.
1. 기하학에서 우리는 완전한 삼각형들과 원들이라는 개념에 친숙하게 되며, 이것들과 우리가 종이위에 그리는 도형들이나 실제상의 몇몇의 책상이나 우표 또는 쇼울과 같은 원의 또는 삼각형의 형태들과 구별한다. 도형들과 책상들은 오로지 근사치에 가까운 삼각형일 뿐인데,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충분히 주의를 갖고 측정을 해 보면은 필연적으로 완전하다. 그렇게 볼때, 만약 이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우리가 보고 만지는 사물들과는 매우 달라야 한다. 그리고 혹 나중의 철학자이 그랬을 것같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따져볼 수 있는 사물들은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활실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플라톤에게는 불합리하게 보였을 것이다.
2. 특수자들은 다른 방식에서 불완전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여자나 동상조차도 흠은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더욱 아름다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플라톤이 믿은 것은, 우리가 절대적인 美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것 또한 감각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 끝으로 특수자들은 반대되는 술어들의 주어가 될 수 있단는 혼란스러운 사실이 있다. 예를 들어 피터는 제임스와 비교될 때는 키가 크지만, 존의 편에서 보면 작다. 그러나 그는 줄곧 피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똑같은 사람에 대해 동시에 상반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그가 다고 불완전하고 온전히 실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키가 큰것은 확실히 어쨌든간에 결코 작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논증들에 의해 플라톤은, 우리가 아는 사물들이 성공하지는 못하겠지만 열심히 닮으려고 하는 완벽한 대상들이 어떻게든 어디에든 존재한다고 가정하게 하였다. 여기서 다시 그는 형상들에게로 되돌아 온다.
마지막의 사상 계보는 『메논』편에서 놀라울 정도로 예시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무지한 어린 노예에게 그가 따라서 그림을 그리게 하면서 기하학적인 문제를 질문한다. 적절한 질문을 함으로써 그는 그 소년에게 실제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면서 게속해서 올바른 대답에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소년이 몰랐던 기하학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소년은 결코 이승에서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주장된 바처럼, 태어나기 전에 지식을 획득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었고 그 때에는 온전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태어나는 과정에서 잃었음에 틀리없으며, 이제는 오로지 어렵게 상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소크라테스는 결론짓는다. 이 지식은 형상들에 대한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은 유리한 환경속에서, 배우지 않은 수학적인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내고 또한 '완전한 직선'과 '완벽한 미'와 같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의 예를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한다. 완벽한 예를 볼 때, 우리는 그것들의 원형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어떻게 형상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는가에 대한 개괄이다. 일단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자 그는 정치, 도덕, 종교, 교육, 예술, 과학 등의 모든 분야들에서 그것의 결과를 밝히는 작업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는 우리가 감관들로써 알고 있는 세계가, 유일하게 참된 인식의 세계인 영원하고 완전하고 변화없는 형상들을 어슴프레하게 반영하고 있는 변화하고 불완전한 세계라고 여기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다. 인간의 육체는 현실 세계에 속하지만, 영혼은 형상들에 가깝고 그 자체로 영원한 듯하며 태어나기 전과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이 이론에는 많은 갭과 어려움들이 있으며 그것이 기초하는 논증들에도 그렇다. 그것들 중의 많은 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플라톤 자신의 만년에 의한 것으로 보여지고 그렇게 생각되며, 우리가 관련된 대화편들에 이르기까진 그것들에 대한 비판을 유보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점들이 여기에서 다루어 질 수도 있다.
특수자들의 불완전성으로부터의 논증들 중에 가장 약한 것들이 가장 지속되는 것들이다. 주어진 예, 즉 한 사람이 크면서 작다는 예는 중요한 차이, 즉 단순한 술어적 용어들과 합리적 용어들 사이의 차이를 너그럽게 보아 넘긴다. '큰'과 '작은'또는 '무거운'과 '가벼운'같은 말들은 절대적 의미를 갖는 건 아니지만, 약산의 표준적인 비교에 대한 지칭을 함축하고 있다. 한 사람은 어떤 다른 사람과 비교될 때 혹은 모든 사람의 평균 신장과 비교될 때 크다. 그러한 지칭이 없다면 용어의 의미는 공허하다. 이것은 어떤 것도 크면서 작은 것은 없다 또는 무거우면서 가벼운 것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나의 대상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하에서만 그럴 수 있으며, 예를 들어 피터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크면서 작다와 같이 말하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며, 그리하여 진짜로 상반되는 술어를 갖는 주어는 온전하게 실재적이지는 않다.
기하학적 완전함과 절대적 미와 같은 어떤 것에 대한 두 논증들은 더더욱 미묘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들과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기 전에, 두가지 점은 완벽히 증명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만족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종류의 특수자들이건간에 완전함에는 미치지 못하며, 플라톤이 말하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오나전함에 대한 지식은 형상들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물질적인 대상도 결코 완벽한 원형이라거나 절대적으로 직선자를 이루지는 못하며, 예를 들어 우리가 충분히 조심스럽게 현미경같은 것으로 그러한 대상을 조사해 보면 우리는 그것들의 외관이 조금이라도 울퉁불퉁함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모서리가 직선처럼 보인다거나 또는 다르게 말해서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이 직섭모양의 대상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그렇다고 볼때, 그것은 나의 감관의 증거를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우리에게 직선의 관념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만약 이것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점점 더 작게 휘어지고 꼬부라진 것들을 빅해 봄으로써 직선의 관념에 도달할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하여 우리는 전혀 꼬부라지지도 않았고 휘지도 않은 예를 들어 완벽한 직선인 어떤 것의 관념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미의 관념은 보다 복잡하다.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는데, 우리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때닫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그것보다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거떤 것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절대적 미에 대한 직관적 관념 또는 절대적 미와 아주 흡사한 어떤 것에 대한 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너무도 아름다워서 어떠한 것도 그것보다는 아름다울 수 없는 어떤 것"이란 표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이것이 그것에게 있는 모두라면 이제 다시 우리가 형상들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하위의 특수자들로부터의 논증들은 형상들의 존재의 확보를 향해 더이상은 나아가지 않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노예 소년의 기하학에 대한 지식을 아룰 수 있다. 적합하게 선택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수학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참이지만, 플라톤의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수학은 방법상으로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지식의 형태이지만 예를들어 역사학이나 식물학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때문에 어떻게 노예가 그것을 획득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태어나기 전의 경험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직선'이나 '삼각형' 숫자를 나타내는 말들 더불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의 경우처럼,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들에 대한 확실한 전제들과 같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전제를 남기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오로지 그것들이 참인 한에서만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결과되는 또한 확실히 참인 정리들만을 논증한다.
기하학적 체계가 형식적으로 세워진다면 이러한 가정중의 몇은 공리로서 처리될 것이며 특별하게 사용된 용어는 주의깊게 정의될 것이다. 기하학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공리와 정의를 이해하는 능력과 함께 연역적 결론을 끌어내는 능력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JOHN은 결론하지 않았고 사위가 있다는 두 진술을 하고 JOHN은 결혼한 딸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때 사용되는 능력인 것이다.플라톤의 논쟁은 단지 인간이 자연적으로 추론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플라톤이 그의 예가 특별한 것이었으며, 유사한 경우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만일 그 소년이 그가 탱나기 전에 일어난 그리스 역사상의 사건의 지식을 보였다면 혹은 결코 배우지 않은 어떤 의료지식을 보였다면 그 경우는 매우 다를 수 있다. 전자는 전시대에 그가 그리스에서 살아왔고 피타고라스에 의해 제시된 일종의 재구체화의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후자는 아마 플라톤이 원했던 것에 거의 근접한데 플라톤이 원한 것은 형식과의 일치에서 파생된 사건이 아닌 원칙에 대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가 일어났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로써 그들은 사용하기엔 실현가능성이 없다.
이러한 비평은 플라톤이 위해한 철학적 중요성의 많은 면들에 대해 고민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의 처지가 불만족스러울 지라도 적어도 그는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지식과 신념
지금까지 우리는 형탱의 존재 증명에서 굉장한 흥미를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플라톤의 개념 - 자연의 지식과 믿음의 일반적 판단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것은 극도로 복잡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이론적 관점뿐만 아니라 이 기간동안 사용한 일반 감각방법을 지닌 관점으로 판단하도록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문제의 다른 면은 다른 단락들 속에 지배적이고 그것은 그것들을 만족적인 방법속에 함께 놓는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책에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철저한 잘못된 것의 종합을 만드는 것보다 연관되어 있는 여러가지 점들을 분석하는데 더욱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본적인 특징은 우리가 너무나 오해하기 쉽게 지식과 신념이라고 부리지 말아야 할 두가지 다른 인식의 상태들 사이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진실된 것이 틀림 없으나, 우리가 믿는 것은 진실될 수도 있고 거짓될 수도 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플라톤은 잘못된 차이점들과 동일한 점들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메모에서는 둘 다 상식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졌다. 한 사나이가 그 방법따라 거기를 여행했었으면 그 사나이는 라리사에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비록 거기에 가 본적이 없었고, 단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 경로를 들었었기만 했더라도 그는 정확한 판단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두 사람을 그 사람들이 라리사로 가는 또 다른 방법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들 자신이 라리사로 가는 방법을 찾은 것에서 닮았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지식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지식보다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고 보다 덜 왜곡되어지거나 덜 소실되어졌다. 지식과 신념은 비록 그것들이 그것들의 철학적 기초들과 다르지만 그것들의 직접적인 효과면에서 유사하게 여기서 다루어졌다. 그 둘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사실들과 같은 이러한 상황속에 있는 같은 종류의 물체들과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은 신념이 원리에 대한 추론에 의해서 신념이 지식으로 변화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 원리는 그의 젊은 노예와 기하학에 관한 인용절에서 그는 태어나기 전에 얻었던 지식의 회상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추론은 라리사로 가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길의 예제와 같은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기하학 같은 연구는 적용될 수 있다. 플라톤은 아마도 정신속에서 어떤 사실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다른 수업 주제들처럼 기하학에서 가식적인 경향을 배우는 것과 진실한 통찰을 배우는 것과는 다른점이 있다. 노예 그 자신의 힘으로 어떤 것들을 추론해야 하는 노예는 필연적으로 진실한 통찰을 얻었다. 정말로 소크라테스의 전체의 방법은 정신속에서 뿐아니라 수학적인 영역에서 어떠한 결과로 이끌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나 선생들로부터 경솔하게 정신적인 원자를 배운다. 그리고 만약 그 가르침이 확실한 것이면 그들은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 진실한 믿음들을 가진다. 그러나 비록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하라고 주장하긴 하여도, 그들이 지식을 얻을 수 있는것은 단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어떤 것들을 검토하는 것에 의해서일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플라톤의 지식과 신념의 이론과 연관되는 공개적인 어떠한 어려움도 없었다. 그러나 Republic에서의 보고는 더욱더 깊어가고 그리고 필연적으로 서투른 질문을 일으킬 것이다. 여기에서 지식과 신념은 서술적으로 마음의 분리된 상태와 다른 객체를 가진 것으로서, 또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형식의 지식과 감각적 세상에 대한 의견으로서 구별된다. 플라톤이 생각한 것이 이것이었다. 지식과 신념은 분리된 분야인데 마치 시각과 청각이 분리된 감각인것과 같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객체를 가져야만 한다. 시각으로 우리는 색깔과 모양을 보고, 청각으로 소리를 듣는다. 유사하게 지식과 신념은 다른 객체를 가져야만 한다. 문제점은 시각과 청각이 하나의 수준위에 있으면서 물질적인 개체들을 이해하는 방법들로써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지식과 의견은 다른 가치와 입장을 취하며, 플라톤에 의해 주어진 것처럼 그들의 객체들이 너무 달라서 완전하게 연관이 끊어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나중에 파르메니데스에서 토의된 것과 유사한 수락할 수 없는 입장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항상 일반상식으로 느꼈으며 그의 이론들을 분명하게 사례인 것에 적응시키려 했다. 따라서 그는 지식과 의견이 밀접하게 연관된 자연법칙을 수락했고, 그가 만들고 싶어했던 모든 면을 조절한 매우 복잡한 이론을 발달시켜야만 했다. 그 두 분야사시의 연결은 그들의 객체 사이의 연결을 수단으로 하여 발견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접근은 Republic에서 "The Sun,""The Divided Line,"그리고 "The Cave"로서 알려진 일련의 예증 속에서 세워진다. 동시에 단순한 예증과 완전하게 논리적인 논쟁이 아닌것이 있는데 플라톤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추론된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 예증들은 플라톤이 스케치해왔던 이상국가의 미래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교육의 아웃라인안에 포함된다. 이러한 교육의 목적은 학생이 형식의 범위를 완전하게 이해하게 하는데 있다.
플라톤의 인식론의 이해를 위해 3가지 예증에 가장 중요한 것은 "The Divided Line"이다.
ⓐ-----------ⓓ-------ⓒ------ⓔ----ⓑ쭬
AB선을 그어 C를 똑같지 않게 나눈다. 그 다음 AC와 CB를 같은 비율로 D와 E로 각각 나눈다. 이러한 비율은 다양한 인지활동과 그러한 활동의 객체사이에서의 관계를 지적한다. 플라톤 예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모든 상세한 부분들의 완전히 일관된 해석을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질문들에 압박을 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같지 않다. 이 선의 본질적인 특징은 이러하다. BC 전구간은 감각의 세계와 그것을 인지하는 방법을 대표하며, CA 전구간은 형식의 영역과 형식의 영역을 알게하는 정신영역을 대표한다. 이러한 것이 서로서로 어떻게 지탱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BC의 하부구간을 보아야만 한다. BC 하부구간은 그 나머지를 예증한다. 여기서 더 큰 부분인 EC는 horses,beds,trees와 같은 물질적인 객체로 대표하며 작은 구간 BE는 mirror-images,shadows,reflections와 같은 형식으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복사(모방)을 대표한다. 플라톤은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만든다. (1)우리는 그 복사본들이 원본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연구할 수 있다.복사본은 원본보다 사실적이지 못하며 존재하기 위해 원본에 종속되는 것이다. (2)우리는 반영이나 그림자에서 보는 인간마음의 상태와 진짜사물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는데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복사본을 화가가 시내에서 반사를 연구하는 것처럼 보거나, 복사본으로서 그것을 보고 원본의 어떤것은 그것으로부터 배우려 하는 것이다.
감각세계에서 복사본과 원본과의 관계는 대체로 doxa(BC)에 의해 알려진 형식 사잉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림자나 반사처럼 그들이 서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들은 넘어서서 찾지는 못한다. 그러나 감각세계는 무상하고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반영함으로써 사람은 그 세계로부터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며 그것이 파생된 형식을 알기위해 추구하려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Doxa는 이성이나 생각(noesis)(CA) 에 의해 알려져 있는 형태들 사이의 것같은 것이다. 물질적인 것들은 모방들이고, 그것들의 본질들의 열등한 모방물이다. 그림자들이나 반사들같이 그들이 상징하는 대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들 이상으로 나아가려하지 않는다. 감각의 세게는 빨리지나가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그리고 사람은 이런 모순들 속에서 모가 그 세계로부터 진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형태들로부터 얻어지는 것을 알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Doxa는 그것이 다른 것들에 관여하기 때문데 지식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의 진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모방의 비유에 의해 표현하는 두 개으 영역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어떤 형태들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감각세계의 더 커다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Doxa는 자연스럽게 우리주위의 세계와의 연관에 의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행로에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Divided Line의 내용속에서 프라톤은 두개와 세개 사이의 다리로서 수학에 집중하였다. 기하학에서 예를들자면 우리는 종이 위에 거친 그림들을 그릴 수 있다.그러나 우리의 논의는 이러한 불완전한 모양들이 아니다. 그려내질수 없었던 보다더 완벽한 정사각형, 원, 삼각형에 관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나타내어지는 것들로부터 그것들 위에 숨은 실체를 이끌어내고 물체들에 대한 진실한 지식이 가눙하다는 것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수학은 지식의 형태중 가장 고차원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위의 부분중의 어둑 적은 부분인 CD의 선에 속한다. 그것의 수단으로 우리가 형상들의 세계로 깨달았을때, 우리는 위의 나누어진 DA에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형상들 자체의 힘이나 자연적으로 논리에 의해 형상들을 공부한다. 수학은 그거시 가설들로서 시작해야 하고 그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데 열등하다. 그리고 가설들 그것들 자체는 시험될 수 없다. 그러나 논리 속에서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가설들로부터 가설적이지 않고 확실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추론의 기점인 어떤것에까지 완성한다. 한때 이것은 달성되어졌고, 우리는 우리의 기점으로부터 가설들을 이끌어 냄에 의해서 우리의 초기의 가설들을 정당화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어떤 지식의 대상이 그의 정신적 수련의 목표에 다다르기를 바랬다. 이것은 우리가 좀더 커다란 세부분에서 The Sun과 The Cave의 비유들로부터 발견되어질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전자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태양이 정신에서 선의 형상과 같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태양이 빛과 시야와 생명의 근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선의 형상은 모든 것들에 대하여 지식과 존재의 근원이다. The Cave의 내용은 교육적인 발전이 어떻게 만들어져야되는 지를 설명한다. 죄수들이 그들뒤의 불에 의해 단지 벽의 그림자들의 형상만 보이는 동물에 수용되어져있다. 그들이 풀려났을때, 그들은 동굴 밖으로 이끌려 나오고 바깥세상 속에서 물체들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전에 그들의 생활이 아주 쓸모도 없었단는 것을 깨닫는다. 마침내 그들의 눈이 더욱 강하게 될때 그들은 여기서 선의 형상을 상징하는 태양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게된다. 선의 형상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교육의 최고점이고 그가 그 밖에 모든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선의 형상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플라톤이 말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것들에 대한 이해로 이끌 수 있는가. 가장 희망적인 실마리는 플라톤에서 발견되어지는데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단지 한종류의 설명만이 그를 만족시킬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것들을 그 설명이 최선의 방법이기때문에 그것들은 그것들 현상태로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것들이 선의 형상에서 나왔다면 그것들은 그것들 자체로 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선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그 밖의 모든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거대한 종합의 다양한 부분을 보다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지식의 의미는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매우 복잡한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식은 우리가 하나의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실은 반드시 참이 외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는 무엇이 그 경우가 아닌지 알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또한 무엇에 관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가진 앎과 어떤것이 그러하다는 믿음, 혹은 생각과 같은 덜 확실한 것을 구분한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된것의 이 2원성때문에 지식의 어떤 단순한 설명도 가능하지 않다. 사실, 분석은 더 해나가야 하고 거기엔 이러한 두면이 있을뿐 아니라 그것들은 전적으로 독립해 있다는 것을 지적해 내야한다.많은 것들이 우리의 앎이 없이 있으며 우리는 쉽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어떤것에 관하여 완전히 확실성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철학자들의 사람을 홀리는 행위는 그 두개가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만약 내가 하나의 일을 확신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래야 하고 다르게는 될 수 없는 상태로서 묘사되어 왔다.
플라톤은 지식의 2원성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한사람이 어떤것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반을 가졌을 경우에만 단지 그것을 알고 있다고 불리워질 수 있고, 지식은 흔히 믿음보다 안정적이라는 견해를 내놓으며 "Larissa로 가는 길"의 예 소게 심리학적 입장을 고려했었다. 그가 객관적인 면에 의지했을때 그는 아마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알려진 무엇이 반드시 진리란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불건전한 결론이 이끌려 나왔다. 예를 들어 지금 비가 오고 있다든가 잔듸가 녹색인 것을 아는것처럼 단어속에 표현될 수 있는 사물들을 아는것을 우리가 평상시에 얘기하는 반면에 우리는 또한 더욱 직접적이고, 더욱 플라톤의 생각에 적합하게 보이는 다른 종류의 앎을 때때로 얘기한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가 여기 플라톤의 구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감각속에 가지고 있는 지식의 종류이다. 내가 잔듸를 볼때, 나는 즉각적으로 그것의 녹색을 깨닫는다. 이것은 그것이 녹색이라는 것을 아는것 이상이다. 거기에는 직접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나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녹색의 바타 사이의 눈에 보이는 관계가 있다.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나는 이 특정의 잔듸가 녹색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관계때문이다. 또다른 주목할 점은 이 깨달음의 양상은 명석함의 등급을 가진다는 것이다. 햇빛있는 날의 잔듸를 주시하는 것과 안개를 통해 먼 거리의 형체를 힐끗 보는 것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양쪽 경우가 다 직접 볼수 있는 경험이다. 그러나 후자의 식별은 불확실한 반면 전자의 식별은 그렇지 않다.
플라톤은 직접적인 녹색의 깨달음과 비슷한 지식의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것을 찾기를 원했다. 그는 우리의 볼수 있는 것들처럼 우리의 정신적 경험들도 명석과 확실성에 의해 등위가 지워질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정신의 경험과 관계된 불확실성이 안개처럼, 방해하는 매개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득한 실제의 결핍을 깨닫는 대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정신적 경험에 포함된 불확실성의 양상을 위한 유사물인 안개속의 완전한 진짜 사람 또는 나무가 아니고 플라톤 자신이 예로서 사용한 그림자나 반영이다.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의 이상은 대상이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명백한 정신의 상태이다. 그러나 단지 가득한 실제 대상만이 이 방법으로 알려질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에겐 객관적인 면위의 진리와 주고나적인 면에서의 확실성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제시했던(거기에선 두개의 면이 독립적이다.) 앎의 분석이 충분한지 어떤지, 감각들의 도움으로 알려진 물질적 대상의 지식의 단지 하나의 유형에만 적용되었는지 어떤지의 의문이 남는다. 의심할바없이 많은 사람들은 미리 플라톤이 마음속에 가졌던 것처럼 어떤 지식의 높은 유형을 믿어왔고 찾아왔다. 그러나 사장 성공하기 쉬웠던 사람들, 즉 신비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그 지식은 너무 숙련되어서 거의 단어로 바꿀 수 없다는데 동의했다. 그들은 잔듸의 녹색을 보는 한 사람의 위치에 있었으나 그것이 녹색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플라톤이 원했던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그의 이상국가의 통치자들에 의해 그랬을듯한 것처럼 한번 성취된 지식은 일상의 삶속에서 표현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예견했던 단 하나의 한계는 교과서에 있는것으로서 가르쳐줄 수 없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사와 학생 사이의 긴밀한 유대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오늘날 어느 대학 교과목에서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사실상, 그의 초창기 저작들에서 플라톤은 어떻게 지식이 표현되는가에 관해서는 매우 조금뒤에 신경쓰지 않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것처럼, 그는 후에 언어의 문제와 어떻게 언어와 지식이 관련되는가의 문제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영혼의 불멸성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플라톤의 대부분의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후기 시절을 말해주는 Phaedo편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Republic,Phaedrus,Laws에도 다른 주장(영혼의 불멸성에 관한)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보다큰 그룹의 논쟁(주장)에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구분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주의는 영혼이 없어지지 않는 그러한 본성임을 증명하는 것에 집중되어져 있다. 그렇지만 Phaedos에서 그의(소크라테스)친구들로부터의 반대에 대답하는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단지 육체의 한 국면으로 만드는 경쟁적 이론에 대해 토의한다. 우리는 그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것이다.
그 문제(영혼을 육체의 한 면으로 파악하는것)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Simmias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의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그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음조가 있다는 사실과 서정시의 관계와 같다고 제안했다. 만약 현들이 어떤 관계에 있다면(그 관계에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적 설명을 줄 수 있었던) 서정시는 음조속에 있다.; 현들이 끊어질때 어떠한 그러한 조화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르는바 영혼이라는 것은 단지 육체의 요소들 사이의 어떤 관계이다.그리고 육체의 분해에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기계라는 견해에 매우 가깝게 근접하고 있으며, 또는 인간의 정신활동과 "기계적 뇌"의 활동사이에 매우 유사성이 있다는 매우 최근의 원리에 매우 가깝게 근접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이론에서는, 유일한 것이란 육체이거나 기계이다. 그것의 파괴에도 생존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인간과 수금 사이의 확실한 중요한 차이를 지적해 냄으로써 답변을 한다. 수금의 현들에 의해서 생산된 선율들 사이의 관계는, 그들이 음조이든 아니든, 현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된다. 즉, 그 관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완전히 수동적이지는 않다고 주장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그것은 육체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 때때로, 한사람이 갈증을 느끼고 마시고 싶어할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마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마시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가능한 해석은 육체는 마시는 것을 원하고, 영혼은 "안된다"고 말하고 그리고 그것을 멈춘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러하다면, 영혼은 능동적인 어떤것이고 그리고 어느정도 육체에 독립된 것이어야만 한다.
이제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증명하기에는 분명이 충분치 못하다. 사람이 수금보다 더욱 복잡하다는 것은 확실하게 보여진다. 거기에는 어떤 현도 다른 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육체의 한부분이 영혼의 간섭없이 육체의 다른부분의 행동을 반대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오늘날 기계들은 한 부분이 다른 많은 부분들의, 비록 이들은 여전히 그들의 "주장력"을 가지고 있지만,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육체는 최소한 수금보다는 더욱 복잡하지만 결론내릴수는 있다.
다른 하나의 주장은 영혼이라고 불리는 분리된것이 있다는 가정을 함으로써 시작된다. 처음은 우리가 이미 만났던 anmenesis로부터의 주장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기하학을 배워보지 않았더라도 기하학을 알 수 있을것이다. -즉, 그는 이세상에서 획득하지 못했던 지식을 가질 수 도 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지식이 (이 세상에서 획득하지 못했는데도 가직 지식) 획득 되어졌던 이전의 존재를 가졌음이 틀림없다. 만약 그렇다면, 출생전의 상태는 영혼이 육체와 떨어져서 존재하는 상태일것이다. 긜고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다가 그리곤 다시 잠드는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육체밖에서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곤 그 육체 안에 있고, 그리고나선 다시 죽음속에선 그 밖에 있다는 것을 결론 내리는 것은 이성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anamenesis의 증거(증명)가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보아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주장의 나머지 부분을 고찰할 칠요가 없다.
다른 주장들은 영혼이 유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따라서 그것들처럼 불멸하며, 그리고 그것은 육체의 주인이며 그것보다 더욱 신성하다. 그리고 미라로 만들어졌을때, 육체는 무한하게 지속되기 때문에, 영혼은 더오래 견디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 다음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더욱 중요해 보인다. 첫째로, 우리는 우연적인 것과 필수적인 대상의 성질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해야 한다. 전자는 그것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도 잃을 수 있는 것이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기를 그칠수 있고 그리고 소크라테스이기를 그리지 않으며 키가 클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러 불과 3은 그들이 불과 3이기를 그침이 없이, 불이 뜨겁기를 그리거나 또는 숫자 3이 홀수이기를 그릴 수 없다.
영혼의 본질적인 성질들은 무엇일까? 영혼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다. 그래서영혼이 육체안에 존재할때, 생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생명이 필수적인 성질이라면, 만약 그것이 영혼에 남아 있는 것이라면, 영혼은 죽음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이제 신과 생명의 유형들과 같은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다른것들이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들은 파괴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면 영혼 역시 파괴되어질 수 없는 것이기 쉽다. 그리고 죽음이 육체에 왔을때 영혼은 좋은 질서속에 있는 어떤 다른곳으로 가는 것이기 쉽다.
플라톤의 주장은 그렇게 나타내어졌는데 반드시 그럴듯하지 않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전문용어들이 제거되어 왔었던 것과 버려진 유형들의 전문용어들 속에서 플라톤이 그것을 말하려 했던 플라톤의 시도가 추가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골격은 위에서 주어졌고, 그리고 그것의 결점들은 분명하다.
야기된것 중 가장 흥미있는 견해는 본질적인 성질들에 대한 토의이다. 어떤 성질들은 본질적이고 다른것들은 우연적이라는 개념은 그럴듯해 보이고 그리고 긴 역사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이 연계된 실제의 정의의 개념처럼,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더욱 면밀히 살펴볼땐 덜 그럴듯하게 된다. 만약 실제의 정의가 있었다면, 우리는 본질적인 성질이 정의의 부분을 형성하거나 정의로부터 받아들여진 방법에 의해 연역되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정의들이 어느정도 임의적이고, 그리고 우리는 각각의 대상에 하나의 실제의 정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아 왔다. 따라서, 하나의 정의에 따라 성질 A는 본질적인 것이 될 수 있고, 그리고 또다른 정의에 따라 성질 B가 본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우리는 때때로 그것의 인과적 중요성때문에 어떤 성질을 본질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불 그 자체를 없애지 않고 불의 뜨거움을 없앨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플라톤처럼 우리는 뜨거움을 불의 존재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불이 밝고 파괴적이지만, 그러나 감각에 있어선 뜨겁지 않다고 말하는 불에 대한 인식을 여전히 할 수 있다.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불로서 설명할 수 있게 준비되어져야 하며, 그리고 나면 열은 본질적인것이 아닌 것이다. 사실상 어떤 성질들이 이 방법과 인과적으로 연결되는지는 단지 경험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조차라도 가끔 실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성질이 이런 면에서조차 본질적이라고 결코 획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봐야, 플라톤의 주장은 개연성 이상이 될 수 없는 두개의 연계를 포함한다.: 생명은 영혼에 필수적이라는 견해와 그리고 생명이 필수적인 많은 사물들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라는 귀납적 증명이다.
그 질문은 후에 Laws속에 있는 공들인 주장과 함께 Phaedrus속에 다시 계속된다. 이것은 운동이라는 사실과 함께 시작하며, 그리고 모든 운동을 두가지 부류로 나눈다.: 던져진 공의 그것처럼 전달된 운동, 그리고 움직이는 것 그 자체속에서 기원한 자발적인 운동. 모든 전달된 운동은 반드시 자발적인 운동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발적 운동의 유일한 원천으로 우리에세 알려진 것은 영혼이다. 사실, 우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어떤것을 볼때, 우리는 그것이 영혼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자기-운동한다는 말이 된다. 플라톤은 이로부터 영혼의 운동은 그리지 않으며, 따라서 영혼은 반드시 불멸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자세한 주장은 이렇다. 그것이 소유한 운동의 원천은 그것의 근원적인 운동력을 다른 어떤 원천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반드시 창조되어질 수 없다.;긜고 창조되어지지 않은 것은 또한 영구적이다. 다시, 모든 운동, 변화, 우주속의 진화가 그리지 않으면, 운동의 기원자, 즉 영혼은 끊임없는 운동속에 있어야 하며 따라서 불멸해야 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세운 커다란 가정은 한 시점에서 새로운 것이 존재로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것이고 또한 한 시점에서 어떠한 것도 오나전한 결론을 가지는 추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운동과 변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그들이 논의함으로써 그러한 가정들을 분명한 사실이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논리적인 사실이 아니거나 거의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은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우리는 플라톤이 그의 입장을 세우는 것에 실패했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
플라톤의 후기철학
형태에 대한 마지막 이론
쉽게 대답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초기의 형태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들이 생긴다. 그것은 아마도 '아카데미'의 설립 이후에 플라톤의 동료나 제자들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들은 플라톤과의 면접을 강요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그러한 비평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증거들이 상당히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에게 대답하려 한 플라톤의 시도로부터 어느 정도의 감명을 받을 수 있다.
아마도 플라톤이 60세때 쓰여졌을 '파르메니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매우 젊은 사람으로써 존경할만한 파르케니데스를 만나고, 그에게 '단일한 것'이나 '다수'의 차이점을 극복할만한 방법으로써 형태에 대한 이론을 역설했다고 전해진다. 파르메니데스는 다수의 난해한 문제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절망감을 감소시켜 주었다. 그러나 논리나 추론의 커다란 경험을 지닌 제안들이 소크라테스에게는 아마도 그의 위치를 만회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그런 것들의 어려움:
A. 모든 것은 형태를 지니는가? 우리는 형태에 대한 이론에로 이끌어 준 사고의 경향이 다양하고 서로 어렵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아 왔다. 한편, 형태들은 유사성을 근거로 두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일반적인 형태로 공유된다고 말하기를 원하는 유사점이 있다. 우리는 '사람','녹색','동등함'같은 일반적인 이름이나 학문적인 용어 땨위의 많은 형태들에 대해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에서의 형식들은 후기철학에서 논의된 '만물'과도 같은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플라톤에 있어 또한 형태들은 그것들의 갈망 속에서 끊임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모방하기를 갈망하는 오나전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정의'나 '용기'같은 윤리적 개념에, '동등함'같은 수학적인 개념에, 그리고 아름다움 같은 다른 어떤 것들에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게 표시되지 못한 불완전한 개별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르메니데스는 그것들에 대한 각각의 형태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상들을 네가지 부류로 나눴다. 첫번째 집단에는 소크라테스가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본 '비슷함','통일성','다수'가 있다. 두번째에는 '정의','아름다움',그리고 '선'이 있다. 그러나 다음 집단 - '인간','불','물' - 에서 그의 의심이 시작되고 마침내는 '진흙','머리카락','더러움'과 같은 형태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의심의 이유는 설명될 수 없으나 그러한 의심들은 우리가 '피에돈'에서 모든 영혼들을 동일하다고 보았듯이, 개개의 사람이나 불꽃은 사람들이나 불과 모두 동일하다는 애매한 느낌에서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점에 이른 형상에 대한 완전한 척도는 없다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해, 완전한 머리카락이나 진흙을 심사숙고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와 같은 형태나 이상과 같은 형태사이에서의 맹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B. 어떻게 혀태들과 개별자들이 관계를 맺는가? 플라톤은 이러한 관게에서 '모방하다'나 '참가하다'같은 은유적인 단어의 사용에 대히 만족해왔다. 그러나 그는 이제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형태들이 개별자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어떻게든지 개별자의 자체에 대한 근원이 된다면 둘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대화'에서 정말로 엑소더스의 천문학자에 의해 아카데미 안에서 보여졌을특별하게 미숙한 해석은 '참가한다'란 단어에서 나타난다. 만약 개별자가 형태들의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면 형태는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더이상의 통일성을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더우기 어떤 경우에 있어서, 부분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무력해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만약 실제로 동일한 성질 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동일한 부분을, 각각의 동등한 개체가 가진다면, 그것은 부분에 의해서 다른 개체와 동일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논리는 터무니없으며, 형태이론에 의한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철학적 전문용어가 인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부분을 강조했기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단어 안의 감각은 명백하게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쓰여져야 한다. 그리고 만약 좋은 이유 때문에 이러한 전후관계에 대해서 감각 자체가 특징을 갖는 다면 우리는 그 관점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그 후에 '모방'이라는 오류가 발견된다. 개별자는 그것의 진짜 모습을 띠는 (거울의 이미지 같은) 복제물 같은 형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것이 단지 은유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들 자체의 기능들에 대한 다양한 다루는 법을 필요로 한게 된다. 이것은 '제 3의 야수(크리켓)'로 알려지게 되어 논의되고, 형태이론의 근원 전부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커다란 존재 안에서 모든 커다란 것들이 닮았다는 점을 가정할 수 있고, 이러한 유사점의 근원으로써 커다란 형태를 가정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형태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커다란 것은 그 자체로써 큰 것이고 이러한 적용은 다른 커다란 것들에게로 비슷하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우리는 이제 커다랗다는 형태가 추가된 어느 오래된 개체들을 커다란 것들의 새로운 그룹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결코 커다람은 반드시 존재하며, 이것은 유사성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계속 되풀이 될 수 있고, 각각의 시간은 거다랗다는 새로운 형태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된다.
이 논의는 상반된 두 국면을 이끌어낸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인 것을 가지는 우주 같은 커다란 형태를 생각한다면, 남자가 인간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거기에는 그것 자체가 커야 하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상처럼 커다란 것을 같은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것이 된다. 그래서 곧 복귀가 일어난다.
C. 정신 안에서 형태는 사고하는가?
플라톤의 형태에 대한 객관적인 이론의 강조 습관의 견지에서 이 점은 궁금해진다. 소크라테스는 형태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신 안에서 사고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러한 추측은 거의 아카데미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주의 깊게 소크라테스, 플라톤, 파름니데스의 '인간'에 대한 많은 견해들을 임의의 정신활동을 제외한 채 분석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형태는 단지 우리의 모든 인간들에 대한 생각들을 집약시키게 된다. '사고란 항상 어떤 실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정당한 대상에 대하여, 혹은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파르메니데스를 한 무리로 보거나 그들을 모든 인간으로 부를때, 우리는 각각 다르게 적용시킬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정신 활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그들 서로서로가 객관적으로 유사한 점을 따기 때문이다.
D. 형태들은 세계와 단절된 것일까? 형태들은 형태들과 연관을 맺고 개별자는 개별자끼리 연관을 맺는다. 그래서 그리하여 주인정신은 노예근성과 관계를 맺으나, 개개의 주인은 개개의 노예의 주인이 된다. 이것은 자체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지식이란 현실 자체이거나 이것 혹은 인간이 세상 안에서의 개체로 정의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그는 형태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른 말로는 신은 그 자신이 분명하게 지식을 가지며, 지식에 의해 형태들을 알 수 있으니 인간은 이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식에 대한 문제의 한 부분으로써, 플라톤이 후에 논의된 Theaetetus 안에서의 또다른 시도를 한다. 그러나 차이점에 대한 진술은 다시금 형태들의 이중성을 불러 일으킨다. 만약 형태들이 만물을 낳는다면 신의 지식은 어떤 개인의 지식과도 같은 개별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플라톤의 '형태'가 어떠한 개별자보다도 완벽한 것이기에 형태는 신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파르케니데스'에서 어떤 어려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주어졌으니, 소크라테스는 그의 어려움을 경험을 갖지 못한 탓으로 돌린다. 플라톤은 그것들을 폭동으로 간주하지 않은 제안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들에 대한 그의 관점이 상당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형태들에 대한 연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의 낙천주의는 실제로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소피스트의 반대파로서 그는 그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노리인 역설에 지겹도록 익숙해졌고, 그 자신이나 제자들에 의해 제기된 개별적인 난점들을 순서대로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을 갖는 것을 당연시 했다.'파르메니데스'이후에 그의 발전상은 설명되기에 적당했고, 동일한 은유를 제시하여 '제3의 야수'와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믿게 했으나 '참가'에 대한 언급은 계속 이어나갔다. 최근의 Philebus에서 그는 확실하게 '참가'의 언급을 이어나간다.
'파르메니데스'의 두번째 부분은 폭넓고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어 왔다. 지루한 농담처럼 그것을 다루는 방법들이 유행하기도 했으나, 최근의 작가들은 심도 있는 시도로 믿기도 한다. 소크라데스는 진정한 철학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얻는 것에 대한 변증법적인 연구의 한 종류 중 보기가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논의는 8부분이 있는데 주제들의 모든 변형물들은 '통일된 존재'이다. 통일성이란 '있다','없다','존재한다', 혹은 '이러한 동일성에 대한 가설이나 다른 모든 것들을 언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로 보여지고 이러한 전제로부터 연역법의 구성이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모든 것들은 언급 되어지거나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고, 통일성이 존재하든 안하든 통일성에 대한 것이나 모든 것들에 대한 것들을 논의하는 것은 지루하며 설득력이 없는 사항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전제의 의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아마도 소크라테스 '대화'현의 절반 부분에서 자주 언급된 문제로 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떻게 하나의 형태가 다수가 될 수 있을까? 좀더 현대적인 어감으로 한다면 어떻게 형태에 대한 진술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아름다움에 대한 형태가 들어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법칙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플라톤의 '심포지움'에서와 같이 만약 우리가 '아름다움의 형태는 영원한 존재요 생성하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증가하거나 감소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영원'이나 '나머지'라는 형태가 남게 되어 아름다움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다 . 그리고 이것의 형태는 감각 안에서 그 자체로서 통하는 것이고 개개는 다수이거나 많은 술부를 갖는다는 의미가 보여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 절충은 형태들의 근본적인 통일성과 더불어 '소피스트'에서 분명하게 직면해 오고, '파르메니데스'에서언급되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결론은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우리는 1/8로 불합리하게 감소된 결론을 얻게 된다. 결국 플라톤은, 많은 흥미로운 점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또는 그것이 가능한 이 부분에서, 다른 경우에서처럼동시대의 많은 학도들을 깨우친다. 그러나 모든 물질의 다양성 때문에 나는 단지 하나 혹은 두가지 점들을 언급하고 싶다.
이러한 논의의 유형에 의해 면밀히 조사되지 않은 일반적인 가르침이 있을 수 있고, 우리는 어느 것이든 증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더 심도 있는 과정은 우리의 방법에 대한 깉은 조사나 각 경우의 전제를 요구하게 된다.
한 예로써 우리는 논의의 과정중에 만들어진 구별을 들수 있다. 첫번째 가설에서 우리는 "통일성은 단위일 뿐 그외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한 동등한 것으로서의 전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부정적인 결말에로 이끈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성은 존재한다"라는 다른 해석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 이것 또한 불만족스럽게 바뀐다. 그러나 본질의 두가지 구분되는 의미때문에 더 높은 단계를 얻는다. 그리고 애매한 그리스어 문장이 이제 발견된다.
The Theaetetus
Teaetetus는 정당하고 정확하게 기록될 수 있다. 그것의 서막은 아카데미의 구성원인 Teaetetus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369년에 코린스에 대항해서 군사원정을 일으켰다. 대화는 나중에 그에게 기억된 것에서 짧게 쓰여졌다는 것은 있음직하다. 불행히도 Parmenides 또는 Teaetetus 중 어떤것이 초기 작품이라고 판단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쓰여졌다.
Teaetetus에서 주장된 목적은 지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지식이 형상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숨겨진 목적이 있는 conford에 동의한다. 사실 형상은 그 속에서 간신히 언급된다. 하지만 그들의 현저하게 부족함은 그들을 눈에 띄게 했고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결말은 우리가 거기서 탐구된 것으로부터 나온 어려운 차이점을 풀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이 대화가 Plato이 철학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것처럼 많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중요시 되었다는 것은 나머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형상의 이론이 아무도 풀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일으킨 그리고 단지 위대한 실패였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Plato의 최고의 불변의 업적으로서 이것이 더욱 분석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덮고 있는 이론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 지식은 감각이라는 단순한 관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곧 두가지 관념으로 연결된다. protagoras에 의한 첫번째는 진리에 대한 이론이고 사람이 정확한 감각의 기초위에서 또는 다른데서 믿는 모든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Heraclitus에 기초한 두번째 관점은 물질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환영처럼 가장 물질적인 대상의 명백한 영속성을 떠나게 한다. 그것이 주장하는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것은 많은 개념이다. 이런 관점들은 결국은 버려진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지식과 참된 믿음을 동일시 하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실패일지라도 많은 이익이 생긴다.
지식은 인식 또는 감각이다. 여기서 Plato이 처음으로 감각으로 심각한 연습을 했다. 지식은 보고 듣는 등등의 동등하다는 관점을 시험함에서 그는 이런 관계에서 논의되는 많은 인식의 특성들을 건드렸다.
1. 똑같은 산들바람같은 "물질"은 어떤 사람에겐 따뜻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겐 차 게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따뜻하다인가 또는 차다인가 또는 둘 다인가 또는 아무것도 아닌가?
2. 꿈은 우리가 깨어있을 때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참 세상같이 우리에게 현실처 럼 보인다. 왜 그럴까?
3. 어떤 사람이 건강할 때 그에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가 아플 때는 쓰게 느 껴진다. 이것이 정말 달콤한 것인가 아니면 쓴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모든 경우에서 우리의 감각이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에 돌린다. 그러므로 감각과 지식사이의 단순한 동등을 믿을 수 없다. 만약 동등함의 근거가 확실하다면 그것은 역설을 상기시킨다. Plato에 의하면 그것은 지식이 감각이라는 단순한 이론보다 더 복잡한 이론이다. 감각의 기초 또는 사고나 그밖의 다른 어떤곳이든 사람이 믿는 것은 참이 다른 것은 최소한 Plato에게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에 제공되는 표시는 또한 더 단순한 이론에되 제공된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말하는 것과 생각의 방식에 있는 확실한 변화가 필연적이고 최소한 두가지 요인이 가능하다는 것이 언급될 것이다. 우리는 첫번째 예처럼 바람은 뜨겁기도 차기도 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주어에 동시에 반대의 형용사를 더하는 데는 논리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것이 형식적인 추론에 큰 어려움을 야기하고 Plato은 이 대안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관계형상을 채용하는 대신에 우리는 길지 않고 짧게 말한다. "이것은 뜨겁다" 또는 "이것은 차다" 그러나 항상 말한다, "이것은 저 사람에게 뜨겁다" 또는 심지어 "그 상태에 있는 그 사람" 우리가 논리적 결과에 기대하지 않고 "바람은 이 사람에겐 뜨겁고 저 사람에겐 차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에 대해 단순한 상태는 만들 수 없다. Plato이 본 다음 단계는 바람 또는 어떤 다른 대상없이도 시도될 수 있다. 그는 Heraclitus에게서 유래하는 복잡한 운동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단계를 다룬다. 이 이론은 지각하는 주체인 사람과 그가 지각하는 환경 모두를 일련의 느릿한 운동으로 환원시킨다. 지각은 예를 들면 내 눈의 운동이 어떤 외부의 운동과 상호작용하고 그래서 더 빠른 운동을 만들어낼 때 생긴다. 이것은 한편으론 내가 가지고 있는 색의 감각으로서 간주될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어떤 외부 대상의 안에 있는 것으로 또는 그 대상의 표면에 있다고 보통 믿는 그 색깔로서 간주될 수 있다. Plato의 관심ㅇ르 끄는 것은 그가 이 분석을 감각을 넘어서 기쁨과 고통, 욕망, 공포 까지도 망라하도록 확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인 것은 주어지지 않으며, 그가 어떻게 이것이 될 수 있는지를 완전하게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
원래 이것은 "중립적 일원론"으로 알려져 왔던 것이 한 형상이다. 즉 그것은 세계가 궁극적으로 어떤 단위를 즉, 정신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은 운동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지각이 생길 때 상식적인 해석은 보고 있는 눈과 두뇌와 관련된 어떤 정신적인 사건이 있으며, 관찰자의 외부에는 보여지고 있는 어떤 영구적인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에 따르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근본적인 단위들의 집합들이다. Heraclitus에 있어서는 이것은 둔동들이다. 많은 근대의 저술가들은 감각소여를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그런한 견해에서는 모든 지각이 동등하게 타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지각을 해석하는 방식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다.
그 이론이 진술되었을 때 Socrates는 protagoras에게 속하는 진리이론에 주로 관계가 있는 몇가지 반대를 제기한다.
1. 돼지나 비비의 세계관은 사람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2. 더욱 심각하게도, 어떤 사람의 견해들은 다른 어떤 사람의 견해들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protagoras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옳다고 믿을 이유를 갖지 못할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pro -tagoras에게 있어서는 참일 수도 있지만, Socrates와 Plato에 있어서는, 만일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릇된 것일 것이다.
하지만 Plato은 이런 어려움들이 극복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방법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차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돼지의 견해는 그것에 관한한 인간의 견해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인정하려 한다면, 첫번째 반대는 심각한 것이 아니다. 왜 중요하지 않은가? 두번째 어려움은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Plato이 지식은 지각이다라는 견해에 대한 논의에 들어설 때 그는 protagoras의 이론이 훨씬 더 폭넓은 것이고 제기된 반대는 단순한 감각들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이론적 신념들에 적용되는 것임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론들에 관련하여서가 아니라 단지 감각들에 관련하여서만 protagoras를 해석한다 해도, 아마도 그의 견해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식은 감각이다라는 단순한 견해에 대한 일련의 상세한 반대의견들을 가지고 있다.
1. 듣는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는 확실히 청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무엇이 이야기 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Plato은 우리가 그가 가지고 잇는 그 음절들이 소리에 대한 지식과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소리들의 의미에 대 한 지식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데 Plato은 그것을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즉, 우리는 어떻게 이 의미를 알게 되는 가? 우리는 이 질문이 인생 후반기에 Plato을 매우 많이 사로잡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2. 어떤 것을 본 사람은 그의 눈을 감고도 그가 본것을 기억할 수도 있다. 이 짧은 예를 가지고 Platoㅇ느 극히 중요한 시사를 한다. 즉 감각들과 직접적으로 관련 되지 않는 기억은 감각이 가지는 만큼 지식으로서 다루어질 충분한 권리를 가진 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사들은 이제 끝까지 추적되지 않는다. 그리고 Plato은 protagoras와 Heraclitus의 더 광범위한 견해들에로 돌아간다. protagoras는 그 자신의 변경에 의해 그의 견해들은 어떤 다른 사람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참이 아니다라고 말한 비판가에게 어던 대답을 줄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각 사물은 각 사람에 대해 그것이 보이는 그대로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견해가 주의되어야 할 현명한 사람들이 있고 또한 그들의 견해들이 무시될 수도 있는 덜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해서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병자도 아니고 건강한 사랍도 아니고 바로 건강한 사람의 감각들과 같이 더 나은 감각들을 아픈 사람에게 주는 방법을 아는 의사다. 또한 현명한 사람은 그의 제자들에게 건전한 판단력을 주는 보사이스,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정치가이다. 이런식으로 protagoras는 사람들의 견해들 사이의 차이를 "참되거나 그릇됨"으로부터 죽음이나 나쁨으로 옮기려고 시도한다.
Socrates는 별 어려움 없이 진실과 거짓을 쉽게 처리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1. 적어도 보통 믿어지는 바는 어떤 사람이 현명한 이유는 그가 참된 믿음들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가 그릇된 믿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내가 이것을 믿는다면 내 믿음은 protagoras 자신의 의견에 따르면 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사실상 참된 믿음들과 거짓된 믿음들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protagoras가 또한 모든 믿음들은 참이다라고 단언했을 때 또한 그릇된 믿음들은 있을리가 없고 그래서 그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다.
2. 몇몇 Sophist들 처럼 사람들은 올바른 것은 단순히 관습의 문제일 뿐이고 어떤 것도 실제로 본질적으로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건강하거나 유명한 것에 관해서 이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들은 실제로 건강을 주거나 유용하다고 믿는다. 또는 다른 말로 A가 건강에 좋다거나 B는 해롭다는 것은 참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이 그렇나 경우들에서 "참과 거짓"의 개념들을 사용하길 고집하게 하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의 호소이며 그것만으로는 protagoras를 승복시킬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3. 세번째 논증은 유사하다. protagoras의 논증들이 대부분 적용되는 현재에 대한 믿음들과 미래에 대한 믿음들을 구별하자. 모든 사람들이 미래에 관해서 어떤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가 문외한의 평가보다 더 나으리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동일한 것이 음식이 어떻게 맛이 날 것인지에 관한 의사의 예지와 요리사의 예지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서 또한 어떤 의견의 옳음 또는 그름은 중요하다.
protagoras는 여지껏 자기모순의 위험속에 처하여 있던 것으로 보여져 왔고 또한 받아들여진 많은 믿음들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여져 왔다. 우리는 여전히 그는 그가 애쓴 데 대해 완전한 보답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Plato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 같다. 즉, 그는 그 이론에 내재하는 난점들을 충분히 드러내었으며, 그의 논증들이 어떻게 상세하게 충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만일 그 이론의 지지자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했다면 이제 그 지지자들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말하고 논의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제껏 제시되었던 것보다도 심지어 더욱 극단적인 변화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들은 여전히 결국 지지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다음 비판은 모든 것은 생성이나 동기의 상태에 있고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의하면 - 안정된 존재는 전혀 없다는 관점에 대한 조준이었다. 상식의 관점에서 우리는 움직임에 의해서나 질적인 변화에 의해서 어떤 크기로 변화하여 더해질지도 모르는 다소간의 영원한 물체에 의해 둘러쌓여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러한 영혼들을 통과하기를 주장하는 어떤 영원성이 항상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영원성을 부정했고 단지 변화만은 남겨놓았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노동의 언어사용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만약 거기에 이름지워진 것에 대해 어떤 영원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단지 어떤 것에 대한 이름만을 지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심지어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이름지어왔던 것이 헛된 것이었으며, 우리가 이름에 의하여 언명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 스스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려고 하고 그래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더 옳지 못하다. 그러나 만약 지각이 지식이라면 이것은 지식이 무엇이고, 평생동안 지식이 스스로 변화되어지려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의 사활을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려하는 지식에 대한 어떤 정의는 동등하게 비지식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요약된 논리를 ㄹ가지고 지식이 지각이든지 어떤지에 대한 이 논의의 끝에 도달하게 된다. 플라톤은 만약 헤라클레이토스에서 기인된 실재의 본성에 대한 관점으로 인도하는 프로타고라스의 이론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정의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말에 대해 안정된 의미를 주는 것에 불가능하고 그러한 어떤 정의인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단념된다. 참, 혹은 실재 그리고 언어의 이론들은 여기서 단지 매우 긴 분석이 그것들을 풀리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혼합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현재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분야에서 제기된 정의는 불만족스럽고 새로운 시도는 반드시 무엇이 지식인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전에 새로운 제안은 만들어졌다. 플라톤은 어떻게 지식과 감관이 연결되어지는지에 대한 어떤 확실함을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크라테스는 감각의 활동성 -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 -과 정신의 활동인 생각을 구별했다. 정신은 그것의 도구로써의 감각의 기관을 사용한다.그러나 정신은 비교와 대조에 의해 그러한 도구를 넘어서 더 멀리 나가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실재나 존재, 수, 동일성, 차이, 그리고 좋음과 나쁨과 같은 확실한 특질들은 감각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발견되어진다.그러므로 이것들은 지식의 근원중의 하나인 반성에 의해 알려진다.
여기서 플라톤은 대다수의 중요한 점들을 가까이에, 그가 건드릴 수 있는 범위에 있다. 첫번째는 감각의 증거는 반드시 동일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는 우리가 눈을 가지고 보는것과 우리의 귀를 가지로 듣는 것이나 우리의 손가락으로 느끼는 것을 연결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연합은 실로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감각에 관한 어느 누구의 작업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정신이라 부르는 것이 편리할지 모르는 어떤 다른 곳의 가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신은 이것보다 더한 것이다. 이것이 감각과 동일시 되었을때, 외부 세계가 이것에도 제공된 것을 반영한다. 그리고 매우 일반적인 적용의 수많은 개념들로 유용하게 만들어 진다. 이러한 것들은 예를 들면, 색꺌의 개념이 그러한 것 같이, 감각적인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사고를 비감각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좋은 예들이다. 우리는 소피스트들이 플라톤이 한 것 같이 그것들에 관하여 어떻게 깊게 관여하는지 볼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감각은 충분하지 않아고 결론 짓는다. 지식은 참된 믿음과 동등하다는 새로운 제안이 이제 만들어진다. 여기서 플라톤은 지식과 믿음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그의 전의 관점의 다른 부분들을 단념한다. 이제 Doxa는 생각하는 지성의 전체적인 활동을 덮는다. 그리고 더이상 지식에 대해 날카롭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전히 참인지 거짓인지의 믿음이 존재하고 만약, 지식이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차이의 흔적이 있는 거짓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실로 어떻게 거짓 믿음이 가능한가?
이것은 플라톤을 심리학으로 인도한다. 그에 있어서 참과 거짓 믿음은 주관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의 관계안에서 이상은 가치가 있다. 그는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직위에서 얻는다. 기억은 정제된 밀랍 위헤 인상의 도장이 새겨진 반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변화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정의의 명석함과 행동의 공으로사람은 그의 감관에 주의하고 그의 정제된 기억에 관한 인상과 그것들을 연결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그가 여기서 실수를 저지르고 사람을 연결시킨다면 그는 이제, 사실 사람은 잘못된 판단을 한다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그의 기억된 이미지를 가지고 볼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계속 작업했고, 잘못된 판단은 단지 현재의 감각이 기억에 의해 오류되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감각없이 생각할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7+5=11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복잡한 이론은 필요하게 되고 우리는 새로운 유추의 의미에 의해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새들처럼 새장에서 유지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아마 그들이 새장에 있는 한 "소유"된 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약 그가 실제로 그의 손에 새를 가졌다면 또한 "가지다와 붙잡다"를 더욱 밀접하게 사용할 것이다. 그 새장은 정신이다 ; 모든 지식의 항목을 심지어 우리가 그것들의 생각을 하지 않을때도 우리는 소유했고, 그 항목은 새다. 우리가 어떤 것의 생각을 실제로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손안에 새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든지 잘못된 새를 잡고 있다면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유혹은 압도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잘못된 새를 붙잡고 있는 실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차이 있는 단계 위에서의 실수이다. 이러한 관계자는 새를 붙잡고 있을 의무가 전혀 없다. 그리고 스스로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분석은 암시에 의해 심리적인 많은 기억과 신념을 다시 시사한다. 이것을 첫쨰로 마치 우리가 아침 식사를 위해하는 일처럼 우리가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 때와, 두번째로 우리가 실재적으로 그것을 환기하는 것의 두 종류의 memory-knowledge를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의 운동에 의해 약간의 그릇된 논쟁이 야기된다는 것을 다시금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순수하게 심리학적이어서 우리의 노력을 통해 신념으로부터 지식을 구분해낼 곳은 아무데도 없다.
요구되어지는 그 외의 것들은 진정한 신념이 지식에 의해 분명히 구분될 수 있는 경우를 부여하는 다음 점에 의해 보여진다 : 배심원은 수많은 변호의 능력에 의해 단독으로 정확한 판단을 허가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실제로 실행된 범죄를 보이는 것으로서는, 그것은 그때 지식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오직 정확한 신념을 보임으로써 (가능할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Meno의 Larissa로 가는 길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심리적 상황의 기원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나 예는 충분치 않고 지식의 세번째 정의는 암시되어졌는데, 그것은 설명을 동반한 진정한 논의이다. 불운하게도, 여기 'account'로 번역된 단어, logos는 그리스 언어에서 가장 모호한 단어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암시는 상당한 명백함을 요구한다.
우선, logos는 아마도 동등한 가치로서 "원소의 분석"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복잡한 전체와 구성된 원소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 철자들과 그들을 형성하는 '문자들에서 만일 우리가 ('so'라는 단어가) s와 o로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so'철자의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문자들에게 같은 방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ㅏ 우리는 문자들에게 같은 방식을 취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같은 원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발견해낸 어려움이다. 다른 것은 'so'가 그것의 원소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요구되어지기까지 한다. 이것은 단지 질서속에 s와 o 또는 더 고매한 typeㅇ의 신선한 구성단위인가? 만약 전자라면 s와 o가 아닌 것으로 우리가 'so'를 알 수 있는 것에서 odd이고, 만일 후자라면, so는 새로운 종류의 원소 그 자체이고, 그것만으로 분석할 수는 없고, 지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 지식을 원자화함의 시도는 흥미로운 것이고, 중요한 몇가지의 요지를 밝혀낸다. 첫째로, 만약 지식이 분석을 포함한다면 대상이 분석되어지는 요소들이 그들 자신을 분석하거나 분석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이 모순되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지식의 충분한 정의를 주는 우리의 요구를 좌절시킨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단 하나의 정의를 위해 요구하는 한, 이 방법은 플라톤에게 제외되어졌다.
두번째로, 이것은 복잡한 전체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플라톤은 이미 불명료한 파르메니데스의 두번째 부분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치명적으로 혼란스러워지기 쉬운것이다. 우리는 전체가 단지 어떤 질서속에 부분들의 합계라는 관념을 만족시킬지 모른다. 어려움은 이 여분의 무엇이 무엇인가고 말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진행되자마자 시작된다. 플라톤이 보았던 것처럼 그것은 이미 열거된 부분으로부터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그러므로 분석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어떤 또 다른 방법에서 축어적으로 그것을 묘사하기에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전체를 말할 때 여러종류의 경우를 실험하고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봄으로써, 사실 이 문제는 오직 완전히 새로운 접근에 의해서만 만족스럽게 취급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의문점의 불필요감각은 주위의 문제에 주의한다.
이제 플라톤은 "logos"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에 주의하고져 한다.
1. 로고스는 단순하게 말되어진 것이나 쓰여
진 것의 언어의 사용을 의미한다. 그러나 참된 의견과 지식은 그들 서로의 차이를 표시하지 않기 위해서 말로 표현되어진 것이다.
2. 로고스는 한 물체의 부분의 열거를 의미한
다. 정말로 4륜 마차가 무엇인지 안다면 4륜짐마차의 부분들을 열거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분석의 문제로 되돌아 온다. 우리가 어던 감각 안에서, 차이라는 문맥속에서 그것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그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체로서의 복합적인 개별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다고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올바르게 Theatetus에서는 철자화하고 있고 그러므로 'the'라는 음절을 알고 있을 듯이 보이는 사람들도 Theodorus의 부분에서처럼 'the'라는 음절의 철자에 있어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러므로 온전하게 Theaetetus를 알고 있다고 말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부분의 열거는, 심지어 가득차고 정확하다 할지라도 지식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3. 아마도 우리가 logos에서 구하고자하는
의미는 한 물체에서 차이나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모든 다른 사물로부터 이것을 구별시킬 수 있는 표시나 성격주어지는 것들이 예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그가 나중에 '소피스트'면에서 발전시킨 정의의 이론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 문제를 떠났다. 왜냐하면, 한 예로, 만약 우리가 Theaetetus에 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른 것들로부터 그를 표시해야 한다. 지식은 어떤 것 이상을 포함한다.
Plato은 아마도 그가 여기서 취한 예 때문에 그 자신의 주장이 부당하게 되었다. Sophist에서 그는 과학적 정의 문제에 연관되어 있다. 대화는 이제 완전한 회의주의에서 끝나고 있다. 어떤 제안된 정의도 비평 앞에 맞서지 못했다. 모든 제안된 정의들은 모순으로 이끌거나 또는 정신적인 용법과 일치해오지 못했었다. 우리가 지식 상식적인 견해에 관계되어온 이래로 그리고 그 도덕은 그 자체로서 그것이 불충분하고 형상속에서 가져오는 가져오는 것으로서 완벽해지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피스트
소피스트는 Theaetetus와 드라마틱하게 연관되어있으며, Theaetetus에 더욱 긍정적인 가르침을 보충해 주었다. 플라톤의 새로운 분류방법은 '대화편'의 첫째와 마지막 부분에 상세히 설명 되어있다. 그런데 아마도 나중에 쓰여진 것 같은 중간부분은 형태와 부정적 판단의 가능성과의 상호교류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선언의 원리로 이끈다.
1. 분류는 아마도 플라톤에 의해 고안된것 같은데 그는 분명히 그점에 대하여 극도로 자랑스러워 했다. 대부분의 현대의 작가들은 그것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지만 우리가 왜 플라톤이 그것에 대해 그토록 가치를 두었는가에 관하여 질문해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주로 정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이것은 그에게 지식획득의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분류는 Phaedrus(아마도 Republic과 소피스트 사이에서 씌어진 것 같은데)에서 처음 언급되고, 거기에서 수집보다 앞선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정의를 획득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정신 속에 있는 사물들의 수많은 산재되어 있는 형태를 간추려야 하고 공통적인 근본적 유사함의 미덕 속에 있는 단일한 형태 밑에 그것들을 함께 가져가야 한다. 이것이 수집이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이 형태를 우리가 정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근접한 형태중의 하나 아래에서 수많은 하위 형태로 나누어야 한다. 이 두번째 형태는 아디 나뉘어지고 우리는 수많은 단계를 거친 후에 그 아래 우리의 예상이 오게되는 species 즉 가장 낮은 가능성의 형태에 우리가 도달할 때까지 이러한 방법으로 계속 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지나왔던 모든 형태의 이름들을 얻게 됨으로써 정의에 도달한다. 그래서 The Sophist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정의"를 획득하기 위해 우리는 여과, 추리하는 것, 선별함 등과 같은 수많은 작용을 조사하고, 수집에 의해 이 모든 것들에 공통적인 것을 구분해내는 기술에 대한 관념을 획득한다고 말한다.(알려준다.) 그러면 우리는 분류를 시작한다 : 구별의 형식은 정화이며, 정화, 정제의 한 종류는 악한 영혼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악은 사악함이나 무지일 수도 있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 즉 교육에 의해 그것 자체가 가진 현명함 속에서 잘못된 믿음의 영혼을 정화하는 기술을 실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소피스트"를 우리가 얻게 될때까지 분류는 계속된다. 주어진 분류의 다양한 다른 많은 예들은 그래 대단한 것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에게 방법의 가치를 우리가 과소평가 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 정의에 도달하는 구조적인 방법이 발견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시도와 실수의 방법에 대해 그토록 위대한 진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Blue로부터 만들어진 암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제 플라톤은 비록 그것이 여전히 그것들의 적용에 있어서 장식과 판단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정의를 위한 형식적 규칙을 제시할 수 있었다. 즉, 수집은 올바른 가장 높은 단계의 개념을 얻는 옳은 것은 커버해야하며, 분류는 분열의 자연스러운 전상을 따라 수행되어져야 한다.왜냐하면, 어떤 규칙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의 형태는 즈어져 있으며, 이 형태는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으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종류와 차이에 의한) 정의의 확장이다.
왜 플라톤은 정의의 이 형태를 특별히 만족스럽게 생각했을까? 그는 원래 범위를 벗어난 형태의 원리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 그는 그 형태들은 수많은 방식들로 그것들 사이에서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들 중 하나는 마치 피라미드와 같다고 믿었다. 하나의 더 높은 형태는 '동물'이 '인간','개','말'등등을 포함하는 것처럼 수많은 하위형태를 포함한다. 정의는 형태의 세계를 정확히 표시하고 그것안에 정의도니 형태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러한 절차는 여전히 그것의 위치를 생물학 안에 가지고 있다.비록 그의 방법이 그가 집착한 고도의 중요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여기서의 플라톤의 개척적인 작업은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2. 부정의 문제는 형태의 상호관계와 역시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분류의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견해로부터 다루어졌다. 문제는 2개의 주도니 부분을 가지고 있다 : "부정적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어떻게 잘못된 진술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고 의미는 있으나 오류인가?"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이미 부정은 불가능하다는 극단적인 견해에 전적으로 파고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설명은 드디어 파르메니데스의 복잡한 철학과 고르기아스의 극단적인 회의론의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부정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이런 어떤 것을 보여준다 : 이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즉 그러한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X의 이름이 있는 곳에, "X는 아니다.(없다)"는 형태의 진술은 불가능하다. 다시, 어떠한 진술도 그것안에 이름이 주어지고 그러므로 있는 어떤것에 대한 것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잘못된 진술은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Euthydemus와 Cratylus에서 그러한 논증들을 그 자신이 대충 보여주었다. 이제 그는 좀더 건설적인 접근을 시도하려 하는데, 그것은 그를 훨씬더 일반적인 문제 - 단정의 문제와 연결사로서 사용된 "is"의 의미와 연관시켰다. 이 문제의 해석은 전통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Antisthenes에게 돌려진다. Antisthenes는 "X"가 "X이다."라는 것을 제외하고 X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사람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이 하얗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플라톤은 이 견해들은 불합리하다는 것과 우리의 언어의 정상적인 사용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는 데 깊이 만족했다. 그러므로 그의 유일한 문제는 위에 주어진 주장들에도 불고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해결책은 결과적으로 그리스어에서 대부분의 다른 언어들에서처럼 동사 "to be"는 수많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이것들이 구별되었을때, 어떤 문제도 남아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그가 여전히 형태의 상호교류와 연관되어 있고, 그의 정의에 대한 원리에서 사용된 피라미드적 관계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사실에서 복잡하다. 그는 일반의 가장 높은 수준에 수많은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summa genera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모든 것이 얼만큼의 그것의 성질을 띄고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being", "motion", "rest","goodness"를 포함한다. 단일한 대상은 우리가 알기에 아마도 동시에 존재하고 나머지에 있고, 선할지도 모른다 : 혹은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놓으면 "being","rest","goodness"는 그 대상 안에서 서로서로 조합하거나 교류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떤 것들은 그 나머지것들과 섞이고 혹은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형태들이 그들 사이에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 더 심화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어떤 형태가 어떤 형태와 조합될 수 있는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는 어떻게 하나의 항목이 많은 "이름들"이나 술어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형태자체가 술어를 가지는가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 같은 대상의 사람과 키가 크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저 사람은 키가 크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상은 "통일"형태인데 통일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이 주제에 대해 플라톤이 다룬 가장 simple한 설명은 그가 자신이 그것들에 대하여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좋게도 그가 말한 것은 여전히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첫째,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언급될 수 없다'의 난해함을 이해한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각이 있지 않는 것과 동등한 -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이제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인정하기를 꺼려했던 것을 굳게 인식한다. 즉 문법적으로 오나벽하게 잘된 표현은 그러나 실제의 감각을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의미에서 '있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은 더욱 가치가 있다.
아닌 것을 묘사하는 것은 오류이다의 진술 : 그것들은 어떤 사물에 대조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 혹은 그것이 아닌것을 포함하고 더 나아가서 어떤 의미에서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 혹은 분명히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어쨌든 결코 아니다. 우리는 Theaetetus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에 착수하기에 앞서 우리는 단정과 부정의 일반적인 문제를 쳐다보자, 진술을 해보라. "운동은 남는것이 아니다" 모두 동의함이라 동의한다. 이것은 누군가 생각한 것이며,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 여기에 "is not"은 단지 "-과 다르다"를 의미하고 존재에 대한 어떠한 함축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동사 "to be"의 존재론적 의미와 다양한 방식으로 개념들을 연관시킨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후자를 통해 부정적 진술은 완벽히 정당화된다.
우리는 이제 오류로 돌아올 수 있다. 플라톤은 말을 분석함으로써 그리고 특히 진술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한다. 진술은 단지 단어의 연속이 아니다 :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결합에 있어서 2종류의 단어 -명사와 동사 - 로 구성되어 있다. 오직 결합이므로 그러한 단어로 통해서만 우리는 진술을 얻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명명이나 언급과는 구별된다. 진술은 Theaetetus가 않는다는 것처럼 그것의 주제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일 수 도 것짓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Theaetetus가 날고 있다'는 Theaetetus에 관한 것이며, 거짓이다. 참진술은 그것으로서의 사물을 언급하고 거짓진술은 그것으로서의 사물과 다른 것을 언급한다.
플라톤의 설명은 간결하고, 대답되어지지 않은 많은 질문들을 남겨 놓았다. 형태에 대한 논의에서 언어에 대한 논의로의 갑작스런 전환이 있고, 오류에서의 형태의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주된 점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한 철학자가 negation의 paradox에 당면하여, 어떤 확신과 해답을 주었다. "is"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작업은 해야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 가지의 구별을 만드는 결정적 첫 단계는 이미 되어졌다.
Plato의 언어 이상론
Plato은 또한 다른 두 곳, 즉 Republic보다 확실히 훗날에 지어진 것으로 규정하기 원하는 Cratylus와 정말 아주 뒤에 즉 353년 2월에 지어진 일곱번째 편지에서 상세하게 언어를 논하고 있다. 후자와 관련된 분야의 진실성은 그동안 의구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때문은 아니었다.
Cratylus에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언어는 자연 그대로의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것인가 혹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에 지배받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인가, 한가지 사물에 대한 명칭은 단 하나뿐인가 혹은 사람들의 임의에 의해서 불려지는 명칭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것인가, Plato은 심지어 각 사람들에게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가 있을 수 있고 그의 마음대로 사물들에 명명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한다.
논쟁의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명칭들과 말들의 본질에 대한 두가지의 주된 관점이 분류되어 있다. 모방적인 것과 기능적인 것이 그것이다. 가가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 단 하나만 존재하거나 제한된 수의 정확한 말들이 있다면 말이 그 사물의 본질을 적절하게 모방해서 표현하고 그래서 그 본질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서 이 적절성을 말하려는 것은 합리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되어질 수 있는 두가지 방법을 고찰한다. 복합어와 명칭들에 관하여서 그들이 명명된 그 사물이나 사람들을 잘 표현해 준다면, 우리는 그들의 요소의 뜻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Astyanax는 "도시의 수호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주인이 그 도시의 참수호신일때 그 Astyanax는 알맞는 이름인 것이다. 그러나 간단한 말을 가지고 이분석은 이행될수없다. 그리고 문자와 음의 수단에 의해서 부터는 모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문자의 'r'는 운동을 가리키고 그리고 'l'는 유연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곧 확실하게 판명된다. 접근은 두가지 이유에 대하여 불만족 스럽다는 것이 ; 그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한는 언어에 있어 실행되어 질수 없고 그리고 더 중요한것은 그것이 말이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말의 기능은 플라톤에 의하면 정보를 주는 것이고 구별를 하는 것이다. 또는 다시 너에게 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처럼 그것을 말아 휼륭하게 또는 서투른 모방이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중요한 것은 당신이 말이 무엇을 의마하는 가를 아는 것이다. 당신이 그것의 용법의 앎을 얻는 그것은 다시 결국 관례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단어의 사용에 동의한 방법으로부터 .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은 말의 지식이 육체의 지식보다 더 앞설수 있고 훨씬더 중요할수있다는 믿음을 플라톤이 완전히 부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미신이다. 그러나플라톤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단어를 통한 간접적인 지식이 육체의 직접적인 지식보다 더 나을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 Seventh Letter ]에서 다시 취하고 있는데 플라톤은 실제 말 정의 그리고 형태의 지식을 얻기 위한 세가지 방법을 구별하였다. 예를 들어 '원'의 경우에 '원'이라는 말은 말에 정의가 주어졌고 그리고 원원형의 둥군 아웉트라인이 그어지거나 Lethe 에 이른다.말은 완전히 관습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지식을 줄수없다 ; 정의 만들어진 말들 전보다 낫지 않다. 형태, 그어진 원은 또한 불완전하고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선 쓸모없다 ; 지식은 앞의 사용에 관한 오랜 연구의 결과로서 얻어진다. 정의와 형태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을 통해서 얻어지진 않는다. 그건은 물건의 본성에 대한 지적적인 통찰의 어떤 설질에 의해서 얻어진다. 사실 플라톤의 후기 서한에서는 그의 초기 관점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의 후기 문답들의 상세한 인식론의 그리고 언어학의 연구들 이후에 그는 그의 기복적 주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어떻든 그의 말년의 증거 그가 복잡한 형태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그리고 아마도 환상적인 방법으로 프롵타고라스학파가 했던것처럼 그것은 흥미있는 점울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제기 블명료하고 그리고 그것의 철학적 가치는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그것에 대해 어떤것도 말할 것은 제안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와 플라톤의 윤리학적 이론들
비록 우리가 그의 철학의 다른 양면에 더 집중했더라도 소크라테스의 주된 관심은더덕의 문제에 있다. 참으로 그의 전체 삶의 연구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을 더 좋게 하는 것이다. 그목적은 플라톤에 의해 공유되었다. 동 시대의 정치정체의 경험은 그의 관심을 날카롭게 했다 그의 맹렬한 활동범위는 많이 넓어지고 그는 철학의 모든 분야에 손을 뻗쳤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같았다. 인류의 진보 이실제적인 목적의 결과로서 둘다 윤리학에 접근했는데 가장 현대의 철학자 들에게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후자는 설교자들과 개혁가들에게 훈계가 담긴 내용이었고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둘다 개혁가 이었고 이론적인 철학자들인점에서 동일화와 그들의 설교는 두부분이었었는데 인간이 선해야 한다는 것은 증명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어떻게 선하게 되는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이 선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몇몇 이후 철학자들에 의햐 난 색을 표하게 되었다 그러한 증명은 두 다른 분에서 비판되었다.
1. 그 주장은 어렇게 말해졌을 것이다 :"인간은 선해야 한다"은 금어 반복이고 반드시 진실되지만 그러나 유익하지는 않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유익한 goodness의 본성애 대한 그들의 분석 연안되어야 만하는 그들의 증명에 답변할수 있어야 한다.
2. 더 중요한 비평은 발견되 성질의 증명들인데 예를 들어 국가에 있어 덕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이익을 추구할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노력에 의해서 도덕성의 기초를 흔든다. 진정한 덕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숨겨둔 동기에 의해 좋게 행동하는 사람은 진심에서 우러난 선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와의 관계에서 훨씬 길게 이점에 대해 결정해야한다. 여기서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점에서 많은 어려움을 격었었을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거리에서 그리스 사람과 다투었는데 그 사람은 그들의 이웃과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고 그리고 죽은후에 처벌을 피할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덕은 추가할만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복잡한 개인적 행복의 형태에 있어 더 나은 성질의 보답을 가져온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노력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증명이 미칠수 있기 이전에 많은 양의 예비적 기초작업은 필여하고 그리고 이것의 많은것은 우리가 분별있는 확실성을 소크라테스의 탓으로 돌릴수있다 그의 가르침은 세가지 문장으로 요약될수 있다 ; 어느 누구도 기꺼이 나쁜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덕은 앎이다 모든 덕은 궁극적으로 하나다. 이것들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욱 밀접하게 연결 되었고 그리고 그것들을 이끌어낸 논의들은 플라톤의 문답들에서 재구성 될수 있다.
1. 모든 사람은 단지 선한것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악한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잘못을 하는 것은 악을 일으킬 방법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잘못을 했을땐 그는 엊지로 한것이다.
2. 모든 사람은 단지 선한것을 추구한다.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할수 있다면 기꺼이 선한것을 일으키려고 한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할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선한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덕은 선한것의 발생이다. 그러므로 미덕은 지식이다.
3. 각지 분리된 미덕은 특별한 상황에서 선을 목표로 한다. 모든 사람은 모든 상황에 있어서 선을 추구한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선한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약 선한것을 알고 있다면 어떤 경우든 단지 고결할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미덕은 한가지에 의존한다.그러므로 모든 미덕은 궁극적으로 하나다.
이것의 대부분의 쉅게 받아들일수 있으나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여러가지의 논쟁점들이 있다.
A) 논의 (!) 잘못하는 것은 악을 야기시킬 방법을 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모호함이 된다. 상식수준에서 잘못을 한다는 것도 항상 다른사람에게 악을 야기시키고 그러나 아마 자신에겐 선을 야기할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을 행하기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에 사실 우리가 볼수있는 것처럼 플라톤은 잘못을 한단는 것은 악행자에게 해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B) 논의 (2) 논쟁점은 만약 사람이 신을 야기시킬수 없다면 그것이 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지주의자 관점은 감각안에 선의 지식을 갖고 있으나 그러나 의지의 약함으로써 그 스스로 그것을 추구할수 없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정의 못하는 것의 근거로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판되었다.
C) 모든 덕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관점은 무엇이 선인지는 아나 그자신의 그것을 찾기를 야기하지 못한 점이라는 심리적 상태에서 정당하지 못한 근거..수많은 의존이 이런 상황에서 지식에 의해 의미되어진다..그것은 그가 무엇을 의미했는가에 새부화된 설명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것.. 비 이성적 이지 않는 몇개의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의 분명하게.. 않은 암시를 수행하기 위한 시도로 본다.
모든 덕은 궁극적으로 한가지 인식된 결과의 견해이다.. 어떤 사람이 또한 정의로움,경건함없이 개별자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통제된 사실상 다른 모든 덕들을 갖는다. 이것은 ... 경험의 사실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Lethes편과 피타고라스편에서 길이의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용기에 대하여 매일의 ... 이미 혼란을 겪는다. 더욱더 칭찬을 한다. 두려움없이 영웅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 칭찬한다. 혹은 그가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했다면 더욱더 칭찬할것이다.플라톤이 행한것은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나오기 위한 방법을 권하는것이었다. 그는 단지 바로 그사람이 진실한 의미에서 ... 가지고있고 그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래서 그러한 이유때문에 .. 에서 용맹스러운 행동을 한다는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런한 이유는 ... 공정하고 경건하고 자아를 통제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떼에플라톤을 위하여 수많은 문제들을 남긴다. 문제는 "무엇이 이러한 지식이냐 즉 덕이냐?" 플라톤은 그것에 하기 위해 처음으로 시도한다. 프로타고라스 편에서 그것은 하나의 진일보이다. 심리학적 쾌락주의의 형태 , 그가 제안하기를 인간이 잘못을 할때 지식은 부족하다는 것은 어떻게 기쁨과 고통의 미래조화를 하랴 그것은 복잡한 행동으로 부터의 결과이다. 기쁨과 고통의 피함은 일치된 목적이다. 그것은 그것에 단지 어떻게 도착하느냐가 문제된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를때 의미심장하게 그것은 단지 인간들 자신의 기쁨과 슬픔때문으로 가정된다.우리는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에 만족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런 원이론은 플라톤에게 오랫동안 만족스럽지 못하다. 고르기아스 편에서 아마도 프로타고라스보다 후반부에 있는 그는 기쁨은 필수적으로 선이다 라는 의견과는 별도로 하고 인간에게 사실상 단지 선이 될뿐이다. 그의 기쁨에 대한 개념을 분석했다. 어떤 기쁨은 혼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목이 탈때 물을 마시는 것에서부터 주장한다. 채액감소의 고통은 충분한 기쁨으로 느껴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통에 의존한다.이러한 종류의 기쁨은 선한것이 아니다. 덕을 위해 필요한 지식의 종류는 기쁨들과 고통들을 따져볼 능력보다 뭔가 이어야 한다는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것을 가능성의 무지이다.어떤 순수한 기쁨은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야 할 것으로서 플라톤은 후기에 PHILE BUS 에서 그의 견해들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소크라테스의 역설로부터 야기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플라톤이 성숙한 이론에 도착하는데 도움이 된다.
1. 만약 덕이 지식이라면 우리는 단지 구두만들기와 항해술,그리고 의학과 같은 기술로서 선생님과 변호사를 기대한다. 이러한 변호사들이 어디어 있는가? 그들은 정치가나 소피스트들이 받아 들여지지 않은 견해에 이른다. 아마도 모든 국민들이 상태가 덕을 가진 선생님이고 그들의 아들들 위를 지난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불만족 스럽다 덕의 진정한 선생님은 존경받지 못한 철학자 속에서 발견된다.
2. 지식의 덕은 어떤 주관적인 문제다. 지식으로서 다른 형상이듯이 사실상 그것은 직접적으로 각자의 덕이 주관적인 문제를 갖는것처럼 보인다.예를 들자면 정의는 조항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고 사물들을 계속해서 안전하게 지켜나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설이 있다. 어떤 사람이 사물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는기술이 있으면 훔치는데도 휼륭한 기술이 있다 그리고 정의로은 사람은 휼륭한 도둑놈이 될수도 있다.일반적으로 휼륭한 사람은 - 덕에 그리스 관념은 사실상 선과 수반한다. 그리고 단순히 압축된 선은 ...라는 것은 어떻게 그의 목적을 이루었는가를 안다.그가 목적을 훌륭하게 ..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여기에는 역설이 분명히 소크라테스에게 있다.그것은 어떻게 그것을 다룰 것인가를 보지 못했다면 확실하지 않다.플라톤이 대답은 덕이 있는 사람이 선함과 악함에 의해 감쳐진 지식을 준다.그리고 이것은 극단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그의 문제의 충분한 다룸은 Republic편에서 발견된다.여기에서 윤리적은 문제는 정치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배경에 반하여 나타난다.형상의 이론의 빛속에서 플라톤은 감각의 지식은 선의 형상의 지식이어야한다고 믿게 된다.그것은 매우 적은 것으로 ..되고 결국에는 길고 어려운 교육이다.정확하게 말하면 무엇이 이런 지식인지는 ..하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보편의 세계와의 조화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이런 상태는 후에 보편의 세계와 무엇이 조화를 맞추느냐의 이론이 언급없이 ..져야한다.)그러한 지식의 획득은 그의 동료들의 지도자가 되고 ..를 위한 이러한 목적의 추구가 그들의 삶을 구성한다.
우리는 여기서 숙고함으로 플라톤의 덕의 관념을 옮겨야한다. 소크라테스는 ...들과 거의 홀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더욱 더 폭넓은 문맥에 문제가 있다고 믿는것 같다. Rep -ublic 에서 중심논증은 정의의 덕이다.그리스사람에게 그것은 폭넓은 의미와 편협한 들다 갖는다.넓은 의미에서는 그것은 실제로 덕의 총체와 동등하다.그리고 "정의"라고 ..할지도 모른다.좁은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들 세계에서 "Justice"와 같은 ...어야한다.개인속에서의 justice는 영혼의 세가지 부분들의 올바른 ..를 수반한다.플라톤은 여기서 이성으로써 구별한다."명예의 감각"이라 불리는 "식욕과 중간자".만약 이성이 명예의 감각의 목적을 가지고 식욕을 조절한다면 개인은 정의롭게 될 것이다...플라톤은 애우 적은 이들이 그들 스스로의 상태에 의해 도달할 수 있음을 ..했다.그러나 이상적인 상태는 그들의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조절할 수 있는 ..이 적다.그리고 직접적인 그들의 식욕은 이성의 통치에 따른다...그렇게 하면 전체 공동사회가 덕스럽게 된다.
우리가 지금부터 증거의 중심부는 인간은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플라톤은 영혼의 부분들의 올바른 균형이 되기 위해 덕을 취한다.-정신적 건강의 형상으로서 그는 정신적 집중에 의해 단지 그것들을 더한다.건강은 행복하게 될 수도 있고 그런 정의는 행복에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정의는 불행히도 복잡한것 같다.그는 또한 어떤 공동체에서 얻어질때 정의는 단지 효과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또는 심각하게 말하자면 공동체에서 작용할 때 효과적이다.플라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써 벌써 나타난 것이라고 묘하했다.많은 현대 작가들은 공화국 안에서의 부자유요소들에 의해 겁내했다.플라톤의 공동체는 현대 전체주의제도의 선구자로 보여진다.그러나 이것은 플라톤의 전체적인 윤곽과 추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현대 사상은 기독교하에 있고 개인 각자의 인간들의 자기구제이고 작용하는 것에 의해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오히려 자유가 선이라는 것은 커다란 자유가 선하게 되는 것이고 자기자신의 흥미가 다른 사람에게 희생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것들을 수반한다.플라톤의 개요는 어렵다.그것은 공상적 이상주의로 간주될지도 모른다.덕의 현대생각은 인간 존재의 결점과 관계가 있다.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비로와야한다.우리는 신이전에 낮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해가 된다.만약 모두가 강하고 건강하고 원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런 덕들은 필요할 것이다.완전한 사회속에서의 사람은 용감하고 친절한 것 만큼 아름답고 지적인 기술을 완벽하게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동료에게 현재에서 목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목적은 그리스의 덕의 관념속에서 구현되었다.이런 사회에서의 아르테는 실제로 우리의 감각속에서 도덕적 덕을 포함한다.그러나 그것은 또한 정신과 육체의 재능들로 덮여있다.기독교인의 생각은 예외이다.예를 들자면 목수의 아르테는 목수의 기술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아르테는 전체 인간의 행동들을 잘 행위하는 것을 포함한다.그러므로 세계에서의 어떤 의미는 "우수함"과 밀접하게 동등하다.실제로 퍼져있으면 도덕의 영역내이다.덕은 이런게 아니다라는 그리스 사람들과 현대의 조망간에 대조를 보인다.반면에 역시 너무나도 억압되어 있다.
그리스 사람들과 현대 견해도 모순으로 부터 자유롭지는 않다.예를 들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사람들이 극도의 고통으로부터 아픔을 당한다고 해도 여전히 기쁜가에 의해 많은 곤란을 겪는다.플라톤은 그가 그렇다고 과감하게 말하지만 ..은 역설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부인하나 ..을 가질 뿐이다.그러나 만약 덕이 행복에 충분하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없다....바이러그의 그리스인의 공포,신으로부터의 원수를 불러 일으키는 오만한 자부심이다...와 이상주의의 요소가 조화된다는 것은 플라톤의 덕에 대한 취급에 의해 야기된다...현재에 덕은 보답이다라는 것 위에 어려움에 봉착한다...느끼기에 첫째는 좋은 행동은 만약 보답의 기대없이 행할때에 ...그러나 다른 한편 도덕주의자들과 목사들은 여전히 덕은 보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한다.아마도 지구상에 ...그러나 하늘에는 분명하다.
...들은 여기에서 덕은 행복의 보증이라는 문제를 빼앗는 것을 논증한다.최소한의 ...덕은 필요하다.그것이 충분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행복을 위한 것은 더욱더 ..받아들여진다.플라톤은 폭군을 보여줌으로써 어려음을 겪는다....인들에게 전형적으로 성공적인 범죄자는 정신적으로 아프고 그러므로 불행하다.그리고 ..필수적으로 행위자보다는 가해자에게 해가된다.
...해져서 남겨진 틈은 정신적 정의로써의 경외와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가 연결된다....은 여기에서 어떤 종류의 정신적 소란 때문에 범죄는 기인한다라고 믿는 ...사상가들이다.그의 욕구를 적당하게 이성의 통제아래에다 놓는다면 동료들에게 잘못하거나 불의의 유혹을 느끼지 못할 거라 한다...하게 어떻게 이것이 불명확하게 수행되는지 가정하건데 선의 지식의 ...때문이다.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득 깨달아야한다.그러나 Republic의 최고점과 플라톤 자신의 삶은 많은 추구후에 어느정도는 ..하게 된다.덕은 철학자들에 의해 베풀어지고 사람들에의해 받아들여지게 된다.
Republic 의 종국에는 philebus에서 부정한 "기쁨위에서 ...생각들"로써 가장 좋게 기술될지도 모른다.philebus에서 가능한 법을 위한 최종의 작업에 기대된다는 것은 아카데미에서의 문제를 ..하는 논증에 기여된다고 써질지도 모르겠다.천문학자 에오도스는 그것은 기쁨이라고 말한다.스페시푸스는 그것이 ..되기를 믿었다.플라톤은 선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것을 안다면 다른 것을 하기 전에 선택할 것이다.그리고 그것에 의해 완전히 행복할 것이다.그러나 생각없는 기쁨의 삶도 아니고 기쁨없는 생각의 삶도 아니라는 것은 인간에게 완전히 만족스럽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과 신은 다르다.더구나 둘 다 기쁨과 생각은 인간을 위한 선안에서 찾는다.그러나 이미 우리가 고르기아스에서 보았듯이 모든 기쁨들은 선이 아니다.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복잡하고 어려운 기쁨의 논증으로 이끈다.그것은 Republic속에서의 구절로 부터 수 많은 견해가 나타난다.거기에는 육체의 기쁨과 영혼의 기쁨이 있다.어떤 기쁨은 순수하다보다 "혼합되다"가 많고 필수적으로 고통이 나타난다.가려움을 긁는 것은 육체의 고통이 수반된 육체적 기쁨의 예이다.물을 마시는 것은 목이 탈때 유래한 것이다.그러나 고르기아스에서 보여준바처럼 그것은 고통을 수반한다.욕구는 육체의 저해상태이다.영혼의 지나간 방해이다.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일치되었을때 지금 만족스러운 영상을 갖는다.나중에 고통은 기쁨과 고통의 중립적인 상태이나 현재는 유쾌하다.그러나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예상의 기쁨은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다.그러나 빈번히 혼합된 몸의 기쁨들을 기대한다.그러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혼합되어 있다.또 다르게 혼합된 정신적 기쁨은 우리들의 친구들의 실패에 악의 있는 즐거움이다.순전한 기쁨들 사이에는 아름다운 형상들과 색깔들을 보는 것이고 아름다운 음색들을 듣는 것이고 즐거운 향기를 맡는 것이다.그런 것들은 원하는 감정없이 앞서가는 것이고 그러므로 고통에서 자유롭다.아주 작은 것을 위한 모든것의 마지막은 배우는 즐거움이다.
이것으로부터 모든것은 모든 기쁨들이 고통과 관련이 있어서 나쁘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오히려 그것은 응축된 기쁨같지만 그것은 아니다.왜냐하면 그것들은 질병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자면 기쁨은 열이 있는 사람이 그의 목마름을 가시게 하는 것으로 부터 얻는다.그러나 순전한 기쁨들과 다른것들은 정상적인 생활에 필요하다는 것은 선한 삶으로 받아들여진다.
현대 플라톤의 종국에 대한 이런 기록은 개인의 도덕적 이론의 기여이다.그러나 그의 자라나는 흥미는 기쁨과 고통에 의해 이부분에서 다루어진다.도덕적 행동의 요인은 법률편 속에서의 최초의 표현이다.배경과 복잡함과 부자유스러운 일은 단지 여기서 언급된다.플라톤이 유명하게 된 다른 이론적 공강은 없다.The Republic은 정치적 이론과 교육에 관한 고전적 작업이다.그리고 사람에 대한 취급은 향연속에서 후반의 생각위에 거대한 영향을 가져왔다.완벽한 정의에 관한 것은 플라톤에 의해 단지 모든 이러한 것과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자로써 인식론자로써 논리학자로써 그리고 도덕가로써 그를 연구해야한다.형상의 이론 그의 형이상학적 구조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다루어 진다.그리고 그것의 기원적인 형상도 좀처럼 방어되지 않는다.그러나 가치의 많은 것은 파멸로부터 구제 될 수 있고 지식의 이론과 논리적인 그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을 위한 훌륭한 출발점을 제공한다.흥미의 넓이는 결코 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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