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 관계의 변화
Ⅰ. 청
1. 호란 이후
(1) 표면적 관계 - 활발한 교역
(2) 북벌 정책의 추진 (서인)
1) 정권 유지 수단
2) 국방력 강화
3) 북학론의 대두 - 천리경, 자명종, 화포, 만국지도, 천주실의 문물 소개
(3) 북학론 대두
2. 청과 국경 문제
(1) 백두산정계비의 건립 (1712) - 숙종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1) 압록강, 토문강 경계
2)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해석상 차이 - 간도 귀속 문제 발생 (東爲土門)
(2) 간도 협약 (1909) -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청의 영토로 귀속
* 대명 의리론에 의한 상징물 1) 대보단 (숙종) - 명의 신종추모 2) 만동묘 (숙종) - 명의 사당 3) 조종암 (숙종) - 명 보은하는 뜻의 바위 4) 존주휘편 (정조) - 춘추대의 선앙 위한 사례 |
[백두산 정계비, 그 위치]
Ⅱ. 일본
1. 교섭 재개
(1) 배경
1) 일본의 입장 - 에도(도쿠가와) 막부가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해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
2) 조선 - 유정(사명당)을 파견 - 조선인 포로 7천명을 데려옴 (1607)
3) 대마도주는 국교 재개 과정에서 양국의 국서를 개작하였다.
(2) 기유약조 (광해군, 1609)
1) 부산포 왜관 설치, 제한 돈 범위 교섭
2) 계해·정미약조보다 제한
3) 대마도 교역 허락
2. 통신사 파견
(1) 에도막부의 쇼군(장군)이 바뀔 때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 (X- 천황이 바뀔때)
(2) 선조(1607) ~ 순조 (1811) - 국빈 예우, 문화 전파
(3) 견문록 - 해유록 (신유한, 동사록 (강홍중), 해사일기 (조엄)
(4) 한번 파견되면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 문화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5) 19c 일본에서 국학 운동이 일어나며 중단되었다. (soy한국사)
cf) 역지빙례 (1812~1867) - 통신사의 대마도 행
[통신사 행렬도] [통신사의 행로]
3. 울릉도, 독도 문제
(1) 삼국시대 충돌
(2) 안용복 (숙종) - 일본 어빈 쫓아냄
(3) 울릉도 경영
(4) 일본
1) 1905 - 시마네 현 - 다케시마라 부름, 불법 편입 (러일전쟁 중) (주의 - X 청일전쟁)
2) 1907 - 독도 일본 편입 결정
3) 1952 - 이승만이 독도를 경북 울릉읍 도동리 행정구역에 포함 ‘평화선’선언
4) 1953 - 일본 영유권 표시 - 독도 의용 수비대를 결성, 일본인 몰아냄
5) 1996 - 일본 문부성,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
6) 1998 - 한일 어업 협정 타결
7) 2005 - 다케시마의 날 조례 상정
8) 2005 - 조례 통과
9) 2006 - 일본 독도 인근 해양 조사차 측량선 출발
10) 2007 - 일본 방위 백서, 일본의 고유 영토로 기술
11) 2008 - 문부 과학성 - 중등 교과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 공식 발표
(5) 독도의 역사
1)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 본기, 이사부 열전 - 지증왕(512) 이사부가 울릉도(우산국) 흡수 이래 한국 영토
2) 고려사 - 우산국의 영역임을 밝힘, 고종 때 최우가 사민 정책 시도하였으나 풍랑으로 실패,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침
3) 조선 태종 (1417) - 공도 정책 실시로, 울릉도와 독도 관리가 소홀
4)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 조 - 독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 (X- 경북)
5) 동국여지승람(1481),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의 ‘팔도총도’ - 울릉도와 독도를 별개 두 섬으로 표시
6) 은주시청합기 (1677)
7) 숙종 (1697) - 안용복
8) 일본 막부가 조선영토로 인정하는 문서를 조전 조정에 넘렸다. (1699)
9) 헌종 : 유럽에 알려짐 - 프랑스 포경선에 의해 로세 리앙쿠르 암초로 불림 (1849)
10) 1855 영국 호네스트호에 의해 측량
11) 명치(메이지) 초기 -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라 불름
12) 1881 - 독도를 울릉도민의 여름철 어업 기지로 이용
13) 대한 제국 (1900) - 독도를 울릉군에 관할한다는 내용 (죽도, 석도)
14) 러일 전쟁 (한일 협정서 이후) - 1905 - 한국정부 몰래 시마네 현에 불법 편입 - 1906년 알려짐
15) 광무 (1906) -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 등으로 불리였는데 독도로 처음 쓰인 것은 울릉 군수
기록과,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이다.
16) 1946 - 연합국 독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 - 국제법적 효력이 살아 있음
17) 1952 - 리앙쿠르 바위섬이라는 서양 호칭으로 명기하여 연합국이 한국에 반환
[팔도총도]
<문제>
1. 조선 후기 대외 관계 1) 임진왜란 이후 기유약조를 체결해 부산포를 다시 개항하였다? (O) 2) 왜란 후 수신사는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구실도 하였다? (X) ☞ 통신사 3)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이르러 북학론이 대두하였다? (O) 4) 숙종 때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였다? (O)
2. 다음의 묘사와 관련된 외교사절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시문을 구하여 얻은 자는 귀천현우를 막론하고 우러러보기를 신선처럼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처럼 하지 않음이 없어,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이라도 조선 사람의 해서나 초서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한다.”
1) 1811년까지 십여 차례 수행되었다. 2) 일본의 정한론을 잠재우는 데 기여하였다. 3) 일본 막부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4) 18세기 후반 일본에서 국학 운동이 일어나는 자극제가 되었다.
☞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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