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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독도]日학자 “한국 주장 일리 있다”"
[동아일보]
17일 일본 도쿄신문은 2개 면에 걸친 독도 관련 특집기사에서 ‘한국 주장에도 일리 있다’는 일본 학자의 인터뷰 기사를 일본 측 논리와 나란히 게재해 주목을 끌었다. 한국 측 논거를 외면해 온 일본 언론계 보도관행을 비추어볼 때 찾아보기 힘든 중립적 보도였다.
독도가 오키(隱岐) 섬에서 160km, 울릉도에서는 90km 떨어진 곳에 있다며 ‘울릉도’를 표시한 지도를 곁들인 것 또한 이례적이었다. 지금까지 일본 언론은 독도의 위치표시 때 울릉도를 생략하는 것을 관례로 삼아 왔다. 울릉도가 오키 섬보다 독도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76) 시마네대 명예교수는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바쿠후(幕府)가 도해(渡海·바다를 건넘) 허가를 내주는 등 실효 지배해 왔다는 게 일본 정부 주장이나 매우 조잡한 설명에 그쳐 (일본의) 고유 영토론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이토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1696년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는데 이는 독도를 영토로 간주할 의사(영유·領有)가 없음을 뜻하며 이에 따라 독도에 가는 일본인도 없어졌다는 것.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일본 정부가 1876년 민간인이 울릉도 개발을 신청한 데 대해 다음해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을 통해 “울릉도와 기타 한 개 섬(독도 지칭)은 본국과는 관계없다”며 거부한 사실을 지적했다. 결국 일본은 독도에 대해 영토가 아니라고 말한 적은 두 번 있지만 영유 의사를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시마네 현 편입 고시보다 5년 앞서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을 통해 울릉도와 부속 석도(石島:독도)를 영토로 선언해 이미 독도의 영유국이 정해졌다는 점도 확실히 언급했다.
한편 교토(京都)대 호리 가즈오(堀和生) 교수도 1987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1905년 독도를 일본에 편입시킨 것은 일본이 조선 각지에서 저지른 주권 침해나 침략과 같은 성질의 찬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도쿄=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독도에 이순신 동상을…″ 네티즌 분노의 패러디 봇물
[쿠키 인터넷팀 3급 정보] ○…“독도에 대형 이순신상을 세웁시다!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듯이 대한민국의 독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립시다.”
일본의 잇단 망동에 네티즌들의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16일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안을 가결하자 인터넷에는 새벽에도 각종 패러디 사진이 오르는가하면 관련 주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패러디 사진을 돌려보며 화풀이를 하는 네티즌들이 유난히 많았다. 특히 독도에 거대한 이순신상을 합성한 사진은 큰 호응을 얻었다.
패러디의 보고인 디시인사이드에는 밤새껏 봇물 터지듯 관련 사진이 올랐다.
불과 12척에 불과한 패잔선을 이끌고 일본의 정예함대 200여 척과 10만대군에 맞서 대승을 일궈낸 ‘조선의 호랑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기가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가하면 KBS ‘불멸의 이순신’에서 출전하기 전 전사들에게 독려하며 남겼다는 이순신 장군의 글도 네티즌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지난 7년간, 저 바다에 수많은 전우를 묻었다. 우리 손으로 이 전란을 끝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 조선 백성의 한을 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일만 육천 조선 수군 모두는 죄인의 얼굴로 전장에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일! 우리는 모두 승리자의 얼굴로 개선할 것이다. 단 한 척의 배도, 단 하나의 적도 살려보내지 마라!’
이순신상을 독도에 세우자는 세우자는 ‘거북이’라는 네티즌의 합성사진에 ‘거멍거멍’이라는 네티즌 등은 “진정 가슴에 불이 타오른다”는 댓글로 화답했다.
이에대해 네티즌 ‘수중왕릉’은 “동해에는 문무대왕상을, 남해는 충무공상을, 그리고 서해에는 장보고 상을 세우면 어떨까?”라고 적어 주목을 받았다.
독도에 국회와 63빌딩 등의 그림을 합성, 독도는 한국땅임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주장도 올랐으며 ‘일본 원폭투하 60주년 기념우표’도 등장했다.
네티즌 ‘체신청’은 패러디 우표사진을 올리며 “일본 열 좀 받게 해줍시다. 왜 우리만 열받나요?”라고 설명하자 “좋은 아이디어”라는 댓글이 잇따랐다. 그러나 “원자폭탄 합성만은 자제하자”는 우려의 글도 이어졌다.
이밖에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 최근 반민족적 언사로 도마에 오른 국내인사들도 패러디 합성의 주된 요소로 등장했다. 쿠키뉴스 김상기기자 kitting@kmib.co.kr
“독도 문헌 등장, 조선이 200년 빨라”
[한겨레] 호리 가즈오 일본 교토대 교수
“일 독도편입 부당” 논문
1987년 호리 가즈오(54)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해 3월 일본 조선사연구회에서 발간한 논문집에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이란 글을 싣고, 독도가 한국땅인 이유를 다양한 역사자료를 들어 증명했다. 호리 교수는 17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논문에 대해 “학술적 차원에서 쓴 글”이라며 “학술대회에선 얘기할 수 있지만, 정치적 이슈가 돼 있는 상황에서 언론에 얘기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며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사)한일사회문화포럼이 이날 〈한겨레〉에 보내온 호리 교수의 글을 발췌요약한다.
조선 문헌에 오늘의 다케시마가 등장한 것은 일본보다 약 200년 빠르다.
〈세종실록〉 지리지(실제로 1432년, 형식적으로는 1454년)에 ‘울릉도와 별도로 또 다른 섬이 존재하고, 청명한 날에는 서로 쳐다볼 수가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한국에서는 우산도를 독도라고 인식한다.
일본 문헌에 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은주시청합기〉(1667년)이며, 송도(마쓰시마)라는 명칭으로 울릉도와 병기되어 나온다.
1693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인 어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대마도 영주가 울릉도를 찬탈할 음모를 꾀했으나 안용복이 두 차례 일본에 건너와 담판한 결과 바쿠후(막부)는 1699년 3월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정식으로 승인함으로써 이른바 ‘죽도 1건’은 결말이 났다. 당시 외교 문서에 독도 명칭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 섬이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된 이상 독도의 영유권도 똑같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관제 지도에서 송도(독도)를 처음 표시한 것은 〈일본여지로정전도〉(1773년)다. 1778년에 간행된 목판채색판인 〈일본로정여지도〉는 일본 본토와 그 부속지를 모두 채색하였으나 죽도와 송도는 조선 반도와 함께 전혀 칠하지 않았다. 즉 ‘죽도 1건’ 이후 관제 지도는 죽도·송도를 일본 영토로 취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쿠후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1876년 10월 내무성이 죽도·송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무성은 1877년 3월 당시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에 ‘일본해내 죽도 외 한 섬 지적 편찬 방향’이라는 문서를 제출하고 최종 판단을 요청했다. 태정관 조사국은 죽도와 송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공문서를 정식으로 내무성에 내려보냈다.
1905년 일본정부는 행정조처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두가지다. 다수 의견은 ‘죽도는 근세 초두 이래 일관되게 일본 영토였기 때문에 1905년의 영토편입 조처는 그것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877년 태정관이 정식으로 이 섬을 판도 외라고 단정했다.
소수 의견은 ‘1905년 당시 죽도는 주인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선점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선은 15세기부터 이 섬에 영유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1906년 일본이 편입시킨 사실을 알고 즉각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일본 정부가 1905년 독도 편입을 서두른 것은 러일전쟁 당시 (동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할 수 있는) 망루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원문
* 호리 가즈오 일본 교토대 교수
=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 호리 카즈오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 / 황영식(한국일보 논설위원) 번역
1.글머리에
영토문제는 고래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도 많은 국제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영토문제라는 것은 지난번 포클랜드분쟁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배타적 내셔날리즘을 폭주시키는 특징까지 갖고 있다.
현재 일본은 치토리(千島)열도, 센카쿠(尖閣)제도,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명)등 3곳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안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당장 해결될 전망은 없다. 실재하는 영토분쟁을 처리하는 수단은 국제법이다. 그러나 국제법을 관계국이 납득하도록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쟁에 대한 사실인식 자체에 공통의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현재 쌍방의 국익과 국민감정 때문에 교착상태에 있는 일본의 영토문제에 대해서도 그 분쟁대상지역의 역사를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해명해 가는 것이 어떤 진보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닐까.
다케시마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 북한이 영유권을 다투고 있다. 전후 국가차원의 분쟁은 1952년 소위「李承晩라인」설정 직후,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전후, 그리고 77년 2백해리 문제가 등장한 시기에 특히 뚜렷했다. 그리고 각각의 시기에 발표된 다케시마문제에 관한 국제법이나 역사학 문헌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연구방법으로서 우선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1966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그것과 반대되는 주장을 펴 나가려 한다. 이 책을 특별히 취급하는 이유는 (1) 일본에 있어서 다케시마에 관한 역사연구 중 가장 실증적인 형태의 저작이라는 점 (2)저자는 이 책 집필 당시 현직 외무성조사관이어서 이 책이 틀림없이 일본정부의 요청에 따른 연구였다는 점 (3)이 책이 현재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정당론의 최대 전거(典據)가 돼 있다는 점등에서다. 본고의 과제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이 다케시마와 어떻게 관련돼 왔나, 그리고 왜 1905년에 그것을 영토에 편입하게 됐나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다만 논지 전개를 위해 전근대에 대해서도 간단히 개관하는 것으로 한다.
또 국제법 논의는 일체 하지 않는다. 가와카미는 자신의 저서에 대해 현실의 분쟁에는 전혀 무관하게 다케시마에 대한 사실관계를 어디까지나 순수한 학문적 태도로 구명했다고 반복해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제1장 독도의 인지와 영유의식
제1절 조선정부와 에도바쿠후(江戶幕府)의 독도인식
조선측의 문헌에 지금의 다케시마=독도가 등장하는 것은 일본측보다 약2백년정도 이르다.「세종실록」지리지(실제로는 1432년, 형식적으로는 1454년 성립)의 江原道蔚珍縣條에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이라고 씌어져 있다. 즉 신라시대부터 알려져 있는 鬱陵島와는 별도로 하나의 섬이 있고 맑게 갠 바람부는 날이면 서로 바라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于山島가 독도로 돼 있다.
가와카미(川上)는 于山島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것이 오늘의 독도에 해당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 두가지 사료를 든다.
우선「고려사」지리지(1451년) 蔚珍縣條에 「鬱陵島 在縣正東海中 新羅時稱于山國一云武陵 一云羽陵…一云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이라고 돼 있고 또「新增동국여지승람」(1531년)의 蔚珍縣條에「于山島·鬱陵島 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一說于山·鬱陵本一島」라고 돼 있다. 즉「고려사」는 본문에서 우산·무릉을 한섬으로 하고 二島說을 주기(註記)했고 거꾸로 여지승람은 본문에서 이도설로 하고 일도설을 주기했다. 가와카미는「고려사」본문의 일도설이야말로 옳은 것이고 다른 문헌의 이도설은「고려사」註記의 오류가 확대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선 각 문헌의 성립연대다. 전체로서는「세종실록」쪽이「고려사」보다 오래된 문헌이라는 것은 가와카미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의 鬱陵島항을 대조하면 전자에는 후자에는 없는 조선 세종때의 사건이 기재돼 있다. 그래서 그는 후자쪽이야말로 보다 오래된 기본문헌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가 조선시대를 취급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며 그것이 사료자체의 신구와는 전혀 무관하다.
두번째 근거는 鬱陵島에서 독도는 보이지 않으므로 「세종실록」의 于山島는 독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와카미는 또「고려사」의 註에 「風日淸明則可望見」이라는 것은 두 섬의 얘기가 아니라 鬱陵島와 조선본토의 얘기라고 해설하고 있다. 우선 문맥을 무시해 주어를 바꿔 읽는 것은 자의적이다. 또 물리학적인 계산으로는 鬱陵島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나 있다.
그리고 그후 일본측의 문헌에도 독도는「맑은 날 鬱陵島 산봉의 높은 곳에서 독도를 볼 수 있다」든가 「鬱陵島에서 50리, 바다 위 멀리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바로「세종실록」의 기술과 일치한다. 또 그 모습까지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고려사」본문에 약간의 혼란은 있으나 15세기 초두에 조선인이 울릉도와는 다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문헌이 조선의 正史중 지리지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국가의 영유의식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와카미 저작의 보다 커다란 결함은 자신의 于山島 부재설에 의거해 16세기 이후 많은 문헌과 지도에 등장하는 于山島를 모두 부정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숙종실록」(1728년) 30권에는 17세기말 鬱陵島를 둘러싼 둘러싼 분쟁때문에 일본에 두번 건너온 安龍福이 「松島卽于山島 此亦我國地」「以鬱陵于山等島定以朝鮮地界」등으로 발언한 사실이 실려 있다. 가와카미는 安龍福이 오늘의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증언은 허구가 많다고 해 그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安龍福의 증언내용은 우선 제쳐 두더라도 그가 독도를 于山島라고 부르며 鬱陵島와 함께 조선령이라고 발언하고 있는 사실은 가와카미의 우산도 비존재설을 뒤집는 데 충분하다. 또「증보문헌비고」(1908년) 輿地考에도「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松島卽芋山島爾不聞芋山亦我境乎」등으로 우산도를 정확히 현재 독도의 호칭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증보문헌비고」가 2백년에 걸친 편찬사업의 소산으로 실록을 보오한하는 관제문헌이라는 점에서 조선정부가 우산도에 대해 영유의식을 유지했던 것이 분명해 진다. 그외 조선이나 일본의 문헌에서 현재의 독도를 우산도라고 쓰고 있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張志淵의「大韓新地志」(1907년)는 울릉도의 동남에 우산도가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또 近藤保祿의 「朝鮮國地誌摘要」(1876년)나 오타 사이지로(大田才次郞)의 「新撰朝鮮地理誌」(1894년)도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는 별도로 우산도가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조선의 지도에서 울릉도와 별도로 우산도가 등장하는 것은 「東國輿地勝覽」(1499년)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발견된 지도 중에서 우산도가 실려있는 것은 수백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그것들은 고지도여서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관계나 크기는 반드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많은 지도가 두 섬을 병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에 있어서 우산도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19세기말 조선정부가 울릉도의 개발에 착수하면서 우산도에의 인식은 보다 정확해 졌다. 그 시점에 조선측의 인식을 보이는 것이 대한제국학부편 「大韓輿地圖」(1899년, 규장각 소장)이며 고지도치고는 울릉도와 우산도가 거의 정확한 위치에 그려져 있다.
위에 든 사실에 의해 가와카미의「우산도 부재설」은 이미 성립할 수 없음이 분명해 졌다. 즉 조선정부는 15세기부터 독도를 우산도로서 자국영토라고 인식해 왔고 혼란된 시기도 있었지만 19세기말에는 또다시 영유의식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일본 문헌에서 현재의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이즈모(出雲·현재 시마네현의 동쪽) 번사(藩士·번주의 봉록을 받는 사무라이) 사이토 도요히토(齊藤豊仙)의「隱州視聽合記」(1667년)며 松島 = 독도와 竹島 = 울릉도를 병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일본에서는 그 두 섬의 형상이 제법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직접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15세기 중반 울릉도에 대해 공도(空島)정책을 취해 섬주민들을 철수시켰다. 1617년 요나고(米子·현재 돗토리현 서부) 거주 오타니 다카요시(大谷甚吉)의 상선이 조난, 우연히 울릉도에 표착해 산물의 풍부함에 착목해 무라카와 이치베이에(村川市兵衛)와 함께 바쿠후에 도항허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이듬해 바쿠후의 허가를 얻어 그후 오타니·무라카와 두 집안이 번갈아 울릉도에 배를 보내 벌목·채취 등을 행하게 됐다. 두집안은「竹島拜領」을 자칭했지만 바쿠후가 내린 것은「渡海免許」였을 뿐이다. 그리고 두집안은 竹島=울릉도에 오가는 도중 松島=독도에서도 약간의 어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1661년경 새로 송도=독도로의 도해면허도 받았다. 그러나 두집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죽도=울릉도였고 송도=독도는 그 왕복도중 여가사업의 대상일 뿐이었다. 또 두 섬의 크기의 차이가 원체 커서 당시의 사료도 「竹島之內松島」「竹島近邊松島」「竹島近所之小島」등과 같이 송도를 죽도의 부속섬으로 취급했다. 이처럼 일본인이 울릉도에 도항을 반복한 시기, 막부는 애초에 이섬이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1693년 울릉도에서 오타니가의 일행과 경상도에서 고기잡이를 온 安龍福 등 조선어민 사이에 커달간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오타니·무라카와 두집안이 막부에 이를 호소해 이문제는 일본과 조선이 외교경로로 죽도=울릉도의 어업권·영유권을 다투는 이른바 「竹島一件」으로 발전했다. 이 외교교섭 도중 쓰시마(對馬)번은 노골적으로 조선으로부터 울릉도를 빼앗고자 했다.
조선정부에서는 한때 방침이 흔들렸으나 안용복이 두번이나 일본에 건너와 울릉도·우산도는 조선령이라고 주장한 것이 계기가 돼 영의정 南九萬등의 대일강경자세가 지배적이게 됐다. 역사적으로 울릉도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에 속했던 것이 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마침내 쓰시마번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대조선 협조정책을 선택했다. 즉 1696년 1월 오타니·무라카와 두집안의 죽도도항이 금지되고 1699년 1월 일본측이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정식으로 승인해 이 「죽도일건」은 결착됐다. 그리고 그 외교문서에 직접 송도=독도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동섬이 죽도=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비쳐져온 이상 그 영유권도 마찬가지로 처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일본인의 송도=독도에서의 어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죽도=울릉도 진출에 수반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죽도 도항금지와 함께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그후 오타니·무라카와 두집안이 송도=독도만을 목표로 도항한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겐로쿠(元祿·1588-1704년)기 죽도=울릉도에의 도항이 막부에 의해 금지된 후에도 산잉(山陰)지방 어민들이 비밀스럽게 동도에 건너간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또 민간에서는 송도=독도를 오키(隱岐)국 소속으로 쓴 책도 있고 또 죽도= 울릉도가 조선의 속령임을 알지 못하고 쓴 책까지 있다. 그러나 이런 책임 없는 민간인의 인식은 영토주권의 귀속과는 관계가 없다.
「죽도일건」이후 막부의 영토의식을 보이는 자료로서는 그 관찬(官撰)지도를 들 수 있다. 일본의 관찬지도 중에서 송도=독도를 최초로 그린 것은 나가쿠보 아카미즈(長久保赤水)의 「日本輿地路程全圖」(1773년)이다.이 지도는 경위선을 사용한 일본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죠큐보는 또 목판채색판인 「日本路程輿地圖」(1778년)을 간행했다. 이 지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본토와 그 부속지는 모두 채색하고 잇으나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채색하지 않은 점이다. 즉,「죽도일건」에 근거한 이후의 관찬지도는 죽도, 송도를 모두 일본영토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또 고지도의 단계를 완전히 탈피했다고 얘기되는 관찬지도인 이노 타다다카(伊能忠敬)의「大日本沿海輿地全圖」(1821년)에는 죽도, 송도 모두 포함돼 있지 않다. 즉, 17세기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애매했지만 겐로쿠 시대 조선정부와의 교섭을 거친 후 막부는 송도=독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일본령이라고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으로 정리하자면 일본인이 17세기에 송도=독도에 대해 깊이 알게 된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이 조선령인 울릉도에 진출한 상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국정부의 교섭에서 울릉도의 조선귀속이 합의된 때 그 속도인 송도=독도도 극히 자연스럽게 일본 판도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제2절 메이지(明治)정부의 독도인식
막말(幕末)로부터 메이지(明治)초년에 걸쳐 구미와 접촉함에 따라 일본의 울릉도와 죽도=독도 인식에는 심한 혼란이 생긴다. 우선 18세기말 동해에 진출해 온 프랑스·영국 배가 잇달아 울릉도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 위치측량이 부정확해 동도는「다쥬레」「앨고너트」라는 서로 다른 섬으로 소개됐다. 죽도=독도는 나중인 1849년 프랑스배에 발견돼 「리앙쿠르」로 명명됐다. 그 때문에 19세기 중반 구미의 지도에는 동해에 울릉도가 2개 있거나 죽도=독도를 합쳐 세섬이 그려져 있거나 했다. 이 구미측의 정보와 일본 구래의 죽도, 송도 지식이 조합되는 가운데 두 섬에 대한 인식이 혼란을 겪었다. 이런 경위는 이미 종래의 연구에 의해 해명돼 있다.
육군참모국의 「朝鮮全圖」(1875년)와 문부성의 「日本全圖」(1877년)에는 울릉도가 죽도와 송도 두 개로 그려져 현재의 죽도=독도는 누락돼 있다. 이윽고 「앨고너트」의 존재가 부정되자 울릉도는 에도(江戶)시대와는 거꾸로 송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동해 가운데 한 섬만을 그린 지도가 나왔다. 어쨌든 1870년대부터 1880년대초에 걸쳐 일본정부의 두 섬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3도설, 2도설, 1도설이 있었고 두섬의 위치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한 것은 적었다. 이런 사실은 애초에 죽도=독도를 예로부터의 일본 고유영토로 한 견해에 대한 반증이 될 것이다.
일본정부 내에서 이런 혼란이 정리돼 가는 중에 그 섬들의 영유권 귀속도 확정됐다. 다만 그것을 각 기관이 통일돼 행한 것이 아니어서 따로따로 살펴 나가자. 우선 내무성이 두 섬의 소속에 대해 최초로 결정을 내렸다. 1876년 10월 내무성 지리료가 지적편찬을 위해 시마네(島根)현에 동현 앞바다에 있는 죽도라는 섬의 정보를 조회한 것이 계기가 됐다. 거기서 시마네현 당국은 17세기 오타니·무라카와 양가에 의한 죽도=울릉도 개척 경위를 조사해 죽도와 송도=독도 약도를 첨부해 「日本海內 竹島外一島 地籍編簒 方伺」라고 내무성에 제출했다.
즉, 시마네현 당국은 송도를 죽도의 속도로 이해했기 때문에 일괄해 취급한 것이었다. 내무성은 독자적으로 원록기의 「죽도일건」기록을 조사해 시마네현의 「伺」정보와 합쳐 검토한 끝에 이 양도는 조선령이지 일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版圖의 取捨는 重大之事件」이기 때문에 동성은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 太政官에 「日本海內 竹島外一島 地籍編簒方伺」을 제출해 그 판단을 앙청했다. 부속서류에「外一島」는 송도임이 명기돼 있고 그 위치와 형상도 올바르게 기술됐다. 태정관 조사국의 심사에서는 내무성의 견해가 인정돼 다음과 같은 초안이 잡혔다.
『別紙內務省伺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簒之件(별지 내무성이 여쭌 일본해내 죽도외 일도의 지적편찬의 건) 右는元祿五年朝鮮人入島以來舊政府該國과 往復之末遂에本邦關係無之相聞候段申立候上은 伺之趣御聞置左之通御指令相成可然哉此段相伺候也.
「御指令按」伺之趣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義라고 可相心得事』 이 지령은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참의 오구마 가사노부(大隅重信) 테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오키 다카마카(大木喬任)등에 의해 결정됐다. 그리고 동년 3월29일 정식으로 내부성에 하달됐다. 즉,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은 시마네(島根)현과 내무성이 상신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한 묶음으로 하는 이해에 근거해 양도를 일본령에서 제외한다고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 지령은 4월9일부로 내무성으로부터 시마네현에 전해져 현지에서도 이 문제가 종결됐다.
^외무성이 이 두섬에 대해 최초로 알았던 것은 1870년 조선시찰을 떠났던 외무성 출사(出仕) 사다 시라카야(佐田白茅)등의 보고에서였다.「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 竹島松島 朝鮮 附屬으로 된 始末 - 송도는 죽도의 隣島로 송도의 항에 덧붙여 게재해 서류도 없앤다. 죽도의 항에 붙여 원록 이후는 한동안 조선에서 거류의 목적으로 사람을 보내 남겨 두었다…」 이것도 원록기의「竹島一件」에서 송도=독도가 조선에 건네졌다는 인식이나 이것은 단순한 보고이다.
외무성이 이 두 섬의 소속에 대해 주체적인 판단을 재촉받은 것은 1876년부터의 송도개척문제와 관련해서였다. 동년 6월 武藤平學라는 자가 외무성에「송도개척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그 이후 2년여 동안 고타마 사다야스(兒玉貞易), 사토 시치로베에이(齊藤七郞兵衛), 시모무라 유사부로(下村輸三郞)등의 민간인과 블라디보스톡 주재 무역사무관 와키세 도시히도(脇瀨壽人)로부터 같은 취지의 건의나 요청이 반복해 제출됐다. 그 내용은 동해에 있는 일본령 또는 소속불명의 송도에 대해 그 자연의 풍부함을 들어 개발의 허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열강이 이 섬을 노리고 있다고 위기감을 부채질한 것도 공통됐다. 여기서 말하는 송도는 물론 울릉도이다.
이 같은 개척요구에 대해 외무성 관료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었다.
기록국장 와타나베 히로모토(渡邊洪基)는 죽도=울릉도는 조선령이라고 하면서 죽도와는 별도로 송도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령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죽도와 송도의 영유권을 나누는 견해로 후에 죽도=독도 영토편입의 이론적 선구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그도 울릉도에 부속하는 우산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우산도의 처리에 곤란을 겪었다. 또 그는 동해에 있는 것이 2섬인지 3섬인지 확신을 갖지 못했고, 더욱이 무엇보다도 개척요청의 대상인 송도가 원래는 울릉도임을 알지 못했다.
관료 갑은 송도는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도여서 송도의 개척은 타국에의 침략이 된다고 반대했다. 관료 을은 우선 송도와 죽도를 시찰하고 그 후에 그것들이 울릉도, 우산도, 또는 무주지인지를 판단하자고 주장했다. 관료 병은 영유권은 언급하지 않은 채 열강접근의 정보를 들어 송도에 사는 조선인에 구애받지 말고 동섬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公信국장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는 당초부터 송도개척 요청의 대상이 조선의 울릉도임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타나베는 개척대상인 송도가 우산도라면 개척을 허가할 수 없고 만약 송도가 소속불명의 섬이라면 조선측과 교섭하면 된다고 말했다.
송도라는 섬을 일본령으로 편입하고자 한 와타나베의 견해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수의견이었다. 송도가 울릉도와 우산도 중 어느 것인지 비정하느냐에 차이는 있었지만 송도의 조선소속 또는 조선의 동도관여를 인정하는 것이 다수의견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외무성내의 논의는 결론을 내지 못했고 결국 개척요청의 대상 송도를 實地 조사하는 것으로 됐다.
1880년 7월 군함 아마기(天城)가 송도에 가 측량한 결과 동섬이 울릉도임이 판명됐다. 오랫동안 관심을 모았던 풍요로운 송도라는 것은 틀림없는 조선의 영토였으며 이에 따라 개척요청은 모두 각하돼 이 문제는 끝났다. 또 하나의 죽도=독도는 완전히 불모의 바위섬에 지나지 않아 애초에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1881년 11월29일 내무성이 죽도와 송도를 판도 외로 한 앞의 대정관 지령서를 첨부해 외무성에 울릉도의 현상을 조회한 일이 있다. 그에 대해 외무성은 아무런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외무성이 죽도와 송도의 영유권을 분리해 취급하는 등의 일은 결코 없었다.
해국에 대해서는 당시의 원문서가 남겨져 있지 않아 그 출판물로부터 당국의 인식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해군水路部가 주로 의거했던 영국퍄 의 해도에서는 1860년대에 이미 두섬의 소재가 확정돼 있다. 그 때문에 일본 해군도 1870년대 말에는 그점을 충분히 인식했던 듯 1880년대의 일본제 해도에는 두섬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해도는 지리적인 인식을 보일 뿐이어서 해도중의 섬의 소속에 대해서는 그 해설서인 수로지를 중시할 수 밖에 없다.
일본해군은 1880년 3월부터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환瀛水路誌」의 편찬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러편인 제2권 제2판(1886년)에는 울릉도와 리앙쿠르트 列岩이 실려 있다. 이것은 세계의 수로지여서 그 귀속을 좌우하는 결정적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1889년3월 이 수로지의 편찬은 중단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해역을 중시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우선 일본영해를 구별해 「일본수로지」로 독립시키고 1892년부터 차례차례 간행했다. 이 수로지에는 1895년의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따른 일본의 신영토 대만과 澎湖島, 또 치토리(千鳥)열도 최북단의 占守島까지 실려 있지만 대만의 對岸이나 캄챠카반도는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 즉 이 일본수로지의 취급범위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영토·영해에 한정된 것이다. 그리고 중시할 것은 이 수로지의 동해항목에 리앙쿠르트섬=독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당시의 일본해도에는 동도의 위치는 정확히 그려져 있어 그 소재를 알지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 수로지의 1897년판 부도와 이섬이 일본영토에 편입된 후의 수로지 부도를 대조하면 사태는 명백하다. 즉, 1900년 시점에서 일본의 해군수로부 당국은 명백히 동섬을 일본령으로부터 제외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일본해군의「조선수로지」 1894년판과 1899년판에는 울릉도와 나란히 리앙쿠르트 列岩이 실려있다. 요컨대 19세기말에 일본해군의 수로부 당국이 죽도=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상을 요약하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의 정부가 죽도= 독도에 독자적인 관심을 보인 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인식의 정도에 강약은 있었지만 일본정부의 관계제기관 모두가 이섬을 울릉도와 함께 조선령으로 보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2장 일본의 조선변경도서 침입
제1절 울릉도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
메이지유신 이후 대외팽창의 기운을 타고 정부의 정책과는 별도로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이 시작됐다. 1881년 조선의 수토관(搜討官)은 이 섬에 많은 일본인들이 침입해 벌목과 어획을 행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조선정부는 즉시 같은해 6월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조회하고 도항금지를 요구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미 앞서 송도개척문제로 울릉도의 조선귀속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 잘못을 인정하고 조선측에 사죄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아무런 구체적 수단을 취하지 않아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은 끊이지가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정부의 항의가 거듭됐다.
일본정부도 이것이 외교분쟁이 될까 염려해 1883년3월 내무성과 사법성이 울릉도로의 도항을 금지하는 지시를 하달했다. 또 같은해 9월 일본정부는 동도거주 일본인을 철수시키기 위해 내무성 서기관과 기선을 직접 파견했다. 그래서 주로 벌목에 종사하고 있던 254명의 일본인 전원을 강제적으로 귀국시켰다. 이것이 메이지정부의 울릉도에 관한 최초의 외교교섭이었다.
동섬에서 철수당한 일본인은 본래 밀출국, 밀무역 범죄자였으나 실제로는 전원이 면소·무죄로 됐다. 이 시점에서는 조선정부에의 배려에서 외무성이 이렇게 전원무죄로 하는 데 이론을 주장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조선정부로서는 다수의 일본인이 몰래 자국령에 침입한 이 사건이 울릉도정책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즉 수백년간이 공도정책이 페지되고 거꾸로 적극적인 개발정책으로 돌아섰다. 우선 1882년 5월 울릉도에 검찰사 이규원(李奎遠)이 파견돼 그의 보고에 의거해 동년 12월「울릉도 개척령」이 나왔다. 그리고 동년 우선 도장(島長)을 두고 이민입식(入植)정책을 시작했다. 즉 이때부터 울릉도는 단순한 지도상의 판도일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갔다. 1883년 김옥균(金玉均)이 「동남제도 개척사겸 포경사」에 임명돼 의욕적으로 동도 개발책을 세웠으나 이것은 그의 실각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후 이 섬의 행정기구는 몇번인가 개편돼 1895년에 도장은 도감으로 변했지만 그간 정부의 징세면제와 이주장려에 의해 조선인의 인구는 착실히 증가했다. 그리고 1900년 10월 마침내 울릉도는 군으로 승격돼 중앙파견의 군수가 임명됐다. 이처럼 울릉도는 1880년대 이후 완전히 미개의 상태에서 차차 정리된 조선인사회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행정기구가 본토보다 크게 정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미리 당하게 됐던 것이다.
앞서 1883년 일본인의 일괄철수 후에도 일본 각지로부터 무단으로 울릉도에 도항하는 자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 일본인의 도항 목적은 당초 목재반출이었으나 남벌에 의해 가치 있는 재목이 고갈돼 가자 그 비중은 낮아졌다. 대신 울릉도 주변의 어장을 목표로 어민의 도항이 늘어 났다. 조선정부의 일본에 대한 동도로부터의 철수 요구는 1888년, 1895년, 1898년, 1899년, 1900년 빈번히 이뤄져 일본인의 침입이 얼마나 집요했나를 보여 준다. 일본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1900년을 전후한 동도 거주 일본인은 약2백명 정도로 계절적으로는 1천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도항 일본인은 서서히 정주하게 됐다.
또 일본정부의 그들 일본인에 대한 정책도 그때까지와는 달라졌다.앞에 밝혔듯 1880년대 초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럭저럭 도항금지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후 일본정부는 조선측의 철수요구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는 요구에 대항하게 됐다.
이것은 19세기말이 되어 일본의 조선침략이 전면적으로 강화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시기 일본에 의한 철도·광산 등 이권획득이나 통화권의 침해는 점점 노골화했다. 본고와 관련된 어업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이미 1889년에 치외법권이나 여러 가지 불평등규정을 지닌「朝日兩國通漁規則」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에 의해 일본어선이 대대적으로 조선연안 각지에 진출해 강도적인 난획을 자행했다. 그깨문에 생활을 위협받은 조선어민과 진출한 일본어민 사이에 충돌이 빈발한 데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일본정부는 그들 어민의 자주적인 通漁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정책에 착수했다. 1898년 「원양어업 장려법」을 실시해 장려금에 의한 도해어업의 발달을 도모했다. 또 당해 행정 최고책임자인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스나오(牧朴眞)는 1899년6월부터 한 달 간 손수 조선연안의 상황을 시찰했다. 그리고 거기에 근거해 같은 해 각 府縣에 韓海통어조합을 조직시켜 이듬해 그 중앙기관으로서 조선해통어조합 연합회를 설립시켰다. 또 1902년「외국영해수산조합법」을 제정해 종래의 단순한 통어에서 이주어촌 건설로 나아 가자고 장려하게 됐다. 이같은 정부의 시책에 따라 각 부현도 조선에의 통어에 보호정책을 취했다. 요약하면 19세기말부터 정말로 관민일체가 돼 조선연안의 어장에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애초에 조선이 외국이며 조선어민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울릉도에서의 사태는 바로 그 일환이었다. 앞에 밝혔듯 어기에 따라 1천명이상의 일본인이 유입된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가와카미는 울릉도에의 일본어민 통어는「朝日양국통어규칙」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불평등조약에 비쳐볼 때 조차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활동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규칙에 따른 통어세를 내지 않았던 통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규칙대로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통어했다면 우선 매년 부산영사를 통해 조선 해관에 통어세를 내고 동시에 면장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또「무역규칙」에 따라 포어의 수출세를 내지 않으면 안된다. 울릉도에 진출해 있던 일본어민이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던 것은 당시 부산영사가 동도의 일본인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으로부터 명백하다. 일본측의 많은 사료에 나와 있듯 그들은 일본의 각 항구로부터 직접 동도에 가 어로가 끝나면 다시 직접 각자의 항구로 돌아 갔다. 울릉도에서의 일본인의 어업은 불평등조약에 비춰서도 부당한 것이었다. 이점은 동도의 목재벌채와 그「수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의 초기벌채가 모두 도벌이었음은 명백하다. 나중에 일본인은 현지의 조선인에 약간의 대가를 지불한 일도 있었던 듯하나 동도는 애초에 개항장이 아니어서 거기서 수출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일본인의 재목반출은 모두 탈세·밀수였다. 게다가 거류지가 없는 동도 거주 일본인은 모두 불법거주자였다.
즉, 동시기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활동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불법부당한 침략행위였다.
관련된 법적인 문제에 끝나지 않고 실제로 울릉도에 침입했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충돌이 빈발했다. 현지의 양민족의 분쟁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동도 도감 裵季周의 고발에 의해서였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은『매년 동도에 와 도검총포를 휴대하고 도내를 횡행하며 인민을 협박하고, 부녀자를 희롱하고, 물품을 빼앗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도민들이 대단히 괴로움을 느끼는』상태였다. 그는 1898년 7월 일본에 건너와 시마네·돗토리 경찰에 일본인의 폭행을 단속하라고 요구했고, 또 마쓰에(松江) 재판소에 몇명인가 일본인을 재목의 도벌과 절도의 이유로 고소했다. 이 사건을 취조한 일본의 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 다수가 거주, 그 세력은 도민을 억누르고 끝없는 횡포를 부려 거의 무정부 상태』로 『때때로 폭력으로써 (조선인)을 위협하는 무리도 있어 장차 그 세력이 뻗어나감에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추측하기 어려운』양상이었다.
도감 裵季周는 조선의 중앙정부에도 현지의 사태를 자세히 보고했기 때문에 映뮐ㅊ寬? 외교문제가 됐다. 동도에서의 이 분쟁은「황성신문에 의해 빈번히 보도됐다. 조선정부가 거듭 동도의 일본인 철수를 요구한 데 대해 일본정부는 그같은 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현지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1900년6월에는 조선내부시찰관 禹用鼎과 부산영사관보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가 합동출장조사까지 행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아 조선정부는 분쟁의 유무에 관계없이 조약에 의거해 동도로부터 일본인이 철수하도록 다시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동도거주가 조약규정 밖임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일본정부가 직접적으로 철수시켜야 할 책임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십수년간 일본인의 동도거주를 묵인해 온 것은 조선정부의 책임이라며 역으로 기정사실을 인정해 거주를 허용하자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울릉도의 분쟁을 싸고 양국정부의 응수가 반복됐다. 그런데 1901년 12월 하야시(林)공사는 분쟁의 빈발을 역으로 이용해 거주 일본인의 단속을 핑계로 동도에 일본인 경찰관을 주재시킬 것을 제안했다. 물론 조약상 으로는 일본인 경찰관이 동도에 상주하는 권리따위는 없지만 조선정부에 동도의 일본인을 철수시킬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인 경찰관을 파견함으로써 현지의 분쟁을 처리하자는 식이었다. 실로 도둑놈의 논리였지만 분쟁의 빈발로 골치를 앓고 있던 조선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일본측은 강제적으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02년 3월 부산영사관의 일본인 경부·순사 4명이 동도에 파견돼 이후 상주하게 됐다. 그들 일본인 경찰관은 일본의 제법령에 준거해 자국인의 보호단속을 한다고 내세웠으나 무장한 그들이 침략의 현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분명했다. 경부의 단편적인 보고에 의하더라도 그들은 일본인의 재목밀수를 저지하려는 군수 沈興澤과 대립해 그것을 좌절시키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1904년에는 울릉도에 일본의 우편수취소가 설치됐고 또 동도와 일본 사카이(境)·하마다(浜田)간 항로까지 개설됐다.
위에서 보듯 러일전쟁 직전의 단계에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세력이 울릉도에서 이미 강고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 일본인 경찰관에 보호받는 다수의 일본인이 공공연히 불법으로 거주하며 재목을 밀수출하고 밀어업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울릉도는 조선의 변경이었고 바로 그때문에 본토보다 조기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을 침해받고 지배받기에 이르렀다.
제2절 일본인에 의한 죽도 어업
일찌기 17세기에 그랬듯이 일본인이 울릉도에 도항진출하게 되자 거기에 부수해 또다시 죽도=독도도 이용돼 나중에 영토편입의 근거가 됐다. 동도의 「실효적 경영」실태를 살펴 보자.
19세기말 이래 일본어민이 산잉(山陰)지방으로부터 울릉도에 통어하게 되자 도항의 도중 죽도=독도에 들러 약간의 조업을 하는 일이 생겼다. 이것은 당시 일본어민의 회상에 의해 확인된다. 오키(隱岐)섬 사이고초(西鄕町)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도 그런 통어자의 한사람이었다. 나카이는 러일전쟁 직전의 피혁이나 기름 앙등상황을 보고 죽도에 떼지어 사는 물개를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울릉도에 오가는 도중 여가를 이용한 어패류 채집과는 달리 1903년 동도에서 본격적인 물개잡이를 개시했다.
20세기 초두 죽도에서의 어업에 대해 일본해군수로부編「조선수로지」제2판(1907년)에 다음과 같이 돼 있다.
[죽도(리앙쿠르 열암)] 한인은 독도라고 쓰고 우리나라 어부는 리앙쿠르섬이라고 말함…메이지(明治) 37년 11월 군함「쓰시마(對馬)」가 이섬을 실사할때는 동쪽섬에 어부용의 갈대로 엮은 헛간이 있었으나 풍랑때문에 심히 파괴돼 있었다고 한다. 매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바다사자를 잡기 위해 울릉도에서 도래하는 자 수십명을 넘을 때도 있다. 그들은 섬위에 움막을 짓고 매번 약 10일간 임시로 거주한다고 한다.
[울릉도 일명 송도(다쥬레섬)]…중요한 어업은 전복 채취로 매년 다량의 마른 정복을 수출한다. 바다사자라는 바다짐승은 본도보다 동남방인 죽도에 서식해 메이지(明治) 37년경부터 본도민이 그것을 잡기 시작했다. 포회기는 4월부터 9월까지의 6개월간으로 현재 이에 종사하는 어선 3조(조당 평균 약5마리를 잡는다)가 있다. 또 우리나라 사람(일본인)이 채취하는 전복은 잠수기 2개및 기선 2척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채취량은 하루 평균 1,130근이라고 한다.
일찌기 이글 중의「울릉도에서 도래한 자」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를 놓고 양국정부간에 논쟁이 있었다. 이 짧은 문장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으니 그 기본인 사료를 보자. 위에 든 기초사료는 군함「新高」와 군함「쓰시마(對馬)의 보고이나 여기서는 전자가 보다 중요하다. 군함「新高」의 1904년 9월25일자 일지에 「송도에서 리앙쿠르드岩을 직접 본 자로부터 청취한 정보」라고 명기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리앙쿠르드岩] 한인은 독도라고 쓰고 우리나라(일본) 어부들은 줄여서「리앙쿠」라고 부른다. 두섬의 사이는 배를 묶는 간단한 시설도 있으나 작은배라면 땅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풍랑이 강하게 이섬에 몰아칠 때는 대개 송도로 순풍을 타고 피난간다고 한다. 송도로부터 건너와 해마사냥에 종사하는 자는 670석을 실을 수 있는 왜선을 사용한다. 섬위에 움막을 짓고 매회 약10일간 체재하며 커다란 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또 그 인원도 4, 50명을 넘을 때도 있으나 담수가 모자란다는 점은 알고 있어야 한다.
또 현재 하나의 사료로서 해군의 제보고와 1905년 8월 시마네(島根)현 지사에 의한 죽도 시찰보고 등에 의거해 씌어진 지리학자 다나카 아카마로(田中阿歌麻呂)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東島에는 갈대로 지은 움막이 있고 이 움막은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씨등 죽도어업회사의 소유로 돼 있다. (지난 38년 8월8일의 폭풍에 움막과 어선등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졌다) 이것은 해표사냥을 목적으로 여름철 이섬에 도래하는 어부들이 사용하는 것이나 지금은 현지히 파괴돼 겨우 흔적만 남아있는 정도다… 출어자는 울릉도를 근거지로 해 670석짜리 왜선을 사용해…사냥이 끝난 후, 또는 풍랑이 세 배를 묶어두기가 어려울 때는 곧바로 순풍을 타고 울릉도에 피난한다』 다나카의 논문에는 죽도의 영토 편입후의 기술도 포함돼 있다. 어쨌든 이상의 각사료를 함께 읽으면 1903년경부터 죽도에서 시작된 강치잡이를 담당한 중심이 일본인이었음이 분명해 진다. 다만 강치잡이에 조선인이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앞의「조선수로지」는 울릉도항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않은 채 죽도 출어자를 그저「도민」이라고 쓰고 있다. 가와카미(川上)도 일본인에 고용된 경우를 가정하긴 했지만 조선인이 죽도의 강치잡이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도 약간 포함돼 있었다해도 이시점에서 동도의 강치잡이에 종사했던 것은 일본어민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나카이 요사부로등 일본어민이 울릉도「도민」으로 씌어지게 된 사태이다. 그들은 울릉도에 주거를 갖고 거기를 근거지로 해 죽도에 출어, 폭풍이 몰아치면 곧바로 돌아오는 상태였다. 즉 그들 일 본어민의 죽도 어업은 앞에서 보았던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이라는 역사적 조건에 근거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울릉도의 조선인은 죽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가와카미의 집요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에서 죽도를 볼 수 있고 조선인이 죽도를 잘 알고 있었음은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앞의 군함「新高」의 보고에 의해 일본이 죽도를 영토편입하기 이전에 조선인은 독도라는 호칭을 사용했음도 명백하다.
가와카미는 일본이 죽도를 영토편입하기 전에는 울릉도의 조선인이 동도를 이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그들이 어업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가와카미는 주로 「한국수로지」에 의거해 울릉도의 조선인이 어업을 시작한 것은 일본인이 그들에 오징어잡이를 가르친 1907년 이후의 일로 했다. 또 전복을 채취한 것은 일본인 뿐으로 조선인은 거기에 종사한 자는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연유로 예를 들어 조선인이 죽도=독도의 존재를 아는 일이 있다해도 그들이 출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와카미의 이같은 주장은 그 자신이 이용했던 사료류에 의해 뒤집어 진다. 예를 들어 해군의 전게「환영수로지」제2권 제2판은 을릉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물산으로는 전복·농어등의 어류가 많고 야채도 있다…봄·여름철에는 조선인이 이 섬에 도래해 조선형배를 제조해 이를 이용해 물산을 본지에 보내고 다량의 갑각류를 수집해 말린다』 또 1899년 9월 울릉도에 파견됐던 외무성서기 이타카 유켄조(生高雄謙三)의 보고에 따르면「현재 토착민의 인구는 2천여명, 5백여세대로 농부와 어부가 각 절반이다.
또 선박을 만드는 대목들도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럽과 일본의 문헌에서 울릉도조선인의 어업, 특히 전복잡이에 대해 쓴 것은 많다. 이 모두를 무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가와카미는 당시 조선측의 항해기술의 유치함도 들고 있으나 울릉도와 죽도=독도보다 훨씬 먼거리인 울릉도와 조선본토 사이를 매년 많은 조선인이 왕래했다. 전복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조선어민이 보이는 곳에 있는 전복이 풍부한 섬에 출어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리고 앞의 일본어민의 죽도출어 회상과 마찬가지로 조선측에서도 울릉도의 노인이 스스로의 독도 출어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울릉도의 조선인 어업은 다수의 일본어미의 침입에 의해 급격히 위축됐다. 「한국수로지」중『전복은 일본인이 채취할 뿐 섬사람은 여기에 종사하는 자가 없다』라는 기술은 일본인의 잠수기와 같은 신식기술에 의한 조업에 따라 그때까지 전복잡이에 종사해 온 조선어민이 구축된 양상을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현지 울릉도의 어장조차 거의 일본인에 빼앗긴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에서의 어업권 다툼문제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1903년부터의 죽도 강치잡이가 일본인주도로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 「실효적 경영」이란 개념을 형식적으로 적용하면 영토편입 직전 죽도에서의 일본측 우위는 명백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말하면 원래 제국주의란 영토를 넘어 경영을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두 일본인에 의한 죽도 경영이란 것은 정부의 침략정책을 배경으로 일본인이 울릉도에 진출하는 가운데 그 일부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영토편입의 근거로서 정당화되려면 죽도=독도가 완전히 주인없는 땅인 동시에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한 조선 정부와 민중이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에 이론을 외치지 않은 경우에 한할 것이다. 전자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음은 앞장에서 분명해졌으니 후자에 대해서는 다음자에서 검토하자.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죽도에서의 강치잡이를 시작한 것은 1903년이었으나 이듬해에는 많은 경쟁자가 섬에 와 남획때문에 동도의 강치는 격감했다. 그래서 나카이는 경쟁자를 배제해 동도의 어장을 독점하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한 공작으로 도쿄로 향했던 것이다.
제3장 일본의 죽도 영토편입
제1절 일본정부의 군사적 요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는 전쟁수행의 전략적인 입장에서 앞의 나카이 요사부로의 개인적인 의도와는 전혀 별도로 죽도에 대한 새로운 이용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일본정부는 개전전에 이미「한국에 관해서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실력에 의해 우리 권세 아래 둘 수 밖에 없다」고 각의 결정했고 또「한일의정서」에서도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한다」는 점을 조선정부가 인정토록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조약에도 근거하지 않은 군사지배를 조선전토에 전개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해군의 군사시설이 문제가 된다. 일본은 개전전에 국내에서 군용전신선이나 망루 정비를 추진했으며 개전과 함께 그런 시설을 조선에도 확대하게 됐다.
1904년 6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함대가 대한해협에 출현해 일본 수송선을 차례차례 침몰시키면서 이 해역의 긴장이 일거에 고조됐다. 일본해군은 규슈(九州) 추고쿠(中國)지방의 연안각지와 병행해 조선동남부의 죽변만, 울산, 거문도, 제주도 등에 망루를 건설하고 그것들을 해저전신망으로 연결했다.
조선내의 망루는 약20개에 이르러 실질적인 군사점령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조치의 일환으로서 7월5일 울릉도에 망루를 건설해 조선본토의 일본해군 정박지 죽변만과의 사이를 군용해저 전신선으로 연결키로 결정됐다. 울릉도의 망루는 동남부(송도동망루, 6인 배치)와 서남부(송도서망루, 6인 배치) 2개소로 8월3일에 건설착공, 9월2일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해전전신선은 9월8일부터 블라디보스톡 함대의 위협을 받아가며 부설공사에 들어가 같은달 25일에 완성했다. 이에 따라 울릉도의 망루는 조선본토를 경유해 사세보(佐世保)의 해군鎭守府와 직접교신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 울릉도의 일본군 주류는 이미 이전부터 일본인이 우위를 점했던 동도에서 조선측의 주장이 보다 심하게 침해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해군은 이 울릉도에서 일련의 공사와 보급활동을 하는 가운데, 또 이 해역에서의 초계활동에 의해 인접한 죽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됐다. 즉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정부에 공작을 하기 전에 해군은 이미 죽도의 이용가치에 대해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공적으로 동도의 영토편입를 결정하기 이전에 해군은 행동에 옮겼다. 1904년 11월13일 해군군령부는 군함「쓰시마」에 대해 「리앙쿠르드섬은 전신소(무선전신소)설치에 적절한지 여부를 시찰할 것」을 명했다. 즉 울릉도와 해저전신선으로 연결할 망루건설의 가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군함 쓰시마는 같은달 20일 리앙쿠르섬에 들렀고 이야말로 일본정부에 의한 최초의 죽도=독도 조사였다. 그리고 쓰시마의 선장은 지형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동도라면 건조물의 구축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했다. 즉 일본정부가 이시기 죽도에 대해 품고 있던 관심은 정확히 그 군사적 이용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죽도에서의 겨울철 건설공사는 절대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착공되지 못한 채 발틱함대와의 결전을 맞게 됐다. 그런데 그 동해 해전에서 울릉도와 죽도 주변해역이 주전장의 하나가 됨으로써 죽도의 군사적 가치가 새롭게 높이 평가됐다. 해군은 해전직후인 5월30일에 계획을 세워 6월13일에 군함「橋立」을 파견해 보다 상세한 조사를 행했다. 게다가 해군은 6월24일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동해 동수역의 종합시설계획을 수립했다. 그 계획이란「우선 울릉도 북부에 또하나의 대규모 망루(송도 북망루, 9명)와 무선전신소를 건설하고 죽도에 문제의 망루(4명)을 건설한다. 그리고 두 섬의 망루를 해저전신선으로 연결하고 그 전신선을 오키(隱岐)의 망루까지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국경 따위에 아랑곳 없는 군용시설이다. 울릉도의 신망루는 7월14일에 기공해 8월16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죽도의 망루은 7월25일 착공해 8월19일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해저전신선은 9월 對러 강화조약의 체결로 당초계획이 변경돼 죽도와 오키(隱岐)사이가 아니라 죽도와 마쓰에(松江) 사이에 부설하게 됐다. 이 공사는 10월말에 개시돼 울릉도에서 죽도를 거쳐 11월9일 마스에와의 연결을 완료했다. 즉 1905년 조선본토(죽변)에서 울릉도 죽도 마쓰에에 달하는 일련의 군용통신선 체계가 완성됐다.
이상을 요약하면 일본정부에 있어서 동해의 죽도는 군사적인 이용대상일 뿐이었다.
또 그것은 당시 조선각지에서 행해진 군사적 점령과 밀접·불가분의 것이기도 했다.
제2절 일본정부 관료의 판단
1904년 초가을 나카이 요사부로는 죽도에서의 어업권 독점을 위한 대정부 공작을 위해 도쿄에 올라왔다. 당시 나카이가 이 섬의 귀속을 어떻게 인식하고있었던가는 그가 현지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시마네(島根)교육회편「시마네현지」(1923년)는 죽도항에 「37년 각방면에서 경쟁적인 남획이 있어 여러가지 폐해가 다투어 발생했다. 이때 나카이는 이 섬을 조선영토라고 생각해 상경해 농상무성에 말해 동정부에 불하 청원을 하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일양국간 논쟁에서 일본정부는 이 사료의 기술을 편자의 오해였다고 정리했다. 과연 그럴까.
나카이 자신이 죽도가 영토 편입된 경과에 대해 언급한 사료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1906년 3월25일 오쿠하라 도미이치(奧原福市)가 나카이로부터 청취한 기록인「죽도와 울릉도」가운데「나카이씨의 얘기」라고 명기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카이 요사부로씨는 리앙쿠르섬이 조선영토라고 믿어 동국정부에 불하를 청원할 결심을 해 37년 어기가 끝난 후 곧바로 상경해 오키출신인 농상무성 수산국 직원 후지타 노리타로(藤田勘太郞)씨에 부탁해 마키(牧)수산국장을 만나 진술한 일이 있다. 마키국장은 이를 도와 해군수로부에 문의해 리앙쿠르섬의 소속을 확인했다.
나카이씨는 곧바로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수로부장을 만나 동도의 소속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한일양국으로부터의 거리를 측정하면 일본쪽이 10리 가깝고 더욱이 일본인으로서 동도경영에 종사하는 자가 있는 이상 일본령으로 편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카이씨는 이에 따라 뜻을 정해 리앙쿠르섬의 영토편입 및 불하청원을 내무 외무 농상무 3대신에 제출했다.…그후 나카이씨는 내부성 지방국에 출두해 이노우에(井上)서기관에 사정을 진술하고 다시 동향인 구와타(桑田)법학박사 (후에 귀족원의원을 지냄)의 소개에 따라 외무성에 출두, 야마자(山座)정무국장을 면회해 이를 시도했다. 구와타 박사도 크게 힘을 쓴 바 있어 시마네현청의 의견에 의거하게 됐다. 시마네현청에서는 오키(隱岐)의 의견을 근거로 상신한 결과 각의에서 이윽고 영토편입을 결정해 리앙쿠르섬을 죽도라고 명명하게 됐다」 이 사료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해 진다. 나카이는 죽도를 명확히 조선령이라고 믿고 있었고 조선정부에 동섬의 임대를 청원하려고 했다. 또 이를 무주지의 영토편입 청원으로 변경한 것은 바로 일본정부였다.
또 하나의 사료는 나카이가 오키島廳에 제출한 이력서이다. 그 부속서류에 죽도경영의 개요로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본도인 울릉도를 합쳐 한국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어 장차 통감부에 출두해 도모할 일이 있어 상경해 여러가지를 획책하던 가운데 당시 수산국장 마키 보쿠마사(牧朴眞)씨의 주의에 의해 반드시 한국령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심이 들어 조사를 위해 여러가지로 분주한 끝에 당시의 수로부장 기모즈케(肝付)장군의 단정에 따라 이 섬이 완전히 무소속임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경영상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진술해 본도를 우리나라에 편입하고 다시 빌려달라는 것을 내무 외무 농상무 3대신에 청원하는 내무성에 제출했다. 내무성당국자는 당시(러일전쟁중) 한국령일 의심이 있는 황량한 일개 불모의 암초를 차지하는 것은 지켜보고 있는 제외국에 우리나라가 한국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것을 의심케 할 수 있어 이익이 극히 작은데 비해 사태해결이 용이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진정해도 기각되게 돼 있어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무성으로 달려가 당시 정무국장이던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郞)씨에 크게 주장하게 됐다. 그는 당시야말로 영토편입을 서두를 필요가 있으며 망루를 세워 무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함감시상 극히 유리할 뿐만 아니라 특히 외교상 내무와 같은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서둘러 청원서를 본성에 회부하라고 의기헌앙했다. 이같이 해 본도는 결국 본방영토에 편입됐다」 이 사료는 죽도의 영토편입 후 수년이 지난 때의 것으로 조선정부라고 해야할 곳을 통감부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카이 본인이 쓴 것이기 때문에 일본정부내의 대응이 구체적으로 씌어져 있다. 앞의 사료와 더불어 볼 때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죽도의 영토편입에 내무성 관료가 명확히 반대하고 있었던 점이다. 즉 앞에 밝혔듯 1877년 내무성은 죽도=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령으로 확정하고 있었고 그 기록과 지식이 동성의 관료에 계승되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침략을 개시한 이 시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이섬을 무주물로 단정하는 데는 주저하고 있었다.
둘째 관련 내무관료의 망설임을 무릅쓰고 영토편입으로 몰고 간 주역은 마키 보쿠마사(牧朴眞) 기모즈케 가네유키(肝付兼行)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였다.
이 세사람의 궤적은 대단히 흥미롭다. 마키는 이미 밝혔듯 오랫동안 농상무성 수산국장으로서 수산행정의 최고책임자였고 정체된 일본어업을 도해어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진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어민이 조선연안에 침입해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촉진하는 행정시책이었다. 기모즈케는 일관되게 해군수로부에 적을 두고 일본 수로행정을 확립시킨 전문관료였다. 수로부란 평시에는 일반수로정보의 정비에 종사하지만 일단 전시가 되면 직접 군사행동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략기관이 된다. 러일전쟁 당시 기모즈케는 수로부장으로서 조선·만주연안에서의 군략수행을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는 玄洋社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성내에서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과 나란히 대외강경·대외진출 정책의 추진자로서 알려져 있었다. 또 국장 취임전 오랫동안 조선의 영사·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의 이권획득을 위한 갖가지 획책에 바빴던 인물이다. 이들 관료가 강행한 영토편입에서 조선측의 주권이나 주장등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셋째 영토편입의 이론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1904년 시점에서 죽도가 완전히 무소속이라는 기모즈케의 주장은 앞에 밝혔듯 해군수로부의 종래 인식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이가 전년부터 동도에서 어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들어 「무주지 선점」이론의 적용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고 일본정부를 진정으로 떠민 것은 야마자의 발언에도 있듯 러시아함대에 대항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는 군사이론이었다. 즉 죽도의 영토편입이란 동시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해 조선각지에서 그 주권을 침해하며 행한 군사조치와 같은 유형이었다. 다만 그것이 어장독점을 노렸던 한 어민의 움직임을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영토점령에 그치지 않고 영토편입의 형식을 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전토의 군사점령이「조선합병」의 전제였다고 한다면 죽도의 영토편입은 그 작은 전주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나카이 요사부로는 앞의 세 사람의 지시에 의해 1904년 9월29일 「리앙쿠르 영토편입및 임대청원」을 내무·외무·농상무 3성에 제출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형태로 1905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이섬의 영토편입을 각의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제3절 일본의 공시와 조선측의 대응
1905년 2월22일 시마네현은 현고시 40호로 리앙쿠르섬을 죽도라고 명명하고 동도를 오키(隱岐)島司(도사)의 소관으로 한다고 공시했다. ***일본정부는 이 결정을 관보에 게재해 정부차원에서 공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외국이 관계를 맺고 있는 섬에 대해 영토주권을 확립한 사례로서는 1876년 의 오가사하라시마(小笠原島)의 경우가 있다. 그때 일본정부는 동도에 곤계가 깊은 영국·미국과 몇차례나 절충해 양해를 얻고서 결정했다. 게다가 또 구미12개국에 대해 이 섬을 일본의 관할하에 둔다고 통고했다. 죽도의 영토편입 때는 일본정부 내에 동도가 조선령이 아닐까하는 견해조차 있었지만 조선정부에 조회는 커녕 통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일본정부는 조선을 대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조선측이 일본에 의한 죽도의 영토편입에 대해 안 것은 이듬해인 1906년 3월에 들어서였다. 시마네현 사무관 가미니시 유타로(神西由太郞) 일행은 죽도시찰조사에 나섰다가 귀로에 울을도에 기항했다. 그리고 3월28일 가미니시 등이 동도의 군수 沈興澤을 방문했을 때 죽도 영토편입의 건을 알렸다. 이 뜻밖의 얘기에 沈군수는 이튿날 곧바로 중앙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냈다.
「우리나라 소속 독도가 본부 바깥바다 백여리에 있었으나 이달 초사일 신시께 수송선 한척이 와서 섬내 도동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일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와 전하기를 독도가 이제는 일본영지가 돼 시찰차 들렀다고 합니다. 이 일행은 일본 시마네현 오키島司 히가시부미 다스오요(東文輔及), 사무관 가미니시 유타로, 세무감독국장 요시다 히라사토(吉田平吾), 분서장 경부 가게야마 하치로(影山八郞), 순사 1명, 회의원 1명, 의사기사 각1명, 기타 수행원 10여명등으로 먼저 가구수와 인구, 토지, 생산의 다소 묻고 다음으로 인원과 경비, 그리고 몇가지 제반사무에 대해 조사하는 모양으로 기록했기에 알려드리오니 살펴 헤아리기를 엎드려 빕니다 - 光武10년 병오일 음3월5일」 가미니시등의 울릉도 방문은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이 사료에 대해 전혀 검토된 바 없다. 일본정부는 이 문서의 존재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해왔다. 그 근거로서 「가미니시는 죽도에서 잡은 강치 한마리를 군수에 보냈으나 군수는 이에 대해 먼길의 노고를 치사하고 선물에 대해서는 사양했다. 만약 군수가 당시 죽도를 울릉도에 소속하는 섬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이런 응접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가 처해있던 혹독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앞에 밝혔듯 이미 동도에는 일본의 군인·경찰관이 상주해 군청이 위치한 도동을 중심으로 3백인이상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미니시 등이 외국령인 울릉도의 가구수,인구, 지세등을 마음껏 조사했던 데서도 당시의 일방적인 역관계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沈군수가 가미니시등에 영토문제를 두고 정면으로부터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같은 일본인들의 압력의 결과일 뿐이었다. 응대가 정중했다는 것이 가미니시의 발언을 승인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일본정부의 이 사료부정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 가와카미의 저작에 있어서 는 가미니시등의 군수방문에 대해 자세히 쓰면서도 군수의 보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료가 한국에서는 연구에 널리 이용되고 있고 또 극히 중요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가와카미의 이같은 침묵은 의도적인 사료은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沈군수의 보고는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국령이라고 통고한 일본관리의 의외의 동정을 보고해 중앙정부의 지시를 구하고 있다. 일찌기 우산도라고 불렸던 섬은 여기서는 독도라고 불리고 있다. 독도라는 호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앞에 보았듯 일본의 죽도영토 편입이전에 이미 조선인이 동섬을 독도라고 부르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이 沈군수의 보고는 강원도 관찰사에 도착해 관찰사서리 李明來는 다시 이것을 중앙의 참정대신 朴濟純에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고를 받은 朴濟純은 독도가 일본령이 됐다는 얘기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독도에 관한 사정을 상세히 조사해 일본이 독도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사실을 기재한 조선의 행정문서는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沈군수의 보고가 불러 일으킨 커다란 파문은 당시의 신문에 의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신문「황성신문」은 5월9일「울릉군수 內部에 보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내용은 울릉군수 심흥택씨가 내부(內部-내무부 상당)에 보고한 것을 계기로 앞의 가미니시 일행의 얘기를 적었다. 그리고 이 기사의 문장은 앞의 沈군수의 보고문과 거의 완전히 똑같아 정부의 내부로부터의 취재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런 점에서 앞의 沈군수의 보고가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이 의문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 진다. 당시 또다른 전국지였던 대한매일신보에도 이 사건은 취급됐다. 5월1일자 이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울릉군수 沈興澤씨가 내부에 보고하기를 일본관원일행이 본군에 와 본군 소재 독도는 일본의 속지라고 자칭하고 지리와 가구수등을 일일이 기록했는데 내부에서 지령하기를 유람도중에 지리나 가구수를 조사하는 사람이 혹 있더라도 그리 괴이한 일은 아니나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는 것은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으니 이번에 보고한 바가 대단히 놀랄일이라고 했다」 이 기사의 전반은 沈군수의 보고의 요약에 지나지 않으나 후반에서는 중앙정부의 대응을 알 수 있는 점이 귀중하다. 즉 조선의 중앙정부도 처음부터 독도를 자국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일본관리일행의 움직임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이런 신문보도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의한 죽도=독도 영토편입의 움직임을 알고 또한 그것을 자국영토의 침략이라고 받아 들였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당시 전라도 구례에 사는 黃玹은 그의 수기「梅天野錄」에서 조선령인 독도를 일본인이 무리하게 자국령이라고 거짓으로 칭하고 있다고 썼다. 이상을 요약하면 조선 중앙정부도 현지의 울릉군수도 또 민간인들도 일본의 죽도=독도 영토편입을 그 시점에 이미 침략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일본은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으로 조선의 식민지지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정부내에서 죽도=독도 문제 대응이 이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즉 나라 전체가 빼앗겨 소멸돼 가는 가운데 일개 바위섬의 영유문제 따위는 날아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죽도영토편입 조치에 대해 당시의 조선민복이 명확히 이론을 제기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그 역사적 평가상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맺음말
1905년 일본정부는 행정조치에 의해 죽도=독도를 자국영토에 편입했다.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에는 두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가와카미를 대표로 하는 다수의견은 죽도는 근세초 이래 일관되게 일본령이었기 때문에 1905년의 조치는 그저 그것을 재확인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하나 소수의견은 1905년 시점에서 죽도는 완전히 무주지였기 때문에 그것을 선점했다고 하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1877년 태정관이 정식으로 동도를 판도외라고 단정한 것 등 본고 전체에서 그것이 허구임을 밝혔다. 후자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든 사실의 반만으로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선은 15세기부터 동도에 영유의식을 갖고 있었고 또 1905년 일본의 조치를 맞아 그것을 알자마자 곧 반대의사를 보였다. 분쟁은 1952년이 아니라 바로 영토편입 시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다수의견·소수의견은 1905년의 영토편입조치를 동시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는 점에서는 공통돼 있다. 그러나 죽도영토편입의 근거가 된 동도에서의 어업이란 일본인의 울릉도 진출과 불가분이다. 또 일본정부가 동도편입을 서둘렀던 것은 울릉도를 지배한데 이어 동도로부터 전신선을 끌어 죽도망루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시기의 조선민족은 일본의 죽도영토편입을 조선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주권침해·침략 과 같은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영토문제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철저하게 역사적인 시점으로부터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죽도=독도의 경우 그 역사적이란 말의 범주에는 동도의 영토편입에 이른 직접적인 경과와 함께 1905년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이 어떤 관계에 있었던가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스카 : 시마네현아 고맙다
번호:3235 | 추천:44 | 조회:17756 | 2005-03-17
나는 오랬동안 독도문제, 왜곡교과서 문제에 나름대로 관여해왔다.
그러면서 느낀것이 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안타까움이었다.
독도문제만 하더라도,
일본의 지리교과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 발행되는 어떤 지도이든지 간에
독도를 한국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국민들은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일본인들에게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것을,
아니 다께시마가 아닌 독도라는 이름으로 한국이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국내에서는 독도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야단 법석을
떨지만, 정작일본의 매스컴에서는 이를 보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정부나 사회단체들도 이 문제를 일본인 들에게 알리기위한 체계적인 노력도 기울인 적이 없다. 우리 같은 민간인들이 생업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시마네현에서 독도 문제를 공론화 한답시고, 조례를 제정하는 바람에 일본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국민들의 분노도 분노로 끝나지 않고 향후의 적극적인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게 되어, 정부도 마지못해 여러 대책을 내놓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정부는 왜 이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독도의 소유권이 불명확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독도학회 회장으로 있는 신용하교수는,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근거의 부당성을 일일이 지적하고, 우리의 영토임을 명백히하는 여러논문과 저서등의 출판으로, 일본의 양심있는 관계학자들도 이에 대부분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시마네현과 일본의 우익들이 이렇게 자신 있게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근 현대사의 발전과정에서 두번의 큰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초기에 이루어진 한일 수교회담에서, 조국의 경제 발전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식민지배 보상금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일본이 거론한 독도문제를 분명하게 못을 박지 못하고 못들은 척 협상에 임한 까닭이다. 왜냐하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받아내어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번째는, IMF사태가 불거진 이후에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일본으로 부터 외환자금 300억불을 긴급히 들여오는 과정에서, 독도주변 12해리밖을 어업공동수역으로 양보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즉 한국이 어려울때 일본은 돈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시켜 왔던 것이다.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협상이 추후에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국가 경제를 파탄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시마네현과 일본우익들이 독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고, 정부로하여금 미적거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는 독도문제로 부터 자유로운 대통령으로 바꾸었고, 우리의 외환 보유고는 1400억불을 넘어서서 세계에서 3번째의 보유국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일본과 미국이 북핵문제 때문에 우리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고, 영토문제에 있어서는 중국과 러시아도 우리와 똑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독도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여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공포를 한다하더라도 하등의 지장이없다. 그야말로 좋은 찬스를 맞이하게 된 것인데,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우익과 시마네현 당사자들이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익들은 국제사법재판소 운운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의 사람들은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국제 사법재판소에 재소를 하게 되면 양쪽의 당사국들은 결론이 날때까지 문제의 영토에서 물러나야한다. 그런데 이런 영토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도 없기 때문에 백년이상이 걸려도 해걸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일본의 속셈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독도를 재배하고 있는 한국을 일단은 독도로부터 떼어내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리고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별의별 이유를 다들어 독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려 할 것이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열강들이 일본편에 서있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독도문제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사과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펌글>
참고로, 저는 대학 졸업 논문때, 독도관련으로 논문을 제출할 정도로
독도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서,
님처럼 독도에 관한 애정은 있으면서도
한국의 독도정책에 대한 이해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좀 답답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독도정책이 얼마나 유효하고,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친구와 독도에 관하여 얘기를 많이 나누는데
그 친구는 오히려 한국의 독도정책을 "지나칠 정도로 교활하다"고 합니다.
자, 이제 하나씩 풀어가 봅시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정말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방법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걍, 무조건 우리 거라고 바득바득 우기고,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일본에 대해 엄포를 해대면 될거라고 보십니까?
설마, 우리나라가 일본하고 전쟁을, 그것도 해상전을 벌여서 이길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정말로 독도를 "공인된 우리 땅"으로 만들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해서 이기는 방법 뿐입니다.
그리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할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역사적인 문제도, 힘의 강약도 아닌
누가 얼마나 오랜기간 동안 "실소유"해왔나 하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50년이나 독도를 실소유해 오고 있고,
사법재판소에 상정되기 전에 최대한 오랫동안 "분쟁지역"이 아닌 "실소유영토"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일본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이를 이슈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한국정부가 일본의 도발에 발끈해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버리면
50년의 공든 탑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되는 걸 늦추어서
상정시의 "실소유기간"을 늘려 놓는게 유리한 겁니다.
실소유 100년이면 100% 우리땅 된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한국외교부의 정책은 박정희 이전부터의 일관된 정책으로
국제적으로 약소국인 한국이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안이었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또 하나, 여러분이 오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해 드릴까 합니다.
독도에 해병대가 아닌 전경이 지키고 있다는 것.....몇몇 분들이 오해하고들 계시는데.
일본인들은 오히려 이걸 못마땅해 합니다.
경찰이 지킨다는 것은 "外治"가 아닌 "內治"를 뜻합니다.
세상 어느나라에서 자기 땅이 아닌곳에 군인이 아닌 경찰을 보낸답디까.......
참고로, 울나라 남해나 서해에 있는 작은 섬들에도 대부분 군인은 없지만 경찰이 있습니다.
국경지대니까 해병대가 가야 한다고들 하시는데,
적국과의 경계선, 즉, 백령도 같은 곳이 아닌이상 경계지역의 섬이라도 경찰이 지킵니다.
즉, 경찰이 지킨다는 것은 분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한국땅"이라는 의미도 있는 겁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화가 날 정도로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안타까워서 설명해 드립니다.
참고로, 한국정부에서 저처럼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는 것도 사실은 "이슈화"를 최대한 막아보려는 뜻입니다.
이런 숨은 뜻도 모른 채 오히려 일본인들을 위한 일인지도 모르고 자꾸 "이슈화"를 시도하려는 분들....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이 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되면 이길 확률 매우 낮습니다.
현명한 장수는 자기가 유리한 때와 장소를 골라서 전쟁을 치르는 법입니다.
일본이 현재 바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독도가 "영토분쟁" 지역으로 세계적을 알려지길 바랍니다.
그래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소송을 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 스스로 독도가 일본땅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영토분쟁 지역이라고 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일본은 착실하게 돕고있다는 뜻이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하면 당연히 우리나라가 이길까요??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15명의 판사 중 한명이 일본인이고,
일본은 그곳의 운영비의 대부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비라면 전세계에서 으뜸인 나라입니다..
진실이 대한민국에 있다할지라도 그 재판의 결과는 예측할수 없답니다..
정부가 독도문제로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요..
물론 핑계겠지만..
참고로 하나더 말씀드릴까요??
만약 일본이 독도를 합법적으로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고 나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불법 점령했던 수많은 섬들이
독도와 같은 이유로 합법적으로 일본의 영토에 편입이 된답니다...
일본이 고작 동해안의 어장을 바라보고 욕을먹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앞으로도 일본은 독도망언을 계속 할것입니다.
독도만 빼았으면 태평양 연안의 많은 섬들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냉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정이 앞서서 잘못된 정보를 누설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독도는 현재도 한국의 영토이고 앞으로도 한국의 영토입니다!!
아직도 100년만 기다리자며 조용한 외교를 강조하는 펌글이
돌아다녀서 안타까운 마음에 글 올립니다.
그글 좀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군요. 펌글 돌아당기는거
너무 많이 봐서. 내용도 어이없고.
일단 그 내용의 어이없음을 몇가지로 정리해 말씀드리죠.
1. 100년 실소유 주장설
일단 100년을 실소유를 하면 국제적으로 인정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많은 모순이 숨어있습니다.
그 100년이란것은 늘리면 늘리고 줄이면 줄이기 나름이죠.
우리가 아무리 100년됬다. 이제 우리땅이다 주장해봐도
일본이 게네 나름대로의 날조된 역사를 적용하면 100년에서
금방 몇십년이 줄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가서 또 게네들이
완전히 동의할때까지 몇십년 분삭히며 기다리실 건가요?
2. 역사는 언제나 강자의 편이다.
100년 실소유라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국제법 규정이죠. 하지만 그 국제법을
누가 만든다고 보시나요. 일본이 UN상임이사국이 되려 기를
쓰는게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시죠? 국제적으로 그만큼의 파워를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법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것이 아닙니다. 법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죠. 100년 실소유? 한마디로 우스운 말씀입니다.
3. 조용한 외교가 최선의 전략은 절대 아니다.
그동안 조용한 외교 덕에 무엇을 얻었나요? 아직도 100년 년수
세고 계신 분 있나요? 부질 없는 짖 그만 하십시오.
역사는 파워게임 입니다. 지금 미국이 세계를 리드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라는 땅도 엄밀히 말하면
인디안들의 땅입니다. 미국인들이 불법으로 점유하고 빼앗은 거죠.
그렇습니다. 힘이 없으면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일본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양의 역사수집과 날조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에 다케시마 라는 이름으로 일본섬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이미 일본해, 다케시마 라고 표기되고 있는
세계지도가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손 놓고
그래 해봐라. 100년만 지나자. 하고 있는 꼴이란.. 참 한심하기
그지 없으며 우물안 개구리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런글 퍼 올리지 마십시오.
조용한 외교가 최선은 아닙니다. 우리 영토주권을 수호 하려면
그에 따른 대책이 필요하고 구체적 대안을 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동아일보]
17일 일본 도쿄신문은 2개 면에 걸친 독도 관련 특집기사에서 ‘한국 주장에도 일리 있다’는 일본 학자의 인터뷰 기사를 일본 측 논리와 나란히 게재해 주목을 끌었다. 한국 측 논거를 외면해 온 일본 언론계 보도관행을 비추어볼 때 찾아보기 힘든 중립적 보도였다.
독도가 오키(隱岐) 섬에서 160km, 울릉도에서는 90km 떨어진 곳에 있다며 ‘울릉도’를 표시한 지도를 곁들인 것 또한 이례적이었다. 지금까지 일본 언론은 독도의 위치표시 때 울릉도를 생략하는 것을 관례로 삼아 왔다. 울릉도가 오키 섬보다 독도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76) 시마네대 명예교수는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바쿠후(幕府)가 도해(渡海·바다를 건넘) 허가를 내주는 등 실효 지배해 왔다는 게 일본 정부 주장이나 매우 조잡한 설명에 그쳐 (일본의) 고유 영토론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이토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1696년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는데 이는 독도를 영토로 간주할 의사(영유·領有)가 없음을 뜻하며 이에 따라 독도에 가는 일본인도 없어졌다는 것.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일본 정부가 1876년 민간인이 울릉도 개발을 신청한 데 대해 다음해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을 통해 “울릉도와 기타 한 개 섬(독도 지칭)은 본국과는 관계없다”며 거부한 사실을 지적했다. 결국 일본은 독도에 대해 영토가 아니라고 말한 적은 두 번 있지만 영유 의사를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시마네 현 편입 고시보다 5년 앞서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을 통해 울릉도와 부속 석도(石島:독도)를 영토로 선언해 이미 독도의 영유국이 정해졌다는 점도 확실히 언급했다.
한편 교토(京都)대 호리 가즈오(堀和生) 교수도 1987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1905년 독도를 일본에 편입시킨 것은 일본이 조선 각지에서 저지른 주권 침해나 침략과 같은 성질의 찬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도쿄=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독도에 이순신 동상을…″ 네티즌 분노의 패러디 봇물
[쿠키 인터넷팀 3급 정보] ○…“독도에 대형 이순신상을 세웁시다!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듯이 대한민국의 독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립시다.”
일본의 잇단 망동에 네티즌들의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16일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안을 가결하자 인터넷에는 새벽에도 각종 패러디 사진이 오르는가하면 관련 주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패러디 사진을 돌려보며 화풀이를 하는 네티즌들이 유난히 많았다. 특히 독도에 거대한 이순신상을 합성한 사진은 큰 호응을 얻었다.
패러디의 보고인 디시인사이드에는 밤새껏 봇물 터지듯 관련 사진이 올랐다.
불과 12척에 불과한 패잔선을 이끌고 일본의 정예함대 200여 척과 10만대군에 맞서 대승을 일궈낸 ‘조선의 호랑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기가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가하면 KBS ‘불멸의 이순신’에서 출전하기 전 전사들에게 독려하며 남겼다는 이순신 장군의 글도 네티즌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지난 7년간, 저 바다에 수많은 전우를 묻었다. 우리 손으로 이 전란을 끝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 조선 백성의 한을 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일만 육천 조선 수군 모두는 죄인의 얼굴로 전장에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내일! 우리는 모두 승리자의 얼굴로 개선할 것이다. 단 한 척의 배도, 단 하나의 적도 살려보내지 마라!’
이순신상을 독도에 세우자는 세우자는 ‘거북이’라는 네티즌의 합성사진에 ‘거멍거멍’이라는 네티즌 등은 “진정 가슴에 불이 타오른다”는 댓글로 화답했다.
이에대해 네티즌 ‘수중왕릉’은 “동해에는 문무대왕상을, 남해는 충무공상을, 그리고 서해에는 장보고 상을 세우면 어떨까?”라고 적어 주목을 받았다.
독도에 국회와 63빌딩 등의 그림을 합성, 독도는 한국땅임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주장도 올랐으며 ‘일본 원폭투하 60주년 기념우표’도 등장했다.
네티즌 ‘체신청’은 패러디 우표사진을 올리며 “일본 열 좀 받게 해줍시다. 왜 우리만 열받나요?”라고 설명하자 “좋은 아이디어”라는 댓글이 잇따랐다. 그러나 “원자폭탄 합성만은 자제하자”는 우려의 글도 이어졌다.
이밖에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 최근 반민족적 언사로 도마에 오른 국내인사들도 패러디 합성의 주된 요소로 등장했다. 쿠키뉴스 김상기기자 kitting@kmib.co.kr
“독도 문헌 등장, 조선이 200년 빨라”
[한겨레] 호리 가즈오 일본 교토대 교수
“일 독도편입 부당” 논문
1987년 호리 가즈오(54)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해 3월 일본 조선사연구회에서 발간한 논문집에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이란 글을 싣고, 독도가 한국땅인 이유를 다양한 역사자료를 들어 증명했다. 호리 교수는 17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논문에 대해 “학술적 차원에서 쓴 글”이라며 “학술대회에선 얘기할 수 있지만, 정치적 이슈가 돼 있는 상황에서 언론에 얘기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며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사)한일사회문화포럼이 이날 〈한겨레〉에 보내온 호리 교수의 글을 발췌요약한다.
조선 문헌에 오늘의 다케시마가 등장한 것은 일본보다 약 200년 빠르다.
〈세종실록〉 지리지(실제로 1432년, 형식적으로는 1454년)에 ‘울릉도와 별도로 또 다른 섬이 존재하고, 청명한 날에는 서로 쳐다볼 수가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한국에서는 우산도를 독도라고 인식한다.
일본 문헌에 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은주시청합기〉(1667년)이며, 송도(마쓰시마)라는 명칭으로 울릉도와 병기되어 나온다.
1693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인 어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대마도 영주가 울릉도를 찬탈할 음모를 꾀했으나 안용복이 두 차례 일본에 건너와 담판한 결과 바쿠후(막부)는 1699년 3월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정식으로 승인함으로써 이른바 ‘죽도 1건’은 결말이 났다. 당시 외교 문서에 독도 명칭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 섬이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된 이상 독도의 영유권도 똑같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관제 지도에서 송도(독도)를 처음 표시한 것은 〈일본여지로정전도〉(1773년)다. 1778년에 간행된 목판채색판인 〈일본로정여지도〉는 일본 본토와 그 부속지를 모두 채색하였으나 죽도와 송도는 조선 반도와 함께 전혀 칠하지 않았다. 즉 ‘죽도 1건’ 이후 관제 지도는 죽도·송도를 일본 영토로 취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쿠후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1876년 10월 내무성이 죽도·송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무성은 1877년 3월 당시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에 ‘일본해내 죽도 외 한 섬 지적 편찬 방향’이라는 문서를 제출하고 최종 판단을 요청했다. 태정관 조사국은 죽도와 송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공문서를 정식으로 내무성에 내려보냈다.
1905년 일본정부는 행정조처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두가지다. 다수 의견은 ‘죽도는 근세 초두 이래 일관되게 일본 영토였기 때문에 1905년의 영토편입 조처는 그것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877년 태정관이 정식으로 이 섬을 판도 외라고 단정했다.
소수 의견은 ‘1905년 당시 죽도는 주인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선점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선은 15세기부터 이 섬에 영유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1906년 일본이 편입시킨 사실을 알고 즉각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일본 정부가 1905년 독도 편입을 서두른 것은 러일전쟁 당시 (동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러시아 함대를 감시할 수 있는) 망루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원문
* 호리 가즈오 일본 교토대 교수
=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 호리 카즈오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 / 황영식(한국일보 논설위원) 번역
1.글머리에
영토문제는 고래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도 많은 국제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영토문제라는 것은 지난번 포클랜드분쟁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배타적 내셔날리즘을 폭주시키는 특징까지 갖고 있다.
현재 일본은 치토리(千島)열도, 센카쿠(尖閣)제도,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명)등 3곳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안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당장 해결될 전망은 없다. 실재하는 영토분쟁을 처리하는 수단은 국제법이다. 그러나 국제법을 관계국이 납득하도록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쟁에 대한 사실인식 자체에 공통의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현재 쌍방의 국익과 국민감정 때문에 교착상태에 있는 일본의 영토문제에 대해서도 그 분쟁대상지역의 역사를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해명해 가는 것이 어떤 진보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닐까.
다케시마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 북한이 영유권을 다투고 있다. 전후 국가차원의 분쟁은 1952년 소위「李承晩라인」설정 직후,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전후, 그리고 77년 2백해리 문제가 등장한 시기에 특히 뚜렷했다. 그리고 각각의 시기에 발표된 다케시마문제에 관한 국제법이나 역사학 문헌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연구방법으로서 우선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의 「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1966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그것과 반대되는 주장을 펴 나가려 한다. 이 책을 특별히 취급하는 이유는 (1) 일본에 있어서 다케시마에 관한 역사연구 중 가장 실증적인 형태의 저작이라는 점 (2)저자는 이 책 집필 당시 현직 외무성조사관이어서 이 책이 틀림없이 일본정부의 요청에 따른 연구였다는 점 (3)이 책이 현재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정당론의 최대 전거(典據)가 돼 있다는 점등에서다. 본고의 과제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이 다케시마와 어떻게 관련돼 왔나, 그리고 왜 1905년에 그것을 영토에 편입하게 됐나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다만 논지 전개를 위해 전근대에 대해서도 간단히 개관하는 것으로 한다.
또 국제법 논의는 일체 하지 않는다. 가와카미는 자신의 저서에 대해 현실의 분쟁에는 전혀 무관하게 다케시마에 대한 사실관계를 어디까지나 순수한 학문적 태도로 구명했다고 반복해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제1장 독도의 인지와 영유의식
제1절 조선정부와 에도바쿠후(江戶幕府)의 독도인식
조선측의 문헌에 지금의 다케시마=독도가 등장하는 것은 일본측보다 약2백년정도 이르다.「세종실록」지리지(실제로는 1432년, 형식적으로는 1454년 성립)의 江原道蔚珍縣條에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이라고 씌어져 있다. 즉 신라시대부터 알려져 있는 鬱陵島와는 별도로 하나의 섬이 있고 맑게 갠 바람부는 날이면 서로 바라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于山島가 독도로 돼 있다.
가와카미(川上)는 于山島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것이 오늘의 독도에 해당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 두가지 사료를 든다.
우선「고려사」지리지(1451년) 蔚珍縣條에 「鬱陵島 在縣正東海中 新羅時稱于山國一云武陵 一云羽陵…一云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이라고 돼 있고 또「新增동국여지승람」(1531년)의 蔚珍縣條에「于山島·鬱陵島 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一說于山·鬱陵本一島」라고 돼 있다. 즉「고려사」는 본문에서 우산·무릉을 한섬으로 하고 二島說을 주기(註記)했고 거꾸로 여지승람은 본문에서 이도설로 하고 일도설을 주기했다. 가와카미는「고려사」본문의 일도설이야말로 옳은 것이고 다른 문헌의 이도설은「고려사」註記의 오류가 확대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선 각 문헌의 성립연대다. 전체로서는「세종실록」쪽이「고려사」보다 오래된 문헌이라는 것은 가와카미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의 鬱陵島항을 대조하면 전자에는 후자에는 없는 조선 세종때의 사건이 기재돼 있다. 그래서 그는 후자쪽이야말로 보다 오래된 기본문헌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가 조선시대를 취급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며 그것이 사료자체의 신구와는 전혀 무관하다.
두번째 근거는 鬱陵島에서 독도는 보이지 않으므로 「세종실록」의 于山島는 독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와카미는 또「고려사」의 註에 「風日淸明則可望見」이라는 것은 두 섬의 얘기가 아니라 鬱陵島와 조선본토의 얘기라고 해설하고 있다. 우선 문맥을 무시해 주어를 바꿔 읽는 것은 자의적이다. 또 물리학적인 계산으로는 鬱陵島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나 있다.
그리고 그후 일본측의 문헌에도 독도는「맑은 날 鬱陵島 산봉의 높은 곳에서 독도를 볼 수 있다」든가 「鬱陵島에서 50리, 바다 위 멀리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바로「세종실록」의 기술과 일치한다. 또 그 모습까지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고려사」본문에 약간의 혼란은 있으나 15세기 초두에 조선인이 울릉도와는 다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문헌이 조선의 正史중 지리지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국가의 영유의식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와카미 저작의 보다 커다란 결함은 자신의 于山島 부재설에 의거해 16세기 이후 많은 문헌과 지도에 등장하는 于山島를 모두 부정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숙종실록」(1728년) 30권에는 17세기말 鬱陵島를 둘러싼 둘러싼 분쟁때문에 일본에 두번 건너온 安龍福이 「松島卽于山島 此亦我國地」「以鬱陵于山等島定以朝鮮地界」등으로 발언한 사실이 실려 있다. 가와카미는 安龍福이 오늘의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증언은 허구가 많다고 해 그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安龍福의 증언내용은 우선 제쳐 두더라도 그가 독도를 于山島라고 부르며 鬱陵島와 함께 조선령이라고 발언하고 있는 사실은 가와카미의 우산도 비존재설을 뒤집는 데 충분하다. 또「증보문헌비고」(1908년) 輿地考에도「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松島卽芋山島爾不聞芋山亦我境乎」등으로 우산도를 정확히 현재 독도의 호칭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증보문헌비고」가 2백년에 걸친 편찬사업의 소산으로 실록을 보오한하는 관제문헌이라는 점에서 조선정부가 우산도에 대해 영유의식을 유지했던 것이 분명해 진다. 그외 조선이나 일본의 문헌에서 현재의 독도를 우산도라고 쓰고 있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張志淵의「大韓新地志」(1907년)는 울릉도의 동남에 우산도가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또 近藤保祿의 「朝鮮國地誌摘要」(1876년)나 오타 사이지로(大田才次郞)의 「新撰朝鮮地理誌」(1894년)도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는 별도로 우산도가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조선의 지도에서 울릉도와 별도로 우산도가 등장하는 것은 「東國輿地勝覽」(1499년)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발견된 지도 중에서 우산도가 실려있는 것은 수백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그것들은 고지도여서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관계나 크기는 반드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많은 지도가 두 섬을 병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에 있어서 우산도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19세기말 조선정부가 울릉도의 개발에 착수하면서 우산도에의 인식은 보다 정확해 졌다. 그 시점에 조선측의 인식을 보이는 것이 대한제국학부편 「大韓輿地圖」(1899년, 규장각 소장)이며 고지도치고는 울릉도와 우산도가 거의 정확한 위치에 그려져 있다.
위에 든 사실에 의해 가와카미의「우산도 부재설」은 이미 성립할 수 없음이 분명해 졌다. 즉 조선정부는 15세기부터 독도를 우산도로서 자국영토라고 인식해 왔고 혼란된 시기도 있었지만 19세기말에는 또다시 영유의식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일본 문헌에서 현재의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이즈모(出雲·현재 시마네현의 동쪽) 번사(藩士·번주의 봉록을 받는 사무라이) 사이토 도요히토(齊藤豊仙)의「隱州視聽合記」(1667년)며 松島 = 독도와 竹島 = 울릉도를 병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일본에서는 그 두 섬의 형상이 제법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직접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15세기 중반 울릉도에 대해 공도(空島)정책을 취해 섬주민들을 철수시켰다. 1617년 요나고(米子·현재 돗토리현 서부) 거주 오타니 다카요시(大谷甚吉)의 상선이 조난, 우연히 울릉도에 표착해 산물의 풍부함에 착목해 무라카와 이치베이에(村川市兵衛)와 함께 바쿠후에 도항허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이듬해 바쿠후의 허가를 얻어 그후 오타니·무라카와 두 집안이 번갈아 울릉도에 배를 보내 벌목·채취 등을 행하게 됐다. 두집안은「竹島拜領」을 자칭했지만 바쿠후가 내린 것은「渡海免許」였을 뿐이다. 그리고 두집안은 竹島=울릉도에 오가는 도중 松島=독도에서도 약간의 어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1661년경 새로 송도=독도로의 도해면허도 받았다. 그러나 두집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죽도=울릉도였고 송도=독도는 그 왕복도중 여가사업의 대상일 뿐이었다. 또 두 섬의 크기의 차이가 원체 커서 당시의 사료도 「竹島之內松島」「竹島近邊松島」「竹島近所之小島」등과 같이 송도를 죽도의 부속섬으로 취급했다. 이처럼 일본인이 울릉도에 도항을 반복한 시기, 막부는 애초에 이섬이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1693년 울릉도에서 오타니가의 일행과 경상도에서 고기잡이를 온 安龍福 등 조선어민 사이에 커달간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오타니·무라카와 두집안이 막부에 이를 호소해 이문제는 일본과 조선이 외교경로로 죽도=울릉도의 어업권·영유권을 다투는 이른바 「竹島一件」으로 발전했다. 이 외교교섭 도중 쓰시마(對馬)번은 노골적으로 조선으로부터 울릉도를 빼앗고자 했다.
조선정부에서는 한때 방침이 흔들렸으나 안용복이 두번이나 일본에 건너와 울릉도·우산도는 조선령이라고 주장한 것이 계기가 돼 영의정 南九萬등의 대일강경자세가 지배적이게 됐다. 역사적으로 울릉도가 신라시대부터 조선에 속했던 것이 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마침내 쓰시마번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대조선 협조정책을 선택했다. 즉 1696년 1월 오타니·무라카와 두집안의 죽도도항이 금지되고 1699년 1월 일본측이 울릉도가 조선령임을 정식으로 승인해 이 「죽도일건」은 결착됐다. 그리고 그 외교문서에 직접 송도=독도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동섬이 죽도=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비쳐져온 이상 그 영유권도 마찬가지로 처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일본인의 송도=독도에서의 어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죽도=울릉도 진출에 수반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죽도 도항금지와 함께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그후 오타니·무라카와 두집안이 송도=독도만을 목표로 도항한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겐로쿠(元祿·1588-1704년)기 죽도=울릉도에의 도항이 막부에 의해 금지된 후에도 산잉(山陰)지방 어민들이 비밀스럽게 동도에 건너간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또 민간에서는 송도=독도를 오키(隱岐)국 소속으로 쓴 책도 있고 또 죽도= 울릉도가 조선의 속령임을 알지 못하고 쓴 책까지 있다. 그러나 이런 책임 없는 민간인의 인식은 영토주권의 귀속과는 관계가 없다.
「죽도일건」이후 막부의 영토의식을 보이는 자료로서는 그 관찬(官撰)지도를 들 수 있다. 일본의 관찬지도 중에서 송도=독도를 최초로 그린 것은 나가쿠보 아카미즈(長久保赤水)의 「日本輿地路程全圖」(1773년)이다.이 지도는 경위선을 사용한 일본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죠큐보는 또 목판채색판인 「日本路程輿地圖」(1778년)을 간행했다. 이 지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본토와 그 부속지는 모두 채색하고 잇으나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채색하지 않은 점이다. 즉,「죽도일건」에 근거한 이후의 관찬지도는 죽도, 송도를 모두 일본영토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또 고지도의 단계를 완전히 탈피했다고 얘기되는 관찬지도인 이노 타다다카(伊能忠敬)의「大日本沿海輿地全圖」(1821년)에는 죽도, 송도 모두 포함돼 있지 않다. 즉, 17세기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애매했지만 겐로쿠 시대 조선정부와의 교섭을 거친 후 막부는 송도=독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일본령이라고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으로 정리하자면 일본인이 17세기에 송도=독도에 대해 깊이 알게 된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이 조선령인 울릉도에 진출한 상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국정부의 교섭에서 울릉도의 조선귀속이 합의된 때 그 속도인 송도=독도도 극히 자연스럽게 일본 판도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제2절 메이지(明治)정부의 독도인식
막말(幕末)로부터 메이지(明治)초년에 걸쳐 구미와 접촉함에 따라 일본의 울릉도와 죽도=독도 인식에는 심한 혼란이 생긴다. 우선 18세기말 동해에 진출해 온 프랑스·영국 배가 잇달아 울릉도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 위치측량이 부정확해 동도는「다쥬레」「앨고너트」라는 서로 다른 섬으로 소개됐다. 죽도=독도는 나중인 1849년 프랑스배에 발견돼 「리앙쿠르」로 명명됐다. 그 때문에 19세기 중반 구미의 지도에는 동해에 울릉도가 2개 있거나 죽도=독도를 합쳐 세섬이 그려져 있거나 했다. 이 구미측의 정보와 일본 구래의 죽도, 송도 지식이 조합되는 가운데 두 섬에 대한 인식이 혼란을 겪었다. 이런 경위는 이미 종래의 연구에 의해 해명돼 있다.
육군참모국의 「朝鮮全圖」(1875년)와 문부성의 「日本全圖」(1877년)에는 울릉도가 죽도와 송도 두 개로 그려져 현재의 죽도=독도는 누락돼 있다. 이윽고 「앨고너트」의 존재가 부정되자 울릉도는 에도(江戶)시대와는 거꾸로 송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동해 가운데 한 섬만을 그린 지도가 나왔다. 어쨌든 1870년대부터 1880년대초에 걸쳐 일본정부의 두 섬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3도설, 2도설, 1도설이 있었고 두섬의 위치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한 것은 적었다. 이런 사실은 애초에 죽도=독도를 예로부터의 일본 고유영토로 한 견해에 대한 반증이 될 것이다.
일본정부 내에서 이런 혼란이 정리돼 가는 중에 그 섬들의 영유권 귀속도 확정됐다. 다만 그것을 각 기관이 통일돼 행한 것이 아니어서 따로따로 살펴 나가자. 우선 내무성이 두 섬의 소속에 대해 최초로 결정을 내렸다. 1876년 10월 내무성 지리료가 지적편찬을 위해 시마네(島根)현에 동현 앞바다에 있는 죽도라는 섬의 정보를 조회한 것이 계기가 됐다. 거기서 시마네현 당국은 17세기 오타니·무라카와 양가에 의한 죽도=울릉도 개척 경위를 조사해 죽도와 송도=독도 약도를 첨부해 「日本海內 竹島外一島 地籍編簒 方伺」라고 내무성에 제출했다.
즉, 시마네현 당국은 송도를 죽도의 속도로 이해했기 때문에 일괄해 취급한 것이었다. 내무성은 독자적으로 원록기의 「죽도일건」기록을 조사해 시마네현의 「伺」정보와 합쳐 검토한 끝에 이 양도는 조선령이지 일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版圖의 取捨는 重大之事件」이기 때문에 동성은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 太政官에 「日本海內 竹島外一島 地籍編簒方伺」을 제출해 그 판단을 앙청했다. 부속서류에「外一島」는 송도임이 명기돼 있고 그 위치와 형상도 올바르게 기술됐다. 태정관 조사국의 심사에서는 내무성의 견해가 인정돼 다음과 같은 초안이 잡혔다.
『別紙內務省伺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簒之件(별지 내무성이 여쭌 일본해내 죽도외 일도의 지적편찬의 건) 右는元祿五年朝鮮人入島以來舊政府該國과 往復之末遂에本邦關係無之相聞候段申立候上은 伺之趣御聞置左之通御指令相成可然哉此段相伺候也.
「御指令按」伺之趣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義라고 可相心得事』 이 지령은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참의 오구마 가사노부(大隅重信) 테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오키 다카마카(大木喬任)등에 의해 결정됐다. 그리고 동년 3월29일 정식으로 내부성에 하달됐다. 즉,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은 시마네(島根)현과 내무성이 상신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한 묶음으로 하는 이해에 근거해 양도를 일본령에서 제외한다고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 지령은 4월9일부로 내무성으로부터 시마네현에 전해져 현지에서도 이 문제가 종결됐다.
^외무성이 이 두섬에 대해 최초로 알았던 것은 1870년 조선시찰을 떠났던 외무성 출사(出仕) 사다 시라카야(佐田白茅)등의 보고에서였다.「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 竹島松島 朝鮮 附屬으로 된 始末 - 송도는 죽도의 隣島로 송도의 항에 덧붙여 게재해 서류도 없앤다. 죽도의 항에 붙여 원록 이후는 한동안 조선에서 거류의 목적으로 사람을 보내 남겨 두었다…」 이것도 원록기의「竹島一件」에서 송도=독도가 조선에 건네졌다는 인식이나 이것은 단순한 보고이다.
외무성이 이 두 섬의 소속에 대해 주체적인 판단을 재촉받은 것은 1876년부터의 송도개척문제와 관련해서였다. 동년 6월 武藤平學라는 자가 외무성에「송도개척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그 이후 2년여 동안 고타마 사다야스(兒玉貞易), 사토 시치로베에이(齊藤七郞兵衛), 시모무라 유사부로(下村輸三郞)등의 민간인과 블라디보스톡 주재 무역사무관 와키세 도시히도(脇瀨壽人)로부터 같은 취지의 건의나 요청이 반복해 제출됐다. 그 내용은 동해에 있는 일본령 또는 소속불명의 송도에 대해 그 자연의 풍부함을 들어 개발의 허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열강이 이 섬을 노리고 있다고 위기감을 부채질한 것도 공통됐다. 여기서 말하는 송도는 물론 울릉도이다.
이 같은 개척요구에 대해 외무성 관료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었다.
기록국장 와타나베 히로모토(渡邊洪基)는 죽도=울릉도는 조선령이라고 하면서 죽도와는 별도로 송도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령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죽도와 송도의 영유권을 나누는 견해로 후에 죽도=독도 영토편입의 이론적 선구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그도 울릉도에 부속하는 우산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 우산도의 처리에 곤란을 겪었다. 또 그는 동해에 있는 것이 2섬인지 3섬인지 확신을 갖지 못했고, 더욱이 무엇보다도 개척요청의 대상인 송도가 원래는 울릉도임을 알지 못했다.
관료 갑은 송도는 조선의 울릉도에 속하는 우산도여서 송도의 개척은 타국에의 침략이 된다고 반대했다. 관료 을은 우선 송도와 죽도를 시찰하고 그 후에 그것들이 울릉도, 우산도, 또는 무주지인지를 판단하자고 주장했다. 관료 병은 영유권은 언급하지 않은 채 열강접근의 정보를 들어 송도에 사는 조선인에 구애받지 말고 동섬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公信국장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는 당초부터 송도개척 요청의 대상이 조선의 울릉도임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타나베는 개척대상인 송도가 우산도라면 개척을 허가할 수 없고 만약 송도가 소속불명의 섬이라면 조선측과 교섭하면 된다고 말했다.
송도라는 섬을 일본령으로 편입하고자 한 와타나베의 견해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수의견이었다. 송도가 울릉도와 우산도 중 어느 것인지 비정하느냐에 차이는 있었지만 송도의 조선소속 또는 조선의 동도관여를 인정하는 것이 다수의견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외무성내의 논의는 결론을 내지 못했고 결국 개척요청의 대상 송도를 實地 조사하는 것으로 됐다.
1880년 7월 군함 아마기(天城)가 송도에 가 측량한 결과 동섬이 울릉도임이 판명됐다. 오랫동안 관심을 모았던 풍요로운 송도라는 것은 틀림없는 조선의 영토였으며 이에 따라 개척요청은 모두 각하돼 이 문제는 끝났다. 또 하나의 죽도=독도는 완전히 불모의 바위섬에 지나지 않아 애초에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1881년 11월29일 내무성이 죽도와 송도를 판도 외로 한 앞의 대정관 지령서를 첨부해 외무성에 울릉도의 현상을 조회한 일이 있다. 그에 대해 외무성은 아무런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외무성이 죽도와 송도의 영유권을 분리해 취급하는 등의 일은 결코 없었다.
해국에 대해서는 당시의 원문서가 남겨져 있지 않아 그 출판물로부터 당국의 인식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해군水路部가 주로 의거했던 영국퍄 의 해도에서는 1860년대에 이미 두섬의 소재가 확정돼 있다. 그 때문에 일본 해군도 1870년대 말에는 그점을 충분히 인식했던 듯 1880년대의 일본제 해도에는 두섬이 정확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해도는 지리적인 인식을 보일 뿐이어서 해도중의 섬의 소속에 대해서는 그 해설서인 수로지를 중시할 수 밖에 없다.
일본해군은 1880년 3월부터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환瀛水路誌」의 편찬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러편인 제2권 제2판(1886년)에는 울릉도와 리앙쿠르트 列岩이 실려 있다. 이것은 세계의 수로지여서 그 귀속을 좌우하는 결정적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1889년3월 이 수로지의 편찬은 중단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해역을 중시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우선 일본영해를 구별해 「일본수로지」로 독립시키고 1892년부터 차례차례 간행했다. 이 수로지에는 1895년의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따른 일본의 신영토 대만과 澎湖島, 또 치토리(千鳥)열도 최북단의 占守島까지 실려 있지만 대만의 對岸이나 캄챠카반도는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 즉 이 일본수로지의 취급범위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영토·영해에 한정된 것이다. 그리고 중시할 것은 이 수로지의 동해항목에 리앙쿠르트섬=독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당시의 일본해도에는 동도의 위치는 정확히 그려져 있어 그 소재를 알지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 수로지의 1897년판 부도와 이섬이 일본영토에 편입된 후의 수로지 부도를 대조하면 사태는 명백하다. 즉, 1900년 시점에서 일본의 해군수로부 당국은 명백히 동섬을 일본령으로부터 제외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일본해군의「조선수로지」 1894년판과 1899년판에는 울릉도와 나란히 리앙쿠르트 列岩이 실려있다. 요컨대 19세기말에 일본해군의 수로부 당국이 죽도=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상을 요약하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일본의 정부가 죽도= 독도에 독자적인 관심을 보인 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인식의 정도에 강약은 있었지만 일본정부의 관계제기관 모두가 이섬을 울릉도와 함께 조선령으로 보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2장 일본의 조선변경도서 침입
제1절 울릉도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
메이지유신 이후 대외팽창의 기운을 타고 정부의 정책과는 별도로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이 시작됐다. 1881년 조선의 수토관(搜討官)은 이 섬에 많은 일본인들이 침입해 벌목과 어획을 행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조선정부는 즉시 같은해 6월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조회하고 도항금지를 요구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미 앞서 송도개척문제로 울릉도의 조선귀속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 잘못을 인정하고 조선측에 사죄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아무런 구체적 수단을 취하지 않아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은 끊이지가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정부의 항의가 거듭됐다.
일본정부도 이것이 외교분쟁이 될까 염려해 1883년3월 내무성과 사법성이 울릉도로의 도항을 금지하는 지시를 하달했다. 또 같은해 9월 일본정부는 동도거주 일본인을 철수시키기 위해 내무성 서기관과 기선을 직접 파견했다. 그래서 주로 벌목에 종사하고 있던 254명의 일본인 전원을 강제적으로 귀국시켰다. 이것이 메이지정부의 울릉도에 관한 최초의 외교교섭이었다.
동섬에서 철수당한 일본인은 본래 밀출국, 밀무역 범죄자였으나 실제로는 전원이 면소·무죄로 됐다. 이 시점에서는 조선정부에의 배려에서 외무성이 이렇게 전원무죄로 하는 데 이론을 주장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조선정부로서는 다수의 일본인이 몰래 자국령에 침입한 이 사건이 울릉도정책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즉 수백년간이 공도정책이 페지되고 거꾸로 적극적인 개발정책으로 돌아섰다. 우선 1882년 5월 울릉도에 검찰사 이규원(李奎遠)이 파견돼 그의 보고에 의거해 동년 12월「울릉도 개척령」이 나왔다. 그리고 동년 우선 도장(島長)을 두고 이민입식(入植)정책을 시작했다. 즉 이때부터 울릉도는 단순한 지도상의 판도일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갔다. 1883년 김옥균(金玉均)이 「동남제도 개척사겸 포경사」에 임명돼 의욕적으로 동도 개발책을 세웠으나 이것은 그의 실각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후 이 섬의 행정기구는 몇번인가 개편돼 1895년에 도장은 도감으로 변했지만 그간 정부의 징세면제와 이주장려에 의해 조선인의 인구는 착실히 증가했다. 그리고 1900년 10월 마침내 울릉도는 군으로 승격돼 중앙파견의 군수가 임명됐다. 이처럼 울릉도는 1880년대 이후 완전히 미개의 상태에서 차차 정리된 조선인사회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행정기구가 본토보다 크게 정비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미리 당하게 됐던 것이다.
앞서 1883년 일본인의 일괄철수 후에도 일본 각지로부터 무단으로 울릉도에 도항하는 자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 일본인의 도항 목적은 당초 목재반출이었으나 남벌에 의해 가치 있는 재목이 고갈돼 가자 그 비중은 낮아졌다. 대신 울릉도 주변의 어장을 목표로 어민의 도항이 늘어 났다. 조선정부의 일본에 대한 동도로부터의 철수 요구는 1888년, 1895년, 1898년, 1899년, 1900년 빈번히 이뤄져 일본인의 침입이 얼마나 집요했나를 보여 준다. 일본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1900년을 전후한 동도 거주 일본인은 약2백명 정도로 계절적으로는 1천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도항 일본인은 서서히 정주하게 됐다.
또 일본정부의 그들 일본인에 대한 정책도 그때까지와는 달라졌다.앞에 밝혔듯 1880년대 초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럭저럭 도항금지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후 일본정부는 조선측의 철수요구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는 요구에 대항하게 됐다.
이것은 19세기말이 되어 일본의 조선침략이 전면적으로 강화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 시기 일본에 의한 철도·광산 등 이권획득이나 통화권의 침해는 점점 노골화했다. 본고와 관련된 어업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이미 1889년에 치외법권이나 여러 가지 불평등규정을 지닌「朝日兩國通漁規則」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에 의해 일본어선이 대대적으로 조선연안 각지에 진출해 강도적인 난획을 자행했다. 그깨문에 생활을 위협받은 조선어민과 진출한 일본어민 사이에 충돌이 빈발한 데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일본정부는 그들 어민의 자주적인 通漁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정책에 착수했다. 1898년 「원양어업 장려법」을 실시해 장려금에 의한 도해어업의 발달을 도모했다. 또 당해 행정 최고책임자인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스나오(牧朴眞)는 1899년6월부터 한 달 간 손수 조선연안의 상황을 시찰했다. 그리고 거기에 근거해 같은 해 각 府縣에 韓海통어조합을 조직시켜 이듬해 그 중앙기관으로서 조선해통어조합 연합회를 설립시켰다. 또 1902년「외국영해수산조합법」을 제정해 종래의 단순한 통어에서 이주어촌 건설로 나아 가자고 장려하게 됐다. 이같은 정부의 시책에 따라 각 부현도 조선에의 통어에 보호정책을 취했다. 요약하면 19세기말부터 정말로 관민일체가 돼 조선연안의 어장에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애초에 조선이 외국이며 조선어민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울릉도에서의 사태는 바로 그 일환이었다. 앞에 밝혔듯 어기에 따라 1천명이상의 일본인이 유입된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가와카미는 울릉도에의 일본어민 통어는「朝日양국통어규칙」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불평등조약에 비쳐볼 때 조차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활동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규칙에 따른 통어세를 내지 않았던 통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규칙대로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통어했다면 우선 매년 부산영사를 통해 조선 해관에 통어세를 내고 동시에 면장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또「무역규칙」에 따라 포어의 수출세를 내지 않으면 안된다. 울릉도에 진출해 있던 일본어민이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던 것은 당시 부산영사가 동도의 일본인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으로부터 명백하다. 일본측의 많은 사료에 나와 있듯 그들은 일본의 각 항구로부터 직접 동도에 가 어로가 끝나면 다시 직접 각자의 항구로 돌아 갔다. 울릉도에서의 일본인의 어업은 불평등조약에 비춰서도 부당한 것이었다. 이점은 동도의 목재벌채와 그「수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의 초기벌채가 모두 도벌이었음은 명백하다. 나중에 일본인은 현지의 조선인에 약간의 대가를 지불한 일도 있었던 듯하나 동도는 애초에 개항장이 아니어서 거기서 수출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일본인의 재목반출은 모두 탈세·밀수였다. 게다가 거류지가 없는 동도 거주 일본인은 모두 불법거주자였다.
즉, 동시기 울릉도에서 일본인의 활동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불법부당한 침략행위였다.
관련된 법적인 문제에 끝나지 않고 실제로 울릉도에 침입했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충돌이 빈발했다. 현지의 양민족의 분쟁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동도 도감 裵季周의 고발에 의해서였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은『매년 동도에 와 도검총포를 휴대하고 도내를 횡행하며 인민을 협박하고, 부녀자를 희롱하고, 물품을 빼앗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도민들이 대단히 괴로움을 느끼는』상태였다. 그는 1898년 7월 일본에 건너와 시마네·돗토리 경찰에 일본인의 폭행을 단속하라고 요구했고, 또 마쓰에(松江) 재판소에 몇명인가 일본인을 재목의 도벌과 절도의 이유로 고소했다. 이 사건을 취조한 일본의 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 다수가 거주, 그 세력은 도민을 억누르고 끝없는 횡포를 부려 거의 무정부 상태』로 『때때로 폭력으로써 (조선인)을 위협하는 무리도 있어 장차 그 세력이 뻗어나감에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추측하기 어려운』양상이었다.
도감 裵季周는 조선의 중앙정부에도 현지의 사태를 자세히 보고했기 때문에 映뮐ㅊ寬? 외교문제가 됐다. 동도에서의 이 분쟁은「황성신문에 의해 빈번히 보도됐다. 조선정부가 거듭 동도의 일본인 철수를 요구한 데 대해 일본정부는 그같은 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현지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1900년6월에는 조선내부시찰관 禹用鼎과 부산영사관보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가 합동출장조사까지 행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아 조선정부는 분쟁의 유무에 관계없이 조약에 의거해 동도로부터 일본인이 철수하도록 다시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동도거주가 조약규정 밖임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일본정부가 직접적으로 철수시켜야 할 책임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십수년간 일본인의 동도거주를 묵인해 온 것은 조선정부의 책임이라며 역으로 기정사실을 인정해 거주를 허용하자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울릉도의 분쟁을 싸고 양국정부의 응수가 반복됐다. 그런데 1901년 12월 하야시(林)공사는 분쟁의 빈발을 역으로 이용해 거주 일본인의 단속을 핑계로 동도에 일본인 경찰관을 주재시킬 것을 제안했다. 물론 조약상 으로는 일본인 경찰관이 동도에 상주하는 권리따위는 없지만 조선정부에 동도의 일본인을 철수시킬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인 경찰관을 파견함으로써 현지의 분쟁을 처리하자는 식이었다. 실로 도둑놈의 논리였지만 분쟁의 빈발로 골치를 앓고 있던 조선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일본측은 강제적으로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02년 3월 부산영사관의 일본인 경부·순사 4명이 동도에 파견돼 이후 상주하게 됐다. 그들 일본인 경찰관은 일본의 제법령에 준거해 자국인의 보호단속을 한다고 내세웠으나 무장한 그들이 침략의 현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분명했다. 경부의 단편적인 보고에 의하더라도 그들은 일본인의 재목밀수를 저지하려는 군수 沈興澤과 대립해 그것을 좌절시키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1904년에는 울릉도에 일본의 우편수취소가 설치됐고 또 동도와 일본 사카이(境)·하마다(浜田)간 항로까지 개설됐다.
위에서 보듯 러일전쟁 직전의 단계에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세력이 울릉도에서 이미 강고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 일본인 경찰관에 보호받는 다수의 일본인이 공공연히 불법으로 거주하며 재목을 밀수출하고 밀어업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울릉도는 조선의 변경이었고 바로 그때문에 본토보다 조기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을 침해받고 지배받기에 이르렀다.
제2절 일본인에 의한 죽도 어업
일찌기 17세기에 그랬듯이 일본인이 울릉도에 도항진출하게 되자 거기에 부수해 또다시 죽도=독도도 이용돼 나중에 영토편입의 근거가 됐다. 동도의 「실효적 경영」실태를 살펴 보자.
19세기말 이래 일본어민이 산잉(山陰)지방으로부터 울릉도에 통어하게 되자 도항의 도중 죽도=독도에 들러 약간의 조업을 하는 일이 생겼다. 이것은 당시 일본어민의 회상에 의해 확인된다. 오키(隱岐)섬 사이고초(西鄕町)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도 그런 통어자의 한사람이었다. 나카이는 러일전쟁 직전의 피혁이나 기름 앙등상황을 보고 죽도에 떼지어 사는 물개를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울릉도에 오가는 도중 여가를 이용한 어패류 채집과는 달리 1903년 동도에서 본격적인 물개잡이를 개시했다.
20세기 초두 죽도에서의 어업에 대해 일본해군수로부編「조선수로지」제2판(1907년)에 다음과 같이 돼 있다.
[죽도(리앙쿠르 열암)] 한인은 독도라고 쓰고 우리나라 어부는 리앙쿠르섬이라고 말함…메이지(明治) 37년 11월 군함「쓰시마(對馬)」가 이섬을 실사할때는 동쪽섬에 어부용의 갈대로 엮은 헛간이 있었으나 풍랑때문에 심히 파괴돼 있었다고 한다. 매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바다사자를 잡기 위해 울릉도에서 도래하는 자 수십명을 넘을 때도 있다. 그들은 섬위에 움막을 짓고 매번 약 10일간 임시로 거주한다고 한다.
[울릉도 일명 송도(다쥬레섬)]…중요한 어업은 전복 채취로 매년 다량의 마른 정복을 수출한다. 바다사자라는 바다짐승은 본도보다 동남방인 죽도에 서식해 메이지(明治) 37년경부터 본도민이 그것을 잡기 시작했다. 포회기는 4월부터 9월까지의 6개월간으로 현재 이에 종사하는 어선 3조(조당 평균 약5마리를 잡는다)가 있다. 또 우리나라 사람(일본인)이 채취하는 전복은 잠수기 2개및 기선 2척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채취량은 하루 평균 1,130근이라고 한다.
일찌기 이글 중의「울릉도에서 도래한 자」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를 놓고 양국정부간에 논쟁이 있었다. 이 짧은 문장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으니 그 기본인 사료를 보자. 위에 든 기초사료는 군함「新高」와 군함「쓰시마(對馬)의 보고이나 여기서는 전자가 보다 중요하다. 군함「新高」의 1904년 9월25일자 일지에 「송도에서 리앙쿠르드岩을 직접 본 자로부터 청취한 정보」라고 명기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리앙쿠르드岩] 한인은 독도라고 쓰고 우리나라(일본) 어부들은 줄여서「리앙쿠」라고 부른다. 두섬의 사이는 배를 묶는 간단한 시설도 있으나 작은배라면 땅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풍랑이 강하게 이섬에 몰아칠 때는 대개 송도로 순풍을 타고 피난간다고 한다. 송도로부터 건너와 해마사냥에 종사하는 자는 670석을 실을 수 있는 왜선을 사용한다. 섬위에 움막을 짓고 매회 약10일간 체재하며 커다란 소득을 올린다고 한다. 또 그 인원도 4, 50명을 넘을 때도 있으나 담수가 모자란다는 점은 알고 있어야 한다.
또 현재 하나의 사료로서 해군의 제보고와 1905년 8월 시마네(島根)현 지사에 의한 죽도 시찰보고 등에 의거해 씌어진 지리학자 다나카 아카마로(田中阿歌麻呂)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東島에는 갈대로 지은 움막이 있고 이 움막은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씨등 죽도어업회사의 소유로 돼 있다. (지난 38년 8월8일의 폭풍에 움막과 어선등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졌다) 이것은 해표사냥을 목적으로 여름철 이섬에 도래하는 어부들이 사용하는 것이나 지금은 현지히 파괴돼 겨우 흔적만 남아있는 정도다… 출어자는 울릉도를 근거지로 해 670석짜리 왜선을 사용해…사냥이 끝난 후, 또는 풍랑이 세 배를 묶어두기가 어려울 때는 곧바로 순풍을 타고 울릉도에 피난한다』 다나카의 논문에는 죽도의 영토 편입후의 기술도 포함돼 있다. 어쨌든 이상의 각사료를 함께 읽으면 1903년경부터 죽도에서 시작된 강치잡이를 담당한 중심이 일본인이었음이 분명해 진다. 다만 강치잡이에 조선인이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앞의「조선수로지」는 울릉도항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않은 채 죽도 출어자를 그저「도민」이라고 쓰고 있다. 가와카미(川上)도 일본인에 고용된 경우를 가정하긴 했지만 조선인이 죽도의 강치잡이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도 약간 포함돼 있었다해도 이시점에서 동도의 강치잡이에 종사했던 것은 일본어민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나카이 요사부로등 일본어민이 울릉도「도민」으로 씌어지게 된 사태이다. 그들은 울릉도에 주거를 갖고 거기를 근거지로 해 죽도에 출어, 폭풍이 몰아치면 곧바로 돌아오는 상태였다. 즉 그들 일 본어민의 죽도 어업은 앞에서 보았던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이라는 역사적 조건에 근거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울릉도의 조선인은 죽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가와카미의 집요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에서 죽도를 볼 수 있고 조선인이 죽도를 잘 알고 있었음은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앞의 군함「新高」의 보고에 의해 일본이 죽도를 영토편입하기 이전에 조선인은 독도라는 호칭을 사용했음도 명백하다.
가와카미는 일본이 죽도를 영토편입하기 전에는 울릉도의 조선인이 동도를 이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그들이 어업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가와카미는 주로 「한국수로지」에 의거해 울릉도의 조선인이 어업을 시작한 것은 일본인이 그들에 오징어잡이를 가르친 1907년 이후의 일로 했다. 또 전복을 채취한 것은 일본인 뿐으로 조선인은 거기에 종사한 자는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연유로 예를 들어 조선인이 죽도=독도의 존재를 아는 일이 있다해도 그들이 출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와카미의 이같은 주장은 그 자신이 이용했던 사료류에 의해 뒤집어 진다. 예를 들어 해군의 전게「환영수로지」제2권 제2판은 을릉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물산으로는 전복·농어등의 어류가 많고 야채도 있다…봄·여름철에는 조선인이 이 섬에 도래해 조선형배를 제조해 이를 이용해 물산을 본지에 보내고 다량의 갑각류를 수집해 말린다』 또 1899년 9월 울릉도에 파견됐던 외무성서기 이타카 유켄조(生高雄謙三)의 보고에 따르면「현재 토착민의 인구는 2천여명, 5백여세대로 농부와 어부가 각 절반이다.
또 선박을 만드는 대목들도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럽과 일본의 문헌에서 울릉도조선인의 어업, 특히 전복잡이에 대해 쓴 것은 많다. 이 모두를 무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가와카미는 당시 조선측의 항해기술의 유치함도 들고 있으나 울릉도와 죽도=독도보다 훨씬 먼거리인 울릉도와 조선본토 사이를 매년 많은 조선인이 왕래했다. 전복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조선어민이 보이는 곳에 있는 전복이 풍부한 섬에 출어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리고 앞의 일본어민의 죽도출어 회상과 마찬가지로 조선측에서도 울릉도의 노인이 스스로의 독도 출어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울릉도의 조선인 어업은 다수의 일본어미의 침입에 의해 급격히 위축됐다. 「한국수로지」중『전복은 일본인이 채취할 뿐 섬사람은 여기에 종사하는 자가 없다』라는 기술은 일본인의 잠수기와 같은 신식기술에 의한 조업에 따라 그때까지 전복잡이에 종사해 온 조선어민이 구축된 양상을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현지 울릉도의 어장조차 거의 일본인에 빼앗긴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에서의 어업권 다툼문제가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1903년부터의 죽도 강치잡이가 일본인주도로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 「실효적 경영」이란 개념을 형식적으로 적용하면 영토편입 직전 죽도에서의 일본측 우위는 명백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말하면 원래 제국주의란 영토를 넘어 경영을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두 일본인에 의한 죽도 경영이란 것은 정부의 침략정책을 배경으로 일본인이 울릉도에 진출하는 가운데 그 일부로서 생겨난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영토편입의 근거로서 정당화되려면 죽도=독도가 완전히 주인없는 땅인 동시에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한 조선 정부와 민중이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에 이론을 외치지 않은 경우에 한할 것이다. 전자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음은 앞장에서 분명해졌으니 후자에 대해서는 다음자에서 검토하자.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죽도에서의 강치잡이를 시작한 것은 1903년이었으나 이듬해에는 많은 경쟁자가 섬에 와 남획때문에 동도의 강치는 격감했다. 그래서 나카이는 경쟁자를 배제해 동도의 어장을 독점하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한 공작으로 도쿄로 향했던 것이다.
제3장 일본의 죽도 영토편입
제1절 일본정부의 군사적 요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는 전쟁수행의 전략적인 입장에서 앞의 나카이 요사부로의 개인적인 의도와는 전혀 별도로 죽도에 대한 새로운 이용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일본정부는 개전전에 이미「한국에 관해서는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실력에 의해 우리 권세 아래 둘 수 밖에 없다」고 각의 결정했고 또「한일의정서」에서도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시 수용한다」는 점을 조선정부가 인정토록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조약에도 근거하지 않은 군사지배를 조선전토에 전개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해군의 군사시설이 문제가 된다. 일본은 개전전에 국내에서 군용전신선이나 망루 정비를 추진했으며 개전과 함께 그런 시설을 조선에도 확대하게 됐다.
1904년 6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함대가 대한해협에 출현해 일본 수송선을 차례차례 침몰시키면서 이 해역의 긴장이 일거에 고조됐다. 일본해군은 규슈(九州) 추고쿠(中國)지방의 연안각지와 병행해 조선동남부의 죽변만, 울산, 거문도, 제주도 등에 망루를 건설하고 그것들을 해저전신망으로 연결했다.
조선내의 망루는 약20개에 이르러 실질적인 군사점령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조치의 일환으로서 7월5일 울릉도에 망루를 건설해 조선본토의 일본해군 정박지 죽변만과의 사이를 군용해저 전신선으로 연결키로 결정됐다. 울릉도의 망루는 동남부(송도동망루, 6인 배치)와 서남부(송도서망루, 6인 배치) 2개소로 8월3일에 건설착공, 9월2일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해전전신선은 9월8일부터 블라디보스톡 함대의 위협을 받아가며 부설공사에 들어가 같은달 25일에 완성했다. 이에 따라 울릉도의 망루는 조선본토를 경유해 사세보(佐世保)의 해군鎭守府와 직접교신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 울릉도의 일본군 주류는 이미 이전부터 일본인이 우위를 점했던 동도에서 조선측의 주장이 보다 심하게 침해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해군은 이 울릉도에서 일련의 공사와 보급활동을 하는 가운데, 또 이 해역에서의 초계활동에 의해 인접한 죽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됐다. 즉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정부에 공작을 하기 전에 해군은 이미 죽도의 이용가치에 대해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공적으로 동도의 영토편입를 결정하기 이전에 해군은 행동에 옮겼다. 1904년 11월13일 해군군령부는 군함「쓰시마」에 대해 「리앙쿠르드섬은 전신소(무선전신소)설치에 적절한지 여부를 시찰할 것」을 명했다. 즉 울릉도와 해저전신선으로 연결할 망루건설의 가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군함 쓰시마는 같은달 20일 리앙쿠르섬에 들렀고 이야말로 일본정부에 의한 최초의 죽도=독도 조사였다. 그리고 쓰시마의 선장은 지형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동도라면 건조물의 구축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했다. 즉 일본정부가 이시기 죽도에 대해 품고 있던 관심은 정확히 그 군사적 이용가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죽도에서의 겨울철 건설공사는 절대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착공되지 못한 채 발틱함대와의 결전을 맞게 됐다. 그런데 그 동해 해전에서 울릉도와 죽도 주변해역이 주전장의 하나가 됨으로써 죽도의 군사적 가치가 새롭게 높이 평가됐다. 해군은 해전직후인 5월30일에 계획을 세워 6월13일에 군함「橋立」을 파견해 보다 상세한 조사를 행했다. 게다가 해군은 6월24일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동해 동수역의 종합시설계획을 수립했다. 그 계획이란「우선 울릉도 북부에 또하나의 대규모 망루(송도 북망루, 9명)와 무선전신소를 건설하고 죽도에 문제의 망루(4명)을 건설한다. 그리고 두 섬의 망루를 해저전신선으로 연결하고 그 전신선을 오키(隱岐)의 망루까지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국경 따위에 아랑곳 없는 군용시설이다. 울릉도의 신망루는 7월14일에 기공해 8월16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죽도의 망루은 7월25일 착공해 8월19일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해저전신선은 9월 對러 강화조약의 체결로 당초계획이 변경돼 죽도와 오키(隱岐)사이가 아니라 죽도와 마쓰에(松江) 사이에 부설하게 됐다. 이 공사는 10월말에 개시돼 울릉도에서 죽도를 거쳐 11월9일 마스에와의 연결을 완료했다. 즉 1905년 조선본토(죽변)에서 울릉도 죽도 마쓰에에 달하는 일련의 군용통신선 체계가 완성됐다.
이상을 요약하면 일본정부에 있어서 동해의 죽도는 군사적인 이용대상일 뿐이었다.
또 그것은 당시 조선각지에서 행해진 군사적 점령과 밀접·불가분의 것이기도 했다.
제2절 일본정부 관료의 판단
1904년 초가을 나카이 요사부로는 죽도에서의 어업권 독점을 위한 대정부 공작을 위해 도쿄에 올라왔다. 당시 나카이가 이 섬의 귀속을 어떻게 인식하고있었던가는 그가 현지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시마네(島根)교육회편「시마네현지」(1923년)는 죽도항에 「37년 각방면에서 경쟁적인 남획이 있어 여러가지 폐해가 다투어 발생했다. 이때 나카이는 이 섬을 조선영토라고 생각해 상경해 농상무성에 말해 동정부에 불하 청원을 하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일양국간 논쟁에서 일본정부는 이 사료의 기술을 편자의 오해였다고 정리했다. 과연 그럴까.
나카이 자신이 죽도가 영토 편입된 경과에 대해 언급한 사료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1906년 3월25일 오쿠하라 도미이치(奧原福市)가 나카이로부터 청취한 기록인「죽도와 울릉도」가운데「나카이씨의 얘기」라고 명기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카이 요사부로씨는 리앙쿠르섬이 조선영토라고 믿어 동국정부에 불하를 청원할 결심을 해 37년 어기가 끝난 후 곧바로 상경해 오키출신인 농상무성 수산국 직원 후지타 노리타로(藤田勘太郞)씨에 부탁해 마키(牧)수산국장을 만나 진술한 일이 있다. 마키국장은 이를 도와 해군수로부에 문의해 리앙쿠르섬의 소속을 확인했다.
나카이씨는 곧바로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수로부장을 만나 동도의 소속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한일양국으로부터의 거리를 측정하면 일본쪽이 10리 가깝고 더욱이 일본인으로서 동도경영에 종사하는 자가 있는 이상 일본령으로 편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카이씨는 이에 따라 뜻을 정해 리앙쿠르섬의 영토편입 및 불하청원을 내무 외무 농상무 3대신에 제출했다.…그후 나카이씨는 내부성 지방국에 출두해 이노우에(井上)서기관에 사정을 진술하고 다시 동향인 구와타(桑田)법학박사 (후에 귀족원의원을 지냄)의 소개에 따라 외무성에 출두, 야마자(山座)정무국장을 면회해 이를 시도했다. 구와타 박사도 크게 힘을 쓴 바 있어 시마네현청의 의견에 의거하게 됐다. 시마네현청에서는 오키(隱岐)의 의견을 근거로 상신한 결과 각의에서 이윽고 영토편입을 결정해 리앙쿠르섬을 죽도라고 명명하게 됐다」 이 사료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해 진다. 나카이는 죽도를 명확히 조선령이라고 믿고 있었고 조선정부에 동섬의 임대를 청원하려고 했다. 또 이를 무주지의 영토편입 청원으로 변경한 것은 바로 일본정부였다.
또 하나의 사료는 나카이가 오키島廳에 제출한 이력서이다. 그 부속서류에 죽도경영의 개요로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본도인 울릉도를 합쳐 한국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어 장차 통감부에 출두해 도모할 일이 있어 상경해 여러가지를 획책하던 가운데 당시 수산국장 마키 보쿠마사(牧朴眞)씨의 주의에 의해 반드시 한국령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심이 들어 조사를 위해 여러가지로 분주한 끝에 당시의 수로부장 기모즈케(肝付)장군의 단정에 따라 이 섬이 완전히 무소속임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경영상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진술해 본도를 우리나라에 편입하고 다시 빌려달라는 것을 내무 외무 농상무 3대신에 청원하는 내무성에 제출했다. 내무성당국자는 당시(러일전쟁중) 한국령일 의심이 있는 황량한 일개 불모의 암초를 차지하는 것은 지켜보고 있는 제외국에 우리나라가 한국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것을 의심케 할 수 있어 이익이 극히 작은데 비해 사태해결이 용이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진정해도 기각되게 돼 있어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무성으로 달려가 당시 정무국장이던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郞)씨에 크게 주장하게 됐다. 그는 당시야말로 영토편입을 서두를 필요가 있으며 망루를 세워 무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함감시상 극히 유리할 뿐만 아니라 특히 외교상 내무와 같은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서둘러 청원서를 본성에 회부하라고 의기헌앙했다. 이같이 해 본도는 결국 본방영토에 편입됐다」 이 사료는 죽도의 영토편입 후 수년이 지난 때의 것으로 조선정부라고 해야할 곳을 통감부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카이 본인이 쓴 것이기 때문에 일본정부내의 대응이 구체적으로 씌어져 있다. 앞의 사료와 더불어 볼 때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죽도의 영토편입에 내무성 관료가 명확히 반대하고 있었던 점이다. 즉 앞에 밝혔듯 1877년 내무성은 죽도=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령으로 확정하고 있었고 그 기록과 지식이 동성의 관료에 계승되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이 조선침략을 개시한 이 시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이섬을 무주물로 단정하는 데는 주저하고 있었다.
둘째 관련 내무관료의 망설임을 무릅쓰고 영토편입으로 몰고 간 주역은 마키 보쿠마사(牧朴眞) 기모즈케 가네유키(肝付兼行)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였다.
이 세사람의 궤적은 대단히 흥미롭다. 마키는 이미 밝혔듯 오랫동안 농상무성 수산국장으로서 수산행정의 최고책임자였고 정체된 일본어업을 도해어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진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어민이 조선연안에 침입해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촉진하는 행정시책이었다. 기모즈케는 일관되게 해군수로부에 적을 두고 일본 수로행정을 확립시킨 전문관료였다. 수로부란 평시에는 일반수로정보의 정비에 종사하지만 일단 전시가 되면 직접 군사행동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략기관이 된다. 러일전쟁 당시 기모즈케는 수로부장으로서 조선·만주연안에서의 군략수행을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는 玄洋社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성내에서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과 나란히 대외강경·대외진출 정책의 추진자로서 알려져 있었다. 또 국장 취임전 오랫동안 조선의 영사·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의 이권획득을 위한 갖가지 획책에 바빴던 인물이다. 이들 관료가 강행한 영토편입에서 조선측의 주권이나 주장등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셋째 영토편입의 이론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1904년 시점에서 죽도가 완전히 무소속이라는 기모즈케의 주장은 앞에 밝혔듯 해군수로부의 종래 인식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이가 전년부터 동도에서 어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들어 「무주지 선점」이론의 적용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이론에 지나지 않고 일본정부를 진정으로 떠민 것은 야마자의 발언에도 있듯 러시아함대에 대항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는 군사이론이었다. 즉 죽도의 영토편입이란 동시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해 조선각지에서 그 주권을 침해하며 행한 군사조치와 같은 유형이었다. 다만 그것이 어장독점을 노렸던 한 어민의 움직임을 이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영토점령에 그치지 않고 영토편입의 형식을 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전토의 군사점령이「조선합병」의 전제였다고 한다면 죽도의 영토편입은 그 작은 전주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나카이 요사부로는 앞의 세 사람의 지시에 의해 1904년 9월29일 「리앙쿠르 영토편입및 임대청원」을 내무·외무·농상무 3성에 제출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형태로 1905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이섬의 영토편입을 각의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제3절 일본의 공시와 조선측의 대응
1905년 2월22일 시마네현은 현고시 40호로 리앙쿠르섬을 죽도라고 명명하고 동도를 오키(隱岐)島司(도사)의 소관으로 한다고 공시했다. ***일본정부는 이 결정을 관보에 게재해 정부차원에서 공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외국이 관계를 맺고 있는 섬에 대해 영토주권을 확립한 사례로서는 1876년 의 오가사하라시마(小笠原島)의 경우가 있다. 그때 일본정부는 동도에 곤계가 깊은 영국·미국과 몇차례나 절충해 양해를 얻고서 결정했다. 게다가 또 구미12개국에 대해 이 섬을 일본의 관할하에 둔다고 통고했다. 죽도의 영토편입 때는 일본정부 내에 동도가 조선령이 아닐까하는 견해조차 있었지만 조선정부에 조회는 커녕 통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일본정부는 조선을 대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조선측이 일본에 의한 죽도의 영토편입에 대해 안 것은 이듬해인 1906년 3월에 들어서였다. 시마네현 사무관 가미니시 유타로(神西由太郞) 일행은 죽도시찰조사에 나섰다가 귀로에 울을도에 기항했다. 그리고 3월28일 가미니시 등이 동도의 군수 沈興澤을 방문했을 때 죽도 영토편입의 건을 알렸다. 이 뜻밖의 얘기에 沈군수는 이튿날 곧바로 중앙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냈다.
「우리나라 소속 독도가 본부 바깥바다 백여리에 있었으나 이달 초사일 신시께 수송선 한척이 와서 섬내 도동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일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와 전하기를 독도가 이제는 일본영지가 돼 시찰차 들렀다고 합니다. 이 일행은 일본 시마네현 오키島司 히가시부미 다스오요(東文輔及), 사무관 가미니시 유타로, 세무감독국장 요시다 히라사토(吉田平吾), 분서장 경부 가게야마 하치로(影山八郞), 순사 1명, 회의원 1명, 의사기사 각1명, 기타 수행원 10여명등으로 먼저 가구수와 인구, 토지, 생산의 다소 묻고 다음으로 인원과 경비, 그리고 몇가지 제반사무에 대해 조사하는 모양으로 기록했기에 알려드리오니 살펴 헤아리기를 엎드려 빕니다 - 光武10년 병오일 음3월5일」 가미니시등의 울릉도 방문은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이 사료에 대해 전혀 검토된 바 없다. 일본정부는 이 문서의 존재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해왔다. 그 근거로서 「가미니시는 죽도에서 잡은 강치 한마리를 군수에 보냈으나 군수는 이에 대해 먼길의 노고를 치사하고 선물에 대해서는 사양했다. 만약 군수가 당시 죽도를 울릉도에 소속하는 섬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이런 응접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가 처해있던 혹독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앞에 밝혔듯 이미 동도에는 일본의 군인·경찰관이 상주해 군청이 위치한 도동을 중심으로 3백인이상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가미니시 등이 외국령인 울릉도의 가구수,인구, 지세등을 마음껏 조사했던 데서도 당시의 일방적인 역관계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沈군수가 가미니시등에 영토문제를 두고 정면으로부터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같은 일본인들의 압력의 결과일 뿐이었다. 응대가 정중했다는 것이 가미니시의 발언을 승인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일본정부의 이 사료부정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 가와카미의 저작에 있어서 는 가미니시등의 군수방문에 대해 자세히 쓰면서도 군수의 보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료가 한국에서는 연구에 널리 이용되고 있고 또 극히 중요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가와카미의 이같은 침묵은 의도적인 사료은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沈군수의 보고는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자국령이라고 통고한 일본관리의 의외의 동정을 보고해 중앙정부의 지시를 구하고 있다. 일찌기 우산도라고 불렸던 섬은 여기서는 독도라고 불리고 있다. 독도라는 호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앞에 보았듯 일본의 죽도영토 편입이전에 이미 조선인이 동섬을 독도라고 부르고 그렇게 쓰고 있었다.
이 沈군수의 보고는 강원도 관찰사에 도착해 관찰사서리 李明來는 다시 이것을 중앙의 참정대신 朴濟純에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고를 받은 朴濟純은 독도가 일본령이 됐다는 얘기는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독도에 관한 사정을 상세히 조사해 일본이 독도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사실을 기재한 조선의 행정문서는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沈군수의 보고가 불러 일으킨 커다란 파문은 당시의 신문에 의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신문「황성신문」은 5월9일「울릉군수 內部에 보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내용은 울릉군수 심흥택씨가 내부(內部-내무부 상당)에 보고한 것을 계기로 앞의 가미니시 일행의 얘기를 적었다. 그리고 이 기사의 문장은 앞의 沈군수의 보고문과 거의 완전히 똑같아 정부의 내부로부터의 취재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런 점에서 앞의 沈군수의 보고가 확실히 존재했다는 사실이 의문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 진다. 당시 또다른 전국지였던 대한매일신보에도 이 사건은 취급됐다. 5월1일자 이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울릉군수 沈興澤씨가 내부에 보고하기를 일본관원일행이 본군에 와 본군 소재 독도는 일본의 속지라고 자칭하고 지리와 가구수등을 일일이 기록했는데 내부에서 지령하기를 유람도중에 지리나 가구수를 조사하는 사람이 혹 있더라도 그리 괴이한 일은 아니나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는 것은 도저히 이치에 닿지 않으니 이번에 보고한 바가 대단히 놀랄일이라고 했다」 이 기사의 전반은 沈군수의 보고의 요약에 지나지 않으나 후반에서는 중앙정부의 대응을 알 수 있는 점이 귀중하다. 즉 조선의 중앙정부도 처음부터 독도를 자국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일본관리일행의 움직임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이런 신문보도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의한 죽도=독도 영토편입의 움직임을 알고 또한 그것을 자국영토의 침략이라고 받아 들였음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당시 전라도 구례에 사는 黃玹은 그의 수기「梅天野錄」에서 조선령인 독도를 일본인이 무리하게 자국령이라고 거짓으로 칭하고 있다고 썼다. 이상을 요약하면 조선 중앙정부도 현지의 울릉군수도 또 민간인들도 일본의 죽도=독도 영토편입을 그 시점에 이미 침략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일본은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으로 조선의 식민지지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정부내에서 죽도=독도 문제 대응이 이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즉 나라 전체가 빼앗겨 소멸돼 가는 가운데 일개 바위섬의 영유문제 따위는 날아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죽도영토편입 조치에 대해 당시의 조선민복이 명확히 이론을 제기했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그 역사적 평가상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맺음말
1905년 일본정부는 행정조치에 의해 죽도=독도를 자국영토에 편입했다. 그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에는 두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가와카미를 대표로 하는 다수의견은 죽도는 근세초 이래 일관되게 일본령이었기 때문에 1905년의 조치는 그저 그것을 재확인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하나 소수의견은 1905년 시점에서 죽도는 완전히 무주지였기 때문에 그것을 선점했다고 하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1877년 태정관이 정식으로 동도를 판도외라고 단정한 것 등 본고 전체에서 그것이 허구임을 밝혔다. 후자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든 사실의 반만으로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선은 15세기부터 동도에 영유의식을 갖고 있었고 또 1905년 일본의 조치를 맞아 그것을 알자마자 곧 반대의사를 보였다. 분쟁은 1952년이 아니라 바로 영토편입 시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다수의견·소수의견은 1905년의 영토편입조치를 동시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는 점에서는 공통돼 있다. 그러나 죽도영토편입의 근거가 된 동도에서의 어업이란 일본인의 울릉도 진출과 불가분이다. 또 일본정부가 동도편입을 서둘렀던 것은 울릉도를 지배한데 이어 동도로부터 전신선을 끌어 죽도망루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시기의 조선민족은 일본의 죽도영토편입을 조선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주권침해·침략 과 같은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영토문제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철저하게 역사적인 시점으로부터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죽도=독도의 경우 그 역사적이란 말의 범주에는 동도의 영토편입에 이른 직접적인 경과와 함께 1905년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이 어떤 관계에 있었던가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스카 : 시마네현아 고맙다
번호:3235 | 추천:44 | 조회:17756 | 2005-03-17
나는 오랬동안 독도문제, 왜곡교과서 문제에 나름대로 관여해왔다.
그러면서 느낀것이 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안타까움이었다.
독도문제만 하더라도,
일본의 지리교과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 발행되는 어떤 지도이든지 간에
독도를 한국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국민들은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일본인들에게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것을,
아니 다께시마가 아닌 독도라는 이름으로 한국이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국내에서는 독도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야단 법석을
떨지만, 정작일본의 매스컴에서는 이를 보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정부나 사회단체들도 이 문제를 일본인 들에게 알리기위한 체계적인 노력도 기울인 적이 없다. 우리 같은 민간인들이 생업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시마네현에서 독도 문제를 공론화 한답시고, 조례를 제정하는 바람에 일본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국민들의 분노도 분노로 끝나지 않고 향후의 적극적인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게 되어, 정부도 마지못해 여러 대책을 내놓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정부는 왜 이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독도의 소유권이 불명확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독도학회 회장으로 있는 신용하교수는,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근거의 부당성을 일일이 지적하고, 우리의 영토임을 명백히하는 여러논문과 저서등의 출판으로, 일본의 양심있는 관계학자들도 이에 대부분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시마네현과 일본의 우익들이 이렇게 자신 있게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근 현대사의 발전과정에서 두번의 큰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초기에 이루어진 한일 수교회담에서, 조국의 경제 발전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식민지배 보상금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일본이 거론한 독도문제를 분명하게 못을 박지 못하고 못들은 척 협상에 임한 까닭이다. 왜냐하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받아내어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번째는, IMF사태가 불거진 이후에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일본으로 부터 외환자금 300억불을 긴급히 들여오는 과정에서, 독도주변 12해리밖을 어업공동수역으로 양보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즉 한국이 어려울때 일본은 돈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시켜 왔던 것이다.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협상이 추후에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나 국가 경제를 파탄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시마네현과 일본우익들이 독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고, 정부로하여금 미적거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는 독도문제로 부터 자유로운 대통령으로 바꾸었고, 우리의 외환 보유고는 1400억불을 넘어서서 세계에서 3번째의 보유국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일본과 미국이 북핵문제 때문에 우리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고, 영토문제에 있어서는 중국과 러시아도 우리와 똑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독도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여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공포를 한다하더라도 하등의 지장이없다. 그야말로 좋은 찬스를 맞이하게 된 것인데,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우익과 시마네현 당사자들이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익들은 국제사법재판소 운운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의 사람들은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국제 사법재판소에 재소를 하게 되면 양쪽의 당사국들은 결론이 날때까지 문제의 영토에서 물러나야한다. 그런데 이런 영토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도 없기 때문에 백년이상이 걸려도 해걸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일본의 속셈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독도를 재배하고 있는 한국을 일단은 독도로부터 떼어내려는 속셈인 것이다. 그리고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별의별 이유를 다들어 독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려 할 것이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열강들이 일본편에 서있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독도문제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사과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펌글>
참고로, 저는 대학 졸업 논문때, 독도관련으로 논문을 제출할 정도로
독도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서,
님처럼 독도에 관한 애정은 있으면서도
한국의 독도정책에 대한 이해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좀 답답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독도정책이 얼마나 유효하고,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친구와 독도에 관하여 얘기를 많이 나누는데
그 친구는 오히려 한국의 독도정책을 "지나칠 정도로 교활하다"고 합니다.
자, 이제 하나씩 풀어가 봅시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정말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방법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걍, 무조건 우리 거라고 바득바득 우기고,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일본에 대해 엄포를 해대면 될거라고 보십니까?
설마, 우리나라가 일본하고 전쟁을, 그것도 해상전을 벌여서 이길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정말로 독도를 "공인된 우리 땅"으로 만들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해서 이기는 방법 뿐입니다.
그리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할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역사적인 문제도, 힘의 강약도 아닌
누가 얼마나 오랜기간 동안 "실소유"해왔나 하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50년이나 독도를 실소유해 오고 있고,
사법재판소에 상정되기 전에 최대한 오랫동안 "분쟁지역"이 아닌 "실소유영토"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일본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이를 이슈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한국정부가 일본의 도발에 발끈해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버리면
50년의 공든 탑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되는 걸 늦추어서
상정시의 "실소유기간"을 늘려 놓는게 유리한 겁니다.
실소유 100년이면 100% 우리땅 된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한국외교부의 정책은 박정희 이전부터의 일관된 정책으로
국제적으로 약소국인 한국이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안이었다고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또 하나, 여러분이 오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해 드릴까 합니다.
독도에 해병대가 아닌 전경이 지키고 있다는 것.....몇몇 분들이 오해하고들 계시는데.
일본인들은 오히려 이걸 못마땅해 합니다.
경찰이 지킨다는 것은 "外治"가 아닌 "內治"를 뜻합니다.
세상 어느나라에서 자기 땅이 아닌곳에 군인이 아닌 경찰을 보낸답디까.......
참고로, 울나라 남해나 서해에 있는 작은 섬들에도 대부분 군인은 없지만 경찰이 있습니다.
국경지대니까 해병대가 가야 한다고들 하시는데,
적국과의 경계선, 즉, 백령도 같은 곳이 아닌이상 경계지역의 섬이라도 경찰이 지킵니다.
즉, 경찰이 지킨다는 것은 분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한국땅"이라는 의미도 있는 겁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화가 날 정도로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안타까워서 설명해 드립니다.
참고로, 한국정부에서 저처럼 자세한 설명을 회피하는 것도 사실은 "이슈화"를 최대한 막아보려는 뜻입니다.
이런 숨은 뜻도 모른 채 오히려 일본인들을 위한 일인지도 모르고 자꾸 "이슈화"를 시도하려는 분들....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이 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되면 이길 확률 매우 낮습니다.
현명한 장수는 자기가 유리한 때와 장소를 골라서 전쟁을 치르는 법입니다.
일본이 현재 바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독도가 "영토분쟁" 지역으로 세계적을 알려지길 바랍니다.
그래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소송을 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 스스로 독도가 일본땅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영토분쟁 지역이라고 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일본은 착실하게 돕고있다는 뜻이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하면 당연히 우리나라가 이길까요??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15명의 판사 중 한명이 일본인이고,
일본은 그곳의 운영비의 대부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비라면 전세계에서 으뜸인 나라입니다..
진실이 대한민국에 있다할지라도 그 재판의 결과는 예측할수 없답니다..
정부가 독도문제로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요..
물론 핑계겠지만..
참고로 하나더 말씀드릴까요??
만약 일본이 독도를 합법적으로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고 나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불법 점령했던 수많은 섬들이
독도와 같은 이유로 합법적으로 일본의 영토에 편입이 된답니다...
일본이 고작 동해안의 어장을 바라보고 욕을먹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앞으로도 일본은 독도망언을 계속 할것입니다.
독도만 빼았으면 태평양 연안의 많은 섬들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냉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정이 앞서서 잘못된 정보를 누설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독도는 현재도 한국의 영토이고 앞으로도 한국의 영토입니다!!
아직도 100년만 기다리자며 조용한 외교를 강조하는 펌글이
돌아다녀서 안타까운 마음에 글 올립니다.
그글 좀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군요. 펌글 돌아당기는거
너무 많이 봐서. 내용도 어이없고.
일단 그 내용의 어이없음을 몇가지로 정리해 말씀드리죠.
1. 100년 실소유 주장설
일단 100년을 실소유를 하면 국제적으로 인정된다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많은 모순이 숨어있습니다.
그 100년이란것은 늘리면 늘리고 줄이면 줄이기 나름이죠.
우리가 아무리 100년됬다. 이제 우리땅이다 주장해봐도
일본이 게네 나름대로의 날조된 역사를 적용하면 100년에서
금방 몇십년이 줄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가서 또 게네들이
완전히 동의할때까지 몇십년 분삭히며 기다리실 건가요?
2. 역사는 언제나 강자의 편이다.
100년 실소유라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국제법 규정이죠. 하지만 그 국제법을
누가 만든다고 보시나요. 일본이 UN상임이사국이 되려 기를
쓰는게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시죠? 국제적으로 그만큼의 파워를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법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것이 아닙니다. 법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죠. 100년 실소유? 한마디로 우스운 말씀입니다.
3. 조용한 외교가 최선의 전략은 절대 아니다.
그동안 조용한 외교 덕에 무엇을 얻었나요? 아직도 100년 년수
세고 계신 분 있나요? 부질 없는 짖 그만 하십시오.
역사는 파워게임 입니다. 지금 미국이 세계를 리드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라는 땅도 엄밀히 말하면
인디안들의 땅입니다. 미국인들이 불법으로 점유하고 빼앗은 거죠.
그렇습니다. 힘이 없으면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일본은 국제적으로 엄청난 양의 역사수집과 날조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에 다케시마 라는 이름으로 일본섬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이미 일본해, 다케시마 라고 표기되고 있는
세계지도가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손 놓고
그래 해봐라. 100년만 지나자. 하고 있는 꼴이란.. 참 한심하기
그지 없으며 우물안 개구리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런글 퍼 올리지 마십시오.
조용한 외교가 최선은 아닙니다. 우리 영토주권을 수호 하려면
그에 따른 대책이 필요하고 구체적 대안을 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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