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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와 윤리

by 소이나는 200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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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임신은 보통 한 부부가 품어 온 자녀와 가정에 대한 희망의 실현으로 생각된다. 또한 임신을 하게 되면 이것은 부부지간의 깊은 자연적 본능의 실현이요 순수한 욕망의 성취로서 부부의 한몸됨을 인간적 형태로 구체화하는 것이기에 두루 환영을 받게 된다. 임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든 지간에 그것은 가장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의 기쁜 사건, 즉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데, 자녀를 갖게 된 부부생활은 그것이 원하던 바이기 때문에 환영을 하게 되고 특별한 애로점이 없이 순탄하게 분만이 된 것을 기뻐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임신이 이런 이상적인 형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예기치 못하거나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도 있고 또 다른 경우는 계획하고 원했던 임신이라도 태아의 건강이나 산모의 건강, 또는 이 둘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불구로 인해 몇 가지 관점에서 위협을 받게 될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 임신 중절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이같은 상태만이 임신 중절에 관련된 복잡한 문제를 적절하게 지적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만일 논의의 출발에 있어서 우리가 낙태논쟁으로 집약되는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동시에 낙태수술을 보통 정당화하는 여러 지시사항을 동일시한다면 아마도 문제를 잘못 과장하거나 혼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Ⅱ. 본론
연간 150만건의 낙태, 기혼자 2명 중 1명이 낙태경험이 있다는 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이러한 낙태의 이유가 지나치게 사소한 이유라는 사실 또한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낙태논쟁은 그것을 생명론자(낙태를 절대 불가하는 입장)와 선택론자(낙태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 낙태 논쟁은 다른 생의 윤리와는 다르게 ① 언제 생명이 시작되며, ② 무엇이 여성(모체)의 권리이고 무엇이 태아의 권리이며 ③ 무엇이 낙태의 좋은 혹은 나쁜 결과인가에 대하여 각 입장이 훌륭한 논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모자 보건법에 의하면 낙태허용은 5가지 경우 뿐이다.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 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한 경우,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이다. 이에 비해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이 중 모체의 건강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자의적이 아니라) 태아가 사산된 [간접적 낙태]만을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영세후 낙태경험이 있는 카톨릭 신자가 41.9%라는 것을 보면 단순히 흑백논리로만 낙태논쟁을 찬성 혹은 반대해서는 안될 것 같다. 특히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자연 피임법을 권장하면서 낙태를 반대하는 것에 대해 보완책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낙태를 반대하는 논증은 대개 다음의 세 단계로 전개된다.
① 탄생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태아는 다른 인간과 동일한 생명권 (the rights to life)을 가진 인간이다.
② 그때부터 정상적인 상태에 있어서의 낙태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살인이다.
③ 더 나아가서, 이런 낙태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여기서 언제부터 생명체(인격체)로 볼 것인가에 따라 유전학파, 발달학파, 사회결과학파로 나뉜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경우 생명론자들은 종교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칼 바르트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존재론적 결정(ontological determination)이라고 한다. 이 말에 바르트가 뜻하는 바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더불어 그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시종일관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역사 속에 내재해 계셨고,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되어 왔으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존재한다. 달리 말하여 인간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존재이다. 하지만 그의 역사는 특수한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하나님의 혁신과 그리고 그 분 안에서의 자유를 포괄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참된 인간성은 관계성에 있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르트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관계 유비(analogia relations)] 라는 말로 특징 지운다. 다음의 바르트의 말은 그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생명 -그자신의 것이건 타인에게 속하는 것이건 간에-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그의 축복이므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며 모든 냉담한 부정이나 파괴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자발적으로 그러한 파괴를 삼가하고 따라서 생명을 보호하는 데에는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자연적으로 수반된다. 인간의 생명은 신적인 생명이 아니라 피조된 것이며, 인간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된 생명의 보호는 무한정한 것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생명의 보호는 인간 생명의 창조자요 미래의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하시는 바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인간의 생명에는 절대적인 위대성이나 최상의 가치가 들어있지 않고 또 신에 버금가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생명은 상대적인 위대성과 제한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생명을 보호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의 복종과 희생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비해 낙태를 변호하는 입장(선택론자)은 어떠한가. 선택론자들은 낙태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논리는 주로 태아(fetus)가 임신 순간부터 인간이며 인격체라는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임신으로부터 신생아로 탄생하는 인간의 과정은 지속적이기 때문에 [이 시점 이전에는 인간이 아니었으나 그 이후에는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정확한 시간을 지적하거나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인위적인 결정일 뿐이다. 또한 태아의 권리보다는 모체의 권리가 우선하기 때문에 낙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Thomson 교수의 예이다.
[어느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무의식 상태에 빠진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옆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음악가는 치명적인 신장염을 앓고 있으며, 음악 애호가 협회가 사방으로 조사를 한 결과 오직 나의 혈액형만이 그를 소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나를 간밤에 납치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신장에 있는 독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혈관과 나의 혈관을 연결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제 병원장이 나에게 말한다. "음악 애호가 협회가 이런 일을 한 데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알았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은 벌어졌으며 바이올리니스트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을 끊어 버리면 당신을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9개월만 지나면 그는 회복될 것이며 그때는 안전하게 그를 당신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나는 도덕적으로 그의 말에 따를 의무가 있을까?
지금까지 생명론과 선택론의 극단적인 경우를 살펴보았다. 정리하면 생명론의 입장에서 그 이론적인 합법성을 제공하는 가치관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생명권에 대한 개인의 존중이 있다. 비록 경계선의 경우에는 확실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과연 '생명'에 대한 권리라는 주장이 확실하지 않지만. 둘째, 약자와 힘없는 존재에 대한 보호를 들 수 있다. 강자로부터의 침해를 방지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달시킬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도덕적인 신념과 원칙을 법제화해야 된다는 합법성이 있다. 마치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주의자들에게 '선택론'을 불허하는 인권 운동의 경우와 같이. 특히 그런 법제화가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기에 필요한 것으로 보일 때에는 더욱 이런 주장을 하게 된다. 넷째, 운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와 사고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고민하는 사람들(여기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사람들)이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어느 단체나 국가의 조정을 통하여 그들을 돕는 것을 공동 사회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가치관이 있다. 다섯째, 도덕적인 가치와 이상의 개인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생명론을 지지하는 이상의 가치들은 '자유주의적'인 견해와 '보수주의적'인 견해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론자를 무조건 보수적인 사람들로 간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생명론도 충분히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특히 외부로부터 부과된 비극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려는 의향은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다.
선택론을 지지하는 가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선택론 운동도 서구의 전통에 대한 거창한 주장을 할 수 잇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인 의심에 싸이게 되는 상황에서의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강조한다. 둘째, 그것은 도덕적 선택의 결과에서 오는 짐을 지는 사람은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원칙을 강조한다. 임신과 육아에 대한 여성의 고유한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선택론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한다. 셋째, 선택론 운동은 출산의 선택을 국가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키고 또한 분명하지 않은 양심적인 결단을 정부에게 맡기지 않고 개인에게 맡기려는 최근의 새로운 전통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 운동은 불법적인 낙태에 내재하는 불의를 명백히 폭로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재의 차별적인 태도가 부유한 사람과 힘있는 사람만을 보호하고 있다는 불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로는 선택론의 커다란 사회적인 기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출산의 선택과 억제를 강조함으로써, 선택론 운동은 육아를 단순한 생물학적인 동기와 성적인 불가피성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부모의 책임감을 강조한다. 성행위와 출산의 필연적인 관계를 분단시킴으로써 그것은 더 이상 무제한적인 출산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들며 또한 새로운 미래의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도와준다. 생명론 운동이 보수주의적인 측면과 자유주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듯이 이 선택론 운동도 양면을 가질 수 있다. 자유주의적인 측면으로서의 선택론은 개인적인 선택의 절대화와 도덕적 판단의 개인화를 중요시한다. 여기서 선택론의 주된 관심은 선택을 단행하는 사회 경제적인 조건도 아니며, 선택의 기준이 되는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히 선택을 단행하는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Ⅲ. 결론
우리가 낙태에 대한 어떠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떻게 낙태 논쟁을 향상 시킬 수 있는 가일 것이다. 생명론자들은 살인, 이기심, 편리함이라는 어휘들을 너무 쉽게 사용하며 또한 선택론자들을 무조건 악독한 유아살해, 노인과 불구아의 살인, 대량 살상의 주역으로 몰아침으로써 우리들의 국가이익과 도덕적 반성에 역행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선택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도 종교적인 고집을 조장하고 상대방을 무조건 여성과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한다고 매도하고, 자신의 입장만이 도덕과 자유와 정의를 인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한쪽만을 미칠 정도로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들은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은 또 다른 입장을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쉽게 찾을 수 잇는 것이 아니다. 특히 그 입장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입장이라면 도덕적, 정치적 문제로서의 낙태의 여러 측면은 타협이나 중간적인 입장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임산부는 낙태를 시키든지 시키지 않는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제 3의 길은 없다. 임신과 마찬가지로 [약간]낙태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낙태를 전적으로 금지시켜서 수많은 불법 낙태와 거기에 따르는 유아 살상과 산모 살상을 가지고 오는 길이 있다. 둘째, 어떤 상황에서는 합법화 시키고 다른 상황에서는 불법화시키는 길이 있다. 셋째, 낙태를 완전히 합법화시켜서 임산부의 요청과 의사의 동의만으로 언제나 낙태를 할 수 잇게 하는 길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그들의 입장이 옳다고 설득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로 지나친 성명만이 나타낼 수 있는 과격한 주장, 자괴적인 경직성, 타협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입장에 대한 반대나 비판에 대하여 겉으로는 태연자약하면서도 속으로는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연 옳은 가라거나 또 거기에 일말의 진리가 있는 가라고 묻지 않고 그저 우리는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할 것인 가라거나 거기에 대한 반대논증은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그리하여 동지란 바로 그 비판에 대하여 자신이 발견할 수 없는 답변을 제공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신념이 언제나 옳다는 절망적인 희망을 계속해서 확신시켜 주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가 바로 겉으로 인정할 수 없는 숨은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게 계속 의심의 씨앗을 뿌려 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다. 낙태 논쟁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낙태를 전체적인 가치 체계에 정합 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신념과 일관성을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낙태논쟁은 어떻게 향상될 수 있을까.
첫째, 낙태에 대한 극단적 입장을 지양하고 중간층에 속한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토론을 전개해야 한다. 물론 그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극단적인 사람들보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하여 더욱 동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 동정심이 잔인한 비판자들보다 낙태논쟁에 더욱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둘째, 양측 모두 상대방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력한 입장에 대하여 토론해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낙태논쟁의 일반적인 성향은 상대방의 가장 나쁜 행동과 가장 반대되는 입장을 취해서 그것을 상대방 전체를 대표하는 실례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결국 이 과정에서 더욱 온건한 신봉자들은 아무런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셋째, 양측 모두 완전 승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한쪽도 충분한 여론의 뒷받침을 얻어서 승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념에 대하여 거기에 합당한 존경심을 갖는 것이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넷째, 가장 다른 점부터 시작하지 말고 서로 동의하는 데 대한 토론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섯째, 양측 모두는 상대방 입장의 어느 정도는 오랫동안 수호되어 온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쪽도 과거의 전통이나 현대적인 가치를 독점할 수 없다. 생명론의 입장이 반드시 가부장적인 가정, 여성의 억압, 높은 예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선택론의 입장이 반드시 유아 살해의 허용, 사회주의 사회, 허무주의적인 도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가치의 여러 가지 종합이 가능하며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더욱 열심히 연구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BIOETHICS
현대 의학과 윤리   H. L. Smith
산아제한과 낙태와 여성해방 황필호 편저
생명의 시초와 선택의 권리 박원기
생명 의료 윤리   맹용길
철학과 성    R. Baker
실천 윤리학   황경식, 김성동 역
책임있는 사랑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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