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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by 소이나는 2009.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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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속(巫俗)의 정의

  무속은 민간층에서 무를 중심으로 하는 전승적(傳承的)인 종교적(宗敎的) 현상(現像)으로서 민간신앙(民間信仰)의 한 형태(形態)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巫)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층의 전승적인 종교적 현상을 무속이라할 대, 어떤 것을 무로 본다는 무의 성격한계(性格限界)에 따라 무속의 성격이 결정된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무의 남녀 성별을 구분해서 무(巫)와 *으로 표기(表記)했고, 한국에서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무*이라 표기되어 무의 남 여 성별을 구분하여 여무(女巫)를 무(巫), 남무(男巫)를 *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으며, 이와 같은 용어가 근래에도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 현재 국내에서 지역별로 무(巫)의 성격과 명칭상의 차이가 있으며, 이에 대한 하게의 견해차문제가 있다.

 1)무의 정의

  무(巫)라고 하는 것은 다음의 네가지 기능을 전제(前提)로 한다.
  무의 첫째 요건은, 무가 되는 것은 성무과정의 시초(始初)에 신의 초월적인 열역을 체득하는 신병체험(神病體驗)을 거쳐 신권화(神權化)하여 신과 교통(交通)할 수 있게 된다.
  무의 둘째 요건은, 신병(神病)을 통해 획득한 영통력(靈通力)을 가지고 신과 만나는 종교적 제의(祭儀)로 굿을 주관할 수 있는 자(者)라야 한다.-여기서 말하는 굿은 무의 정통한 종교적 표현의 행위적 현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무의 셋째 요건은, 위 두가지 요건을 기반(基盤)으로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서 민간층의 종교적 지지를 받아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라야 한다.
  무의 넷째 요건은 무의 신앙대상신이다.-성무 초기에 어떤 신을 어떻게 체험하여 그 신을 어떻게 신앙하느냐 하는 문제다. 무가 신병을 통해 체험하는 신은 산신(山神), 칠성신(七星神), 천신(天神), 용신(龍神) 등 자연신 또는 장군신(將軍神), 왕신(王神) 등이고, 무가 소망을 소원(所願)하는 신앙싀식인 굿에서 이들 자연신을 대상으로 한다.
  무의 성격을 위 네가지 요건으로 한계를 지을 때, 무가 되는 첫째 요건이 신병에 의한 영통력(靈通力)이며, 또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로 공인되는 것도 이 영통력에 의한 것이라 보인다. 그렇다면 무와 같은 신병체험을 통해 영통력을 얻어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독경자(讀經者)나 또는 무의 신병과 유사(類似)한 기독교(基督敎) 교회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령체험현상은 무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할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무(巫), 독경자(讀經者), 교회의 성련체험자 이들 삼자가 모두 무의 신병과 같은 불가사의한 종교적 체험에 의해 영통력을 얻어 비범한 신권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무의 네가지 요건중에서 두 번째 요건인 무의 정통한 종교적 제의로서의 굿, 네 번째 요건인 무의 신앙대상신과 이 신에 대한 신앙의식으로서의 굿 즉 무의 전통적인 종교적 표현수단이 전제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는 그들의 신앙대상신인 자연신을 대상으로 한 굿으로, 독경자는 그들의 신앙신인 신장계통(神將系統)의 신을 대상으로 한 독경의식으로, 성령체험자는 그들의 신앙신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교회의 예배로 자기의 전통적인 조교적 배경에 의해 전통적인 종교적 표현을 하는 개성적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2) 무의 한계
  현재 한국에 분포되어 있는 무를 성격상으로 구분하면 항신무(降神巫)와  세습무(世襲巫)로 크게 두 계토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성무 초기에 신병을 체험하여 신의 영력을 얻어 이 영력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 운명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후자는 영력과는 관계 없이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 무의 사제권(司祭權)이 세습되어 인간의 길흉화복 운명을 제의(祭儀)를 통해 신께 소원하는 사제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 전자의 영력을 소지한 항신무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후자의 사제기능만을 소지한 세습무는 남부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앞에서 논의된 무의 성격 기준에 의하면 먼저 항신무가 이 무의 기준에 해당한다. 그러나 항신무 중에서도 똑같이 신병을 체험하여 영력을 얻어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도 무의 정통한 굿을 주고나할 능력이 없어 자기들 나름의 임기응변으로 제의를 하거나 또는 독경식에 의존하는 선무당, 명두, 동자 등은 성격상의 차이를 보여 항신무 계통의 조통한 무로 보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굿이 무의 정통한 종교적표현의 제의로 무가 독경자나 기독교 성령체험자와 구별되는 개성적 표현으로서 무의 굿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선무당, 동자등을 항신무의 이차적인 무로 보고, 일차적인 무로는 중부를 포함한 북부-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북부에 분포된 무당, 박수류가 해당된다. 이 무다, 박수는 신병체험을 통해 영력을 얻어 무의 정통한 굿을 하여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항신무의 일차적 정통성을 갖는 무라 생각된다. 다음은 남부에 분포된 세습무의 성격문제로, 충청, 전라도지역에 분포된 단골과, 강원도남부와, 경상도지역에 분포된 무당, 그리고 제주도의 심방이 혈통을 따라 대대로 무의 사제권이 세습되는 세습무계통이다. 이 계통의 무는 무의 정통한 종교적 제의인 굿을 위주로 하여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의 기능을 갖고 있으나 영력을 소지하지 못하여 무당, 박수와 성격상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종교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항신무의 신비적 종교력이 호남, 영남, 등지의 남부지역이 갖는 지리 역사적 요건에의해 사회적으로 정착 제도화 되면서 무의 신비적인 영력이 점차 생기고 제의의 사제권만 남아 이것이 제도적으로 혈통을 따라 세습되고 있는 것이 세습무로 보이기 때문에 항신무계통의 정통무가 그 전승상의 역사적 변화로 성격상의 차이를 가죠오게 된 것이라 생각되고, 또 무의 종교적 제의의 개성적 표현인 정통한 굿의 기능에는 성격상의 차이가 없으므로 이 계통의 세습무도 일차적 무로 볼 수 있다.

 3) 무속의 정의
  무속은 앞에서 논의된 무의 정의와 무의 한계에 입각한 개념의 무를 중심으로한 민간층의 전승적인 종교적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민간층의 전승적인 종교적 현상이라는 데에는 민간층에서 생활을 통해 전승되는 자연종교적 현상 곧 민간신앙의 한 형태라는 단서가 붙는다. 이와 같은 무속의 종교적 현상을 가리켜 종교의 입장에서 무교(巫敎)라 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른다. 그렇다고 해서 무속이라 호칭한다 하여 종교적인 입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속이 넓은 의미로는 민간층에 의한 전승적 문화현상이라는 입장에서 일차적으로 민속권에 속하는 것이지만, 분석적 입장에서 본다면 무속이 민속권속에서도 무를 중심으로 한 민간층의 종교적 현상이므로 무속에 대한 종교적 비중을 두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4) 巫俗의 종교사적 성격
  현재 한민족의 다수 보편적 기층인 민간층의 종교는 민간신앙이다.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가 들어와 장구한 역사와 더불어 조직적 체계 밑에서 끈질기게 포교활동을 계속하였지만 불교나 유교의 경우는 소수의 지식층에 머물었고, 기독교의 경우도 도시나 일부 지방에 국한된 실정이어서 외래종교는 언제나 한국의 외적 표층의 종교로 머물게 되었다 외래종교인 도교는 아예 민간신앙 속에 용해되어 그 잔영마저 찾아보기 힘든 형편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외적 표층의 종교 이면에는 내적 기층의 종교로 민간신앙이 존재하여 외래종교가 이속으로 파고 들어갈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민간신앙이 한국의 종교적 기층을 이루어 왔다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민간신앙은 민간층의 생활공동체 속에서 자생하여 생활을 통해 전승되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종교현상이다. 따라서 민간신앙은 어떤 인위적 목적의식이나 당위성 이전에 이미 민간인의 생활현상이자 종교인 생활 그 자체인 것이라 생각된다.
  무속은 이렇게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집약된 것으로 한민독의 정신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생활을 통해 생리화한 현재의 산 종교현상이라 보인다.
  한편, 무속은 한국 전통예술의 그원을 종교적 입장에서 볼 때, 무속 속의 무가(巫歌), 무악(巫樂), 무무(巫舞), 제의(祭儀) 등 미분화된 종교적 원시예술의 종합체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국문학, 국악, 민속극 등의 분야로 분화발전되어 갈 기틀이 된 것이라 생각된다.

2. 巫의 類型과 분포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의 무는 항신체험을 통해서 성무한 항신무가 지배적인데 비해 남부지역은 혈통을 딸 무의 사제권이 세습되는 세습무가 지배적인, 무성격상의 지역적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항신무는 성립도기가 항신으로 인한 신의에 있으며 무의 주기능이 항신으로부터 얻은 영력인데 반해 세습누는 성립동기가 사제권의 인위적 세습인 동시에 무의 주기능이 영력과는 관계없이 제의를 집행하는 사제에 주력하고 있다.
  중부지역의 무(巫)는 모두 원인 모를 신병의 항신 체험을 통해 무가 되었고 또 이와 같은 항신과정에서 몸에 실린 신을 몸주라 하여 집에다 신단을 만들어 봉안(奉安)하며 영력을 내려주는 주신으로 믿고 있다. 이들 항신무는 영력으로 점을 쳐 미래사를 예언하며, 제의에서는 사제인 동시에 직접 신이 몸에 실려서 신격화하여 공수를 내려 신의를 무의 육성으로 전한다. 그러나 중남부지역의 경우를 보면 혈통을 따라 조상 대대로 세습되는 사제권을 통해 인위적으로 무가 되었기 때문에 항신무와 같이 신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았으며, 신의 체험을 통한 몸주신이 없으므로 신단을 만들어서 신을 봉안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이들 세습무는 제의에서 신을 향한 일방적인 사제로 항신무와 같은 신과 사제의 일체화가 없는 이원화 상태에서 의례적으로 제의(祭儀)를 집행할 뿐, 항신이나 공수가 거의 없는 상태다. 그리고 항신무는 항신체험을 통해 신을 실제로 체험해서 무가 되었기 때문에 신의 실재를 믿고, 이것으로부터 신에 대한 구체적인 신관이 확립된다. 그러나 세습무는 신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신의 실재를 믿지 않아서 신에 대한 구체적인 신관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의 항신무의 신관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또 남부지역의 세습무는 체적인 신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신의 존재를 거의 믿지 않는다.
  중부와 북부지역에는 항신무가 분포되어 있고, 남부지역은 세습무가 분포되어 무 성격상의 지역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단 남부지역에도 명두와 같은 항신무계통이 분포되어 있으나 무의 주류는 세습무이다. 따라서 제주도의 심방은 세습무이면서 영력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세습무가 단골, 영남지역의 세습무인 무당과는 성격상의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무의 유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무당형
  항신체험을 통해 성무한 무로 가무로 굿을 주관할 수 있고 영력에 의해 점을 치며 예언한다. 중부와 북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무당, 박수가 무당형에 해당된다. 한편 무당형의 방계(傍系)로 선무당류가 있다. 이들 선무당류는 항신체험으로 성무하여 영력을 가지고 있으나 가무로 정통한 굿을 주고나할 수 없는 하위의 무로 간단한 무의인 비손을 하며 영력으로 점을 치는 것이 주기능이다. 선무당류 역시 중부와 북부지역에 주로 분석외어 있고 남부지역과 제주도에서도 간혹 발견된다. 이 무당형의 성격적 특징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항신체험과 영력의 소유
② 항신한 모주신과 그 모주신을 모신 신단이 있다.
③ 신관의 구체화 확신
④ 가무로 정통 굿을 주관하는 사제
⑤ 영력에 의한 점복(占卜)

  (2) 단골형
  혈통을 따라 대대로 사제권이 전승되어 인위적으로 성무한 세습무(世襲巫)로서 민속상의 제도적 조직성을 갖춘 무이다. - 무속상으로 관할(管轄)하는 일정한 지역과 이 관할구역에 대한 사제권(司祭權)이 제도상으로 혈통을 따라 전승된다. 이러한 무는 호남지역의 세습무 단골과 영남지역의 세습무인 무당이 있다. 호남지여그이 단골은 단골판이라는 일정한 관할구역이 있고, 단골은 단골판 안에 사는 주민인 신도들과 단일(單一)의 집합적 거래관계를 맺으며, 이 단골판에 대한 무속상의 사제권이 제도화 하여 홀통을 따라 대대로 세습되는 조직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 영남지역의 세습무 무당은 무속상의 사제권이 혈통을 따라 대대로 세습되고 있으나 단골판과 같은 관할구역제가 희박한 것으로 보이는 남부지역의 영남지역에 무의 관할구역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단골형의 무는 제도화된 무라는 특징이 있는 반면에 영력이 없어 제의의 일방적인 사제의 기능을 갖고 있다 단골형 무의 성격적 특징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혈통에 의한 사제권의 세습
② 사제권에 의한 일정지역관할권의 전승
③ 무속상으로 제도화된 점
④ 항신체험이 없어 영력이 없으며, 그래서 구체적인 신관이 학립되어 있지 않다.
⑤ 신을 향해 일방적인 가무로 정통 굿을 주관하는 사제

  (3) 심방형
  단골형과 같이 무의 사제권이 혈통을 따라 대대로 전승되는 세습무로서 무속상 제도화된 일면을 보이면서 영력을 중시하여 신에 대한 구체적(具體的)인 신관이 확립되어 있는 무다. 이와 같은 무는 제주도에 분포되어 있는 세습무인 심방이다. 심방형의 무는 단골형과 같이 사제권이 제도상으로 혈통을 따라 세습되어 인위적으로 성무(成巫)하나 단골형이 신에 대한 인식(認識)이 극히 희박한 데 반해서 심방형은 영력을 중시(重視)하며, 신관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어 있다는 점이 단골형과 다른 심방형의 차이이다.
  그리고 심방형이 무당형과 같이 영력을 중시하고 신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나 심방형은 무당형과같이 신이 직접 몸에 항신하지 않고 제의(祭儀)에서 무점구(巫占具)를 통해 신의(神意)를 물어 전달한다. 이상과 같이 심방형이 단골형과 다른 점이 있으면서 또 무당형과도 다른 이 두가지 차이점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고, 이 양자의 특징을 종합해 보면 심방형은 단골형과 무당형의 중간형이란 귀결점(歸結點)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심방형이 제의(祭儀)에서 무당형과같이 신(神)과 무(巫)가 일원화(一元化)하지 못하고 단골형과같은 이원화(二元化)된 위치에 있는 점으로 보아 단골형 쪽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심방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혈통에 의한 사제권(司祭權)의 세습, 제도화
② 영력을 중시하며, 신의 인식이 ㅣ확고하여 구체화된 신관이 확립되어 있으나 자가의 신단은 없다.
③ 직접적인 항신(降神), 교통(交通)이 없이 무점구(巫占具)를 통해서만 신의를 물어 점(占) 침
④ 신을 향해 일방적인 가무(歌舞)로 정통 굿을 주관하는 사제(司祭)

  (4) 명두형
  인간 사령(死靈)의 항신체험을 통해서 된 무인데. 체험된 사령(死靈)은 혈록관계(血綠關係)가 있는 어린 아이가 죽은 아령(兒靈)으로 대개 7세 미만의 사령(死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6세 전후의 사령도 있다. 명두형의 특징은 몸에 실린 사령을 자가의 신단에 모시고, 필요할 때 이 사령을 불러 영계(靈界)와 미래사를 탐지(探知)시켜 점(占)을 치는 것이다. 여아의 사령을 명두, 남아의 사령을 동자 또는 태주라 하며 이 사령이 실린 무도 각각 명두, 동자 또는 태주라 부른다. 이와 같은 명두형의무는 남부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중부와 북부지역에도 산발적(散發的)으로 분포(分布)되어 있으며, 특히 호남지역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명두형이 무는 원래 사령(死靈)을 불러 점을 치는 것이 전문인데, 근자에 이르러 무의 제의(祭儀) 영역까지 침범하여 정통무와 명두형 무 간의 대립의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명두형의 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사아령(死兒靈)의 항신(降神)
② 사아령(死兒靈)에 의한 점복(占卜)의 전문(專門)
③ 사아령(死兒靈)의 초영술(招靈術)
④ 가무(歌舞)에 의한 정통 굿의 주관이 불능(不能)

  명두형이 무당형과 동계의 항신무계통으로 볼 수 있으나 무당형의 항신대상이 대체로 일반적인 자연신인데 비해 명두형의 항신 대상은 특정한 혈록관계의 사아령인 점이다. 그리고 이 사아령(死兒靈)을 특별한 의식이 없이 자유자재로 불러 점을 치는 초영술도 명두형의 특징적 성격으로 꼽을 수 있다.

3. 무의 지역적 특징

  무의 제의면에서 볼 때 중부와 북부지역 항신무의 굿과 중부지역 세습무(世襲巫)의 굿에서도 차이가 있다 항신무가 제의(祭儀)에서 신이 내려 신격화(神格化)하여 일원화하는데 반해 세습무는 신을 향한 일방적인 사제(司祭)로 신과 무의 이원화 현상을 보인다. 이와 같은 영력의 유무(有無)를 기점(基點)으로 다음과 같은 제의 양식상의 차이가 발견된다.
  세습무의 제의에는 신의 하항로(下降路)를 상징하는 신간(新刊)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제장(祭場)에 설치한다. 제주도 심방제의의 십왕(十王)대, 수릿대, 굿문기, 호남 단골제의의 곳대, 명두대, 혼대, 영남 무당제의의 처낭대, 혼대가 다 대형의 장간(長竿)으로 제장에 세워진다.
  그러나 중부와 북부지역 항신무의 제의에는 대체로 위와 가은 대형의 신간(神竿)이 사용되지 않거나 간소화(簡素化)된 상태이다. 그 이유는 항신무에게는 항신이 자유자재이므로 굳이 성역을 표시하는 신(神)의 하항로(下降路)인 신간(神竿)을 제장에 세울 필요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습무에게는 신의 항신이 어려워서 인위적으로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신의 하항로를 상징(象徵)하는 대형의 신간(神竿)이 발전되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잔재(殘在)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중부와 북부지역 항신무의 무복(巫服)은 各 제차(祭次)마다 개개 신의 신복(神服)을 상징하는 무복(巫服)이 각기 있어서 무 하나가 12종 내지 20종의 무복을 제의(祭儀)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남부지역 세습무(世襲巫)의 경우는 무복이 2∼3종 정도이며, 호남지역 단골의 경우는 무복(巫服)이 퇴화해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상태다. 이와 같은 항신무와 세습무의 무복 차는 앞에서 본 신간(神竿)과는 정반대의 대조적 현상이다. 항신무에게는 항신의 영력을 얻기 위해 제의(祭儀)에서 자신이 신격화(神格化)해야 되기 때문에 신복(神服)으로서의 무복(巫服)이 발달하게 된 것이며, 세습무의 경우는 영력을 소지하거나 신격화할 필요성이 없이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일방적인 사제(司祭)였기 때문에 신복으로서의 무복이 사용되지 않게 되자, 무복은 저찬 의례복(儀禮服)의 기능으로 전락(轉落)해 과정이라 생각된다.
  무(巫) 제의(祭儀)의 가무(歌舞) 면에서 보아도 장고(長鼓), 징 꽹과리, 제금 등의 타악기(打樂器)를 위주로 가무의 가락과 속도가 빠르며, 세습무는 위의 타악기 외에 피리, 젓대, 호적(胡笛) 등의 악기와 가야금, 아쟁 등의 현악기(絃樂器)가 사용되어 가무의 가락과 속도가 차이를 보인다. 즉 북쪽의 항신무는 타악기 위주로 가무(歌舞)의 가락과 속도가 빠르면서 몹시 흥분된 도무(跳舞)가 따르며, 남쪽 세습무는 타악기 외에 다른 악기까지 다양하게 동원되어 가무의 가락과 속도가 차이난다. 징, 꽹과리, 제금 등의 금속 타악기는 무의 심경(心境)을 자극해서흥분상태로 몰아 망아경(忘我境)으로 들어가 항신의 환상을 촉진시키므로 항신무가 주로 금속타악기를 위주로 하게 되고, 세습무의 무악(巫樂)이 타악기 외에 관현악기까지 동원된 것은 제의(祭儀)가 점차 의례화(儀禮化)하여 예술의 경지로 접근해 가고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항신무는 영력을 가지고 신과 직접 교통(交通)되지만, 영력이 없는 세습무는 제의(祭儀)의 격식에 주력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세습무 중에도 제주도 심방의 경우는 영력을 중요시하므로 무악(巫樂)의 가락이 빠른 타악기 위주이며, 항신무 중에도 경기도 일원(一圓)에서는 피리, 젓대, 가 사용되는 예외적(例外的) 사실도 있다.
  무(巫)의 성별을 놓고 남부지역과 북부지역을 비교해 볼 때, 남부지역은 남무가 우세하고, 북부지역은 여무가 우세한 실정이다. 남부 세습무, 즉 제주도의 경우는 남무인 심방이 무의 주류가 되고, 호남, 영남지역이 경우도 무의 사제권(司祭權)이 남성 위주로 전승되면서 남성이 제의 진행 전체를 관할하고 거리풀이 과정에 사제(司祭)로 직접 등장한다. 그러나중부, 북부지역 항신무의 경우는 무의 수적(數的)인 면이나 제의 주도권에 있어서 여성이 절대적이다. 간혹 남무인 박수가 있으나 수적인 면에서 아주 극소한 편이다.
  이와 같은 남부지역과 북부지역에서 서로 상반되는 무(巫) 성별상의 차이문제도 무의 영력을 기반으로 야기된 문제로 보인다.
  남부지역과 중부, 북부지역 특히 남쪽과 북쪽의 서로 상반되는 항신무와 세습무의 차이점으로 집약되었고, 여기서부터 오는 남과 북의 상반되는 무속상의 모든 차이가 무의 영력을 기준으로 해서 달라지게 된것이라 생각된다.

4. 무속의 원형

 1) 원형의 개념
  원형(原型)이란 용어가 1960∼1970년대로 들어와 한국 학계에서자주 거론 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원형의 개념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문학의 원형을 꿈과 관련시켜 영의 육체탈이(肉體脫離)로 보는가 하면 한국신화의 원형을 본(本)풀이 무가와의 관련 밑에서 본풀이-본원(本源)이 풀이로 보기도 한다.
  또 한국무속의 원형을 Mircea Eliade의 명제를 그대로 옮겨다가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 속에 있는 전체로 보기도 한다. 이상은 국내에서 사용된 원형 개념의 대표적인 용례를 단적으로 예시한 것인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원형이 개념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원형이란 용어의 개념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원형의 개념이 재검토 되어야 한다.
  원형이라는 용어는 'archetype'의 역어(譯語)로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archetype은 희랍어 arche와 tupos의 복합어에서 온 말이다 arche는 영어의 priciple 또는 beginning, original에 해당하고, tupos는 영어의 model이나 type에 해당하여, archetype은 primitive type 또는 original model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말로 prototype이란 말이 있다.
  archetype의 어의를 이와 같이 밝히면서 뽈,훌끼에는 인간의 경험이 archetype의 복사라고 했다 고브로에 의하면 archetype의 시원(始原)을 platon의 Idea로부터 보면서 이데아가 감각 세계의 존재화 사물의 archetype이라 설명하여 archetype의 시원을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본다. 고브로의 이와 같은 견해는 요란데 야코비의 경우도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archetype이라는 용어가 심리학의 용어로 사용되어 널리 알려진 것은 1919년부터 C. G. Jung에 의해서였는데, 주로 primordial imaga, dominant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C. G. Jung의 archetypus는 영원히 변치 않는 의미의 핵인 무으식의 구조지만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의식 벼화에 따라 발전하면서 다양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원형(原型)이란 용어가 C. G. Jung이 무의식의 구조라는 개념으로 사용한 이래 M.Eliade에 의해 '모범적(模範的) 모형(模型)' 또는 '모본(母本)'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제의(祭儀)가 신에 의해 이루어진 천지창조 행위를 모방 반복하는 것, 그래서 제의의 원형을 천지창조를 한 신의 행위 그 행동 자체로 보았던 것이다.
  신에 의한 천지창조 행위 자체를 원형으로 본 M.Eliade의 원형개념을 한국신화나 무가, 무속, 중국, 일본, 아니누 등지의 동양신화, 보르네오나 게르만족 신화 등에 적용시켜 놓았을 때 한국이나 다른 지역에는 그와 같은 신에 의한 천지창조 현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한국이나 다른 지역에 있는 천지시원 신화는 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이 스스로 열려 우주가 생성되는 자연 율동 그대로의 것이다. 만약 이것을 신에 의한 창조 역사 부분이 도태, 탈락되었다거나 그렇게 발전되어 가지 못한 미완성의 것으로 본다는 신학적 '도그마'가 아니고, 한국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현상적 입장, 그래서 있는 현상을 현상 그대로 순수하게 객관적 입장에 서서 보는 입장이라면 M.Eliade의 원형 개념은 한국의 현실고 크나큰 오차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M.Eliade가 원형론을 유도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용된 기본자료부터가 대부분 서양의 조직화된 종교 경전들로 신학적 도그마가 가해진 이차적 자료라는 사실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신의 행도 자체를 종교난 신화의 원형으로 본 M.Eliade의 원형이론은 그가 종교를 종교현상 있는 그대로의 현상적 입장에서 종교를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타당한 것이면서도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인위적인 종교자료나 도그마로 인해 그의 원형이론이 인위적으로 조직화된 종교에는 적용될 수 있어도, 도그마가 가해지기 이전의 원 신화나 자연종교 현상에다 그대로 적용시키려 한다면 많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2) 원본의 개념과 원형
  무속현장에서 무속의 핵으로 있는 것은 존재 근원에 대한 원질사고(原質思考) 즉 존재에 대한 원본 사고다.
  인간 존재의 영구지속을 위해 무속의 제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럴 때 무속에서 존재의 지속과 단절, 유,무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으며, 무엇이 존재의 기준이 되는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존재란 이쓴ㄴ것인데, 무속에서 무엇을 존재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영원은 시간안에 없는 시간 밖의 것인 동시에 시간이 공간의 시작과 함께 있게 된것이어서 영원은 또한 공간 밖의 것이 되어 영원은 공간과 시간의 밖에 있는 것이 된다. 영혼이 불멸의 영원존재라 믿는 것도 츅체라는 공간성과 그 육체가 지속된다는 시간성을 벗어나 육체가 차지한 공간과 시간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원이란 공간과 시간밖에 있는 것이 되어, 인간존재의 영구지속을 욕구(欲求)하는 무속사고는 공간과 시간 밖의 무공간 무시간 상태의 영원성을 중시한다. - 인간이 이 세상에 나와 잠시 머물렀다가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가서 영생하거나 아니면 다시 이 세사으로 나왔다가 또 영혼이 저승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인간의 근원을 영혼으로 보면서 이렇게 불멸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공간과 시간 조건 위에 있는 존재여서 영원존재로 만들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 무공간 무시간의 영워계로 향하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굿을 할 때는 언제나 현실계의 공간과 시간을 금지시키는 금기로부터 시작되어 굿으로 현실계를 소거시킨 다음 태초 이전의 혼돈(混沌)에서 하늘과 땅이 열리는 천지개벽신화를 구연하여 우주가 생기면서 인간과 지상만물이 생겨나는 과정을 서술(敍述)한다. 이것은 우주라는 가시적 유형존재의 공간과 시간이 시작되는 과정인데, 우주 역시 공간과 시간 조건 위에 있는 가시적 유형의 존재여서 우주 안에 있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형존재 역시 같은 공간과 시간 조건에 의한 존재라 믿고, 그 존재의 근원인 혼돈으로 돌아가 존재를 다시 획득하여 지속시켜 나가려는 것이다.
  카오스는 하늘과 땅이라는 우주의 공간과 시간이 생겨나기 이전 그대로 무공간 무시간이어서 공간성과 시간성에 의한 존재의 생(生), 멸(滅)이 없는 영원계, 그래서 존재의 무한 시발 그원이 된다. 영혼이 불멸의 영원존재인 것도 육체의 존재 조건인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무시간 무공간의 카오스 상태의 근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무속사고는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가시적 유형존재의 조건인 공간과시간을 초월해 그 유형존재의 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보는 사고다. 그럴 때 하늘 과 땅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이 시작된다는 그 시작이란 시간인, 공간과 시간 조건 위에 있는 우주 코스모스, 이런 공간과 시간안에 있는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유형존재도 시간성의 제약으로 인해 그 공간성도 영구히 지속되지 못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공간과 시간조건 위에 있는 코스모스 안에 있기 때문에 공간성으로 인한 시간성의 제약을 벗어나려고 한다.
  이렇게 존재의 영구지속을 위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 그 존재 근원인 카오스의 영원으로부터 존재를 보는 사고가 존재근원에 대한 원질사고로 이것이 무속사고의 원본이 된다. 이와 같은 원본 사고는 존재의 근원을 카오스로 보기 때문에 카오스를 또한 존재의 원질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일정한 사고의 본을 갖게 된다.
  현대인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존재를 코스모스의 공간과 시간 안으로 한정시켜 보는 평면적 존재사고인 데 비해 무속의 원본 사고는 그 존재의 근원인 코스모스 밖의 카오스 로부터 보는 입체적존재사고-그래서 존재근원인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코스모스에서 다시 카오스로 환원되는 존재의 순환체계 위에서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 순환의 본을 갖고 있다. 공간과 시간의 분화가 있는 코스모스 쪽에서 보면 이와 같은 존재의 순환성을 믿지 않아 존재를 시간과 함께 단절되는 종말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카오스 쪽에서 보면 존재는 근원적 원질의 카오스 상태로 이미 있었던 것이고 존재는 그와같은 카오스를 기반으로 순화되고 있어서 순환의 반복을 통해 코스모스의 유형존재도 단절 ㅇ벗이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존재가 이렇게 순환된다고 믿는 것은 공간도 시간도 분화되지 않은 카오스의 미분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미분성은 동일근원성의 결과를 가져와 동일근원이기 때문에 서로 바뀌어 순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순환성은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의 환원 반복을 통해 지속성의 결과를 가져와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무속 사고는 이렇게 카오스의 미분성을 기반으로 해서 입체적으로 존재가 순환 지속되어 영원하다고 믿기 때문에 카오스의 미분성이 무속사고의 원본이 되고 이 원본이 사고가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제의인 굿이라 생각된다.
  원형은만물의 근원을 시능로 보게 된 그 사고근원을 더 분석해 들어가는 견해다. 즉, 무엇 만물의 근원을 신으로 보게 하였나 - 그러니까 여기서 신의 근원과 함께 무엇이 신의 전능한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가. 이런 원질 문제를 찾는 입징이다. 그래서 원본은 원형이전의 보다 선행되는 존재의 근원 문제가 된다. 원형이 archetype의 역어로 쓰일 때 archetype의 type이란 말은 형, 유형으로 이것은 일정한 규격을 갖춘 형상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원본의 본은 근본, 근원의미 즉 일정한 규격을 갖춘 형상 이전에 그 형상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재래의 버선을 만드는 데에 버선 뽄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버선 모양으로 종이를 오려 만든 평면 종이인데, 이 종이 버선뽄에 맞추어 천을 마름질해 두 쪽을 맞붙여 꿰매 놓으면 입체적인 버선이 된다. 그럴 때 버선은 버선뽄에 의해서 일정한 규격을 갖춘 제품이 되고 이 버선이란 제품은 바지나 저고리, 또는 양말과 다른 형의 것이며 이렇게 구별될 수 있는 버선형의 기준이 버선뽄에 의해 천이 재단되었기 때문에 버선이라는 형의 근원은 버선 뽄인 본(本)이다.
  신의 창조행위를 원형으로, 그래서 존재의 근원으로 본다면 무엇이 신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하였나, 곧 신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된 사고 자체의 근원이 무엇인가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 원본이고, 이런 존재근원에 대한 원본은 카오스의 미분성이 된다.
  여기서 문제로 삼는 존재는 그저 있는 것 이라는 의미일 뿐, 특별히 존재론의 입장을 통해서 보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힌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민간사고나 무속에서 인간의 눈 앞에 형체를 나타내어 있는 것, 형체는 없지만 인간의 관념 속에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존재라는 말로 압축시켜서 사용할 뿐이다.
 이와 같은 무속의 존재,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에서 무속의 존재문제를 관찰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어서, 여기에 어떤 이론적 전제를 가지고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논리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전제된 무속현실을 갖다 맞추는 형식론적 모순을 배제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3) 무속의 원형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무속의 제의 목적이 인간의 출생, 장수, 치병, 초복, 내세 등의 소원으로 제의가 이와 같은 인간의 절실한 생존 문제를 직접 행동을 통해 보전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제의목적을 더 집약시켜 보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래 살면서 재물을 많이 가지고 편히 살고, 액운(厄運)이 없이 병이 나면 고쳐서 건강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영혼이 내세의 좋은 곳으로 가서 영생하게 해 달라고 신께 비는 것이어서 인간 존재의 영구 지속 문제로 압축된다. 그렇다면 무속의 제의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인간 존재의 영구 지속을 행동을 통해 실전화하려고 하는가. 이와 같은 제의(祭儀)의 원리 속에서 무속의 원형을 찾아 보고자 한다.

  (1) 제의(祭儀) 공간과 시간의 원의(原義)
  앞에서 본바와 같이 무속의 제의 굿은 어느 것이나 특별히 금기가 있어서 제의 는 현실의 일상적인 것과 엄격히 구별된다. 제의 공간이 현실의 일상적인 공간으로부터 엄격히 구별되어 금기가 따르는 공간이라면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이 아닌 공간, 즉 현실 밖의 공간임을 의미하게 된다. 또 제의가 이루어지는 시간도 인간이 활동하는 일상적인 낮과 구별된 밤의 시간이어서 이것 역시 일상적인 시간 밖의 시간-현실 밖의 시간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제의는 현실이 아닌 현실 밖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의 장소는 3일 또는 7일 전부터 금줄을 치고 황토(黃土)를 펴서 부정(不淨)을 가린다. 이렇게 되면 일반 사람들이 제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그 제의를 할 공간이 일상적인 현실의 공간과 엄격히 구별되는 별개의 공간적 의미를 갖게 된다. 동신(洞神)을 모셔 놓고 동신제를 지내는 동신당은 제의가 아닌 평상시에도 세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신성한 공간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부정을 가려 일상적인 현실의 연장을 차단시킨 그 공간인 제의 장소에서 제의가 시작될 때는 언제나 부정굿부터 시작하여 이 제의 공간을 다시 정화한다. 즉, 제의 3일 또는 7일전부터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제의 공간이 일상적인 현실 공간으로부터 연자오디는 것을 차단시키고, 그렇게 현실로부터 차단된 공간안에서 제의가 시작될 때는 다시 그 공간 안을 정화시켜 그 속에 남아 있는 일상적인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
  도 무속의 제의가 이루어지는 시간은 통산 밤이다. 앞의 무속의 실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울, 경기지역의 재수굿 이나 병굿 등은 낮에 하지만 이 지역에서도 황제풀이나 성주맞이 영장치기 집가심은 반드시 밤에만 한다. 이런 점은 이 지역에서 무속의 제의가 원래는 밤에 하던 것이 낮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동신제(洞神祭)의 경우는 거의가 밤에 제를 올리고 비손과 같은 간단한 제의도 주로 밤에 하는 것을 원치긍로 하고 있다 서울 지역 동신제인 당굿의 경우를 보면, 동신에게 올리는 제사(祭祀)는 밤에 하고, 당굿은 낮에 하는데, 집짓는 과정을 서술해 나가는 황제풀이는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서 밤에 하여 제의의 중요로운 과전은 밤에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호남, 영남, 제주도 드지에서도 다소 예외는 있지만 굿은 주로 밤에 하는 것을 원치긍로 하고 있다. 무당은 아니지만 경(經)쟁이, 경꾼,법사, 판수등으로 불리는 독경자(讀經者)들의 독경 의식도 밤에 한다. 이렇게 무속이 제이가 밤의 시간을 택하는 것은 밤이 일상적인 시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일상성이 차단된 시간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무속의 실천적인 행위적 방법으로 나타나는 제의는 현실께의 일상적인 공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차단된 현실 밖의 공간과, 또 그렇게 격리 차단된 현실 밖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사건들-일상적인 현실계의 공간과 시간 밖에서 행해지는 사건들이다.
  먼저 제의의 공간 의미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제의 공간은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세인(世人)의 축입이 금지되는 곳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현실의 생활 공간과 엄격히 구별되는 공간이다. 금기 표시로 치는 금줄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오른 새끼가 아니고, 왼쪽으로 꼬은 왼 새끼줄로 일상적인 것이 아님을 상징한 것이다. 또 금기 표시로 펴는 황토도 일상적인 공간에서 연장되는 흙이 아니고 이것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붉은 색의 흙, 새흙이어서 제의 공간이 일상적인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임을 상징한다. 즉, 일상적인 공간의 흙에다 다른 새 흙을 갖다 막아 놓음으로써 제의 공간을 일상적인 현실의 공간으로부터 차단 격리시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현실과 차단 격리된 공간안에서 제의가 시작될 때는 부정(不淨)굿을 하여 굿판 안을 정화하고, 물을 그 굿판 주위에 뿌리고 불을 붙여들고 굿판 주위를 돌아 태워버리는 것을 보면 제의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태워 없애고 물로 씻겨 파괴시켜 떠내려 보내 없애버려서 그 안에 남아 있는 현실 일체의 것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불은 세상을 태워서 없애버리는 소각(燒却)의 으미가 있고, 물은 홍수로 세상을 휩쓸어 없애버리는 의미로 풀이된다. 민속층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은 몇 년이고 끝없이 비가 와서 홍수가 나 세상이 물로 덮혀 없어지고 하늘과 땅이 맞붙어 버렸다가 다시 새롭게 열려 새 세상이 온다고 믿는다. 제의에 반드시 촛불을 키고 정화수를 바치며 술을 부어 놓는 것이 모두 제의 공간 안에 있는 일상적인 현실을 소거 정화시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술의 경우 물과 동계의 액체로 역시 홍수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 제의(祭儀)공간에 대한 이상과 같은 금기와 정화 소거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제의장소는 일상적인 것으로 부터의 연장이 금지된 장소, 즉 일상적인 인간의 출입이 금지되고, 일상적인 생활 공간이 연장되지 않고 차단된 장소다. 그래서 제의 공간은 일상적인 생활의 공간과 구별된 전혀 다른 공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일상적인 현실의 생활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이라면 그것은 일상적인 현실 밖의 공간, 이 세상의 현실 속에 있지 않은 별개의 또 다른 공간이란 의미가 부여된 공간-불로 태워보리고 물의 홍수로 일상적인 현실의 공간이 없어진 전혀 다른 공간이란 의미가 된다. 제의 공간이 이렇게 현실 공간이 소거된 공간이라면 그것은 공간이 없어진 무공간의 종말을 의미하게 되고, 이렇게 무공간 상태라면 그것은 공간 질서가 생격나기 이전 하늘과 땅의 공간 구별이 없는 혼돈의 카오스 상태가 된다. 제의 공간이 이렇게 일상적인 현실의 우주 공간이 아닌 카오스를 의미할 때 제의 시간이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제의를 하는 시간은 인간들이 활동하는 일상적인 생활 시간이 아닌 밤의 시간이다. 밤은 인간들이 활동하는 일상적인 낮의 시간과 엄격히 구별되는 시간으로 그 낮의 일상적인 시간이 끝나 없어진 시간인 동시에 그 낮의밖에 있는 시간, 그래서 일상적인 현실 공간밖에 있는 별개의 시간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시간이라면 그것은 현실 공간-우주 공간밖에 있는 시간, 곧 우주 공간이 소거되어서 끝난 후의 공간 속에 있는 시간, 그래서 우주공간이 끝난 카오스에 있는 시간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제의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시간은 다같이 카오스에 있는 시간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제의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시간은 다같이 카오스를 의미하는 공가노가 시간 곧 카오스의 무공간, 무시간으로 공간과 시간이 생긱 이전의 무, 카오스르 상징하게 된다. 이런 카오스의 의미는 제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언어로 직접 카오스의 상황이 서술되는 무가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천지가 혼합이 되었구나/천지개벽이 되었구나......
갑자이로 하늘의 머리 자방으로 열립니다/ 지벽어축하니 땅의 머리 축방으로 열립니다.......(제주도 무가 '초감제' 서두(序頭)

하늘과 땅이 생길적에 미륵님이 탄생한 즉/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소아/하늘은 북개꼭지치럼 도도라지고/따는 사귀에 구리기둥을 세우고/그때는 해도 둘이요, 달도 둘이요/달하나 띄어서 북두칠성 남두칠성 마련하고/해하나 띄어서 큰별을 마련하고/작은 별은 백성의 직성별을 마련하고/큰 별은 님금님가 대신별 마련하고......(함경도 무가 '창세가' 서두(序頭)

위에 글들은 무가가 불리워지는 지역의 제의에서 맨 먼저 시작되는 굿 순서에서 부르는 무가의 서두로 이 무가들은 모두 천지가 개벽되기 이전의 혼돈 카오스에서 하늘과 땅이 열려 처음으로 하늘과 땅의 공간 질서가 생기는 것으로부터 서술된다. 그래서 제의의 공간이 일상적인 현실 공간으로부터의 연장이 금지 차단된 별개의 현실 밖의 공간, 또 제의 시간이 일상적인 현실 시간과 구별되는 밤의 시간이어서 이런 제의 공간과 시간이 카오스를 의미한다는 그 상징성의 문제보다도 무가에서 언어로 직접 카오스의 상황이 서술되어 제의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시간이 카오스의 상황-하늘과 땅의 공간 질서가 생기기 이전, 이렇게 공간 질서가 시작된다는 그 시작이란 시간 질서가 생기기 이전의 카오스 상황임을 언어로 직접 명백히 말해 주고 있다.
  제의 공간이 특별히 거룩한 신성의 으미가 있는 것도 영원 그대로의 카오스가 존재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그 존재 근원에 대한 외경(畏敬)이라 풀이되고, 이 영원이 존재의 절대가치가 되어 영원성을 기준으로 일상적인 순가 세계를 의미 없는 속(俗), 영원계를 실재적인 신성으로 보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존재의 획득 지속으 ㄹ위해 이루어지는 제의의 공간과 시간으 상황(狀況)은 전연 현실계가 아닌 카오스를 의미하게 된다. 카오스는 공간과 시간의 출발점으로 공간과 시간 조건을 전제로 생성되고 멸(滅)하는 우주 존재를 비롯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시발적 근원이 되어, 제의는 이 존재근원인 카오스로 돌아가 그 존재근원에서 행하는 존재의 획득 지속 행위 현상이라 생각된다.

  (2) 무속의 존재 근원과 원본(原本)
  무속의 제의가 존재의 획득 지속을 위한 실전적 행위 현상이라는 것을 앞에서 밝혔다. 이렇게 존재의 획득 지속을 희구하는 ㅔ의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존재의 근원을 상징하는 카오스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여기서 무가가 불러져 인간의 존재 지속을 신께 소원한다-삼신에게 애 낳기를 빌고, 칠성신에게 수명장수를 빌며, 대감신이나 제신에게 재복과 행운을 빌고, 명부 십대왕에게 내세의 영생을 빈다. 그런데 제의가 이와 같이 산아나 수명, 재복을 맡은 해당 신에게 존재 획득과 지속을 소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와 같은 제의가 언제나 카오스를 상징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카오스를 서술하는 무가를 부르는 그 카오스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카오스가 무공간,무시간의 영원 그대로 공간과 시간질서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어 이 공간 질서 안에 있는 만물의 존재근원이 되기 때문에 이 근원인 카오스에서 존재 획득을 위해 제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에서 논의 되었다. 그러면서 앞에서 본바와 같이 존재의 획득을 소원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신이다. 이럴 때 존재의 근원이 신인가, 카오스인가. 신이나 카오스가 존재의 근원이라면 그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 신과 카오스의 상관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런 존재의 근원 속에서 무속의 존재 원본이 밝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5. 결론

  무속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 뿌리를 찾는다거나 한국사상의 근원을 찾으려 했던 것이 지난날 선학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관심사는 방법론의 모색을 구상 내지 동경하면서 관심사에 머물러 온 느낌을 준다.
  무엇이 무속을 한국인에게 살아 있는 현재적 종교현상으로, 그리고 뿌리 깊은 전통적 기층문화현상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은 정작 분석되지 않았다. 본 연구의 성과로 얻어진 원본 사고의 미분성으 ㄴ미분성에 기반을 둔 동일성에 의한 순환지속성의 결과를 가져와, 영원존재를 희구하는 민간인의 심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결과가 되어 무속이 민간인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원인이 밝혀졌다. 또한 원본 사고의 미분성이 사고, 언어, 행동을 통해 형상화 한 것이 무속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져 무속의 구심적 핵이 포착되었다. 이런 아키패턴의 미분성은 무속뿐만 아니고 일반 민속과 민간인, 현대인의 심성 속에서도 두루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이어서 무속과 일반 민속, 그리고 민간인가 현대인에게 각기 그 심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 기계가 되어 자연적 상황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 한 원본 사고의 미분성도 인간의 심성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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