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Ⅰ. 원의 내정 간섭
1. 일본 원정 : 정동행성 (원정 준비기관) ➝ 태풍으로 실패
2. 영토의 상실
(1) 쌍성총관부 설치 (1258~1356) : 원 고종 말년 화주(양흥)에 설치 : 철북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
(2) 동녕부 설치 (1270~1290) : 자비령 이북의 땅 차지, 서경에 동녕부 설치
(3) 탐라총관부 설치 (1273~1301) : 목마장 경영
3. 영토의 수복
1) 충렬왕 : 동녕부, 탐라총관부
2) 공민왕 : 쌍성총관부
4. 관제의 개편
(1) 부마국 : 원의 공주와 결혼,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다.
cf. 원의 공주가 데려온 시중 ‘겁령구’의 횡포가 심함
(2) 관제의 격하
1) 2성인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2) 6부를 4사로 통합 → 전리사(이부·예부), 판도사(호부), 군부사(병부), 전법사(형부) / 공부는 폐지
3) 도병마사 ➝ 도평의사사(독자적, 최고 상설기구)
4) 중추원 ➝ 말직사
(3) 호칭 격하
짐 ➝ 고 / 폐하 ➝ 전하 / 태자 ➝ 세자 / ~조·종 ➝ ~왕 / 선지 ➝ 왕지 / 상서 ➝ 판서 /
시랑 ➝ 총랑 / 사 ➝ 유 / 주 ➝ 정/
5. 원의 내정 간섭과 수탈
(1) 원의 내정 간섭 제도
1) 심양왕 제도 : 남만주 심양 일대에 포로, 유민 고려민 통치하기 위해 설치
2) 독로화 제도 : 고려의 세자가 북경에 인질 후 돌아와 왕이 되었다.
(2) 원의 내정 간섭 기구
1) 정동행성 : 일 원정 준비 기구 ➝ 연락소, 고려 내정 감독의 성격
cf) 몽고인으로 임명되어야 할 평장정사, 우좌승, 참지정사는 비워두는게 보통이었다.
2) 순마소 : 반원 인사 색출, 개경 치안 담당 = 감찰기관
3) 만호부 : 5개의 만호부, 천호부 등 십진법에 따른 군사 편제가 영향력을 행사 (국방, 치안)
4) 다루가치 : 감찰관 파견, 내정간섭, 공물 징수 감독
(3)몽골의 수탈
1) 결혼도감 : 처녀들 뽑아감 (원종 1272) -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 함 (cf. 조혼이 유행)
2) 응방 : 매 징벌 ➝ 해동청 사육
3) 자주성의 손상, 통치 질서의 와해
(4) 지방제도
1) 5도 - 안렴사 파견 → cf. 려말 도관찰 출척사로 변경, 상설관청 - 경락사 설치
2) 양계 - 병마사 → 도절제사 →도관찰출척사 (‘도’의 성격으로 변화)
6.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1) 친원 세력의 대두
(2) 풍속의 교류
1) 몽골풍 : 변발, 복장 등
2) 고려양 : 음악, 예절, 무용, 병, 고려아청, 고려만두 등이 원에 전해짐
(3) 만권당 (충선왕) : 원나라에 학문연구소를 설치 (조맹부, 이제현) ➝ 문화, 학문의 교류
cf) 조맹부 - 송설체로 유명
(4) 권문세족의 성장
Ⅱ. 원 간섭기 개혁정치
1. 원 간섭기 고려의 상황 : 권문세족의 대두(부원세력), 사회 모순의 심화
2. 원 간섭기 개혁 정치
(1) 충선왕, 충목왕 때부터 시도
-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을 상대로 개혁을 추진할 만한 세력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실패
(2) 충렬왕의 개혁 정치
1) 전민변정(正)도감 : 권문세족의 농장을 혁파
2) 홍자번의 편민 18사 건의 : 국가 재정난, 민생 문제 해결 (無 - 토지개혁안)
3) 세자의 대리정치
4) 필자적(비칙치)의 설치
5) ‘무비살해사건’으로 퇴위
(3) 충선왕의 개혁정치
1) 사림원 (예문관)설치 : 정방 폐지시도, 왕명 출납 담당, 고문기능
2) 정방폐지 → 한림원으로 이관
3) ‘조비무고사건’으로 폐위 → 충렬왕 재즉위후 1308년에 충선왕 재위
4) 전지시행
5) 만권당 설치
6) 재정 개혁 : 의염창 (소금 전매제) / 전농사 설치 (농장, 노비 조사)
(4) 충숙왕
1) 제폐사목소 설치 - 시폐 개혁 위한 교서 반포 → 찰리변위도감으로 명칭 변경 했으나 실패
2) 입성책동 - 고려를 원의 한 성으로 하려는 것 → 충렬왕 시기의 ‘세조구제’를 내세워 저지
* 세조구제 - 양국관계 변경말자 (원 세조)
(5) 충혜왕 (1344) - 편민조례추변도감 설치
(6) 충목왕의 개혁정치
1) 정치도감 : 토지 노비를 본인에게 돌려줌
2) 권문세족의 견제
(7) 실패 : 원의 간섭
3. 공민왕의 개혁 정치
(1) 14세기 중반 : 원 명 교체기
(2) 반원 정칙
1) 친원파 숙청 - 기철, 노책, 권겸 주살
2) 정동행성이문소 폐지
3) 관제 복구 (문종 때로)
4) 몽골풍 폐지
5) 쌍성총관부 회복 - 철령 이북
6) 요동 수복 정책 : 지용수, 이성계(요양 점령)
7) 기자사 수축 - 자주의식
(3) 왕권 강화책
1) 권문세족을 견제
2) 정방 폐지 : 신진사대부의 등장을 활성화 → 왕의 인사권 실시 (인사권을 전리사와 군분사로 이전)
3) 교육·과거제도 정비 : 성균관
4) 전민변정(整)도감 설치 : 승려 신돈을 등용 ➝ 노비해방, 토지 돌려줌 ➝ 국가 재정 수입 기반 확대
5) 성균관 강화 - 신진사대부 등용
4. 군제 개편
(1) 중앙
1) ‘충용위’설치
2) 8위제 복설
3) 방리군, 한산군(전함관, 참설관 주축) - 신설
(2) 지방군
1) 진수군 - 5도 중심 / 지휘관 - 도순문사
2) 만호부, 익군 - 양계
(3) 특수군
1) 연호군 - 왜구
2) 수군
5. 공민왕의 개혁 실패
1) 원의 간섭
2) 권문세족의 반발 : 신동 제거, 공민왕 시해
3) 신진 사대부 세력의 미약 → 근본적 실폐이유 (주체 세력 미약)
4) 홍건적, 왜구의 침입
Ⅲ.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1. 홍건적 격퇴
(1) 홍건적 : 원 말기 백련교도 중심 한족의 농민 반란군 → 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
(2) 제1차 침입 (공민왕 8년, 1359) : 모거경 침입 ➝ 이승경, 이방실이 격퇴
(2) 제2차 침입 (공민왕 10년, 1361) : 개경 함락 ➝ 정세운, 안우, 이방실, 이성계 격퇴
2. 왜구의 침략
(1) 14세기 중반부터 본격적, 쓰시마, 규수 지역
(2) 무력 토벌 해결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
(3) 왜구의 격퇴
1) 최영(우왕 2년) : 부여의 홍산
2) 최무선 (우왕 6년) : 진포에서 화포 이용 (최초 화포사용) -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
3) 이성계 (우왕 6년) : 남원의 황산 (아지발도 사실)
4) 정지 (우왕 9년) : 남해의 관음포
5) 박위 (창왕 1년) : 쓰시마섬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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