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
Ⅰ. 서론
지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은 한반도와 그 부근,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분산되어있다. 현실적인 민족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한반도 이남으로 되어 있고, 현재 우리가 있는 이 곳은 중국이다. 현재 이곳이 조선족자치주로 되어있지만,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만은 아직도 남아있다. 지금 이 만주의 땅은 바로 우리 옛 민족이 살던 땅이고, 우리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이곳은 고구려인이 그 넓은 기상을 지니던 땅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구려와, 한반도의 신라, 백제는 어떻게 하여 통일이 되고, 그 통일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
1. 백제의 멸망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의 멸망원인은 당과 고구려의 쟁패에서 당의 이따른 패배로 인해, 고구려보다는 백제를 먼저 공격해야 된다는 인식과, 당태종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이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는 원조를 해주는 것을 먼저 제거해야한다"라고 하여 강대국인 고구려의 팔과 다리 같은 십자동맹국인 백제를 치게 된 것이고, 또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처음에는 해동증자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신라를 공격하여 지리산 근처의 성을 점령하며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는 고구려에게 원조를 청하지만, 고구려는 자신의 점령당한 영토를 다시 돌려줄 것을 요청하며 거절하고, 김춘추를 토굴에 가두는 등, 신라와 불편해지자, 신라가 당에게 백제 정벌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의자왕은 처음에는 뛰어난 왕 이였지만, 그 후 실정을 하여, 성충, 흥수 등의 충신을 귀양보내고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술과 향락에 빠져 버리게 된 것 또한 백제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7만의 군사가 군포로 하여 금강을 따라 부여성으로 출진하고,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가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의 군사는 탁현(황산벌)에서 백제의 맹장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군사에게 3번이나 폐하지만, 화랑 관창의 죽음에 사기를 얻어 백제군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2. 고구려의 멸망
당은 방호태로 하여금 663년에 20만의 군사를 데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패하게 된다. 고구려의 멸망은 내부분열에 의해서 몰락하게 된다. 연개소문이 664년에 사망하고 그의 장자 연남생에게 대막리지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에게 버드나무를 가져 오게 해, 한 개를 꺾으면 부러지지만, 세 개는 부러지지 않는다는 협동의 정신을 가르치지만 연남생이 동생 연남건에게 대막리지 자리를 맡기고 외각을 순찰하던 중, 첩자의 계속되는 모략에 의해, 연남건과 연남산이 정권을 잡고, 연남생은 당으로 투항, 이들이 삼촌인 연정토는 10여개의 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다. 그 후 668년에 당이 쳐들어와 남건이 당에 항복하고 남산이 저항을 하지만 끝내 멸하게 된다.
3. 삼국의 통일과 부흥운동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양국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당이 차지하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당은 신라까지 도모하려 하였다. 당은 문무왕을 계림도독부에 임명하는 등 부조리한 행사를 하였고, 신라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선 백제 유민의 포섭에 힘썼다. 백제의 관리들에게 골품제에 입각하여 신라의 관등을 부여한 것은 그 하나였다. 당도 백제의 유민의 민심을 받기 위하여 사로잡아 갔던 백제 태자 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사비와 웅진 등 약간의 지역을 제외한 백제전역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나 당과 신라의 군대가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무왕의 아들인 복신과 승려인 도침은 백제 부흥운동을 도모하였고, 흑지상지는 임존성에서 부흥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의자왕의 둘째아들 풍이 복신을 죽이고, 흑지상지는 당에 투항하는 등 백제의 부흥운동은 다시 자체 내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기에 이른다.
한편, 나라가 망하자 고구려 유민은 일파는 신라지역으로 약 80만명이, 당나라 전지역으로 30만명이 해산되었다. 이렇게 해산된 고구려인은 이정기, 고선지 등 유명한 장수가 되었다. 또한 이들 유민들도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그 전성이 당의 통치 밑에 있었으므로, 그 부흥운동은 당에 투쟁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검모잠은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성을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모으는 한편 신라에 후원을 요청하였다. 안승은 문무왕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신라는 당을 축출하고자 하였으므로 기꺼이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다. 안승이 추대되고 신라의 후원이 있자 고구려 유민들은 사방에서 호응하여 당군을 몰아내고 자립하였다. 그러나 전역을 가다듬은 당이 재차 침입하자 고구려 성들은 다시 함락 당하였고, 부흥군은 모두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안승을 받들고 있던 핵심적 부흥군은 비록 무력해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당은 고구려지역에 대한 직접통치를 포기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무창)으로 옮겨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보장왕은 신성에 도착하자마자 곧 말갈족과 연락하여 당에 투쟁을 시도하였으나 일이 탈로가 나 다시 당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당은 한반도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룩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바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을 식민지화하려다가 우리 민족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을 맛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삼국의 문화가 기본적으로 중국세력과 대항하는 측면에서 민족의 가능성을 시험하면서 성립한 문화였다는 점을 확인하는 역사 경험이다.
4.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
삼국간의 항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맺어 지면서 대한민국은 처음으로 민족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것은 비록 삼국 중 어느 한나라가 주축이 되어 민족통일로써만이 가능한 새로운 민족사의 전개를 전망하면서 이룩한 바는 아니었을지라도 분명히 우리 민족의 자기 성장과 그 발전 과정의 도모에서 획득된 위업이었다. 이에 이르러 우리 민족은 비로소 민족과 민족문화 형성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가장 후진국 이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은 크게 보아 문화적 후진성을 지닌 우리 민족이 선진세력과 대항하여 정당하게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이 중심이 된 경우보다도 그것이 민족사에 제시하는 의미는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신라사회의 건전성이야말로 백제, 고구려 양국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지닌 후진적인 한계성은 그 삼국통일에도 반영되었다.
첫째, 삼국통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어 민족국가의 형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국 말기부터 벌어졌던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상대국에 대한 대결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미미하나마 그들 사이에 동일 역사체 의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전부터 중국이 삼국을 삼한으로 불렀던 것은 이러한 삼국의 동질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삼국 사이의 대결이 약화되면서 반대로 뚜렷이 형성되는 것은 668년 이후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면서부터 이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결속하고 나아가 귀족세력을 억압하여 전제 왕권을 정점으로 한 중앙 집권화를 이루어, 삼국의 영역과 주민을 아울러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룩하려 하였던 것이다.
둘째, 신라의 통일은 영토상으로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상실케 하여 민족 생활권의 2차적인 축소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 영토상의 손실은 그 자체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우리민족을 주체로 하여 말갈족이나 거란족을 포섭, 동화하는 시늉까지 상실케 하였다. 실제로 신라는 통일 후 한족과 경쟁하지 못하고 발해와 적대관계에 섬으로서 민족의 역량을 무의미하게 소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민족의 가능성을 모두 실현하지 못하였던 아쉬움을 질책하고 그 원인을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을 뿐 외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한국 고대 문화가 전면적으로 붕괴 당하게 되었던 위기를 막은 위대한 업적을 부인하거나 감소시키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통일 후 신라는 여, 제의 유민과 지배층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삼국문화의 통합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삼국민이 합심하여 당 세력을 몰아냄으로서 통일작업을 마무리지은 경험에서 보여준 삼국문화의 공동기반은 민족문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에게 가능성과 한계성을 함께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진실로 고구려 지역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민족의 통일을 도모하여야만 했던 한국고대문화의 고충과 비록 그러한 손실을 보기는 했을지라도 훌륭하게 중국의 침략세력을 막아낸 민족문화의 역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역사적 경험이었다.
Ⅲ. 결론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이라는 외세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자주통일이 아니 였다. 또한 당의 백제에의 도독부 설치와 고구려의 도호부의 설치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에 한 과정으로 보일 정도였다. 비록 부흥운동을 도와 당을 몰아내지만, 그 또한 자주적이지 못 하였다. 고구려도 점령하였지만 완벽하게 점령하지 못하고, 그 거대한 영토를 받아들일 역량이 부족하였으며, 이곳 만주지방은 모두 당의 영토가 되어버렸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재산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특히 백제의 경우 삼국 중 제일 문화수준이 높았지만 지금 남아있는 유물이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신라의 수도는 경주로,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석으로 치우쳐있어, 한반도를 다스리는 균형을 잡기에 어려운, 불완전한 통일 이였다. 하지만 신라의 통일은 그 많은 뜻을 담고 있다. 우선 여러 갈래로 흩어진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융화하였다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문화도 모두 통일이 되어, 조화롭게 삼국의 문화가 남아있으며, 하나가 되었고, 경제와, 과학, 종교, 기술 등의 발전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또한 후에 오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보아도 통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현재 중국이하고 있는 동북공정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민족의 역사가 한 거번에 사라지려 하고 있다. 이는 신라의 통일과 고구려 보장왕의 도호부 임명, 백제왕의 아들의 도독부 임명 등으로 지방분권과 주정부사이의 역사로 기록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전에 노무현대통령이 독도문제를 말함에, 자기의 아내를 남이 자기 아내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라는 말과 같이, 내가 태어난 고향은 한 곳인데, 그곳이 내 고향이 아니라고 하면, 과연 내가 이 지구에 태어난 장소가 어디이며,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있는 존재의 시작이 사라져, 내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한다. 한국은 KOREA이다. 고려라는 뜻이다. 고려는 무엇인가. 고구려와 고려는 그 이름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국가이다. 그런 KOREA가 이제는 CHINA가 되려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고려가 고구려의 왕권을 계승받은 국가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모순은 많이 밝혀져 있다. 자료는 어딘가에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고분 벽화와, 남아있는 자료는 우리 민족과 다를 것이 없는 바로 우리인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가 아닌가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현재의 우리가 되게 이끌어준 과거, 나의 어린 시절이 다른 사람의 어린 시절이 되지 않게 굳은 마음으로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역사는 과거를 돌이켜, 미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는 밝은 것이 되기 위하여,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반성을 하여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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