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2. 조선 정조 (정조의 치적, 정조의 업적, 정조의 탕평책, 준론 탕평, 장용영, 규장각, 금난정권 철폐, 신해통공, 문체반정, 금등사건, 홍국영, 초계문신제, 만천명월주이옹, 무예도보통지, 추관지, 동문휘고, 탕탕평평실, 화성 건설, 홍재전서, 현릉원, 진산사건, 시흥환어행렬도, 규장각도 김홍도)
1. 적극적인 탕평책
(1) 준론 탕평 시행
1)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
2) “‘탕탕평평실’ 평액을 달았다. ~ 백성에게 직접 의견을 ~”
3)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지만 비판하기도 함
(2) 척신(김귀주, 홍인한, 정후겸)·환관 제거
(3) 노론 청명당, 청남, 소론 준론 등용 (공용파의 집권) - 주로 남인 계열(청류)의 시파가 중용
* 채제공 - 남인 학자 보호, 서학 묵인
(4) 능력 중시
(5) 홍국영(세도정치)을 내치고(1779) 소론 서명선, 노론 홍낙순 등 연합정권 출범
→ 시파·벽파의 대립 발생 (1783) → 3붕당 보합체제 성립(1788) : 노론 김치인, 소론 이성원, 남인 채제공
→ 시파의 정권 장악 (1789)
cf) 영·정조 탕평의 공통점 - 왕이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를 양성하고 재교육 시킨다.
2. 왕권 강화책
(1) 장용영 설치 (1758) - 친위부대 (cf. 순조 때 폐지)
(2) 규장각 설치 (1776) - 창덕궁 주합루
1)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이 검서관으로 정치에 참여
2) 비서기능, 문한 기능
3) 강화도 외규장각 (1781)
4) 일성록
cf) 숙종 때 도서관으로, 갑오개혁 때는 폐지
[규장각도 - 김홍도]
(3) 초계문신제 시행
1) 초월적 군주로 군림
2) ‘만천명월주이옹’을 자처- 군주권 확립
‘만 갈래의 하천을 밝게 비추는 달 같은 존재’,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
3)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하여 등용
(4) 수원 육성 (화성)
(5) 수령의 권한 강화 - 향약을 직접 주관
cf) 규장각 검서관 - 정조 서얼 출신 학자를 우대하기 위해 두었던 관직으로 서적의 교정과 필사를 담당
(6) 선전관무강 - 무신 육성
(7) 대유둔전 설치 (soy 한국사)
3. 치적
(1) 신해통공 (1791) -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을 폐지 - 자유 상업 진작 (시전의 위축)
cf) 통공정책 - 노비와 서얼 차별 완화, 민생의 안정, 문화 부흥
(2) 성리학을 정학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남인의 고학, 서울 노론의 북학, 불교, 한당 유학까지 여러 학문을 넓게 수용
(3) 대고(大誥)를 반포
* 대고의 4目 1) 백성의 살림살이 제정 2) 인재의 성취 3) 군정을 다스림 4) 재용의 풍족
(4) 수리시설 개편 - 만석거, 만년체 등 / 제언절목 반포
(5) 편찬
1) 대전통편 (김치인 1785)
a.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
b. 균역법, 초계문신제도, 서얼관계법규, 노비신공감소, 노비추쇄법 폐지,
2) 동문휘고 (정창순) - 조선의 외교 문서집
3) 탁지지 (호조) - 초호의 사례 등 기관 기능 정리 (경제서)
4) 추관지 (형조, 박일원) - 형률에 관한 법령집
5) 규장전운 (이덕무) - 음운을 정리
6) 홍재전서 (정조) - 정조의 개인 문집, 학자 군주 과시
7) 무예도보통지 (이덕무, 박제가) - 병법서
8) 고금도서집성 - 중국의 고금을 수입해 학문의 기초를 마련
9) 춘관통고 (예조, 유의양) - 예서
10) 홍문관지 (홍문관, 이노춘) - 홍문관 역사 정리
11) 규장각지
12) 태학지 (민종현 ) - 홍문관 역사 정리
13) 병학통 (장지항) - 군사 훈련 기본 교범
14) 송사전 (이덕무) - 송나라 역사
15) 사학화성 - 음악서적
16) 내각일력 - 규장각 일기록
17) 존주휘편 - 인물의 사적
18) 일득록 - 정조와 규장각 문신과 대화
4. 정치 사건
(1) 문체반정 운동 (1792)
1) 청나라 패관소품의 경박한 문체를 쓴 노론계와 소론계 , 북학파 박지원을 지목하여 반성문 제출 명령
도문일치의 문체를 공부하여 올리도록 함
2) 시파계 남인의 정권 유지 목적
(2) 금등사건 (1793)
1) 금등 -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준 영주의 친필 쪽지
2) 사도 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
3) “피 묻은 적삼이여 ~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 가~”
4) 현릉원 (1796) - 사도세자 묘소를 수원으로 옮긴 곳
5) 오회연교 (1800) - 정치원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6) 화성건설
a. 1789년 사도 세자의 묘소를 수원부 읍치가 있었던 화산 아래로 이장하면서 비롯되었다.
b. 정조 18년 (1794) 정월에 시작되어 불과 34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 10월에 일단 마무리되었다.
c. 공사에는 경기도의 농민들이 경비와 품값을 주고 부역에 동원하였다. (X- 강제)
d. 만석거와 대유둔전 등의 모범적인 수리 시설과 국영 농장을 설치하고 대도시의 조성과 상공업 진흥에 노력
e. 행궁, 학교, 사직단과 장용영의 외형을 설치하여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남방 요새지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f. 화성 행차 - 배다리, 원행을묘정리의궤, 시흥환어행렬도
g. 화성성역의궤 편찬
1. 의식 절차와 공사 진행에 관한 절차 기록
2. 정교한 활자와 높은 수준의 인쇄술
3. 각종 건조물과 공사에 사용된 기계·도구 등의 그림이 수록
☞ “정조 18년 1월부터 정조 20년 8월에 걸친 성곽의 축조는 큰 토목 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편찬을 명령,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이어 순조 1년 9월에 발간되었다.”
[시흥환어행렬도, 정조 - 화성에 다녀오는 행궁 모습]
(3) 진산사건 (1791) - 천주교식 제사 지낸 사건
cf)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발굴 (2009) - 정치 현안 상의, 노론 벽파도 밀착된 정치 동반자
5. 기타
(1) 전랑의 통청권 혁파
cf) 조선 후기에 3사가 폐지된 것은 아니고, 환국동안 비중이 줄고 세도 정치에는 행정 실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2) 수령의 권한 강화
(3) 공장안 폐지
(4) 3대 상가 형성 - 이현(동대문), 칠폐(남대문 밖), 종루(종로)
(5) 활자 -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목), 정리자(구리), 춘추관자(철)
(6) 고공법 제정 - 주인의 노비 살해에 대한 형벌강화
(7)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
6. 한계 - 붕당 자체의 해체는 못함
영 조 |
정 조 |
탕평책, 왕권 강화, 노론등용, 병권 강화 |
탕평책, 시파 등용, 장용영, 규장각 |
서원 정리, 신문고 제도, 균역법 |
금난전권 폐지(육의전 제외), 공장안 폐지 |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추관지 |
임진자 (활자) |
생생자, 한구자, 정리자, 춘추강자 |
☞ 「홍재전서」 - 정조 개인 문집
“옛날의 붕당은 혁파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오늘날의 붕당은 가능하다. 왜 그런가? 옛날에는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당을 이루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당을 이루었다. 당을 혁파하고자 하면 군자는 반드시 해를 입고
소인은 뜻을 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을 만드는 것은 군자나 소인이 아니다.
저쪽에 군자와 소인이 있으면, 이쪽에도 반드시 군자나 소인이 있다. 반드시 그 당을 혁파한 후에 군자는
모을 수 있고, ~ 대개 지금의 붕은 사사로운 붕이다. ~”
☞ 「비변사 등록」 - 정조 1799
“황해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수안에는 본래 금광이 다섯 곳이 있었다. 두 곳은 금액이 다하였고 세 곳만
금액이 풍성하였다. 지난해 장마가 심해 광꾼들 대부분이 흩어졌다. 올해 여름 새로이 39곳의 금혈을 팠는데,
55여명의 광꾼이 모여들었다. 일부는 도내 무뢰배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사방에서 이득을 좇아 몰려온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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