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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by 소이나는 2009.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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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의 어원과 의미
 14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및 역사가 빌라니 등이 잃어버린 고대의 문예 및 예술을 새 시대에 재현한다는 뜻으로 이탈리아어의 재생, 부활을 의미하는 리나시타라는 어휘를 사용하였으며, 다시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 기베르티와 알베르티, 필라레테 등의 저술에도 그러한 사관이 계승되어 있으나, 특히 16세기의 미술가 바사리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에서 고대미술이 야만족의 침입과 중세의 우상파괴운동으로 멸망하고, 그 후 고트인에 의하여 독일식, 즉 고딕이나 딱딱한 비잔틴식이 풍미한 뒤, 13세기 후반 이후 화가 치마부에 지오토 및 조각가 피사노와 디 캄비오 등이 나와 토스카나 지방에서 뛰어난 고대 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킨 사실을 리나시타라는 말로써 파악하였다. 이 말이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의 주목을 받아 프랑스어로 르네상스라고 번역되었고, 이어서 영어, 독일어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시멘토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어이며, 더욱이 그 개념이 형성된 단서는 그 시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역사적 자각과 의욕을 보여준 미술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2. 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견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 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한편 J.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란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 문화사가 J.브루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고,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오로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시켰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의 연구자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오히려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너무나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3.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
 문예부흥은 원래 '재생'의 의미를 가지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예술을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은 그들의 상업주의적 세계관에 많은 지식과 활력소를 제공했다. 그들은 고전의 부흥을 통해 부르조아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면서 학자, 정치 이론가, 관리, 귀족의 각 신분으로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인문주의였고 그들은 인문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합리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통치, 전쟁수단 등 여러 분야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의 법칙까지도 합리화했다. 반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경제에 나타난 계획성, 목적성, 타산성의 상업주의적 합리주의가 모든 분야에 작용했던 것이다.
 근세 합리주의는 르네상스 이후의 모든 발전 단계나 사회 계층에 통용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발전 단계나 사회 계층에 따라 합리주의는 다양한 성격으로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지배했다. 르네상스 부르조아지의 합리주의는 당대 상황에 맞게 동적이고 반전통적이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복종과 금욕의 정직 생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인간의 발견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이고 그것은 그대로 인간적 삶의 해방이었다. 개인과 사상의 자유, 인격적 자율 등은 중세적 세계관을 극복한 몫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합리주의는 기독교적 전통에 반동적이면서도 생활의 활성화를 가져온 동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띠었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자연 법칙의 연구 등 르네상스의 자연의 발견도 금욕주의의 중세적 세계관의 극복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자연 예찬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로운 현실적 삶을 포괄하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욕 해방의 관능주의 형태로도 나타나 중세의 금욕주의 세계관과 교회의 권위에 투쟁하는 몫을 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이런 자연주의는 세속주의와 더불어 부르조아지의 세계관인 합리주의의 중요한 양상이다. 이런 합리주의가 극단적으로 세속화된 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외세로부터 이태리를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군주는 갖은 권모술수를 써야 하고 강력산 권력 통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함으로써 세속주의와 권력 정치를 옹호했다. 그리고 그는 정부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현세의 시민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하여 정치에 의한 세속주의를 더욱 극명하게 표방했다. 형식이 중요시되고 문체의식, 기술의식은 이 시대의 가장 확실한 수확의 하나로서 이것은 고대 작가들을 읽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고대작가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미의 전형을 보여 준 셈이다. 그리하여 고대 작가가 모방되고 작품은 고대 작가의 실례가 인정하는 문학 형식에 따라 쓰게 되었다. 고대의 신화나 전설, 고대 시세계의 모든 것이 차용되었다.
 요컨대, 르네상스 문학은 매우 풍부한 매우 다양한, 열렬하고, 관대하고, 때로는 과격한 문학이며, 동시에 순종적이며, 자발적이며, 모든 방면으로 뚫고 나가는 문학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인간의 지적, 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서 비롯되어진 르네상스는 고전주의 문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절대적 권위와 도덕을 배척하고, 자아중심주의라든가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 여러 경향을 가진 근대 문학을 형성케 하여 소설, 시, 희곡, 비평 등 광범위한 문학을 꽃피게 했다.

 3.1 이탈리아
 이탈이아에서의 르네상스 정신은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그 모토로 한다. 이것은 봉건적인 폐쇄사회에서 군주와 종교의 도그마에 빠져 있던 인간을 회복하자는 휴머니즘 운동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자연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 말하자면 인간적인 본성이 타의에 의해 혹은 지혜의 부족으로 수세기 동안 유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성의 회복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문학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신적 태동을 알리는 첫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다. 아직 중세적인 신앙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신곡>에서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려는 인간적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연옥에서의 죽은자들과의 만남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하는 인간의 세속적 희망을 보게 한다. 단테는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 곳이 천국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자체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단테를 완전한 인문주의자로 평가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가 인간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의 마지막 보루는 여전히 종교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한 것이 페트라르카이다. 페트라르카는 중세적인 문화를 철저히 배격하고 고대의 발견을 통한 인간 중심 사상을 학문연구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는 주로 베르길리우스 등 라틴 작가들의 문학을 통해 그의 사상을 확립했는데 이것이 그의 유명한 소네트이다. 그가 라틴어로 쓴 서간문은 고대 성현들의 문학을 이어받은 르네상스 정신의 산물로 교회에 대한 비판, 인간의 고뇌와 행복 등 그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피력한 고전이다.
 보카치오도 역시 고대문학 탐구에 열정을 보인 휴머니스트로 산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당시 지식인의 덕목인 고전연구를 통해 높은 교양을 쌓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탐구에 몰두했다. 그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삶을 사랑해야 하며, 사람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정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의 현세적인 삶을 중시한 태도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이해, 나아가 몽떼뉴적인 '삶의 지혜'에 촉구이다. 이러한 사상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지배했던 당시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죄악시될 만큼 세속적이고 이단적이었다.
 마키아벨이의 <군주론>은 위선과 사기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고 인간이 구축한 문화와 사회의 허상을 벗겨 보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군주론>은 순수한 문학작품은 아니지만 현실주의적인 독특한 성격의 인물을 적나라하게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관습이나 행동규범, 정치적 논리를 설파하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군주론>은 르네상스기의 인문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외에 미켈란젤로아 탓소등 시와 산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예가들이 르네상스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3.2 프랑스
 이렇게 찬란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프랑스이다.
 프랑스에서의 르네상스 문학 예술은 물론 종교와 정치를 개혁하는 범사회적 의식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아무튼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그것이 전쟁이든 문화적 접촉이든 이탈리아와의 만남으로부터 의식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문예부흥의 분위기는 정치적으로 확고부동한 입지를 세운 프랑스와 1세의 후원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그가 창설한 왕립 학사원에는 신학문에 매료된 젊은 학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고전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원전에 대한 신앙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그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이 익힌 히랍어와 라틴어, 히브리어를 통해 직접 원전을 해석하고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그때까지 성역으로 금기시되었던 신과 군주, 그리고 우주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인간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간 본래의 모습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자연히 기존의 전통과 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충독이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과 농민전쟁이고, 신앙에 있어서는 종교전쟁이다. 이러한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은 르네상스 정신이 몰고 온 휴머니즘과 복음주의의 확산에 기인했다.
 프랑스 휴머니즘의 기수는 라블레이다. 그의 소설적 기법의 특징은 우의적인 호방한 인물을 내세워 해묵은 중세적 세계관을 통찰하게 함으로써 대담하면서도 통쾌한 교훈을 주었다는 점에 있다. 1532년 그의 불후의 걸작 <빵타그뤼엘>이 발간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아 구성이나 통일에 허술한 점이 많으나 작중인물인 거인 빵타그뤼엘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와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라블레를 르네상스 초기 제일의 휴머니스트로 만들고 있다.
 라블레의 사상은 현세적인 쾌락과 행복을 중시하는 인간적 본능에 도덕적 기준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가치, 즉 인생의 의미가 인간 중심의 판단 기준에 따라 사고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한편, 프랑스에는 라틴어 문학의 우상을 과감히 타파하기 시작한 일련의 젊은 시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쁠레이아드학파라고 불리는 7인의 시인으로 사대주 적인 라틴어 문학의 숭상과 모방에 회의를 느껴 중세에 천시되었던 프랑스어를 갈고 닦아 고대 문학에 못지 않은 훌륭한 글을 썼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불모인 프랑스 문학을 독자적으로 선진문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프랑스어를 연마하는 언어 정책과 새로운 문학형식을 창달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것이 뒤 벨레, 롱사르가 주축이 된 문학 선언서 <불어의 옹호와 선양>이다. 이는 프랑스어를 업신여기고 희랍어와 라틴어의 정통성만을 주장하는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경종으로, 프랑스어도 고대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낳을 수 있다는 확신, 즉 독창적인 모방으로 고대작품에 못지않은 걸작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뒤 벨레는 앙쥬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쁘와티에 대학에서 법률을 전고하였으나 라틴어 문학을 접한 후부터 시와 문학에 심취하였다. 쁠레이아드 학파의 주장격인 롱사르의 집필 의외로 프랑스 문학 사상 최초의 문학선언서를 발표한 그는 개인적으로 페트라르카의 인문주의 정신에 크게 영향받은 시인이다.
 프랑스 최초의 계관시인인 롱사르는 사실상 쁠레이아드 학파를 이끈 중심인물이다. 그는 그리스 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문학에 심취하였다. 롱사르는 그들의 높은 학문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한편 고대 문학 형식을 바탕으로 그의 독창적인 첫 시집 <오드>와 고전적인 형식미에 근대적인 감각과 운율, 성정을 담은 소네트 <사랑>을 썼다. 그는 이로써 시의 내용과 형식에서 참신한 프랑스적 전통을 세웠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프랑서적인 정서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그외에 이탈리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지리적으로 중계 역할을 했던 리옹파 시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페트라르카류의 플라토니즘에 관 르 가지고 새로운 시법을 연구했다. 이들의 중심인물 모리스 세브는 섬세한 사랑을 노래한 시집 <델리>로 각광을 받는다. 죠델을 비롯한 많은 문학자들이 연극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고대극을 번안하기도 하고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 그리고 세네카 등을 소개하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시론이 소개되면서 연극의 규칙에 대한 논의가 거세어졌는데 이것은 앞으로 있을 프랑스 고전주의 형성의 시초가 된다.
 휴머니즘에 기초한 합리주의 정신은 개인의 자아반성과 비판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중세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신적으로 성숙되고 이교적인 고대사상에 물든 시민과 지식인들은 이제 더 이상 바티칸의 권위와 위상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독교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의 수혜자가 되고자 했다.
 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의지는 독일의 경우 마르틴 루터가, 프랑스의 경우 칼빈이 주도했다.
 칼빈은 1534년 있었던 격문 사건 이후, 다른 많은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피신했다. 엄격한 종교적 율법을 강요한 그는 쥬네브에 자리를 잡고 그의 독단적인 신학과 도덕, 교리를 설파하는 데 정력을 쏟았다. 그는 이러한 종교적 요람을 건설하기 위하여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의지로 반대자를 숙청하는 한편 <기독교 제도>라는 그의 종교에 대한 이론서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썼다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16세기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이에 따른 정신적 위기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위기에 인간의 양식을 믿는 지혜로운 철학자 몽떼뉴의 출현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휴머니스트들의 지나친 독단과 편견, 그리고 중세적인 봉건적 사고방식 모두에 대한 현명한 판단과 처방이었다. 휴머니즘이 전통에 따라 철학적 성찰의 원천을 고대에서 찾은 그는 정치와 종교에 예속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개체,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인간이 성찰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몽떼뉴의 현세적 인생관은 전통적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지나친 독다노가 맹신에서 벗어나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지혜를 제공하는 자연에 기초하고 있다.

 3.3 영국
 영국의 르네상스는 프랑스와는 달리 이탈리아와의 간접적인 관계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 이탈리아 문화를 직접 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원주민이었던 고올 인과는 달리 영국의 켈트 인는 로마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오서가 시를 영어의 모체인 지방어로 쓰기 전에는 라틴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와 같이 사용되고 있었다. 세련되고 풍부한 문학어의 완성이 국민문학 발전에 절대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떄 초오서의 출현은 분명 근대문학 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외교상의 임무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여러번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폭넓은 독서를 통해 고전과 프랑스 문학을 익혔다.
 그러나 영국의 르네상스 운동이 각종의 대작에 반영되게 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헨리 8세가 즉위한 1509년에 에라스무스가 토머스 모어 경의 집에 머무르면서 <우신예찬>을 펴낸 것은 모어가 라틴어로 <유토피아>를 쓰게 된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 플라톤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종교상의 관용을 가르쳤던 모어는 우주를 현실세계와 피안이 세계로 나누고 그 괴리에 분노하며 병든 사회를 풍자적인 고양된 필치로 비판했다.
 르네상스 정신이 영국 문학에 가장 깊이 침투한 것은 16세기 말 엘리자베스 시대이다.
 존 릴리의 유퓨이즘은  두 가지 점에서 남방문학의 기질을 본받고 있다. 그 하나는 <유퓨이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테네를 옥스포드로, 나폴리를 이탈리아 문화에 심취한 런던 사회로 보고 고대의 이국적인 화려함을 풍자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뛰어난 문체로 인간과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는 환상적인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시드니는 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섬세한 인물묘사로 릴리 풍의 지나친 유려함과 우매함을 벗어나고 있다.
 스펜서는 고오와 방언을 시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대사상과 기독교 정신의 조화를 도모하고, 조잡한 자연을 조탁하는 조각가와 같이 언어를 순화하고 세련되게 함으로써 시적 이상을 실현했다.
 이들 중 릴리의 문학정신을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세익스피어의 출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사랑과 증오에 얽힌 운명과 싸우며 고뇌하는 인간을 통해 극화하고 있다. 그는 벤 존슨과 같이 기질의 심리학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거울을 비추이는 과장된 반사를 통해 햄릿과 같은 개성적인 인물을 창조해 내고 있다.
 그의 초기의 낙천적이고 관용적인 작품이 차츰 정밀을 더해가며 숭고한 고전적 형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관객의 고전적 취미에 부응하거나 고전적 시비에 적응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작품은 플롯에 못지 않게 작중인물들의 대화 하나하나가 결정적인 행동을 암시하는 극적 효과를 요구하고 있어 내용에 긴장과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모든 인간의 영혼과 능력을 체현하고 그것을 위대한 시로 장식함으로써, 그리고 이미지나 리듬을 통하여 그들이 노래하는 감정을 영원불멸케 함으로써, 인물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익스피어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이면서 고대 문호들의 모방원리에 보다 충실한 작품을 쓴 작가가 벤 존슨이다. 그를 당대의 베르킬리우스로 칭송하는 것은 그가 고전에 대한 폭넓은 독서로 깊은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삼단일법칙 등, 고대문학의 규법에 맞추어 작품을 씀으로써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4 독일
 독일의 르네상스 운동은 일반적으로 문학과 학문을 통한 인간의 개발을 인문주의 사상보다는 루터를 위시한 종교 개혁자들의 복음주의에 더 의지하고 있는 듯했다.
 독일의 경우는 현세적인 인간의 행복과 정신적인 자유를 교회와의 투쟁을 통한 개혁에서 찾고 있다. 르네상스 문화가 아직은 유럽 각국에 비해 미진했지만 에크하르트 등 신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간성에 대한 관심이 싹트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속박하는 교권과 정치를 배격하는 급진적인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교회와의 대회전이라는 세기적 사건, 즉 종교전쟁을 불러왔다. 이 종교개혁은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성서의 원전에 의거한 교회의 정화였다. 로마의 전통적인 카톨릭은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성서를 왜곡함으로써 교회를 부패시켰다. 자연히 중세적인 종교관과 우주관은 세계의 중심인 인간을 현세적인 행복에서 격리시켰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잡고 성서나 고전의 원전을 통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승리이자 인간이 승리였다.
 둘째는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된 성서의 번역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못지 않게 독일어와 독일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개혁과 변혁이 독일이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이루어졌다. 루터는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되찾자는 퓨리타니즘 운동으로 독일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의 종교관은 결국 세속에 물들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를 통해 직접 하느님을 만나는 일,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마음속에 신성한 교회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진정한 위대성은 그의 성서번역에 있다. 그에 앞서 성서가 번역되기는 했으나 라틴어의 중역으로 오역이 많았고, 그나마 표준 독일어가 아니라 방언이었다. 반면, 루터는 고대의 원전, 말하자면 히브리어와 희랍어로 된 성경을 직접 번역했으며, 언어 선택이나 표현 방법, 문체에 있어서도 남다른 정성을 보였다 .당시 독일 전역은 지방마다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성서 번역은 독일 표준어 탄생의 기원을 마련했으며, 세련된 시적 표현은 독일 문학, 특히 산문 발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참고문헌

 신곽균 외, 서양문예사조, 1993, 건국대학교 출판부
 성기조, 문예사조, 1995, 한국문학사
 최유찬, 문예사조의 이해, 1995,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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