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論
韓國의 現代詩도 이제는 그 史的 系統의 정리와 그 가치의 評價作業을 서서히 진행시켜도 좋을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한다.
新詩란 이름으로 출발한 지 이미 6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오늘날 추릴 것은 추리고 버릴 것은 버려서 알뜰한 韓國現代詩史 한 권쯤 꾸며 낼 때가 온 듯도 하다. 또한 詩史的 見地에서 하나의 시기, 하나의 에콜을 반성해 보는 것도 그러한 韓國現代詩史의 기반이 되는 부분적인 작업의 하나가 되리라 믿는다.
'靑鹿派'란 한 에콜로서 朴斗鎭, 朴木月, 趙芝薰 세 사람이 우리 詩史에 기여한 史的 의의를 한번 청산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1936년에서 그 이듬해에 걸쳐 『文章』지를 거쳐 나란히 등단한 세 시인의 앤솔로지 『靑鹿集』이 1946년 6월 간행됨을 계기로 '靑鹿派'란 명칭이 정립되었다. 이름만의 流派가 아니라 우리 詩史를 통틀어 이만큼 공통된 생리와 특질을 표출할 수 있는 流派는 지금껏 없었던 것이다.
'靑鹿派'라는 하나의 에콜로서의 특질과 그 안에서의 각기 다른 개성적 면모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먼저 '靑鹿派'가 탄생되기까지의 우리 나라 詩史의 주된 유파와 그 기복의 과정을 살펴보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역사적 흐름이 '靑鹿派'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어떠한 요소와 현상을 흡수하였고 어떠한 것을 거부하고 버렸는가를 알아보는 일이 先行되어야 할 것이다.
Ⅱ. 靑鹿派의 詩史的 背景
1910년대까지의 詩, 소위 唱歌, 新體詩란 장르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詩歌는 시사적인 견지에서 충분히 재고되어야 한다. 唱歌나 新體詩가 詩로서의 요인을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 하는 문제부터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개화초기라 하더라도 또한 아무리 논급한 대상이 그것밖엔 없다 하더라도 唱歌나 新體詩만을 이 시대의 대표적인 것으로 추켜들고 발표된 모든 것을 다 거론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10년대를 하나의 古典詩歌의 末期로 보고 末期的 현상을 병행시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民謠나 時調 같은 전래적인 우리의 詩歌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이, 오히려 민요나 시조보다도 詩的 本質을 잃어버린 공허한 형체만을 매만진다는 것은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1920년대 후기의 素月의 詩나 1930년대의 主流的인 詩와의 맥락을 위해서라도 韓國的인 詩歌的 傳統은 외래적 사조 및 그 방법과 아울러 그 시대마다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1910년대의 唱歌나 新體詩는 그 동안의 文學史에서 부당한 우대를 받아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1920년대의 詩는 1920년대 소위 新詩란 이름으로 나타난 시 아닌 시에 대한 철저한 거역과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시 아닌 시에 대한 拒逆에서 출발한 詩였기 때문에 1919년 全民族的인 울분으로 폭발한 3·1運動에 즈음하여 民族的 感興의 詩 한 편도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기현상은 물론 일제의 잔악한 탄압 아래서 어절 수 없는 일이라고도 보겠지만, 가령 1910년대의 시가 시로서의 正道에서 태동한 것이었다면 3·1運動을 전후한 시기의 시에서 우리는 적어도 獨立宣言書에 비길 만한 시 한 두 편을 읽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1920년대 前期의 '白潮派'를 중심한 韓國詩의 양상도 그렇게 감성에 병들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1920년대의 詩는 1910년대의 詩에 대한 반발로서 철저하게 주관적인 情感 속으로만 파고들었다. 거기에 世紀末的인 風潮의 流入과 一次世界大戰이 끝난 뒤의 戰後的인 니힐리즘은 이 땅의 植民地的 감성과 혼합되어 1920년대 前期 詩의 공통된 특질로 나타났다. 병든 침실이었던 1920년대의 詩에서 그래도 추릴만한 것을 찾는다면, 첫째 뿌리가 어디에 뻗쳐 있는 것이며 어떻게 숨쉬어야 한다는 것을 부실한 대로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며, 둘째 韓龍雲·金素月같은 詩人을 얻게 된 것이 이 시기의 수확이었다.
萬海는 이념적인 지향을 여성적인 느낌을 가지고 詩로서 충분히 형상 해주었고, 素月은 개성적인 감정을 韓國的인 음률로 구성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두 詩人은 詩로서 지녀야 할 本質的인 것을 무엇보다도 先行시킴으로서 1920년대의 시가 다음 시에 작용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 것이다.
1920년대 後期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詩는 또 하나의 異端의 流入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다. 日帝에 대한 抗拒라는 명분에 편승하면서 유행성 열병처럼 휩쓴 프롤레타리아문학의 侵入이 그것이다. 구호와 같은 외침과 공소한 이론으로 벌인 소란한 논쟁만을 일삼고 끝내는 작품다운 작품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자체내의 분열로 퇴
조해 버리긴 했으나 이로 인한 충격과 이에 대한 반발은 큰 것이었다.
'海外文學派', '時文學派'의 등장은 바로 이 異端에 대한 반발이 직접 동기가 되었다. 특히 '時文學派'는 1930년대의 詩를 새로운 한국의 詩로 출발시킨 뚜렷한 공헌을 해 주었다. 1920년대의 詩와 1930년대의 詩의 경계선을 진하게 그어 놓은 것이다. 그 意義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순수한 詩에 대하여 뚜렷한 의식을 가진 점이다. 이것은 1920년대의 詩가 1910년대의 詩에 대한 반발로서 가진 自覺과 비슷하지만, 1920년대의 詩는 그 반발의 대상이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에 外來的인 힘에 의지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다시피 하면서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던 반발임에 비하여, 1930년대의 詩는 외부로부터 侵入해 온 이론으로 무장된 異端을 주체적인 自覺과 信念으로 물리쳤던 것이며, 그리하여 순수한 詩의 성역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詩의 言語에 대하여 깊은 자각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自然發生的인 情感의 流露에 의지해 온 1920년대의 詩에 복귀한 것이 아니라 다른 自意識을 강하게 부정하고 나와 순수한 詩가 갖추어야 할 현대적 면모에 대하여 自覺과 모색을 가졌던 것이다. 詩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를 깨닫는 한편,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표현의 방법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과 실천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韓國의 言語를 현대의 詩語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개시했던 것이다. '時文學派'의 현대적 성격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韓國 現代詩의 起點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永郞은 個性的인 정서의 韻律的 재고성에 몰두하였고 芝溶은 現代的 感性으로 韓國的이며 東洋的인 멋과 감성의 세계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韓國의 詩語들이 詩에서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매력을 창조하였으며 그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뒤이어 金光均을 선두로 한 이 모더니즘의 시위는 확실히 淸新한 것이었으며 그들대로의 기점인 이미지즘과 그에 따르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소재를 都市와 現代의 기계문명에서 구하고 시선은 밝은 면만을 좇으려 하였다. 굳이 어두운 현실과 꾀죄죄한 韓國的인 것을 외면한 이들의 지향은 그만큼 코스모폴리탄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대적인 세계성을 띤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流行的인 生命力을 출발부터 매포하고 있었다. 도시와 현대의 기계문명이 구국적인 것이 못되며, 오히려 영원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갈등과 대립되는 否定的인 대상이 되어 갈수록, 또한 밝은 면보다 오히려 더욱 어두운 면만이 늘어만 가는 것이 도시와 현대의 기계문명이라는 것을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떠한 生命的인 것도, 아무 慰安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화려했던 쇼윈도우에서 얼마 가지 않아 때늦은 유행 모우드를 보는 서글픔을 갖게 되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모더니즘은 그러한 流行的 生命을 내포한 채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한 凋落이 시작되었을 때 모더니즘은 그렇게도 크게 소리치며 갈망했던 감정의 눈물 속에 스스로 다시 파묻히고 말았다.
그들의 시의 방법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芝溶에 의하여 개척된 것이었으며 다만 素材로서의 言語를 都市文明 속에서 찾았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용이 자기 세계를 찾기 위하여 스쳐지나온 과정이었던 한 世界를 이들이 새삼스럽게 클로우즈업시켜 그들의 온 世界로서 들고나선 데에 바로 단명의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매력은 그리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1930년대 後期의 詩는 모더니즘과 새로운 지향을 하는 詩人들로 夜市와 같은 성황을 이루었다. '時文學派'가 이루어 놓은 든든한 터전 위에서 詩의 숲이 무성할 수 있었던 것이 1930년대의 詩壇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後期의 숲을 多血한 몇몇 詩人들이 뚫고 나왔다. 柳致環, 徐廷柱, 吳章煥 등 몇몇 詩人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靑鹿派'의 詩人들은 이러한 시기에 거의 나란히 나타났다. 우연히도 이들은 공통된 고향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 내지 '자연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순수'이기도 했다. 잃어버린 하늘과 딛고 설 땅을 빼앗긴 상황 속에서 또다른 고향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고향을 찾았다. 그곳에서 세사람은 서로 만나 같은 血綠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靑鹿派'의 탄생이었다. 詩史的으로 이들이 직접 반발한 것은 모더니즘이었다. 모더니즘이 인간의 심장으로서 문명과 공허한 재치에 반항하였다면, '靑鹿派'는 자연으로서 도시와 위험한 文明時代에 대립하여 하였다. 그리하여 절박하고도 유랑한 현실과 문명을 거부하고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찾으려 한 것이다.
1920년대에는 日帝의 文化政策이란 위장된 美名 아래서 그런 대로 가는 호흡이나마 가능했다. 그러나 日帝는 점점 침략의 야망을 노골화하여 이 땅을 완전히 점유하고 모든 문화까지도 抹殺할 뿐 아니라 침략의 면모를 동양 전체를 향해 뻗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절박한 때인 1939년 우리 나라 문학의 마지막 등불처럼 타고 있던 『文章』誌를 통하여 '靑鹿派'의 세 詩人은 나타난 것이다. '時文學派'가 이루어 놓은 토양 속에서 필요한 것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더니즘에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자연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혹은 1920년대의 시를 청산한 素月의 율조를 재음미하기도 하고, 혹은 지용이 개척한 방법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지만 '時文學派'가 표현
의 방법에만 치중하여 등한히 한 韓國의 詩가 지향할 고향과 같은 것을 찾기 위하여 새로운 자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음악, 새로운 정자를 찾아 이들의 시는 출발하였고 각기 자기대로의 작업을 통하여 한 에콜로서의 특색 있는 업적을 이루어놓은 것이다.
Ⅲ. 朴斗鎭의 詩世界
朴斗鎭은 1936년 6월『文章』誌에 <香峴>, <墓地頌>이 推薦됨으로써 등단하였다. 이때 芝薰은 이보다 앞서 同年 3月號에 <古風衣裳>으로 첫 추천을 받고 있었다. 斗鎭은 '靑鹿派' 세 詩人 중 제일 먼저 詩壇에 등단하였다.
斗鎭은 '新自然'이란 새로운 세계를 가지고 청신한 시적 체취를 풍기면서 나타났던 것이다. '靑鹿派'의 공통된 世界가 '自然'이라면 斗鎭이 그 중심적 존재일 것이다. 斗鎭의 자연 배경은 주로 '山'이었다. 더불어 '하늘'과 '해' 다음에 '바다'로 퍼져 갔다.
推薦期의 작품들도 그렇지만 初期 작품들의 대부분이 산을 배경으로 한 <靑山道>, <靑山에>, <山아>, <숲> 등이 있다.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골 골이 장송 들어섰고 머루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윽새풀 우거진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香峴> '山'이 있다. 모든 날짐승 길짐승을 거느리고 모든 식물을 품에 안은 '山'은 斗鎭 의 자연 속에서 가장 싱싱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海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다'는 憧憬의 대상으로서 혹은 '해'나 '하늘'과 더불어 이데아의 세계 또는 그 배경으로서 전개되고 있다.
「나만 혼자서 그리는 하늘. 나만 혼자서 그리는 사람. 그리는 사람과 구름을 밟고, 나란히 층층계 올라가 본다. 머얼리 따로 있어 생각하는 이 바다로 걸어가며 생각하는 이 당신의 가슴으론 해가 오리라」
------<海愁>
산을 중심한 斗鎭의 '자연'은 현실과 인생에서 물러나면 으레 돌아가는 귀의의 대
상이던 동양의 자연 그대로는 아니었다.
「朴斗鎭의 特異性은 그의 究竟的 歸依가 다른 東洋 詩人들에서처럼 自然에의 同化法則에 의하지 않는 데 있다 그도 물론 자연의 품속에 들어가 살기는 한다. 그리고 "永遠의 어머니"라고 부르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시 "다른 太陽"이 솟아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메시야>가 再臨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金東理, 『文學과 인간』<自然의 發見>(三家詩人論)에서
斗鎭의 '자연'의 본질을 잘 究明해 주고 있거니와 '다른 태양'---이 솟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바로 '메시야'의 再臨을 기다리는 것으로 직결하기에는 斗鎭의 '해'나 '하늘'은 너무나 자연적이다. 斗鎭의 시에서 그의 의식과 갈구는 篇마다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宗敎的'이라고 결론지어 버리기엔 너무나 自然的이라는 말이다. 즉 宗敎的인 이데아에 이르고자 하는 目的意識에 앞서 詩의 세계로서의 그의 '자연'을 먼저 창조하고자 한 곳에 斗鎭의 시가 의의를 갖는다. 또한 그의 이데아 前의 '자연'에서 斗鎭은 芝薰·木月과 血綠을 맺게 되는 것이다.
「내 시가 그 出發로부터 너무도 벅찬 意慾을 갖었음에도 不拘하고 그 素材나 形象을 自然에서 구하고 自然의 것을 빌어오게 된 것은 내 오래고 生來的인 어려서부터 받은 自然의 感化와 一切의 죽은 것, 생명이 없는 것, 都市的이고 人工的이고 末梢神經的인 것, 너무 人事에 치우치고 무기력한 것… 」
-----朴斗鎭, 『詩人의 故鄕』<나의 推薦時代>에서
斗鎭이 시의 素材나 形象을 '自然'에서 찾은 이유를 밝히고 있는 이 말에서 또한 이미 있어 온 詩들에 대한 반발의 자세도 알아볼 수 있다. 자연의 본질에 대하여 斗鎭은 다른 곳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擧論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의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은 自然性을 떠나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더 자연적이고자 하는 노력을 말합니다. 여기에 내가 말하는 것은 물론 소박한 자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는 자연, 사랑과 생명의 원리에 서 있는 자연, 다시 말하면 살아 있고, 아름답고, 생명이 있고, 질서가 잇는 한 실재- 온 우주에 편만해 있고 그 속에 내재해 있고 그 위에 초월해 잇는 한 법칙, 생명과 사랑의 본질과 그 속성과 그 실재성, 그 주재자의 의지, 그러한 섭리에 조화하고 참여하고 통일하고 귀일하고, 그것으로 꽃피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 朴斗鎭, 『나의 詩 나의 詩論』에서
이렇게 斗鎭의 자연은 소박한 자연현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永遠에 이르는 그것의 主宰者요 생명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빛과 참과 善과 美意識 그 근원으로서의 自然이었다. 때문에 斗鎭은 그 자연 안에서 전적인 긍정과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밝은 내일의 象徵인 '해'를 발돋움하여 목청을 돋우며 불렀던 것이다.
斗鎭은 또한 1930년대 後期에 이르러 자기가 詩를 쓰게 된 동기와 자연을 택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民族的인 참담한 現實에 對한 政治的 의식과 反抗意識, 어쩔 수 없는 强壓에 대한 억울한 忍辱 乃至는 어디 두고 보자고 벼르는 特期態勢가 이 당시의 내 詩들의 주요한 창작동기였고, … 이러한 情勢에서 打開된 시의 길이 政治나 社會나 世界보다는 그 唯一한 血路를 自然에다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前揭書, 『詩人의 故鄕』<詩話閑題>에서
이 創作動機와 또한 자연을 택한 이유의 일면은 '靑鹿派'의 다른 詩人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서 택한 '자연'속에서 斗鎭은 거룩한 힘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지고한 이데아를 지향, 시의 순수한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식과 더불어 절망적이고 무기력하고 암담한 눈물을 극도로 기피하면서 보다 더 줄기차고 억세고 끝까지 밝은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소망과 염원과 동경의 정자를 노래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고자 한 것이다.
斗鎭은 그의 자연 속에서 宗敎的 信念을 더욱 시로써 승화시켰고 개인적인 情感이나 感動보다도 다수의 인간에 보편 하는 정감과 감동을 노래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는 개방적인 목소리였다. 初期詩의 대부분은 산문체이면서 반어와 유음 등으로 독특한 운율을 창조하였다.
인간과 사회 현실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된 中期에 들어서면서 斗鎭의 시는 더욱 이념적인 불굴한 자세로서 불신에 대해선 더욱 뜨거운 信念을 吐露하고 不義와 不正에 대해선 불같은 抗拒로 나타났고 暗黑은 정면에서 부정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자연'에서와 같이 사회에 들어와서도 자기의 지향을 견지하고 더욱 적극화하면서 詩人으로서의 참다운 자세가 무엇인가를 시범하였다.
이 무렵의 시는 그 이전의 시에 비하여 더욱 길어지고 관념이 표면에 자주 드러나고 說得性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종교의 문제도 개체적 내면에서 다루어졌고 자연도 광활한 자연이 아니라 '장미'의 개화나 낙화의 순간의 내면성과 그 永遠性을 追求하고, '인간'도 서로 따뜻한 피의 온기가 통하는 구체적 인간 사이의 공감을 차분하게 노래하고 있다. 시의 방법도 다양해지고 이데아에의 지향도 직선적이 아니다. 다양한 매력과 정신적인 뒷받침을 갖추면서 더욱 깊은 사색으로 이끌어 주는 斗鎭의 시가 발전해 온 과정은 그 외 여러 作品集이 잘 설명해줄 것이다.
斗鎭의 詩集으로는 『靑鹿集』(1946.6) 이후 處女詩集 『해』(1949)가 나왔고 第二靑鹿集과 같은 『現代詩集』Ⅲ(1950, 徐廷柱와 '靑鹿派' 三詩人)에 이어 『午 』(1953.7), 『朴斗鎭詩選』(1956.10), 『거미와 星座』(1962.2), 『人間密林』(1963.8), 『하얀 날개』(1967.12) 등이 있다.
Ⅳ. 結論
1998년 9월 16일 [靑鹿派]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박두진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청록파 3인 가운데서 60년대에 조지훈. 70년대에 박목월이 떠난 뒤 오직 한 분이 남아 계셨던 것이다. 現代韓國文學史에서 다른 시인들을 말할 때는 시인 하나 하나를 말하지만 청록파 세 시인은 으레 한꺼번에 말하는 대상이었다.
그 분의 基督敎的 意志는 60년대 思想界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그 이래 軍事政權에의 默示的 抵抗은 우리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박두진 시의 율격과 박자를 이루고 있는 歌辭的 긴장은 그의 文學에서 일관된 특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文壇에는 그 분과 같은 원로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現代韓國文學史는 辛苦가 많은 文學史이다. 이런 文學의 세월을 살다가 이 세상의 일을 다하고 떠나시는 박두진 선생 뒤에서 우리는 悲感에 젖는다.
그의 시는 基督敎的 이상과 倫理 意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自然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人間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다. 日帝末 暗黑期에 현실을 주검, 무덤으로 파악하던 그의 시는 하늘, 해, 바다 등 자연에서 그가 동경하는 이데아를 읽어냈다. 光復後에는 투철한 현실인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그는 고비 때마다 사회문제로 발언해온 대쪽같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담시 [오적]
재판땐 법정에서 김지하를 옹호했으며 노년에도 '오늘 우리 文學의 병은 사상적 도피 현상과 비평의식의 결여, 무내용한 언어유희와 말초'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질타했었다. 노년의 박두진은 그의 시세계의 출발인 基督敎 정신과 신앙심, 그리고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로 회귀했다.
'70이 되니 마음먹은 대로 시가 좀 써지는 것 같다'던 시인은 74세에 신작시집 [빙벽을 깨다]를 낼 정도로 열정을 보여줬다. 그는 46년 낸 공동시집 [청록집]을 필두로 [거미의 성좌], [고산식물], [서한체], [수석연가], [박두진문학전집] 등 다수의 作品集을 남겼다.
그는 특히 연세대 국문학과 등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깡마른 체구, 단아한 얼
굴로 '겉은 엄해도 속은 그지없이 따뜻한' 스승으로서 후학들에게 큰 가르침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 노래부른 '무덤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등단작 '묘지송')처럼 오래도록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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