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 시를 너와 나 사이의 연애시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었다. 이번 리포트를 계기로 이 시에 대해 문학적인 의미로 분석해 보려고 한다.
김춘수는 1922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여 경기중학과 일본의 니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47년 제 1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계속 문단에 주목을 받아 1958년에는 한국 시인협회상을, 그리고 다음 해에는 자유아세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독특한 그의 시론(무의미 시론)을 전개하여 한국 시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으며, 60년대의 소위 순수-참여의 대립에서 순수시를 지켜온 시인이다. 그의 작품 경향은 대체로 순수와 객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며, 관념의 사물화 혹은 언어의 절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조금은 난해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극도록 절제된 언어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우리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인도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놓치고 있는 존재의 지평을 열어 보여 주고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우선 보는 사람으로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사물(세계)과 만날 때 그것을 시로 표현한다. 우리의 앞에는 언제나 사물이 펼쳐져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의 진정한 실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태도나 방식은 어떤 선입견이나 통념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도 우리는 그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보기보다는 목수로서 또는 목재상인이나 식물학자로서 보기 때문에 각기 다르게 생각하며 그 나무를 자기 나름대로 유용하게 쓸 방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무는 참다운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집 짓는 재료 혹은 돈 버는 자원 또는 식물학적인 대상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 그 자체를 참되게 보기 위해서는 선입견을 버리고 순수한 시선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빛이라는 밝음 속에서 노출되어야 한다. 이때 그러한 밝은 빛을 비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사물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 속에 드러낸다는 일이 된다. 시인은 사물을 보는 사람이므로 그는 사물을 언어의 밝음 속에 불러내어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다. 언어로 불러낸다는 것은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이름 지어 규정하는 일이다.
이 시 <꽃>은 이러한 언어의 로고스적인 본질을 전제로 할 때에 해명된다. 이 시 제 1연과 2연에서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니까 몸짓에 불과하던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아직 나의 시야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를 찾고 있었고 그 찾는 행위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며, 그러한 '부름'을 통해서 그는 '꽃'이 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로고스인 언어의 빛을 부어 줌으로써 그 때까지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내가 부른 것은 그의 이름이고 이 때의 '이름'은 그 대상에 대한 규정이며,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개별성의 부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나무도 아니고 새도 아닌 '꽃'이라는 존재의 성격이며, 그 주체를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하여 나타내 보여 주는 바의 그것이다. 따라서 아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무엇이라고 규정되지 않은 막연한 것, 즉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꽃은 코스모스나 봉숭아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내가 이름 부르기 전에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다만 막연한 몸짓이었지만 이제 이름을 부른 후에는 그는 어떤 것 즉 꽃이라는 존재자로 내 앞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나에게 꽃이라는 존재의 표상이다. 즉 그는 이제 막연한 몸짓이 아니라 꽃이라는 하나의 '의미'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 없는 몸짓인 '그'를 불러 꽃이 되게 한 '나'는 무엇인가? 이 시의 3연과 4연은 '나'와 '그'와 '너'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나'는 아직 무규정의 존재자이다. '나'가 어떤 안정된 존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서 그가 꽃이 된 것처럼 누군가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아직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나'는 그러므로 쓸쓸하고 고독한 하나의 불안이다. 실존철학에서는 이러한 불안이 내가 나를 각성해 가는 실존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그 실존을 끊임없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려고 한다. 그러한 '나'는 바로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든지 이러한 불안한 세계의 무규정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제 4연에서처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며 그 '무엇' 이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이 '눈짓'이란 우리의 존재의 확인, 즉 우리들의 근거에 대한 확인이다.
우리들 보통 사람의 시야에 드러나는 사물은 언제나 우리의 선입견이나 통념을 벗어나서 순수하게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려고 하며, 사물을 드러나도록 언어의 빛을 비쳐준다. 그러한 행위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며, 사물은 그 '이름 부름'을 통하여 언어의 밝음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세상을 그저 막연하게 내가 누구인 줄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불안하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무엇인가 어떤 '존재자'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하며, 그때 비로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 즉 확실한 의미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얼핏 보기에 아주 감상적인 연애시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드려다 보면 이 시는 '나'라는 고독한 실존이 불안 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요, 절절한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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