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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 대한 소고-맑스의 응답

by 소이나는 200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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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헤겔에 대한 소고-맑스의 응답

 헤겔

1. 생 애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튀빙겐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790년에
이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여러  가정에서 가정 교사일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베른에서,  그리고 다음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하였다.
그는 종교에  흥미를 가져 기독교의 기원을 연구하게 되었고,예수의 생애에
관한 저술을  내었는데, 여기에서 기적과 정통적 그리스도관을 부인하였다.
2처음에 그는 자연에 관한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해석을 채택한다고 공언했는
데, 해석은 셸링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또 그는 셸링을 통하여 예나 대학에
서 가르치는 자리도 얻었다.  그와 셸링은 [비판적 철학잡지]를 함께 발산하
여  1802-1803년 2년간 함께 편집을 맡아보았다. 1803년에 셸링이 예나를 떠
나자 그는 셸링의 여러 견해와 결별했고, 그 후 10년 동안 차츰 자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예나를 떠난 후로 뉘른베르크  대학/하이델베르크 대학,
그리고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철학계의 지도자로 여겨지게 되었고
또 많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931년에 베를
린에서 퍼지기 시작한 전염병 콜레라로 죽었다.

2. 학 술

헤겔의 철학은 일종의 칸트주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칸트 후계자들처럼 그
도 칸트의 불안정한 입장의 여러 국면을 그대로 지키지는 않았다. 그는 칸트
의 몇 가지 논점을 열렬히 받아들였고, 다른 몇몇 논점은 전적으로 배척하였
다.  그리하여 칸트의 비판 철학을 소위 절대적 관념론(觀念論)의 체계로 변
모시켰다.
 헤겔은 경험의 이성(理性)적 성격에 대한 칸트의  주장에 의하여 깊은 감명
을 받았다. 경험은 아무런 합리적 구조도 없이 그저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소재(素材)가  아니다.  헤겔은 로크와 흄이 경험을 이와 같은 소재(素材)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  이성(理性)은 개인 속에 머물러 있는, 그
리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러 가지  직관을 가지고 작용하는 추상적 능
력이어서는 이성(理性)과 경험은 둘潔틈臼 하나이다. 이성(理性)은 경험의
객관적 구조이다. 그리고 우리들 인간은 우리의 심리학적인 여러 변덕스러운 
경향을 따르기를 그치고 우리의 사고로 하여금 경험이 일어나는 방식 그대로
를 따라가게 할 때 가장 참되게 이성적으로 될 수 있다.
 헤겔은 '사물들 자체'에 대한 칸트의 상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성이 오
직  현상 세계에만 적용되고  모든 실재에 대하여서는 구성적인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칸트가 가르쳤을 때 칸트도 결국 이성을 너무나 신통치않은 우연적
인 것이 되게 하였다고 그는 논란하였다.  물론 실재는 개인의 정신들로부터
독립해 있으나 정신과 전혀 관계없이 존재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사물들 자체'는 만일 이성의  한계를 넘는 것이라면 도대체 아무것도  아니
다. 현상들은 실재와 대조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상
들과 대조를 이루는 실재는 경험의 배후에, 그리고 사고와는 영 떨어져서 존
재하는 가상적(假想的)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편적인, 따라서 아
직 어느 정도 합리성이 부족한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 경험이 인간 이상의 정
신의 객관적 질서로서 지향하는 완성된 경험이다. 현상들은  실재에 대하여,
마치 부분이 전체에  대한 것처럼 관계되고 있다.  경험은 단순히 혹은 원래
인간적 사건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광대한 우주적과정으로서, 거기
대한 우리의 유한한 참여를 넘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무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혹은 전체로부터 인위적으로 추상하는 우주적
경험의 어느 토막에서나 우리는 여러 가지 혼란/모순/애매성을 발견한다. 우
리의 유한한 경험이 더욱 더 넓어지거나 혹은 우리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전
망을 더욱더 구체적인 것이 되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경험이 더욱더 많은 합
리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경험의 전부가  완전
히 이성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경험의 여러 가지 못마땅한 점, 혹
은  못마땅한 것으로 우리에게 여겨지는 것은  시간을 통한 우주의 점진적인
운동에서 모두 극복되는 것이다.

3. 절 대 적  관 념 론.

 이리하여 헤겔은 나중에 하나의 유명한 철학적 명문구가 된 말로, 현실적인
것은 이성(理性)적이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
다. 그는 이 원리를 역사의 연속체로부터 떼어낸 각 순간의 인간  경험에 적
용하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당연한 기대가 사건들의 경과에
의해서 가끔 좌절된다는 사실을 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속에
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혼합에 부딪친다. 그러나  헤겔은 절대적인 경험,즉
시간을 따라 발전하는 우주 전체의 충만한 구체성안에 온전한 합리성이 깃들
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말한 바와 같이, 헤겔은 19
세기의 문학에서 그 모든 국면의 특징을 이루면서 중대한 역사의식을 철학에
끌어들였다. 혹은 적어도 이 역사 의식을 그 자신의 철학에서 강조하였다.그
러나 헤겔이 다룬 역사는 그저 과거의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시간적 구조를 전체로서, 즉 과거/현재/미래에 있어서 이해하는 것이
다. 하나하나의 경험은 그 어느 것이나 아무리 향상의 도중에 있는 것일지라
도 결국  현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경험이 우리
의 단편적 경험의 여러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모든
부조화, 모든 의미의 결여, 모든 허망은 인간 정신에  있어서는 사라지지 않
지만 절대 정신(絶對精神)에 있어서는 사라지지 않지만 절대 정신에  있어서
는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다.  절대적 경험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그
필연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또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실재의  여러 가지 정도와 인식의  여러 가지 정도를 논하
였다. 환상이  우리의 경험에서 사실 일어나지만, 그것은  현상일 따름이요,
따라서 낮은 정도의 실재만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상의 존재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유한한  견지에서는 옳은 것이 될 수 있다. 그
러나 그것은 결국  낮은 정도의 지식밖에 낳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
터 헤겔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실재가 이미 완성된 것이요,
실재를 목적 삼는 우리의 인식은 온전하고 최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가정
함으로써 과오를 범했다고 헤겔은 생각하였다.  실재도  인식도 결코 완성될
수는 없다.  실재는 끝없는 과정이요,  그것에 대한 전적으로 올바른 인식은
오직 절대 정신에게만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의 어느 순간에서 발견
하는 세계는, 그것이 우리의 작업의 터전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과학들의 재
료로서 우리에게 추상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학문은 비록 고귀한 것이기
는 하나 지적 발달의 여러  단계요,  개별적 학자들의 정신적 경각심의 정도
와 지역  사회의 문화적 전진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현실적인 
유일한 세계는 우주 전체요, 전적으로 올바른 유일한 인식은 이 우주의 인식
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견해에 있어서는 우주가 곧 절대 정신(絶對精神)이다.  인
간 존재들 속의 정신은 하나의 주관적 과정이지만, 우주 속의 정신은 하나의 
포괄적인 역뼈 과정으로서 이에 의하여  우주는 그 자신의  완전한 성취를
향하여 서서히 전진하는 것이다.  절대 정신을 헤겔은 신이라 부르고자 하였
다. 이 견해는 역사상의 유태교나 기독교의 교리들과  아주 일치한다고는 도
저히 말할 수가 없다.  헤겔의 신은 제일 원인도 아니오 궁극적인 목적도 아
니다.  그것은 세계와 대립하는 것으로 세워진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것을 '가이스트(Geist)'란 말로  표현하는 데, 이 말은 보통 '정신'이라고 
번역되지만 헤겔의 경우에는 '문화'라고 번역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절대적
인 것은,  모든 물건과 모든 사건 속에  깃들어 있는 문화적 발전의 선이다.
그것은 우주가 더욱더 잘 이해되는 데로 진전하는 하나의  광대한 역사적 과
정이다. 역사는 그저 그것에 의하여 우리들 인간 존재들이 신을 의식하게 되
고 혹은 세계의 포괄적인 문화에 이르는 과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또한 그것에 의하여 신, 즉 가이스트가 그 자신의  발전과 그 양양한 미래에
대한 원대한 경륜을 더 충분하게 의식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4. 헤 겔 의  변 증 법

 헤겔은 실재와 인식에 관한 그의 이론이 하나의 새로운 논리학을 필요로 함
을 깨달았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이 논리학을 조직적으로 꾸미기에 주력하였
다. 그는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배척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
텔레스의 논리학이, 영구적인 실체들과 또 모든 실체가 주기적으로 되돌아오
는 고정된 전형들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의 논리학은 명제들이 참이 아니면 거짓이요, 또 참인 때에는 궁극적으로 참
이라고 가르친다. 헤겔은 발전하는 사물들과 변화하는 사건들의 모습을 드러
내어 주는 논리학을 원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사건들의 논리에 관하여 이야
기한다. 이와 같이할 때 우리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헤
겔은 생각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형식 논리학(形式論理學)은 이  논리학,
즉 사건들의 논리학이 아니다. 형식 논리는 오히려  이 논리로부터의 추상이
다. 형식 논리학은 세계의 동적 과정들로부터 멋대로 끄집어낸  고정된 사항
과 생명 없는 존재물을 다루기는  하나 이 동적 과정들의 본성을 살펴보지는
않는다. 헤겔이 제창한 논리학은 절대 정신(絶對精神)의 점진적 개현에 있어
서의 사상의 율동적 운동을 인정한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우리의 사고의 모
형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리고  우리들의 유한한
정신들을 떠나서 우리가 벌써부터 알려고 추구하고 있는 절대적 경험의 모형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리학을  사고의 법칙을 연구하는 신학이라고 정의
하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사고의 법칙을 특별히 인
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절대적 사고 혹은 보편적 
문화의 발전 법칙이다. 논리학에 의하여 법칙이 부여되는 이  사고는 무엇보
다도 진화라는 세계의 동적 발전이요, 그리고  오직 부차적으로 또 결과적으
로만  최선의 통찰의 순간들에 있어서의 현인들의 사고이다.  사고의 법칙들
이 인간 사고의 규범적 원리가 되는 것은,오직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우주의
시간적 진행의 현실적인 구조들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역사를 세 계의 단계로 변천하는 주기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이 단
계들은 그는 정립(定立;these)/반정립(反定立;Antithese),그리고 종합(綜合;
Synthese)이라고 불렀다. 이 단계들은 세계의 발전하는 생명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즉 군사/경제/정치/사회/사상의 각방면에 나타난다. 물론 이 각 방면
은 실제에 있어서 서로 얽혀 있다.  첫 단계에서는 오성이 우주의 상황의 의
의를 어떤 정설로 요약하고 결론짓는다. 이 정설은 그 상황에 관한 얼마간의
부분적 진리를 명료히 표현하고 있다.  둘째 단계에서는 처음에 내세워진 정
설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서 처음의 정설의 여러 가지 모자라는 점을 지적하
고 또 그 부분적 진리에 대한  전반적 회의를 시도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성(理性)이 부분적 이해와 부정적 비판을 종합하여 실재의 좀더 큰 부분을
더 올바르게 파악한다. 정립과 반정립의 부분적 진리들은 모두 종합 속에 보
존되어서 좀더 전체적인 견지로 합체된다.  그리고 이 정/반/합의 주기적 운
동은 끝없이 계속한다고 헤겔은 믿었다. 이 과정에는 종말이 없다.  모든 쓸
만한 종합은 새로운 비판적 검토를 위한 정립(定立;these)이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비판적 검토는 저 종합이 올바른가를  의심할 새로운 근거를 제시
하는 동시에 훨씬 더 큰 범위에 걸친 경험에 대한  좀더 충분한 이해로 이끌
어 주는 것이다.
 (우주의 역사와 인간의 여러 성찰에 있어서의)사상의 주기적 운동을 헤겔은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세계의 역사는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
것은 그가 세계 역사의 요점을  표현해서 한 말이다.  그가 변증법적 과정을
논함에 있어서 우주론적인 측면에 치중한 부분은 인류 역사를 취급한 부분에
비하여 딱딱하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전문적 철학자로서도 이를 이해
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그의 [철학 백과]에서 제시된 하나의 기본적
인 3원, 즉 정/반/합은 유/무/생성이다. 순수한 유가 시발점이다. 이것은 지
각되지도 않고, 촉감되지도 않고, 상상되지도 않고,  또 일정한 형태를 가지
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추상이요, 전혀 아무것도 아
닌 것이다.  즉 무이다. 유와 무는 서로 완전히 다르며, 또한 전적으로 동일
하다. 이 두가지의 종합綜合;Synthese)에서 생성, 즉 변화가 나온다. 또 하
나 다른 3원은 질/양/척도이다. 질은 저 홀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물건의 질이요, 따라서 양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
고 질과 양의 종합에서 일정한 분량혹은 척도가 나온다. 헤겔은 이 3원과 이
밖의 여러 3원을 하나의 도식으로써 배열하였다.  그리고 이 도식은 그로 하
여금 막연한  사상으로부터 우리 주위에 그 충만한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 세
계의 진행으로서의 매우 착잡하고 발전한 사상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하였다고
그는  상상하였다. 그가 이 도식을 사용한 취지의 요점은 아마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세계는 막대한 수의 입자들로 되어 있어서, 이것들이 여러 가
지로 다른 결합과 순서의 연속으로  저들 자신을 배열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비교적 공허한 것으로부터 차츰 증가하는  깊은 의미에로의 줄기찬 성장이라
고 하는 주장에 있지 않을까 한다.
 헤겔은 그의 변증법적 공식을 인류 역사의 진행에 적용했을때 이 공식을 훨
씬 더 이해하기 쉽게 하였고, 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치게 하였다.  그는
인류 역사의 분야에 있어서 방대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대로부터 그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유럽의 정치사와 사회사에서 그의 논리의 유효 적절한
실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플라톤의 관념론(觀念論)은 그것의 반정립으
로서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을 낳은 하나의 정립이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
고 서로 대립하는 이 두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에서 그것들의 종합
내지 절충을 보게 되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쾌락에 대한 무관
심을 표시한 스토아 학파의 항변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다 같이 참된 부분도
있지만 그릇된 부분도 없지 않았던 이 두학설은 기독교의 좀더 균형 잡힌 윤
리학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초극되었다.  특권 계급들의 세습적 여러 권리에
대한 부르봉 왕가의 주장은,  모든 사람의 평등한 여러  권리를 요구한 자코
뱅당의 혁명적 주장의 직접적 기연이  되었다. 그리고 설익은 이 두 개의 부
분적 진리는 한데 합쳐서 민족국가내부의 국민들을 위한 법적으로 인정된 여
러 권리라고 하는  좀더 건전한 이론과 그 실천으로 진전하였다.  헤겔은 인
류역사에 있어서의 충돌과 이 충돌들을 재료로 한  새로운 형의 사회 질서를
세우는 정치가다운 창건을 해명함에 있어서 그의 변증법적 방법을 아주 교묘
히 구사하였다.

4. 역 사  철 학

 그의 사후에 출판된 [역사  철학]의 서론에서, 헤겔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
아의 고대제국들로부터 18세기의 서구 여러 나라들에 이르는 인류 역사의 개
관을 통하여 그가 발견한 역사의 의미에 관하여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 인류 발정의 역사에서 네 개의 주요 단계를 발견하였다.  고대의 여
러 제국에서는 전제 정치가 널리 행하여 졌고,  또 그 당시의 도덕은 외부로
부터 인민 대중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이러한 전제 정치는 인류의 유아기이
다. 이 이후로 희랍 세계에 있어서 개인주의와 더불어  모든 사람이 그들 자
신의 개인적 취미와 사상을 자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해방이 왔다.이와 같
은 분방한 자유는 인류의 청년기이다.  다시 그 다음에 로마 국가의 균형 잡
힌 정체가 일어났다. 이  정체는 제국의 여러 제도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권
력을  쥐도록 개인들을 훈련합으로써 권위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를 조정하였
다. 여기에 인류의 장년기가 있다.  마지막으로 여러 세기에 걸친 혼돈이 있
은 뒤에 헤겔이 서슴지 않고 이 모든 역사적 발전과정의 완성이라고 부른것,
곧 독일 국가의 출현을 보았다. 그리고 이 국가의 생명은 기쁨에 차 있고 이
성적이고  완전하다고 그는 감히 말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어서 인류는
그 원숙기에  도달한 것이다.

5. 윤 리 학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觀念論)의 몇가지 귀결은 우리는 그의 여러 윤리학적
이론에서  볼 수 있다.
 개인은 사회로부터 추상한 것이요, 자연적 여러  권리의 찬미는 (그것이 로
크가 한 것이든 자코뱅 당원들이 한 것이든) 도덕적으로 보아 틀린 일이라고
헤겔은 믿었다. 사회는 사람들의 한갓된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
은  하나의 정신적 실재요, 그 속에 파고들어감으로써 사람들은 자아의 의식
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 제한을 가하는 사회는 물론 완전한 것
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 정신(絶對精神)의  발전에 있어서의 한 단
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가지는 유일한
사회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시대와 처소의 가이스트요, 적어도 그에게 있어
서는 과학/예술/종교/철학 및 모든 국면의 문화의  보호자요 육성자이다. 자
기의 사회가 완전한 것이 못된다 하여  그 사회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자기의
한정 있는 완성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기반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
로 한  개인의 의무는 마치 그가 현재의 사회를 대체하고 들어서리라고 공상
하는 어떤 미래의  사회 속에 이미 들어간 듯이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가 그의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그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충분히 살리는 것이다. 가족과 정치적 조직 같은 사회의 여러 제도는
사회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안정시켜 놓은 것들이다.  이 제도들은 비록 불완
전한 것일지라도 기성 제도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의견들보다는 훨
씬 더 건전한 도덕 기준이다. 우리들 인간 존재는 절대 정신(絶對精神)이 우
리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취하고 있는  변증법적 발전에다 우리들 자신을
밀접하게 관련시키는 한에 있어서만 좀더 나은 존재로 진보할 수 있다. 도덕
적이라 함은 자기 자신의 사회의 가이스트(Geist)에 합치하면서 사는 것이다.
 헤겔의 윤리적 여러 학설은 그 여러 결과의 하나로서 보수주의의 강화와 국
가 예찬을 가져왔다.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가끔 그를 비난하되, 그가 부
당하게 개인의 인격을 정부의 권위 밑에 굴복시켰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실
제적인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서는 이 비평가들이 아주  옳다고 볼 수도 있
다. 그러나 이론에 있어서는 헤겔이 국가와 정부를 동일시할 의도는 전혀 없
었다. 정부는 국가의 한 기관이요 또 매우 중요한 기관으로서 없어서는 안되
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러 기관들 가운데 한 기관일  따름이다. 국가
가 하나의 정치적 실재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헤겔은 '정치적'이
란  형용사를 희랍어의 의미로 사용하여, 단단히 조직된 하나의 집단에 있어
서의 사회 생활의 모든 면이란 의미로 이 말을 썼다. 국가는 한 사회로 하여
금 여러 가지 예술 활동을 추구할 수 있게 하며,  여러 가지  과학을 발달시
킬 수 있게 하고, 또 그 개개 성원의 정신을 교육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관습
과 제도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는 포괄적 실재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문화
적 정신의 담지자이다.

6. 헤 겔 의   영 향

 헤겔의 영향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엽에 걸쳐 강대한 바가 있었다.  절
대적 관념론(觀念論)의 학파는 실용주의자들과 신실재론자들의 반대가  일어
나기 전까지 독일 안에서 지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강단 철
학을 풍미하였다.  헤겔 철학에  호의를 가진 비평가들은,  그것이 편파성에
대한 웅대한 항변이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편파성에 대한 웅대한 항변은
쉽사리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위한  변명으로 전환한다. 왜 그러나 하면, 이 
항변은 모든 선뿐만 아니라 모든 악도 우주의 과정에 있어서는  불가피한 것
으로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겔주의자들은 실제에 있어서 그
와 같이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어떤 사람들의 수중에서 신의 나
라를 현존하는 교회와 동일시하는 데로 나아간 것과 꼭 마찬가지로 헤겔주의
는 이상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데로 나아갔다. 헤겔주의자들은
모든 현실적인  악이 절대 정신의 상승운동에 있어서 초극된다고 믿을 수 있
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모든 악이 모든 선에  못지않게 절대자의 사상이 새
로운  개현으로 발전하는 변증법적 과정의 불가피한 일부라고 고백하지 않으
면  안된다.  그리고 개혁의 정열을 가지고 절대자로 하여금 바삐 그 노정을
가게 하려고 애쓰는 유한한 행위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이론은 웃음
거리요, 그의 실천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절대자는 그 스스로의 방식을 따라
서, 그리고 그 자신의 시기에 있어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이다.

7.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응답

 헤겔의 저작을 연구한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카를 마
르크스이다. 그는 독일 사람으로서 프랑스로부터 두 번 그리고 벨기에로부터
한 번 추방당했으며, 그의 성년기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는 영국에
서 제 1 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동맹)을 위해 일하였고, 또 그
의 주요 저서인 [자본론]을 영국 박물관의 도서실에서 썼다.  마르크스는 헤
겔의 제자로서 출발했으나 결국엔  헤겔의 적대적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일
반적인  형이상학적 견해나 우주론을 전개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만
그의 이른바 유물 사관을 정의하고 옹호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헤겔에 대
한 그의 철학적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관념론(觀念論)과  절대주의를 버렸으나 변증법적 방법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고.
 마르크스는 그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유물론'이란 말을 씀으로써  자주 오
해되어 왔다. 그는 생각지 않는 물질이 사회적 변화의 경로를 결정한다는 가
정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또한 정신이 물질의 쓸데없는 부산물이라고 생각하
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정신을 가지고 실제를 정의할 수 있다고 하는  헤겔
의 설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
다고도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물질이 정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도
보려고 하지않았다. 사유, 순수한 사유가 비록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것
도 생산해 내지  못하며,또 세계 안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
러나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데 뭉쳐 집단을 이루고 또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적 및 사회적 재료에 대해서 작업을 가할 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물
론 인간의 참여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많은  변화가 자연에서 일어날 수 있
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가장 많은 흥미를 가졌던 변화, 인류의 복지에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그 지능으로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실제적 기예와 고안을 통해서 그들이 생기게 하는 변화라고 그는 믿었다. 사
람들은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게 역사를 만든다.  사람들은 그들의 물질적 환경을 더욱더 잘 좌우하게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미래의 역사의 진로를 좌우하는 힘을 더욱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깨달았다.  그러나 세계는 사유의
전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물질적 세계요,  그 안에서 사유는 물질적 구
조들과 과정들 속에 구체화되지 않는 한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절대주의를 통박하였다. 그는 절대주의를 사회적 반동의
방패로 여겼다(유럽에서는 1830년과 1848년의 혁명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그런
반동이었다).  그는 헤겔이 사회적 반동을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광채로 휘감
았고, 사회의 특권 계급들로 하여금 필요한 개혁을 반대하도록 격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빈곤과 인류의 고뇌는 이것들이 절대 정신(絶對精神)의 발전에
있어서의 단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유물
隙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즉 그는 역사를 적대  세력들의 끊임없는 충돌이
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세력들의 하나하나는 아무리 기성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들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수호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을 폭력에 의
하여  거꾸러뜨리는 조건이 될 수 있는  불만을 생기게 한다. 제각기 혼자서 
일하는 개인들은 변화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거의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나
계급들은 철저한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행동의 방편을 발견할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경제적 집단들이 권력을 위해서 서로 투쟁하며, 그리하
여 어떠한 사건들이 그들의  시대에 일어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립(定立;
these)/반정립(反定立;Antithese)/종합(綜合;Synthese)의 이론이다.  마르크
스는 경제적 동기가 사회의 중요한, 그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힘이라고 믿
었다.그리고 예술과 교육과  철학, 심지어 과학적 문제들과 발견들을 경제적
이익에 대한 근본적 욕구를 조장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 자신의 매우 중
요한 역사 연구는 그  당시에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공업 생산의 자본주의적
체제로부터  하나의 사회주의적 체제로  옮아가는 것을 촉진하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를 중심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입장을 일반적
인 철학적 술어로 표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본
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의  계기하는 여러 단
계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마르크스는 보통 선거, 일반의 동의, 대의 정부와 같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민주주의적 방법에 대해서 거의 흥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의 영향은 
그의 사상의 이 면을 특히 두드러지게 했다.  만일 어떤 계급이 다수결을 통
한 일반의 동의를 기다린다면, 그 계급은 그목적을 절대로 달성하지 못할 것
이다. 역사가 계급들 사이의 충돌로 이루어지는 마당에서는, 보통 선거는 이
미 권력을 쥐고 있는 계급의  이익이 아니면 일반 대중의 무기력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과감한 소수파는 투표자들의 무리 속에서 전향자들을 만들려고 정
력을 허비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직접 행동에 의하여 더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과감한 소수파의 성원들을 단결시키는 주요 유대가 되는 것은  언제나
경제적 이해 관계를 가진 하나의 공동체일 것이다.  오직 이 경제적 이해 관
계를 가진 공동체가 있는 곳에서만 비로소  한 집단의 성원들이 지적인 원리
들과 이 밖의 여러가지 사회적 힘에 위해서도 또한 단결될 수 있다. 어떤 개
인들은 남들의 복리가 곧 자기의  복리라고 생각하고 남의 복리를 위하여 일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의 개인적 이익에 정반대되는  행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
서의 지배적 힘과 사회 변화의 주요한 수단은 모두 경제적인 것이다. 마르크
스가 많은 개인들에  대한 공민권의 침해를 허용하려 한 것은,  약간의 개인
들이 필요한  사회적 개혁의 여파로 고통받게  마련이라고 하는 그의 확신에
기인하는 것이다. 헤겔처럼 그도 국가 안에  있는 개인들의 행운보다 하나의
전체로서의 국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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