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 교육 진흥 운동Ⅰ. 조선 교육회1. 일제하의 식민지 교육- 철저한 식민지 교육, 낮은 취학률 (일본의 1/6)(1) 1910년대 (무단통치기)1) 제1차 조선 교육령 (1911) – 충량한 국밍 육성, 실업교육에 중점2) 교육 연한 단축3) 교육 내용의 변화 a. 보통학교 - 역사•지리 과목 폐지b. 고등보통학교 - 한국 역사•지리 교육 X4) 사립학교 규칙 (1911) - 탄압5) 개정사립학교 규칙 (1915)6) 서당규칙 (1918) “조선은 아직 일본과 사정이 달라 그 교육은 특히 덕성의 함양과 국어(일본어) 보급에 전력하여 제국신민된자격과 품성을 구비케 함을 요할지니, 만일 공리공담(空理空談)하여 실행에 소홀하며 근로를 싫어하고 안일에 흘러 악풍에 빠진다면 교육의 본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2) 1920년대 (문화통치기)1) 제2차 조선교육령 (신교육령)2) 목표a. 표면적 - ‘일시동민’ b. 실제 - 무차별 동화3) 교육 연한 연장4) 조선어 과목, 조선지리•역사 교육5) ‘시립학교규칙’(1929) 개정6) 복선제도입7)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성고등학교는 3년에서 4년으로 연장8) 대학관련 규정 신설 – 경성 제국대학 창설cf) 학교에 들어가는 비율은 10명 중 2명정도이고 서당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문화적 제도의 혁신으로써 조선인을 유도하여 그 행복과 이익 증진을 도모할것이다. ~ 총칼로 지배하려는 것은 그 순간의 효과밖에 없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과 종교와 교육, 그리고문화를 앞장 세워서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 이 땅의 어린이들을 일본인으로 교육하겠다. 황은(皇恩)에 감읍하도록 조선 민중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을 세뇌시켜야 한다. 이것이 나의 문화정책이다.”<사이토의 발언> - 3•1운동 이후 친일파 육성“임시비만 500만원 가량 들었고 ~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 중에서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168명 학생 중에서 조선인은 고작 44명 이었다.”- 경성제국대학 개교식 참관기(3) 1930년대 이후1) 언론사 폐간2) 제3차 조선 교육령 (1938)가. 교명변경 - 일본과 동일하게 변경a. 보통학교 → 심상소학교 b. 고등보통학교 → 중학교 c. 여자고등보통학교 → 고등여학교나. 국어, 국사는 선택과목다. 3대 교육방침 a. 국체명칭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분명히 하는 일),b. 내선일체 (일본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교육시킨다고 표방)c. 인고단련 (어려운 것을 참고 여러 번 반복하여 수양함)제 1조 소학교는 국민 도덕의 함양과 보통의 지능을 갖게 함으로써 충량한 황국 신민을 육성하는데 있다.제13조 소학교의 교과목은 수신•일어•산술•국사•지리•이과•직업•도화이다. 조선어는 선택과목으로 한다.3) 제3차 조선교육령 변경 (1941)4) 초등학교령 (1941)5) 제4차 조선교육령 변경 (1943) - 전시비상조치령 : 군사체계화, 조선어, 조선사 폐지제2조 국어를 상용하는 자의 보통교육은 소학교령, 중학교령 및 고등여학교령에 의함제3조 국어를 상용치 아니하는 자에 보통교육을 하는 학교는 보통학교,고등 보통학교 및 여자 고등보통학교로함.제5조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6년으로 함.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자는 연령 6년 이상의 자로 함.제7조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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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5년으로 함.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자는 수업연한 6년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함.1차 (1911) 무단통치 사립학교 억제, 일본어 학습강요한국인의 교육 보통, 실업, 전문 기술 교육으로 한정2차 (1922) 문화통치 사범학교, 대학교육교육시설을 3면 1교로 확대3차 (1938) 중일전쟁 황국 신민화 교육 강화, 내선일체우리말 우리역사에 대한 교육 금지4차 (1943) 태평양전쟁 수업연한 단축, 학도병제국어 국사 교육 완전 폐지학생을 토목공사와 전쟁물자 채집에 동원2. 민족 교육 운동의 전계(1) 민족 교육사관: 1910 - 어려움 ➝ 1920 - 야학, 항일 사상 ➝ 1931 (만주사변) 이후 - 말살정책으로 위축(2) 조선 교육회 창설 - 한규설, 이상재 (1920)“나는 조선여성교육회가 가정의 부인을 교육하는 데 열렬한 찬성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이미 많고가정생활에 구속된바 되어 간절한 향학심이 있되, 취학의 기회가 없어 고민하는 여자가 대개 얼마나 많은가.이로써 일어나는 가정생활의 불편과 여자 교육의 손실과 조선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가.”<1921년 신문기사> ➝ 야학 설립운동3. 민립 대학 설립 운동 (1922)(1) 배경 - 조선 교육회 → 총독부에 요구(2) 전개 1)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씩 1원씩’ - 모금운동2) 민립대학설립 기성회 결성 - 한규설, 이상재의 조선교육회 중심(3) 실패 - 일제의 방해, 자연 재해(4) 일본의 무마책1) 연희 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학당 - 대학 승격 노력2) 일제 방해 - 경성 제국대학 설립 (1924)“교육에도 계단과 종류가 있어 민주의 보편적인 지식은 이를 보통교육으로 능히 수여할 수 있으나,심원한 지식과 온오(蘊奧)한 학리는 고등교육에서 기대하지 아니하면 불가할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 유위의 인물을 양성하려면 최고 학부의 존재가 가장 필요하도다.”“우리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한 일이 되고 가장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있고,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안 된다. ~ 대학의 설립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 – 민립대학 설립 기성회 발기 취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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