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rom-SOY ♣/포토에세이 Photo Essay

낯선 땅의 선조 - soy

by 소이나는 2017. 3. 11.
반응형


낯선 땅선조 



주덕해 기념비 앞에 있었던 연길의 작은 집



 낯선 연변 땅에서 생활에 적응을 하기를 한 달여가 되어갈 무렵 나이가 지극하신 교수님께서 새벽 일찍 함께 연길시를 둘러보자고 하셨다. 본디 연길에 있던 대학의 기숙사는 10시가 되면 모든 불이 소등 되어 일찍 잘 수 밖에 없었고 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을 터이기에 늘 새벽 시간에는 산책을 하던가 개인 공부를 하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새벽 시간의 여행은 즐거웠다. 흔쾌히 교수님과의 약속을 잡고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연길의 가장 큰 대학인 연길대학교를 둘러보고 연길대학교 뒤편에 있는 항일무명영웅기념비를 보았다. 중국 땅에서 한글로 새겨진 비석을 보니 과거의 항일 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 지는 것 같았다. 연길은 한국 사람들이 흔히 '간도'라고 말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있는 도시이다. 그런데 사실 연길보다는 연길에서 40분 정도 거레 있는 '용정'이라는 도시가 동포들이 더욱 많이 살던 곳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배워보았을 만한 내용으로는 연길에는 '대한 국민회'라는 단체가 있었고, 용정에는 이상설의 '서전서숙'과 '윤동주'가 다니던 명동학교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동포가 더 많이 살던 용정이 아닌 연길이 조선족자치주의 주도가 된 것은 조선인들에 대한 결단력을 약하게 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저 연길에 있는 조선족에게 들은 풍문인 내용이지만, 용정의 일송정에 올라 해란강을 바라보면 왠지 모를 뜨거운 감정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의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기에 충분한 장소가 바로 용정이기에 어느 정도 그 풍문은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임에도 사실상 연길의 시내에는 누가 조선족이고 누가 한족인지 알 수가 없다.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어로 대화를 하고 있기에 선뜻 조선족이라는 생각을 먼저 갖기도 어렵다. 어느덧 광복을 한지도 70년이 다되가고, 타국 땅에서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우리의 후예는 지금 중국 땅에서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으니 가슴이 아프다.


주덕해

항일무명영웅기념비를 뒤로 하고 계속 길을 걸어 작은 과수원을 지나 '주덕해 기념비'를 찾아 갔다. 주덕해(朱德海)는 1911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56년에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첫 주장이었던 인물이다. 

원래의 이름은 '오기섭'이었는데, 1934년에 주덕해로 이름을 고치고, 모스크바 노동대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도에 중국 예안에서 팔로군의 정치사을 하였다. 또 김원봉의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광복 후 최초로 조선족중학교를 세우고, 연변대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었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과 함께 제1서기, 자치주장을 맡았고, 1957년 연변예술학교를 세워 조선족 예술인을 양성하는 등 조선족의 권위신장에 노력한 것이 화근이 되어 ‘지방민족주의 분자’로 낙인찍혔고 문화대혁명기간 중 린뱌오[林彪] ·장칭[江靑] 등에게 박해를 받았으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후의로 베이징을 거쳐 1969년 후베이성[湖北省] 1953농장에 피신하였다가 우한[武漢]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1978년 명예회복되고 연길시민공원에 안치되었다. 그는 중국 조선족을 대표하는 정치가이고 교육행정가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한 인물에 대해서 조선족이 아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민족을 위해 힘쓴 인물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덕해 기념비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한 옛 선조의 아픔을 느꼈다.


주덕해 기념비가 있는 작은 동산에서 내려와 연길의 아리랑 방송을 지나 아침 식사로 오랜만에 한식을 먹었다. 아침부터 설렁탕에 수육을 먹었는데, 그 맛이 한국에서의 맛보다 진하고 훌륭했다. 하지만 중국 땅에서 느끼는 한민족의 흔적은 왜이리 서글프고 안쓰러운지...

어쩌면 우리 민족의 '한'이란 정서는 이곳에 더욱 남아 있는 것 같았다.




追 思

                                        

반응형

'♣ From-SOY ♣ > 포토에세이 Photo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전하는 자 - soy  (10) 2017.03.27
생명의 서에서 설일로... - soy  (26) 2017.03.27
의자를 걷는 사람 - soy  (18) 2017.03.26
시간을 잡고 싶어 - soy  (16) 2017.03.20
바다를 보다 - soy  (20) 2017.03.12
안녕 - soy  (24) 2017.03.09
시간은 흘렀지만 - soy  (8) 2017.03.07
하루를 견디다 - soy  (18) 2017.03.06
덜컹거리던 기차 안에서 - soy  (26) 2017.03.03
만화처럼 살고 싶다 - soy  (20) 2017.03.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