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고려청자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색과 정교한 문양이 아름다워 세상사람들이 보물처럼 여겨왔다. 고려청자는 고려의 역사와 같은 길을 걸어 왔고 고려의 역사에 맞추어 설명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고려인의 생활과 밀접했고 고려인의 얼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청자가 고려시대에 어떻게 발달했는지 이제 살펴보자 한다. 고려청자의 변천과정을 시대에 따라 초기, 발전, 1차 절정기, 2차 절정기, 쇠퇴의 순으로 다루겠다. 그리고 상감청자에 대해 조금 언급하겠다.
Ⅱ. 본문
1.초기청자
도자기발전사적견지에서 보면 10세기는 선행한 삼국과 발해와 후기신라 때에 발전되어 온 록유나 황갈유 등 연유계통의 도기들과 회유를 이용한 도기나 자기를 더욱 발전시켜 고려의 특유한 자기를 만들어 낸 시기였다. 고려초에는 이미 많은 지역에서 청자기를 만들어내게 되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질도 비교적 높은 수준에 오르고 청자가 사용하는 범위도 보다 넓어졌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자로서 햇무리굽계 청자와, 녹청자가 있다.
㉮햇무리굽계 청자
중국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햇무리굽계 청자는 9세기 후반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햇무리굽계 청자가마터는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었다. 이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소위 햇무리굽 대접이 있다. 이 대접은 굽 모양이 햇무리굽이고 耐火土빚음눈에 側斜面이 직선인 점 등 공통적인 특색이 있고, 그외에 內底에 圓刻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굽 밑면의 넓이가 아주 넓은 것과 약간 넓은 것 등이 있다. 대체로 굽 밑면의 넓이가 약간 좁은 것은 내저에 원각이 없으며 유약이 얇고 갈색을 머금었으며 태토의 입자가 매우 곱다.(초기청자Ⅰ형식) 굽 밑면의 넓이가 넓은 것은 內底圓刻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유약이 약간 두터운 편이며,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색이 진하나 그 발색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초기청자Ⅱ형식) 이 두형식의 청자는 선후관계가 큰 차이 없이 Ⅰ형식 후기와 Ⅱ형식 초기가 병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綠靑磁
이러한 햇무리굽 청자 이외에 녹청자라고 명명한 일군의 조질청자가 있다. 녹청자는 胎土가 거칠며 유약표면이 안정되지 못하여 우툴두툴하며, 표면색은 구운 청자색이 아니라 녹갈색 계통이다. 녹청자는 햇무리굽 청자가 만들어진 연후에 지방의 수요에 대한 공급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초기청자Ⅱ형식의 중·후반경에 민간 수요용으로 발생·발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양질이고 磁化된 햇무리굽 청자는 비싼 것이어서 상류계층과 지방호족들이 쓸 수 있는 것이었으며, 녹청자는 일반 서민과 지방민이 사용한 것을 것이다. 녹청자는 器形도 다양하지 않으며 대접·접시류가 대부분이고 방구리·이형매병·치마병·항구리 등이 약간 있을 뿐이다. 녹청자는 10세기 후반경부터 시작하여 11세기 전반경까지 많이 제작되었으나 점차 양질청자에 흡수되었다.
2.청자의 발전
㉮11세기 전반
10세기 말-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도자기술은 바야흐로 숙련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기형이 다양해지고 종전의 기형에 변화가 있었으며, 문양의 표현기법과 문양의 내용이 다양해진다. 초기청자 시대의 병·주전자 등 금속기의 영향을 받아 각 부위의 연결이 예리하게 꺽이는 강인한 형태에서 점차 모든 부위가 유연한 곡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음각문양이 가늘고 부드럽게 세련되고 국당초문·파도어문·앵무문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며, 耀州窯式 陽印刻文이 많이 등장한다. 초보적 양각과 철화문·퇴화문이 나타나며, 상감문양도 계속 시도된다. 초기청자 시기에는 특수화형이며 매우 드물던 花形 대접, 접시 등이 나타나며 瓜形 등 象形 器皿도 등장한다. 유약은 점차 밝아져서 12세기 전반기의 翡色釉로 접근한다.
㉯11세기 후반-12세기 초
이상과 같이 긴 숙련기를 고려의 도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는 세련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청자·백자의 기형과 의장에 유연한 곡선주조의 고려적인 풍모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그 釉·胎의 질과 번조기술, 문양의 표현기법과 문양 자체가 또한 진일보했던 것이다. 청자의 기형에서 일부 금속기를 모방한 주전자 등에는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으나, 대접·접시 등 일반 기명들은 구연이 유연하게 외반되면서도 날렵하며 단정한 가운데 예리한 맛이 깃들여 있다. 문양에는 상감기법의 시도가 조금씩 늘어나며, 음각·양각이 예리하나 늘어나고, 특히 양인각이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특히 11세기 말경에 이르면 요주요식의 각개 문양의 周綠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방법은 점차 사라지고, 문양의 浮彫가 아주 낮아지면서 매우 부드러운 모양이 된다. 또한 각개 문양의 중심부위가 더 두드러지면서 그 주위를 음각으로 마무리짓는 새로운 방법이 시도되었다. 또한 이 세련기에 눈에 띄는 고려청자의 특색은 釉·胎 등질이 일정하고, 유약은 기포가 많으며 반투명성인데 전반기보다 녹색이 좀더 줄었으며, 胎土도 철분이 줄어 밝은 灰色이며, 번조시 환원이 잘 보장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는 바야흐로 다가오는 12세기 전반기의 고려청자 절정기를 앞에 두고 북송 자예기술의 차원에 발돋움하면서 독창적인 고려 도자예술 창조의 기틀을 착실하게 다져 나간 시대였다.
3.고려순청자의 절정기
순청자의 절정기인 12세기 전반기 50년 동안은 고려도자로서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사 가운데 하나의 절정기였다. 순청자 절정기의 비색은 시유된 유약의 두께가 얇으나 비취옥과 같이 녹색이 비쳤으며 유약내에 미세한 기포가 많아 胎土가 은은히 비쳐 보인다. 그러므로 섬세한 음각이나 세밀한 양각 등이 은은하게 나타날 수 있어 한층 기품이 있다. 이때는 유약과 함께 器面의 정리도 매끄럽고 전체적인 균형이 준수하고 경쾌하다. 병·주잔자 등 큰 그릇이 굽을 깎는 방법과 번조시 굽 밑 유약을 훓어 내리고 눈을 받치는 방법도 가능한 단아하고 깨끗하게 하였다.
4.청자상감의 전성기(12세기 중엽-13세기 전반)
고려청자는 다른 도자와는 달리 두 번의 절정기를 맡게 된다. 그 두 번째 절정기가 고려 18대 毅宗 연간이며, 그 절정기가 조금씩 수그러들지만 대체로 몽고가 침입하여 커다란 국난을 당하는 1220년대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의종 연간에는 상감기법과 상감시문이 본격화되면서 청자의 유약이 더 맑아 투명하여지고, 기형의 예리함은 내재적인 정신으로 숨겨지고 표면은 은근한 양감이 있는 부드럽고 유려한 형태로 변모한다. 이때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청자상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고, 청자유약이 한층 맑고 밝아진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청자상감 전성시대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고려의 국토가 그들에게 짓밟히고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가서 40년간에 걸치는 저항을 시작하는 1220년대 무렵까지 약 80년간에 걸쳤던 것이다.
청자상감법은 이 기간 중에 다양화되고 청자 전체가 양산되었다. 특히 象嵌意匠 무늬는 12세기 전반기에 양인각문양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운학문 등 단독문양과, 모란·국롸절지 등 折枝문양과, 사실적이면서 회화적인 牡丹唐草文 등이 상감으로 시문되어 문양으로 세련되는 등 독자적인 주제와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문양구성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주문양과 종속문이 함께 등장하여 적재적소에 따로 시문되면서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고려청자 문양은 공예의장으로서 하나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뿐만 아니라 상감무늬가 세련될수록 그 투시효과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이러한 투명도의 추구 때문에 오는 부작용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곧 빙렬이라고 일컫는 식은테의 일반화였다. 즉, 이 청자상감 전성시대의 釉調는 釉質의 硬度가 높아짐에 따라서 빙렬이 유면 전체에 분포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이것은 12세기 전반기 순청자 전성시대의 빙렬이 없는 유조와는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청자 질감과는 점점 거리가 더 생기게 되었으며 釉의 질감뿐만 아니라 색감과 문양에서도 또다른 고려청자 특유의 품격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5. 청자의 쇠퇴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십 년간에 걸친 사회 불안과 경제의 혼란으로 그처럼 정기어렸던 고려청자의 기품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양상은 元宗代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쇠퇴의 그림자는 청자의 기형, 태도와 유약, 번조수법 그리고 장식의장에 이르기까지 고루 미치게 되었다. 이것은 지나간 영광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忠烈王 시대에 일시적으로 元 세력의 지배체제가 안정되면서 사회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고려의 磁藝도 활기를 되찾는 듯했었지만 그 이후 얼마 안되어 다시 쇠퇴일로를 걷게 되고, 결국은 과거의 軌範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청자상감의장은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조잡하고 거칠었으며 그 표현에는 밀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象嵌意匠의 일부를 일정한 印形으로 押捺해서 손쉽게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조선시대의 인화문기법의 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자기의 특징은 첫째로 그릇의 종류와 수량이 대폭 늘어나고 그릇형태가 대범해지고 살이 두터워지는 등 둔중한 감이 도는 것이며, 둘째로 색깔이 암회청색, 암갈황색으로 된 것이고, 셋째로 무늬가 복잡하게 장식되는 한편 많이 생략되고 간략화된 것과 새로운 무늬류가 등장한 것이다. 넷째로 자기에 간지명이나 소속기관명, 무덤명 등 제작 시기와 소속명을 명백히 밝힌 것 들이다.
살펴보면 1230년대부터 고려조가 쇠망해 버리는 1392년 무렵까지 고려의 磁藝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고 간단없이 그 하한선을 더듬었다. 고려청자의 두드러진 곡선의 아름다움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흐트러져서 우아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사회에 알맞는 무겁고 둔한, 즉 실용성과 가능만을 생각하는 안이한 便化의 造形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이 짙어만 갔다. 160면 동안에 걸친 긴 경로를 하나로 묶어서 쇠퇴기라고 본 것은, 고려의 국정이 그러했듯이 고려의 磁藝 또한 고려의 국운과 너무나 닮은 경로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6. 상감청자기
상감청자기는 비색청자기와 함께 고려자기를 대표하는 독특한 자기이다. 상감자기는 소지의 겉면에 무늬홈을 파고 거기에 바탕흙과는 다른 색흙을 밀어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청자기 외에 백자기, 검은자기 등에 다 적용되었는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청자기였다. 청자기에 상감을 하는 경우에는 바탕흙보다 철분이 훨씬 많이 섞인 색흙이나 백토를 상감재료로 썼다. 이 경우에 철분이 많은 색흙은 환원소성하여 흑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백토는 흰색으로 나타난다. 상감청자기의 일반적 특징은 선명하고 뚜렷한 무늬와 시원한 회청색 계통의 맑은색, 아름다운 형태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진귀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상감기법으로 장식된 무늬들은 어느것이나 다 음각이나 양각 등 조작적 기법으로 처리된 무늬들에 비하여 더 선명하고 뚜렷하며 바탕색깔과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은근하게 안겨온다. 음각이나 양각법으로 처리된 무늬들은 바탕을 파거나 돋구어주는 방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파진부위에 유약이 더 깊이 차면서 무늬를 나타낸다. 그러나 상감한 것은 바탕색깔과 다른 색흙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대조되면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편 같은 색깔의 유약이기 때문에 무늬와 바탕이 자극적으로 대조됨이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하게 살아난다. 이것은 상감기법이 조작적 기법과 회화적 기법이 배합되어 있는 특성과도 관련되어있다.
상감청자는 물병, 기름병, 꽃병, 화분류, 화장함, 자기베게 등 크기와 형태가 각이하다. 무늬는 동물무늬, 식물무늬, 환상무늬, 기하무늬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서로 배합되어 자연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Ⅲ. 맺음말
고려시대에는 檀君崇拜의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켰다.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으며, 12세기 중엽에는 유약을 맑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 등 우리나라의 도자기 중 가장 아름답다.
박물관에 가서 보면 우리나라 도자기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고려청자이다. 위에서 얘기한 아름다움 역시 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음이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푸르른 그 빛깔이다. 고려청자의 翡色이라고 불리는 그 색은 마치 비취옥과 같은 빛깔로 완전히 푸르지도 않고 풀색도 아닌 청록색 계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중국의 두껍고 짙푸른 색의 청자와는 달리 맑고 명쾌한 색이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 색에는 마치 도공의 영혼이 담겨 있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청명한 색깔을 지켜주는 것 같다.
우리는 여지껏 이런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박물관에 가서 고려청자를 보고도 그 색이 어떠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나 역시 고려청자에 관해 흥미가 있어서 이 주제를 택해서 쓰면서도 자세히 기억나는 청자는 몇 개 안되었다. 색감에 대해서는 관심있게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억이 나지만 고려청자의 모양이나 문양에 관해선 사진을 보며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린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얼이 담긴 고려청자 뿐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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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이·유홍준·이태호, 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학고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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