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여행, 식당 ♠/대전 충청 강원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처음 도착한 나바위 성지, 전북 익산 나바위성지 (Nabawi Catholic sacred place in Iksan-city, 羅岩聖地, 華山天主敎聖地) (망금정, 김대건 신부 순교비, 나암창)

by 소이나는 2014. 6. 8.
반응형











나바위 성지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처음 도착한 나바위 성지, 전북 익산 나바위성지 

Nabawi Catholic  sacred place in Iksan-city, 羅岩聖地, 華山天主敎聖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나바위 성당으로 유명한 나바위 성지는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되어 있는 곳이다.



동서양의 조화가 아름다웠던 나바위 성당에서 천천히 왼쪽의 내리막 길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지나면 김대건 신부가 도착한 곳이 나오고, 

다시 화산을 오르면 김대건 신부의 순례비를 살펴 볼 수 있다. 많은 천주교인들이 성지인 나바위 성지를 찾아 오고 있다.




근대 초기이자 조선 말기에는 역관들이 들어오며 함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학문, 즉 서학이 동양에 전해졌다.

서학은 천주교 및 서양학술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좁은 의미로 천주교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당시에는 종교가 아닌 학문의 일종으로 유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는 위에서 처럼 외국의 신부들이 조선으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청나라 등을 다녀오며 들여온 것이다.

조선이 처음 서양에 관한 지식을 접한 것은 야소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1603년 연경(북경)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세계지도(양의현람도)를 가지고 온 것이 그 첫 대면이었다. 

또한 1631년(인조 9) 진주사로 연경에 간 정두원은 귀국길에 등주에서 신부 로드리게스를 만나 과학기구와 서적을 얻어가지고서 귀국했다. 

특히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도 연경에 머무는 동안 중국의 서양선교사들을 접촉하면서 서양학문을 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문으로 저술된 한역 서학서가 17세기 무렵 조선에 흘러들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서학이 크게 퍼졌다. 

이 서학은 이후 실학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제자들 중에는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내치는 파가 있었던 반면, 학문적인 관심에서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파도 있었다. 

예컨대 신후담과 안정복은 천주교의 창조설과 불멸설을 비판하여 강력히 서학을 내쳤으나, 홍유한,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은 천진암 등에서 강학회를 열고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처럼 외부의 전도도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예는 역사상 조선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학문적인 관심에서 시작된 천주교는 1784년(정조 8)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교회 창설을 계기로 천주교는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나, 한편에서는 천주교뿐 아니라 서양학문 전체를 배격하는 척사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785년(정조 9) 을사추조 적발사건을 시작으로 천주교는 시련기로 접어들었다. 

1791년 호남 진산의 천주교인 윤지충이 천주교 의식에 따라 모친상을 치른 것이 발단이 되어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이승훈, 권일신, 최필공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리고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불살라지는 등 서학탄압은 더욱더 극심해졌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면서 명도회(明道會)를 중심으로 한 정약종과 황사영의 전교활동, 강완숙 등 여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선교회는 다시 발전의 길에 올랐다. 

정조 시대에는 그래도 천주교의 박해가 심하지 않았다. 

정조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정약용 또한 천주교 신자였고, 당시의 남인 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1년(순조 1)에 또다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금교령을 시작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정부는 전국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천주교도를 빠짐없이 고발, 처벌하도록 했다. 

오가작통법은 본디 향촌의 규율을 위해 인원을 파악하는 제도인데, 이때에는 천주교도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다.

이때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등 남인(南人)계통의 사람들과 주문모 신부, 황사영 등 모두 1백 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4백 명이 유배를 당했다. 

특히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사실을 알리는 소위 ‘황사영 백서(帛書)’를 북경에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백서에서 황사영은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었다.

신유박해 후 천주교는 세력을 다시 회복하는 듯했으나 1839년(헌종 5) 기해년에 다시 모진 박해가 몰아쳤다. 

기해박해는 이전의 박해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전국적이었다. 

이 박해로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모두 순교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던 때에 조선을 떠나 상해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는 서품을 받은 후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에 도착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착륙한 지점은 십자가의 길 중간에 있는데, 중국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지역이지만 지금은 주변이 넓은 평야가 되어 있다.

전에는 금강이 나바위 성당이 있는 화산 옆으로 흘렀는데, 일제시대에 수류를 변경시켜 지금은 이 곳 주변이 논과 밭으로 변해 버렸다.

배가 도착한 물이 없어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성 김대건 신부 일행 착륙지점


이후 순교하기 전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오가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 일의 일환으로 1846년 5월 14일 황해도에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다. 

40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받은 김대건은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 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참수되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그 시신을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조선 정부는 김대건의 시신을 파묻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다. 

순교한 지 40일 만에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민식을 비롯한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빼내 이민식의 고향인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순교자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페레올 주교 또한 김대건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되었다. 이어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문전걸식을 하며 고생한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아들 옆에 묻혔다.



본디 나바위 성지는 금강이 흐르고 조운 제도가 이루어지던 곳으로 나암창[羅巖倉]이라고 불렸다.

조선 중종 7년 용안 금두포에 위치한 득성창의 기능이 군산창에 합해진 후 금강을 이용한 전라북도지역의 조운창고는 군산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조운제도의 어려움은 운송로의 실익을 따지는데 있었기에 어느 장소에 창고가 설치되어도 문제점이 없을 수는 없었는데 군산창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운창고가 용안이나 성당에 있을 때는 큰 불편함을 못 느꼈던 용안, 익산, 여산, 금산, 진산, 고산, 무주 등의 경우는 장수 지안 등 산 중에 위치한 지역과 달리 금강 변에 위치하면서도 군산창까지 세곡을 육로로 운반해야하는 고충을 조정에 진정하여 결국 자체적인 조창을 개설하는데 그 조창이 바로 나암창이다.

나암창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여산현조 창고에 “ 나암창은 邑北三十五里의 羅浦巖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증헌문헌비고』산천조에는 “금강은 속칭 나암포라고 하는데 여산의 서쪽 20리에 있다”라고 하여 바로 이곳인 현재의 전북 익산의 화산(나바위, 바우꼬쟁이)지역임을 알 수 있다. 

화산은 지금은 이렇게 나바위 성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나암포는 숙종대까지 운영되다가 금강하류에 위치한 성당창으로 다시 이전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강이 화산 옆으로 흐르지 않는다.


김대건(金大建)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충남 나바위 성지와 가까운 강경에 잠입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출생-사망

  1821.8.21 ~ 1846.9.16

 본  관

  김해 (金海)

 초  명

  재복(再福)

 보명(譜名)

  지식(芝植)

 출생지

  충청도 내포 지방의 솔뫼 (현재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별  칭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 재복·보명·지식


김대건 신부는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택현(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아버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Maubant)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당시 칼레리 신부는 이들 3명의 조선신학생들에 대해 “사제가 갖추어야 할 훌륭한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 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J.J.J.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M.N.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할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김대건 신부가 안장된 곳은 미리내 성지로 불리워지며, 이윤일 요한 성인과 16위 무명선교자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857년(철종 8)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시복(諡福)되어 복자위(福者位)에 오르고 1984년 4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諡聖)되어 성인위(聖人位)에 올라,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작은 산인 화산으로 오르니, 망금정과 김대건신부 기념비로 가는 길이 나온다.

5분도 되지 않는 길을 올르면 된다.

 

화산을 오르는 길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가 보인다.

화산 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 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웠다고 한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 순교비 옆에는 망금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망금정

 


망금정(望錦)이란 '아름다움을 바란다‘라는 뜻으로 1915년 베로모렐 신부가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화산의 끝자락에 있는 넓은 바위인 나바위에 위치하고 있는 데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망금정이 있는 곳은 화산의 정상인데 산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화산의 끝자락에 넓은 바위가 있어 나바위라 불려 나바위 성지라고 불리고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금강의 강변에 자리하여 산 밑 서북쪽을 물이 닿았고 갈대숲이 우거졌다고 한다.

지금은 금강이 흐르지 않아 평원이 보였지만, 당시의 화산 옆으로 금강이 휘감아 흐르던 모습을 상상하면 과연 그 아름다움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후 초대 대구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월이면 연례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고,

개인 피정 장소로 더할 수없이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를 감탄하며 피정을 하는 주교를 위해 베로모렐 신부는 1915년 정자를 지어 망금정이 된 것이다.

이 정자의 이름을 붙인 것도 드망즈 주교이다..


금강을 바라보며 세 성직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장소이다.


망금정을 뒤로 하고 혼자 조용히 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한 노부부가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손은 서로의 손을 잡고, 순교비가 있는 곳으로 오르고 있었다. 


나바위 성지의 평화의 모후

반응형

'♠ 여행, 식당 ♠ > 대전 충청 강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과 함께 가기 좋은 대전 동물원 오월드 (O World in Daejeon-city, Daejeon Zooland,, 大田 動物園)  (19) 2014.07.02
시원한 봉달 커피~, 천안 카페 슬로우커피 (천안 슬로우커피, Cafe Sloww Coffee in Cheonan-city, 天安 咖啡馆, 천안 맛집 카페, 천안 안서동 카페)  (16) 2014.06.28
Peach Kitchen Pasta, 천안 신부동 파스타 피치키친 (천안 맛집 파스타, 신부동 맛집, 천안 파스타 맛집, Cheonan Pasta restaurant Peach Kitchen, 韩国 天安 意大利面 比萨饼 (イタリアのパスタ料理, ピザ))  (14) 2014.06.27
널찍해서 좋은 천안 두정동 카페 네스카페, cafe Nescafe in Choenan-city, 天安 咖啡馆  (24) 2014.06.22
저렴한 돈가스 대전 은행동 더 키친 에서 먹은 돈가스 (Daejeon restaurant The kitchen)  (14) 2014.06.10
홍차 딜마 좋아하세요? 천안 불당동 찻집, 카페 티브레이크타임 (Tea Break Time Dilmah in Cheonan), 천안 맛집 카페, 천안 티브레이크타임 (天安 紅茶 咖啡馆)  (12) 2014.06.06
천안 불당동 카페 마노 (천안 불당카페거리 카페 마노, 마노 커피), cafe Mano roastery coffee in Cheonan city, 天安 咖啡馆  (8) 2014.05.26
천안역 분식점 천안 할범 탕수육  (29) 2014.05.24
스승의 날 발원지(발원교), 충남 논산시 강경읍 강경고등학교 (江景高等學校, Ganggyong High School)와 강경여자중학교 (Ganggyeong Girls’Middle School, 江景女子中學校)  (14) 2014.05.15
천안 불당동 카페 커피 1380 (천안 불당 카페거리 커피 1380, 천안 불당동 맛집 카페) [Cafe coffee 1380 in Cheonan, 天安 咖啡馆 1380 (カフェ) ]  (6) 2014.05.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