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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신국론

by 소이나는 200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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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Ⅰ 부



제 1 권  로마의 재앙은 기독교 때문인가?


■ 제1주제 : 로마의 멸망은 기독교의 책임인가?

        로마가 무너지고 침략을 받음은 그리스도교의 탓이 아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다. 나는 '야만인들이 도성을 노략질할 때 그리스도 때문에 살려주었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반대자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피에 굶주린 야만인들이 전쟁의 관행과는 반대로 자비를 보여준 사실은 기독교에서 원인을 찾아야한다. 이것은 로마나 로마 이전의 '승리한 자들이 패배자들을 그 신들에 대한 존중심으로 살려준 사건은 전쟁의 관행과는 정반대된다.'로마에 의해서 정복당한 신이 기독교에 의해서 소멸되지 많았다면 로마가 이런 재앙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인들은 트로이를 방어할 수 없었던 신들로부터 유익을 얻으리라 믿을때, 평소의 현명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비록 그리스 인들도 같은 신을 숭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의 어머니인 트로이는 성별된 신들의 건물속에서 그리스 인들의 불과 칼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 인들로부터 아무도 구원치 못했던 트로이에 있는 주노의 성소와, 그리고 도망친 사람들을 야만인들로부터 보호해 주었던 사도의 교회'와 비교된다.'로마인들도 도성을 장악할때 신전에 있는 피정복민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결국 '로마가 약탈당할때 발생된 잔인한 행위들은 전쟁의 관행에 부합되지만 관대한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부터 결과되었다.'


 ■ 제2주제 : 종종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없이 임하는 축복과 불행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악행에 대하여 명백하게 벌이 가해진다면,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남겨질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똑같은 고난을 당해도 선인은 기도하고 악인은 증오한다.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고난받는 이유'는 선인과 악인이 모두 악한 생활을 해서가 아니라, 둘 다 비록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현세적인 생활을 사랑하기에 함께 징벌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세적인 재난으로 도덕적인 타락을 징벌하기로 결정했을때, 이것이 바로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난을 받는 원인이라 생각한다. '성도들은 세상 재물을 빼앗겨도 잃는 것은 하나도 없다.'굶주림 때문에 누가 죽었다면 그것은 그에게서 현세의 악들을 낚아채갔기 때문이고, 굶주리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다 검소하고 보다 금식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죽은 것은, 이것은 참아내기 힘든 사실이지만,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죽음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다. 그렇지만 전란의 와중에 길가에 버려진 그리스도인의 시신은 과연 축복일까? 이것을 축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해도 '그리스도 인은 매장되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신이 흙으로 덥히지는 못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죽은 이의 시신, 특히나 선행의 도구로 씌였던 시신이 경멸당하고 버림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이 시신에 까지 미치며, 부활에 대한 신앙을 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장례의식도 그분께 기쁜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제3주제 : 자살에 대하여

 '포로로 잡혔다 정절을 잃은 성별된 처녀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처녀들에 관하여, 그리고 이들은 의지로 그런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영혼이 더럽혀 질까?'는 것은 의지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지키고 있다면, 불가피하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를 당하여 다른 누구가 육체를 가지고 혹은 육체에 대하여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피해자에게 책망할 거리가 없게 된다. 이들이 '징벌이나 불명예 때문에 저지를 자살에 대하여'스스로 결백하면 할수록 자살을 통하여 죄를 더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정신은 침해당하지 않고 남아있지만, 다른 사람의 정욕에 의하여 육체에 가해질 수도 있는 폭력에 관하여'서는 정신의 순결이 범해졌을때 육체적인 순결도 범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육체가 농락당해도 정신적인 순결이 유지되는 한 육체의 순결은 잃지 않았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자살할 이유는 없다. 자살하지 못했다고 해서 욕먹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지 타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아니다. 자신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살할 권리를 가지고있지 않다.' '자살은 결코 당사자의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육신의 불순종은 우리가 잠들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의지가 동의하지 않는 한에서는 책망받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죄로써 죄를 회피하고자 노력해서는 않된다.' 육체와 정신의 정결함은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며, 굳건한 의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동의 없이는 강탈당할 수 없는 보물이다.


 ■ 제4주제 : 로마 멸망의 원인과 변론

 어떤 도시에 도덕이 붕괴된 상태에서 그 성벽이 서있다고 한들,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번영이 당신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당신들은 곤경을 당해도 잘못을 고칠 수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당신들이 살아남은 것은 하느님의 은혜이다. 사악한 자들 사이에도 교회의 아들이 있고, 교회 안에도 거짓 그리스도인이 있다. 사실 이 두 도성은 이 시기에 결합되고 혼재되어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으로 분리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제2권 로마의 재앙,
(관습의 부패와 영혼의 사악함에 대하여)


■ 제1주제 : 이교의 신들과 이에 대한 방종

 '이교의 신들을 숭배하던 자들은 신들로부터 어떤 건전한 교훈을 받지 못했고, 숭배행위를 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부정한 행동을 저질렀다.'신성 모독적인 종교예식과 천박스러운 연극 등은 정신의 종인 육신뿐만이 아니라 유신을 지배하는 정신 그 자체에까지 손상을 입혔다. 또한 '철학자의 주장은 신적인 가르침에 속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인간의 교훈에 순종하기 보다는 신들의 모범을 따르는 경향이 있기에, 어떤 도덕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교의 신들은 자신을 화나게 하는 추잡스러움에 더 기뻐했다. '신들에게 수치스러운 행동을 발표한 공연물은 신들을 성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비위를 맞추어주었다.' 악마는 인간들의 잘못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 인간이 그러한 오류를 더 많이 저지름으로써 파멸과 속임수를 위하여 고안된 수천가지의 술책을 통하여 숭배받을 수 있다. 이교의 신들이 과연 악나의 경우와 얼마나 다름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결국 로마인들은 '음탕한 공연물로 숭배받고 싶어했던 신들이 신적인 명예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신들의 방종을 노래한 시인들은 잘못된 것이며 이러한 '시인들을 질서정연한 국가로부터 배제한 플라톤은 연극 공연물에 의해서 숭배받고자 했던 신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종의 신적인 권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장 부패한 욕망을 심어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마의 어떤 신들을 만든것은 이성이 아니라 허영심이다.'라고 할 수 있다.


■ 제2주제 : 로마의 멸망과 기독교

 로마는 이미 부패했고, 이것을 막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비난 받아 왔다. 키케로의 지적대로 "예전의 로마의 토대는 그 도덕성과 그 시민들었노라". 초기에는 공화국이 있었다 할지라도 지금은 이름뿐인 공화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의 이 도성에는 진정한 정의가 없다. 단지 "하느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라고 말한 그 도성에는 진정한 도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악마들은 이 모든 장소에서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했지 숭배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이런 공물을 자기의 영예를 위하여 바치고는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보는한 ,이들이 타락한 생활을 하도록 권유한다. 그렇다면 과연 로마의 신들이 이와 무었이 다른가. '현생의 부침은 악마의 호의나 적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의 의지에 달려있다.' '사악한 영들은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행동에 대한 거짓된 신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도록 얼마나 강력하게 부추기는..'는지 알아야 한다. 악한 영들은 '자기들을 위한 의식을 통하여 온갖 악행을 주입시킨 반면에, 어떤 모호한 도덕적인 교훈은 아주 은밀하게 부여한다.' 연극을 통해서 관객은 처녀신이 무었을 좋아하는지 알게되고, 부인들은 풍성한 경험을 가지고 돌아간다. 몇몇의 정숙한 여인은 고개를 돌리지만 결국은 훔쳐보게 되고 음란한 기술을 배우게 된다. 결국 '로마인들은 자기 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봉헌했던 그러한 연극이 주로 공적인 질서를 전복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고의 이름으로 그런 소름끼치는 멍에와 그들이 받을 형벌로부터 구원되었고, 사악한 영들은 이것을 불평한다.


제 3 권 : 로마의 외적인 재앙


■ 제 1 주제 : 로마의 재앙, 그 신적인 기원에 대하여

 왜 공통적인 신들을 섬기던 트로이가 멸망할 수 있으며,간통이 공공연히 벌어지던 신들의 사아에서 어째서 헬렌을 유혹했던 파리스의 행동이 신들을 기분나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신들이 로물루스의 어머니의 간통에 대하여 전혀 분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데, 그들이 파리스의 간통을 징벌했으리라 믿을 수 없다.' 또한 '신들은 로물루스의 동생 살해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형벌도 요구하지 않았다.' 트로이는 신들이 트로이를 버렸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항상 속일 수 있는 기회를 찿고있는 악마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누마 통치기의 평화는 신들 덕분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보라! 누마의 시기가 지나고 그것의 위치를 신들이 물려받고 어디 전쟁으 신전의 문이 닫힌적이 있었는가. 단지 1년의 평화가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로마는 부단한 전쟁의 결과로 대제국을 만들 수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결국 로마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평화와 안정을 버린 것이다. 결국 '누마에 의해서 도입된 신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신들을 첨가했으나, 그런 신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 제2주제 : 로마의 재앙, 인적인 기원

 로물루스는 자신의 동생을 패배시키고 살해하면서 로마를 장악했다. 그러면 그렇게 왕위에 오른 인물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혹자는 로물루스 승천했다고 하지만 실제는 암살당했던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집정관직이 시행이 되면 로마 공화국을 괴롭혔던 재앙에 대해, 그리고 로마신들의 불개입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한다. '포에니 전쟁의 시기에도 로마인들이 겪었던 재앙은 신들의 보호에 의해서 경감되지 못했고' 결국은 양측의 힘을 소진한 결과가 되었다. ㅗ한 그락쿠스 현제의 개혁에 의해서 발생한 내란에 의해서도, 이런 소란 속에서 결정된 원로원의 결의에 대해서도 로마의 신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런것들이 '고트족과 골인들이 침입했을때 로마의 경험'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종종, 그리고 아주 잔혹하게 잇달았던 전쟁의 연결고리에 대하여'생각해 본다면 유혈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의 시기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신들이 숭배되고 있을 때에조차도 이런 재앙이 사람들을 덮쳤는데, 오늘날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다신론적인 숭배행위에 대한 금지조치와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제 4 권 : 로마의 운명은 하느님의 손에 있다.


■ 제1주제 : 로마의 확장은 신들의 도움인가?

 왜 이교의 사람들은 로마의 확장이 오래된 저속한 연극의 외설적인 형태와 저속한 인간들의 봉사에 의해서 적절한 숭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신들에게 돌리는 것일까? 전쟁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었던 제국의 확장이 현자들이나 행복한 사람들이 받는 축복으로 생각 될 수 있는가? 에서 나는 강도떼의 비유를 들고자 한다. '정의가 없는 왕국은 강도떼와 얼마나 유사한가?'강도 떼도 일정한 규율에, 한 사람의 두목에 의해서 지배되며 약탈물은 일정한 원칙에 의해서 분배된다. 알렉산더에게 한 해적이 말했던 것과 같이 국가는 커다란 도둑떼와 다름없지 않는가. 나는 여기서 '보다 넓은 영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이웃나라와 처음으로 전쟁을 일으킨 나누스(Ninus)왕의 야망에 관하여'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단지 지배욕 때문에 복종시키려 하는 것은 대규모의 강탈행위가 아니고 무었인가. 그러므로 나는 전쟁을 통한 제국의 확장이 신의 은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초기의 왕국들은 신들의 도움을 받아 흉하고, 그들로부터 버림 받아 망하게 되었느가?'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 하고자 한다. 다신교의 '개별 신들은 개별적인 일에 대해서조차 담당할 수 없는데도, 로마인들은 제국을 성장시키고 보존하는 일에 어떤 신들이 주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과연 어떤 신이 로마라는 제국의 확대에 공헌을 했는가? 미의 여신인 비너스인가? 전쟁의 신인 마르스인가? 그들의 시조인 로물루스 인가? 아니면 '로마제국이 크게 확대되고 오래 지속한 것은 숭배자들이 주신으로 믿고 있는 주피터 덕택인가?' 그렇다면 이 '다양한 신들이 세상의 상이한 부분을 책임지도록 분담시킨 자들은 어떤 견해를 따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교도 박사들이 주피터와 동일하다고 옹호하는 많은 신들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그렇지만 이들은 완전성을 가지지 못하며, 또한 완전성을 가진다해도 '저들이 주장하듯이 빅토리아가 여신이라면 그녀 혼자서도 이런 일을 하기엔 충분할 것이기 때문에, 로마가 확장된 원인을 주피터에게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또한 '신이 우주의 영혼이고 우주가 신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의 견해에 관하여' 말한다면 우리가 밟고있는 땅은 곧 신이니 우리는 신을 밟고 있는 것이오 우리가 먹는 생명은 곧 신의 생명을 매일 살해하면서 먹고있다는 결론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들이 통치 영역을 확장하기를 바라는 일이 적합한가?'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로마의 경우, 정당한 전쟁의 결과라기 보다는 악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들의 신에게 '신적 속성이 정당하게 부여되었더라면 마찬가지로 숭배되어야 했을 다른 훌륭한 성질은 간과된 채, 이교도들이 신전과 거룩한 의식으로 숭배한 덕과 믿음에 관하여'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비록 덕과 믿음에 대한 신을 만들고 숭배했다고 할지라도 '저들은 덕과 행복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덕과 행복에 만족했어야 한다.' 사실 고대인들은 덕을 잘사는 '기예' 자체로 정의내렸다. 따라서 덕이 그리이스어로 아레테(ARETE)로 명칭을 얻었기 때문에, 거기서 라틴어인 ARS (예술 ART)로 파생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영혼이나 육신이나 외적인 축복을 얻기 위하여 온갖 신들 무리를 숭배하며 불러낼 필요가 있었던다? 그들은 온갖 이름의 신들을 개인의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개개의 신들을 할당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 제2주제 : 하느님에 대하여
 
 나는 여기서 '바로가 스스로 로마인들에게 부여해 주었다고 자랑하는 바, 신들에게 합당한 숭배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 동의한다. 누가 사람들에게 모든 좋은 것들의 근원인 한 분, 참된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면, 누가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것인가. 처음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행복을 주는 분으로 생각되었고 유일하게 경배 받아야 하는 한 분 하나님에 관하여' 나는 그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 의해서 행복이 주어졌음을 믿었다는 말을 철저히 인정한다. 단지 그분을 찿고 경배드려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로마의 위정자들이 말했던 '신들이 그 숭배자들에게 강요하는 의식, 즉 연극 공연물에 대하여'생각한다면, 그들을 위해서 바쳤던 연극이 허구였다면 그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기뻐했다면, 그에 대한 숭배는 악마를 섬기는 것과 무었이 다르겠는가. '신관인 스카이볼라가 논술했던 세 종류의 신들'처럼 그들의 신들은 시인과 철학자와 정치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에 '로마인들이 제국을 획득하고 확장하는 데 신들에 대한 숭배가 도움이 되었는지에 관하여' 알아본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신들이 그러한 권능이 있다면 로마인 보다도 훨씬 더 연극을 통해서 자신을 숭배했던 그리이스 인들에게 더한 번영을 주었을 것이다. '모든 왕들과 왕국의 때는 참된 하나님의 판단과 능력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하느님은ㅁ 지상 왕국을 선인에게도 주시고 악인에게도 주신다. 이것은 그분의 질서대로 되어있는 바, 이분은 사건의 주인으로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주인으로서 다스리시며, 통치자로서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유대인들이 진정한 종교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분의 힘으로 존속되었을 유대인들의 왕국에 대하여' 우리는 안타까워 하는지도 모른다.


제5권 : 운명론, 자유의지와 행복


■ 제1주제 : 인간의 운명
 
 아무런 원인도 없거나 이해 가능한 질서 속에서 생겨나지 않은 원인을 가지고 발생한 사건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르고, 필연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운명의 견해에 따른다면 '로마제국과 다른 모든 왕국의 기반은 우연적인 것도 아니고, 별들의 위치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인간의 행동이 천체의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별들과 인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판결할 여지가 어디 남아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같은 성좌의 운명을 담고 태어난 '쌍둥이의 건강상 차이점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에 그들이 같은 운명이라면 한쪽이 아플때 다른 한쪽 역시 아픔을 겪어야 할 것이 아닌가. 또한 '성격과 행동에서 아주 달랐던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에서도 알 수 있듯이여기에 대한 황당무괴함에 대해서는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별들의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있는 원인의 연쇄'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원인에 묶여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우리는 '키케로가 내린 정의와는 상반되게도 하나님의 예지능력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스토아주의자들을 논박하면서도 그들의 의견에 어느 정도는 동조하게 된다. 그는 생각하기에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현실에서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되는 것이기에 "의지의 자유"를 선택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모든 원인의 확정된 질서가 있다고해도 우리 자신의 의지의 행사에 달려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우연적이라고 불리는 원인이 존재하지 않느느다고 보지않고 단지 은밀한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원인을 참된 하느님의 의지나 이런 저런 영들의 의지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사의 주요한 원인은 "생명의 생기"인 그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이고, 이 본성의 생기는 피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의지로서 존재하며, 우리가 의지함으로써 하는 것은 무었이든지 행한다. 우리는 자유를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결코 하느님의 예지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현재 자유로우며, 장래에도 자유로울 것이다.우리가 현세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하느님의 예지속에 있으나, 인간에 있어서는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고, 또한 자유를 위한 일종의 기댐줄이라고 생각할때 우리의 자유는 절대적인 권위 속에서 안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고 진실하신 하느님은 '그 법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로 그분의 말씀과 함께 셋으로 하나인 분이다.


■ 제2주제 : 로마의 번영과 그 원인

 지상의 왕국 역시 권능아래 두고 계신 참된 하느님이 로마인들에게 어떤 덕성이 있어서 '고대의 로마인들은 하나님께 경배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덕성에 의하여 참된 하나님이 자기들 제국을 확장시키도록 상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지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초기의 로마가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선한 길을 걸었던 몇몇 사람들의 통치를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또한 '비록 악덕이라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더 큰 악덕이 억제되기 때문에, 덕이하고 간주되는 칭찬받을 욕망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칭찬받고 싶어하는 욕심도 일종의 악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에 비해서 비열한 정도는 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칭찬을 얻으려는 욕심이 근절되어야'한다. '하나님이 로마인들의 덕성에 대하여 부여해준 세상적인 보상에 관하여' 서는 "저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한다. 또한 '로마인들의 덕성으로 유용한 모범을 삼을 수 있는 천상의 거룩한 시민들이 받을 보상에 관하여'이야기 한다면 로마인의 제국과 영광이 그토록 두드러지게 확장된 것은 로마시민들에게 보상을 베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세상나라의 시민들이 인간적인 명예를 얻기 위하여 그 나라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영원한 도성의 시민들이 이곳에서 순례길을 가면서 로마인들의 모범을 부지런하고 냉정하게 숙고해보고, 영생을 위하여 저 하늘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끔 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인들이 인간적인 명예와 지상 도성을 위하여 그토록 위대한 일들을 이루었느데, 영원한 도성을 사랑함으로 어떤 일을 행했다고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랑을 금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적인 명예를 심뢰하면서 어떤 종류든지 자기들이 가진 덕성으로 그것을 얻고자 추구했던 이들 로마인들이, 아주 사악하게도 진정한 영광과 영원한 도성을 주신 분을 살해하고 배척했던 자들을 정복했음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명예심과 지배욕의 차이'는 칭찬을 지나치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열망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들의 칭찬에서 조차 진정한 명예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명예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덕성을 사용하는 일은 육체적인 쾌락만큼이나 수치스럽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로마 제국은, 그에게서 모든 능력이 나오며 그 섭리로 모든 일들이 통치되는 분에 의하여 부여되었다.' 우리는 왕국과 제국에 부여되는 권력의 원인을 참된 하느님에게 돌려야 한다. '전쟁의 기간과 결말도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 이것은 '악마 숭배자이며 코트족의 왕인 라다가이수스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하루 아침에 패배당한 전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참된 주님이자 만물을 지배하시는 이는 로마인들을 자비로이 채찍질하기도 하시며, 악마 숭배자들의 놀라운 패배를 통해서 악마에 대한 제사조차 불필요함을 보여주신다. 오늘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종교를 버리지 않고 더 굳건한 믿음으로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제Ⅱ부


제6권 : 영생을 위해 신을 믿음을 반박한다.


■ 제1주제 : 바로의 신학적 분류와 이에 따른 비판

 나는 여기서 '자기들이 현세적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반박하고자 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거룩한 시편의 말처럼 우리의 복은 하느님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현세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또한 내세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는 신들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는 제 민족의 신의 다양한 종류와 종교의식에 대하여 많은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해 침묵했더라면 신에게 더 정중하게 행동한 셈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가 자신의 저술에서 고대의 관습중에서 인간적인 일과 신적인 일에 관하여 구성했던 부분'에 대해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고대의 여러 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바로의 논의로 보아,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인간적인 일들을 신적인 일보다 오래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된다.'  또한 '바로에 따른 세 종류의 신학, 즉 신화적, 자연적, 도성적 신학에 관하여'살펴본다면 "시인에 의한 신화적 신학", 그리고 "철학자에 의한 자연적 신학",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도성적 신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바로는 자연적인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에게 대항한 신화적, 즉 허구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신화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의 유사성과 일치점에 관하여' 알아본다면, 신화적인 신학은 고대의 연극 등의 형태에서 보이듯이 도성적 신학에 흡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자연적 신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교도 교사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위하여 보여주려고 시도하는바, 자연적 설명을 구성하고 있는 해석들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어떤 물리적인, 즉 자연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이 곧 하느님인가? 그렇지는 않다. 모든 사물에 본성이 있으나 그것을 종합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된 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물은 신의 작품일 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하느님의 관점에서조차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자연적인 현상들을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자연적 신학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의 해석에서 그 오류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신들의 특별한 역할에 관하여' 알아보자. 이 비열한 신들은 인간사의 여러 부분을 세분하고 있다. 이들은 불결한 행위를 자신의 제전에서 하기를 강요한다. 바로의 견해에 따르자면 그는 교묘하게 "신화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을 비판하며, 이것을 자연적 신학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관하여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서 보다 철저하게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바로의 신화적 신학을 비판한 것보다 더 격렬하게 도성의 신학을 비판했던 세네카의 자유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다. "저들은 그런 것들을 신일고 부르고 있지만, 만약 그런것들이 숨을 쉬고 갑자기 사람들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괴물로 생각될 것이다." 라는 말과 같이 그는 그 당시의 잡다한 신들에 대해서 혹평을 하고 있다. 사실 바로는 이정도까지의 자유를 향유하지는 못했다. 그는 단지 도성에 대한 신화적인 신학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했을 뿐이었다.


■ 제2주제 : 하느님만이 숭배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견해에 의해서 '이전에 제민족의 신들이 거짓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을때, 신들이 현세적인 일들에 관해서조차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에 있으므로 어느 누구에든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은 의심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을 줄 수 없는 자가 어찌 영원한 행복인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겠는가? 불결한 영들이 겪는 영원한 생명이란 단지 영원한 고통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죽음일 뿐이다. 최악의 죽음은 영원한 형벌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성적인 신들은 현세적이고 세상적인 일들로 인하여 숭배되어서는 않된다.


제7권 : 영원한 생명은 "선택된 신들"의 숭배를 통해서 얻어지는가?


■ 제1주제 : 선택된 신들

 '신성이 도성적 신학에서 발견될 수 없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성이 선택된 신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에서 부터 우리의 논의를 진행해보자. 그렇다면 우선 '선택된 신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보통의 신들의 직무로부터 면제되어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바로는 선택된 신을 20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요한 목적이 "성"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때 '보다 고상한 직무가 많은 열등한 신들에게 위임이 되었는데, 어떤 신들이 선택되기 위하여 제시될 수 있는 이유가 어떻게 하여 없는가?' 선택된 20개의 신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인류에 도움이 되는 신들이 많은데 왜 그들이 그런 신들보다 우위에 서서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왜 '그 이름이 불명예와 연관되지 않는 열등한 신들은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유명한 선택된 신들보다 더 낫다고 취급되었다.
■ 제2주제 : 선택된 신들 Ⅱ

 '하느님은 세상의 영혼이지만, 세상은 그 여러 부분 안에 그 본성이 신적인 많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바로의 견해에 관하여'생각해보자. 바로는 하느님이 세상의 영혼이며,이 세상 자체가 하느님이라는 범신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분인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듯 보이면서도 다시 복합적인 신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바로가 주장하는 복합적인 신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자. 바로가 출발점으로 삼고있는 야누스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자. '야누스와 테르미누스를 별개의 신으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한가.'라는 문제에서 우선 출발하자. 야누스는 시작의 신이고 테르미누스는 종결의 신이다. 실제로 시작과 종말은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꼭 그것을 나누겠다면, 근심이 시작되는 "시작의 신"보다 모든 근심이 끝나는 "종결의 신"이 더 숭배 받아야 되지 않을까? 실제로 보면 야누스도 그리 대접은 받지 못했다. 왜 '야누스를 숭배하는 자들은 무슨 이유로 신상의 얼굴을 둘로 하였다가 때로는 넷으로 하였다 하는가?' 야누스가 쌍둥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네 방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우리는 '주피터의 능력 및 주피터와 야누스 사이의 비교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사실 둘의 능력은 비슷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피터를 영혼으로, 야누스를 신체로 묘사한다. 그러나 야누스가 육체라면 어찌 신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야누스와 주피터를 구분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신들에게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된 신에게 언급된 주피터의 별칭'을 본다면 실제로 모든 신들은 그에게 속해있어야 정상이다. 또한 '이교도들이 신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어떤 별에 대하여' 알아보자.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것은 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은 이미 다이아나에게 바쳐져 있다. 가장 빛나는 존재가 다른 신에게 바쳐져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심지어는 태양조차도 아폴로에게 바쳐져있다. 그러고 보면 쥬피터는 그들이 말하는 별에 있어서는 그다지 숭배를 받지 못하는것 같다. 또한 '그들이 세상의 부분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아폴로, 다이아나 및 다른 선택된 신들에 관하여' 알아본다고 해도, 그들의 신이 여러가지로 중복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점에서 '"바로" 자신조차도 신들에 관한 자신의 견해가 애매하다는 점을 자인하고 있다.'


■ 제3주제 : 이교 비판

 이제 '이교도들의 오류에 대한 신빙성있는 이유'를 대보기로 하자.우선 '사투르누스를 숭배하는 이유를 구성하는 해석에 대하여' 알아본다면, 사투르누스는 종자의 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시간을 상징하는 '크로노스'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신 이외에도 남성과 여성의 종자를 다루는 '리베르'와 "리베라"가 필요했을까? 우리는 또한 '리베르를 기념하여 거행되는 의식에 수치스러움에 관하여'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공개적이고 음란한 의식은 사르투누스라는 종자의 신 말고도 두개나 더 되는 종자의 신, 그것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외설스러움으로 전시되었고, 신들이 왜 그것을 즐겼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신성모독적인 의식에다가 종교의식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더러운 악마들의 무리에 의하여 모욕당하고 오염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영혼이 또한 그의 신체중 가장 아래부분에도 침투하고 거기에다가 신적인 위력을 나누어주기 때문에 여신이라고 확언했던 대지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고 해도 이것은 마찬가지의 결론을 낳는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추악한 것은 '대지모신의 종교의식에 담긴 혐오스러운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거세한 자들의 봉헌을 받는 그 의식이 과연 신성할 수 있을까? 이것은 추악한 미신의 희생물이고, 더러운 마귀의 지배이다.


■ 제4주제 : 자연철학의 허구

 그러면 이제부터는 '참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고, 참된 하나님에게 적합한 예배를 수용하지도 않는 자연철학자들의 허구에 관하여' 알아보자. 실제로 '신학에 관한 바로의 해석은 어느 부분에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그럴듯한 논법에 의해 하늘을 "능동적인 원리"로, 대지를 "여성적인 원리"로 생각했지만, 능동과 수동을 만드신 분은 하늘과 대지를 모두 만들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연적 신학자들이 세상과 그 부분을 연관시켰던 모든일들은 한분이신 참된 하나님과 관련되어야 한다.' '한 분 하나님 대신에 한 분 창조주의 작품의 수효 만큼이나 많은 신들이 숭배되지 않도록 창조자를 피조물과 구분하는 일은 얼마나 경건한 일인가?' 실제로 '과거의 어떤 시기에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신비가 없지는 않았으나 항상 다른 형태로 선포되었다.' 이것은 언제나 예언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유일하게 참된 종교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들의 오류를 즐거워하는 사악한 영들의 속임수는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폭로될 수 있었다.'


제8권 : 자연적 신학의 신들 숭배


■ 제1주제 : 플라톤주의자

 '자연적 신학의 문제는 보다 뛰어난 지혜를 추구했던 철학자들과 토의될 수 있다.' 이 지혜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철학자들의 두 학파, 즉 이탈리아 학파와 이오니아 학파'에서 시작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학파의 시조는 "피타고라스"라고 할 수 있으며, 이오니아 학파의 창시자는 밀레투스의 "탈레스"였고,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를 거쳐, 나중에는 소크라테스로 이어지고 있다. '소크라테스 철학에 관하여' 알아본다면, 그 이전의 철학자들이 물리적, 자연적 현상을 탐구했는데 비하여, 그는 도덕적인 정결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 또한 '스크라테스의 제자중에서 최고인 플라톤과, 철학에 대한 그의 삼분법에 관하여'서도 알아보자. 그의 철학은 첫째 사색을 목적으로 삼았던 자연적 부분과 둘째, 실천과 관계되었던 "도덕적 부분", 세째로 참과 거짓을 분류하는 "논리적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철학은 다른 어떤 철학자들보다 참된 하느님의 존재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학적 문제에 관하여 토의할 때 특별한 논의대상은 그 견해가 모든 다른 철학보다 선호될 만한 플라톤주의자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 철학이라고 불리는 철학에 대해 플라톤주의자들이 가진 의미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그들의 존재의 의미는 '창조에 의한 존재'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주의자들은 논리학, 곧 이상적 철학에서 다른 철학자들을 얼마나 많이 능가한다고 주장될 수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다고 하겠다. 또한 '플라톤주의자들은 윤리학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한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기독교의 우수성은 모든 철학자들의 학문보다 위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덕과 관련해 어떻게 '최고선'이 될 수 있는가를 안다면 참된 한분에게 그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다른 학자들이 사물의 원인과 방식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소진시키는 동안,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앎으로써 우주의 구성과 진행을 알 수 있는 진리의 샘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철학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플라톤은 어떻게 기독교적 지식에 그토록 근접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그가 이집트에서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그토록 기독교와 유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들조차 한 분 참된 하나님에 관하여 이런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여 종교의식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플로티누스", 포르피리, 아풀레이우스 등의 플라톤주의자 들이었다.


■ 제2주제 : 귀신 숭배?

 '이성적인 혼이 세 종류, 즉 하늘의 신들의 혼과 공중의 마귀들의 혼과 지상의 인간들의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던 사람들의 견해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들의 주장은 귀신이 인간보다 더 높은 장소를 점하고 있으므로 해서 "인간보다 귀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귀들은 그들이 공기같은 신체를 가졌거나 거주지가 더높다고 하여 인간보다 더 낫지는 않다.' 만약에 이러한 점들이 인간의 앞에 놓여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뛰어난 동물들을 우리의 앞에 놓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영보다는 뛰어난 인간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고 있기에 인간의 존재가 더욱 우월한 것이다. 또한 선의 부재의 귀신보다 우리의 영이 더 뛰어나다고 하겠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인 아풀레이우스는 마귀들의 태도와 행동에 관하여 어떤 생각을 했는가?' 그의 생각은 귀신에게는 인간이 가지지 못하는 "신체에 있어서의 공기적 성격"과 "시간에 있어서의 영원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보다 낫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한분이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비칠것인가? 우리는 이들에게 연극을 바치고 숭배하지만, 과연 '사람들이 그 악덕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는 영들을 숭배하는 것이 적절한가?' 또한 '사람들이 선한 신들의 호의를 받도록 추천되기 위하여 마귀들의 후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종교인가?' 나는 '사악한 영들을 돕는 일에 매달려 있는 마술의 불경건함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선한 신들이 인간들보다 마귀들과 더 교제하고 싶어 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신들은 마귀들을 사자요 통역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신들은 그들에 의하여 기꺼이 기만당하는가, 혹은 알지 못하고서 기만당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귀신의 숭배를 주장하는 '이플레이우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귀들에 대한 숭배를 배척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제9권 : 영원한 지복은 그리스도에게만 존재한다.


■ 제1주제 : 참된 복은 누구를 통해서 가능한가?

 우리는 우선 '신들보다 열등한 마귀들 가운데 인간의 혼이 참된 지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어떤 선한 영들이 있는가?'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영에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참된 지복으로 이르는 길은 아니다. 그렇다면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차이는 무었인가? '아풀레이우스는 마귀들에게 덕이 있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또한 '격정에 대한 소요학파와 스토아주의자들의 견해'도 있다. '아풀레이우스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한다고 가정되는 마귀들을 격동시키는 격정에 관하여' 나오고 있다. 그는 마귀의 불멸성이 신과 동일하기에 신들과 영원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마귀들의 중재로 천상의 신들로부터 우정을 확보받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마귀는 생물체의 보다 나은 부분인 혼에 있어서는 인간과 마찬가지으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단지 하급의 육체에 있어서 신과의 영원성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가멸적인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영원한 육체를 가진 마귀들보다 덜 비참하다.'고 했다. 인간의 경우는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동정을 받을 여지느 남아 있으나, 마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마귀는 신과도, 인간과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마귀들은 신들처럼 지복 상태에 있지도 않고 인간들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지도 않으므로 양자와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면, 어떻게 신들과 인간들을 중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영원히 참된 복을 향유할 수 없고, 이것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 제2주제 : 그리스도

 '인간은 비록 가멸적이지만 참된 복을 향유할 수 있는가?' 그렇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중재자인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알아보아 한다. 이 복된 중재자는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서 일시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한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내려주었다. 그러므로 '천상의 신들은 지상적인 일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하며 인간들과의 교재를 거절하고 따라서 마귀들의 중재를 요구한다고 확정지은 플라톤주의자들은 타당한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다. '우리는 최고의 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복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마귀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하여 공급되는 중재를 필요로 한다.' '속이기 잘하는 마귀들은 자기들의 중재로 인간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들을 진리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하려고 꾀하고 있다.' 귀신들 스스로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알고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하지 않았던가. 그분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는, 그 시험 이후에 거룩한 천사에게 수종을 받는다. 그분의 육체의 연약함은 마귀에게 경멸받았지만, 그분의 권위는 경멸하지 못했다.  이 형용하지 못할 고귀함고 아름다움은 "선"의 향유에 있다. 이것은 또한 천사의 지식과 마귀의 지식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비록 성경이 신들의 이름을 거룩한 천사들과 의로운 인간들 모두에게 적용시키고 있기는 할지라도, 그것을 이방인의 신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천상에 거주하는 복된 영이 비록 신이라고 호칭된다고 할지라도, 신들 중의 신인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10권 : 희생과 구원


■ 제1주제 : 희생

 '플라톤주의자들 스스로는 인간들에게 행복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행복을 얻기 위하여 플라톤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섬기라고 지적하는 그런 영들은 희생을 자신이 받기를 원하는지 혹은 한 분 하나님에게만 그것이 드려지기를 원하는지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神性)", 아니 그보다는 "신격(神格)"에 관련된 문제라 하겠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들은 비록 우주의 창조자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선하든지 악하든지 천사들에게 신적인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배를 오해했다.' '희생(제사)은 참된 하나님에게만 합당하다.' 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지는 않지만 그분이 요구하시는 일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준수되도록 바라시는 희생'과 '참되고 완전한 제사에 관하여', 이것이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하느님과 관련되어 행해지는 자비의 행위, 곧 사랑의 행위로, 영원한 복을 얻는 길이다. 우리는 여기서 '거룩한 천사들의 사랑, 곧 그 때문에 우리가 자신들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도록 그들에게 자극하는 그 사랑에 관하여' 알아야 하며, '하나님이 경건한 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그분의 약속에 따라 천사들의 수종을 통하여 친히 사용하신 기적들에 관하여', 그것이 지성적이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 제2주제 : 구원

또한 '한 분이신 하나님은 영원한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세적인 번영과 관련되어서도 경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들이 그분의 섭리에 의하여 규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통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인 거룩한 천사들의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언약궤, 그리고 하나님이 율법과 약속을 권위있게 하신 기적적인 징후들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교육시키는 기적들에 대하여 교회의 서적들이 신뢰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참된 종교가 가르치듯이 참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제사를 드려도 타당한지에 관하여'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최고이자 참된 제사에 관하여' '성도들은 공중의 영을 달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써 승리를 얻는다.' 나는 또 '성도들은 마귀에 대항하는 권세와 참된 마음의 청결을 어디로부터 얻는가?' 라는 질문에 '인간의 본성을 정결하게 하며 새롭게 하는 유일하게 참된 원리에 관하여' 답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모습이 있다고 하면서도 플라톤적인 "복수(複數)"의 원리에 빠지지 않는다. '플라톤주의자들의 불경건함 때문에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하여' 생각하면서 '모든 성도들은 율법 아래에서 살았던지 그보다 앞서 살았던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신비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플라톤주의자들이 외쳤던 정결의 의미는 사실 여기서 완성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악령들에 대한 숭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포리피리의 연약함에 관하여', '심지어 아풀레이우스의 오류보다 더 악한 포르피리의 불경건함에 관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포르피리가 참된 지혜인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몽매하게 된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그의 고고한 지혜가 한낱 여인의 몸에 태어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따를 수 없다는 경멸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인간의 혼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플라톤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에 대항하여' '포르피리가 올바르게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만이 가능한 바, 영혼이 구원되는 보편적인 길에 관하여'말하고자 한다. 구원의 보편적인 길은 "종교"다. 이길에 의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이 구원의 길은 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에 속해있다. 또한 이러한 구원의 길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

제Ⅲ부


제 11권 : 창조


   Augustine은 11권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바로 11권에서부터 [신국론]의 제 2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길(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기초가 되어야만 함을 전제하고 있다.
   첫번째로 그는 이 우주의 창조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 우주의 시간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과 이 우주는 시간의 창조와 아울러 시간과 공간성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설명하여 우주창조 이전에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 수도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두번째로 그는 천사의 창조를 논하면서 천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지음받은 존재이며 그들의 창조는 우주의 창조이전 내지는 빛의 창조와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그는 천사 역시 악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천사들 자체가 빛이 될 수 없음에 기인한 것이며 Augustine에게 있어 악이란 선의 결핍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천사는 본래 인간보다 우월한 위치로 창조되었고 至福을 누리는 존재였으나 그의 본성에 반하는 의지의 작용(곧 악)에 의해 일부 천사가 타락됨으로써 두 종류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곧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빛과 선의 나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탄과 함께 하는 어둠과 악의 나라인 것이다. * Augustine에 있어 이 "나라"는 전 우주를 지칭하고 있는 말이다.
 


제12권 : 인간의 창조와 악의 기원


   12권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창조과정과 악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Augustine은 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영원한 존재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위치와 내적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악한 천사의 타락은 그 악한 천사들의 본성이 타락되고 악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적 과오로 인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그 의지적 과오를 교만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교만을 곧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위와 같아지려고 한 시도였으며 이것이 죄와 그 형벌을 초래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악한 의지는 다른 말로 도덕적인 외고집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악한 천사들이 그들 자발적으로 선으로부터 의지적인 이탈을 선택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여기서 고대 희랍인들이 가졌던 순환사관을 반박하고 있는데 순환사관이란 인간이 계속해서 다른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이다. Augustine은 이를 반대하고 이 우주는 시간속에서 창조되었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남자와 여자)은 이성과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며 이 첫 인간으로부터 온 인류가 배태되었고 이들로부터 두 사회가 생겨났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 13권 : 원죄


   13권에서 Augustine은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로서의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의 악용으로 인해 범죄하고 타락하게 됨으로써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이 아닌 그의 불순종의 결과로서의 형벌인 죽음을 맞게 되었다. 첫 인간 아담이 경험한 죽음이란 영혼의 죽음과 육신의 죽음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며 이러한 불순종의 형벌로서의 죽음은 그의 모든 후손들, 전인류에게 유전되었다. 또한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그 이후 그를 통하여 출현하게 되는 모든 인류의 심성속에 육신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의 갈등이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특별히 여기서 Augustine은 죽음의 문제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죽음을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형벌로써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중생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죽음이 죄악과의 투쟁이 존재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서 인식하고 선인은 그 죽음까지도 선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담 이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인간의 모습은 비록 육신으로는 영혼과 분리되는 죽음을 경험치 않고 있더라 하더라고 이미 영혼의 사망을 향해 내딛고 있는 과정으로서 인식하고 있다.


제 14권 : 두 도성


   14권에서 Augustine은 인간의 타락에 따른 결과로서 육신적인 성품을 지니게 된 과정과 함께 두 나라(도성)에 대한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다.
   인간의 타락은 타락한 천사의 낙원에서의 유혹(금단의 열매를 따 먹도록)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은 악한 행위 이전에 악한 의지가 그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Augustine은 그 악한 의지를 교만이라는 단어로서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 교만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구로서 타락한 천사인 마귀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이런 인간의 타락은 육신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기에 육신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며 육신이 부패한 것은 죄의 형벌로서 주어진 결과이다.
   인간의 타락이후 이 세상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지게 되는데 한 나라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생활해가는 사람의 나라로 지상의 나라이며 또 다른 한 나르는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의 나라로 천상의 나라인 것이다. 여기서 Augustine은 지상의 나라의 특징으로서 자신에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경멸,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태도, 교만, 지배욕 등을  천상의 나라의 특징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태도, 겸손, 섬김 등을 열거하면서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14권에서 특히 Augustine은 육신의 정욕의 문제를 상당 부분 언급하면서 인간의 범죄의 결과로서 인간은 이성간의 육체에 대한 수치감을 갖게 된 것과, 성행위에 대하여 수치감을 갖게 되었으며 인간의 肢體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순종하여 인간의 정욕에 따르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Ⅳ부



제15권 : 창세기에서 홍수사건까지



   15권은 첫 인간 아담에게서 나뉘어지기 시작한 천상도성과 지상도성이 성장하고 역사속에서 진전되어 나가는 과정을 구약 성경의 창세기를 중심으로하여 전개되고 있다.아담의아들 가인과 아벨은 각각 지상도성과 천상도성으로 대표해 주는 인물로서 Augustine은 간주하면서 그들의 특성으로 지상도성의 대표자 가인은 도시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으로 이 현세에서의 쾌락과 영광을 추구하는 반면 천상도성의 대표자 아벨은 이 세상에 정착하지 않는 나그네로서 천성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소망하고 있는 것을 들고 있다.
  또한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인 사건을 Rome의 건설자 Romulus가 동생인 Remus를 살해한 사건과 관련지으면서 이것은 지상도성과 천상도성의 필연적인 대립으로 이해했다.                                                           


■ 제1주제 : 인류의 역사

 나는 지금부터 '인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분열시키는 두 계통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우리의 인류는 크게 둘로 나누어 사람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결국 '육신의 자식들과 약속의 자식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드러난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났고, 이삭은 하느님의 약속과 이에 따른 은혜에 의해서 태어났다. 사라는 잉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잉태하지 못하던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생산하게 되었다.'자식을 낳을 이 자연성은 인류의 본성이 죄로 더럽혀져 있고, 그 결과로 정당한 정죄를 받아 내세에 복락을 받을 자격이 없게 된 것을 상정한다.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은 은혜의 자녀와 자유도시의 시민을 적절히 상징한다. 그러나 지상의 도성은 최후 심판의 벌을 받으면 도성이라 할 수 없고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있고 거기서 기쁨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지상 도성의 충돌과 평화.'은 승리를 전제로 하며 '지상 도성의 건설자와 로마의 건설자는 자기 동생을 죽였다.' 결국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들도 지상 순례 중에는 죄에 대한 벌로써 허약하며,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도 돌이킬수 없었던 가인의 완강한 결심과 범죄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참으로 질투의 죄성이 그의 안에서 강하게 되어 그의 동생을 죽였다. 지상 도성의 건설자는 이 모양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의 모형이었다.


■ 제2주제 : 원시 시대의 기록에 대하여

 우리는 옛날의 기록을 보면서 많은 의문점을 가진다. '가인은 어떻게 그렇게 일찍이 도성을 건설했는가?' '홍수 이전 사람들의 장수와 큰 체구'는 어떻게 설명될 것이며 '히브리어 성경과 우리 성경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연령 계산에서 차이'는 어떻게 다르냐는 점이다. 이것을 해석하는 견해는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성경을 그대로 이해하며, 어떤 이들은 '원시 시대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만큼 장수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기도 한다. 이들은 성경의 10년의 계산을 1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태양의 운행에 따라서 고대인의 1년이 우리의 1년과 같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홍수가 따에 덥히니 노아 600세 되던해 2월 곧 그달 27일이라"에서 보이듯 우리의 일 계산과 고대의 계산이 같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이 불어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원시 시대 사람들은 자식을 낳는 연령까지 이성 관계가 없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혈족 결혼과 원시 시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처음 부모에게서 난 이는 자신의 형제 및 자녀들 밖에는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결과로 혈족간의 결합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로 오면서 서로 존경하는 근친간의 결합은 기피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자연성에 기인한 것이다.


■ 제3주제 : 지상 도성의 출발

 아담은 지상과 천상의 두 도성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인이 에녹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따서 도성을 지으매, 이것은 이제 지상의 도성이 되었다. 가인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8대에 끝난다. 에녹은 '헌납'의 뜻을 가지매, 이것은 지상 도성의 출발과 끝에 대해서 알려준다. 그 이후의 '셋'의 계열은 그들과는 구별된 '부활'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아벨과 셋과 에노스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느가?' 이것은 아무도 자기를 믿음으로써 가인의 아들의 이름으로 현세에 헌납된 도성, 즉 지상의 도성에 있어 죽을 세상의 시민이 되어서는 안되며, 영원한 행복에 헌납된 도성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가인의 아들 에녹의 이름이 나온 후에 곧 족보가 홍수까지 내려가는데, 셋의 아들 에노스의 이름이 나온 후에는 다시 인간 창조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있다. 전자에는 받아 마땅한 벌을 갚아주시고, 후자에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를 거져 주셨다. 자유의지로 선한 것은 타락해서 악을 행할 수 있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때 만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창조에 대해서 보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매혹되어 타락했음므로, 여덟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두 때에 멸망했다.'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보통 하느님의 아들은 천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영적 본질을 가진 천사들이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서 결혼하며. 이 결합에서 거인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영들로 자기의 사자를 삼으시매"에서 보이듯이 영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자식들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악을 행함에 하느님은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다.하느님의 분노는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은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거나 그이 변함 없는 평정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은 노아를 선택했고 '노아에게 지으라고 명령하신 방주는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한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방주와 홍수에 대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인정하고 비유적 해석을 배척하거나, 비유적 의미만을 주장하고 역사적 사실임을 부정하는 것에 우리는 찬성할 수없다.' 하느님은 역사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제16권 : 구약의 기록


   16권에서 Augustine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두 도성의 발전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셈, 함, 야벳)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성이 아브라함의 때까지 보존된 것으로서 Augustine은 보고 있다. 이들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은 본래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노아로부터 저주받은 아들 함의 자손 니므롯때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건설하려고 한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서 언어가 분리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지상의 도성은 앗수르, 이집트, Sycyon의 3대 왕국으로 발전해 갔다고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때부터 본격적인 하나님의 도성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장차 올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 유다를 걸쳐 이스라엘 왕조의 다윗왕에 이르기까지 14대의 기간은 하나님 나라의 유년기에 해당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 제1주제 : 홍수 이후

 '홍수 이후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사이에서 하나님을 따라 산 가족이 있었느가?'라는 질문에는 별로 없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여기서 '노아의 아들들의 예언적 의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이었던 '셈'은 '이름'을 의미한다. 야벳은 '창대함'이고, 함은 '뜨거움'이다. 여기에는 그 자체의 의미는 없으면서, 일종의 테두리가 되어서 거기에 의미있는 일들을 연결시켰다. 단지 '셈의 후손 사이에서 하나님의 도성이 아브라함 때까지 보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빌론의 건설 이전에도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의 무리는 함의 계통에 있었고, 경건한 무리는 두 아들의 계통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지 이 두 도성이 지상에서 말살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 제2주제 :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거룩한 계보에 새 시대가 열렸다.' 그의 시대에 하느님의 도성에 증거가 더욱 현저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성취된 하느님의 약속들이 더욱 분명히 알려졌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다."  그러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브라함이 하란을'을 떠나고 가나안에 있게된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약속을 받게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의 순서와 내용.'을 알아보면 "큰 민족을 이루리라"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이때에는 이미 타락한 천사에 의한 지상의 왕국이 이ㅛ었고 '그 하나인 앗수르는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에 이미 강성했다.'그래서 '하느님이 두번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또한 '하느님의 세번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영구히 주신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으며, 이 말씀을 믿은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전이지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또한 '연로한 아브라함이 자식없는 사라에게 아들을 얻으며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느님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할례의식으로 확인하셨다.' 이것은  '제8일에 할례받지 않은 남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배신했기 때문에 그 영혼이 멸망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나고, 그 이름은 부모가 웃었기 때문에 주어졌다.' 또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으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험'을 받았다. 이제서야 하느니믄 흡족해 하시며, "...이제야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도다"하셨다.


제3주제 : 아브라함 이후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결합'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재물만을 물려 받았을뿐 약속은 물려받지 못했다. 이것은 "육신의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기"때문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던 쌍둥이에 대하여 하느님이 말씀하신 뜻'을 살펴보면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느 것은 오랜 유대의 백성이 새로운 기독교인을 섬기리라는 말이다.
 '아버지의 공로때문에 은혜를 받은 이삭이 아버지가 받은 것과 똑같은 말씀과 축복을 받았다.'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어..."에서 보이듯 그의 아비인 아브라함의 공로를 그대로 인정받아 하느님과의 계약을 계속 이어준 것이었다. 그것은 후에 야곱에게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후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출애굽에 자세히 나오며, 이 고난은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나올때까지 계속된다. 이후의 시대는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열왕들의 시대로 초대왕은 사울이었으나, 상징적 예표로써, 또 그 자신의 행적으로 다윗이 탁월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본격적인 지상왕국의 시대가 시작된다.


17권 : 하느님 도성의 역사
   17권의 내용은 사무엘에서부터 시작되는 선지자들의 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의 열왕과 왕국분열 후의 이스라엘의 두 왕국 발전상을 다루고 있다. Augustine은 성경의 예언이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인 이스라엘(지상의 예루살렘) 민족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영적인 후손들(천상적 예루살렘)에게 각각 적용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은 선지자들에 의해 유지되며 아론을 통해 세워진 제사장직은 선지자 사무엘 이후 차츰 성격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제사장 제도는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제사를 보여주는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나라가 영원하고 그 지경이 땅끝까지 펴지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육신의 예루살렘(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는 이 세상나라가 아니라 미래 그리스도의 나라가 누릴 영화를 예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 제1주제 : 선지자 시대

 선지자 시대거룩한 사무엘의 시대에서 바빌론 유수를 거쳐 성전을 재건할 시기까지의 시대이다. 또한 그 이전의 시대도 거룩한 아브라함과 모세의 선지자 시대이다. 선지자를 통한 하는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한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에 관해서 하느님이 하신 약속'이 처음의 약속이고 두번째의 약속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초반에 여호수아의 영도에 따라서 가나안에 입성한 것으로 초반의 약속은 어느정도 실현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선지자의 의미는 3중인데, 지상적 예루살렘, 혹은 천상적 예루살렘, 혹은 양편에 동시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조와 제사장 제도가 변천하리라고한 예언이 있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교회를 대표해서 예언'에서 잘 드러나듯이 '유대인들의 제사장 제도와 왕국은 영원히 확립될 것이라고 했으면서도 지금은 없어졌으므로, 영원성에 대한 약속은 다른 일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왕국의 파탄은 영적 이스라엘과 육적 이스라엘의 영구적 분리를 예표'하는 것으로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의 손에서 떼시리라."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솔로몬의 시절을 높이 평가하지만 실제로 '다윗의 아들에 대해서 그에게 주신 약속은 솔로몬의 시절에 전혀 이행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풍성하게 실현되었다.' 성전의 약속도 솔로몬의 시절에는 외부의 형상으로 드러나 후일 불타버렸으나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는 그 성전이니라"고 말한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시기에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약속된 평화의 참의미를 솔로몬 시대에 돌릴 수 있을까?'는 의문이 들 수밖에는 없다.


■ 제2주제 : 신의 도성은?

 실제로 '땅위에 예루살렘이 서있는 사건은 하느님이 약속한 사건과 달랐으며,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실상은 다른 왕과 나라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심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본질이 그 안에 있으며, 그만이 지옥에서 자신의 영혼을 탈취할 능력이 있었다.'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만의 신의 도성에서 영광을 알 수 있다. '시편 44장에서 직접 또는 비유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교회에 대해서 말한 일들'에서도 나오듯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서 오셨다가 그들에게 죽음을 당하시고, 생전에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그리스도가 되셨다.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시리니 내가 알지 못한 백성이 나를 섬기며 내 풍성을 들으시로내게 순복하여나이다."에서 보이듯 이제 그리스도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 되었다. 하느님은 비록 히브리인들이 자신을 실망시켰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여로보암은 불경건한 우상숭배로 백성을 더럽혔으나, 하느님께서는 계속 선지자들을 감동시키시며,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셔서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게 하셨다.'


제18권 : 이방의 신과 이단과 예언


   18권에서 어거스틴은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는 과정의 모든 인류 역사를 취급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민족의 역사를 희랍 및 로마의 발전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지상의 도성의 역사에 대한 부가적 고찰로서 지상의 도성과 천상의 도성의 대비를 통해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려는 것이다.
   Augustine은 또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살피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결과이며, 그 형벌로서 유대인의 나라는 로마에게 멸망당하고 온 세계에 흩어짐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중 얼마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될 것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Augustine은 현재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도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서 세상나라에 속하여 있음을 인정한다. 이단자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자칭하면서 마귀에게 이끌려 기독교의 교리에 반대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악을 도구로 사용해서 선을 이루어 가시기도 하시므로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마귀는 마침내는 정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종말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가장 극심한 고난으로 핍박을 가하게 되며 그 시기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 제1주제 : 구약의 역사

 18권의 초반은 구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른 이방의 나라와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제목만 밝힌다.

2. 아브라함의 탄생 이후에 성도들과 동시대였던 지상 도성의 왕들과 그 연대.
3.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때 약속된 이삭이 태어났고, 이삭이 60세에 그 아내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았을때, 앗시리아와 시키온의 왕들은 누구였던가?
4. 야곱과 그 아들 요셉의 시대.
5. 아르골리스의 아피르 왕을 이집트 왕이 세라피스라 부르면서 신으로 숭배했다.
6. 야곱이 이집트에서 죽었을 때에 아르고스와 앗수르를 다스린 왕들
7. 요셉이 이집트에서 죽은 것은 어느 왕 때였는가?
8. 모세가 태어났을 때의 왕들과 그 시대에 경배를 받기 시작한 신들
9. 아덴이 건설될 때와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한 바로의 설명
10. 아레오바고라는 이름과 데우칼리온의 홍수에 대한 바로의 견해.
11.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것은 어느 시대며,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의 왕들은 누구인가?
12. 이스라엘릐 출애굽으로부터 여호수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헬라의 왕들이 제정한 거짓 신 숭배에 대하여.
13. 히브리 민족을 사사들이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에 어떤 황당한 설화들이 있었는가?
14. 신학적 시인에 대하여.
15. 아르고스가 멸망했을 때에, 사투르누스의 아들 피쿠스가 라우렌툼 왕국을 얻었다.
16. 드로아 멸망 후 신으로 추대된 디오메데스와 새가 되었다는 그의 동료들
17. 인간의 믿지 못할 변형에 대한 바로의 이야기.
18. 귀신의 술책으로 사람이 변한 듯한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19. 압돈이 히브리 민족의 사사였을때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왔다.
20. 사사 시대 이후의 이스라엘의 왕들
21. 라티움의 역대왕 중에서 초대완 아이네아스와 제12대왕 아벤티누스는 사후에 신으로 인정되었다.
22. 로마가 건국될 때에 앗수르 왕국이 끝나고, 히스기야가가 유대의 왕이었다.
24. 로물루스 왕때에 일곱 현인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갈대라로 포로로 끌려갔을때 로물루스는 신으로 인정되었다.
25.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때, 즉 히브리의 히드기야 왕과 로마의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때에 있었던 철학자들.
26. 70년이 차서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로마 국민은 왕정에서 벗어났다.
27. 앗수르 왕국이 멸망하고 로마제국이 출발할 때에, 이방인을 부르시는 데에 대한 예언을 한 문서 예언자들.


■ 제2주제 :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

 '그리스도에 관한 호세아와 아모스의 예언.'은 전하는 말씀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뜻을 해명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올라오리라."와 "이스라엘아 네 하느님 부르기를 예비하라. 대저 우레에 힘을 주어 바람을 창조하며 사람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자는 나니라."에서 보이는 것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들', '새 언약에 적용되는 미가와 요나와 요엘의 예언들.''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될 것에 대하여 오바댜와 나훔과 하박국'과 '하박국의 기도와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와 스바냐의 예언', 그리고 '그리스도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레미야와 스바냐의 예언.', '그리스도와 교회에 해당하는 다니엘과 에스겔의 예언.', '학계와 스가랴와 말라기의 예언들.'에서 보이듯이 그리스도의 강림과 이에 따른 유대민족의 부흥, 그리고 이에 도움을 받는 이방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


■ 제3주제 : 예언과 예언의 권위

 '이방철학의 어느 근원보다도 예언의 권위는 더 오래다.' 우리의 선지자들은 후대에 훨씬 널리 알려졌지만, 그 시기에 주목받던 이방의 철학자들보다 훨씬 더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하고 모세의 경우가 그러하다. 훨씬 더 오래의 일을 본다면 노아의 경우도 그러하다. '히브리어는 항상 자체에 기록을 남겼다.' 모세가 히브리 인들에게 하느님의 율법을 알기 전에 교사들을 임명해 백성에게 문자를 가르키게 했다. '이집트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과학에는 10만년의 역사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거짓이다.' 아담이 창조된지 아직 6000년도 다 지나지 않았는데, 성경의 역사기록을 믿는 우리는 이 권위에 반대되는 것은 아주 거짓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역사의 문제는 차지하더라도 인간사의 조화의 문제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서로 견해는 다르나, 교회의 정경은 그 책들 사이에 조화가 있다.'모범을 삼는 사람들은 그 생활과 사상을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해서 이방인들이 알 수 있게 하셨'고 그러므로 '히브리어의 성경을 마땅히 존중해야 하지만, 70인 역은 다른 번역보다 권위가 있다.'고 하겠다.


■ 제4주제 : 예언과 그리스도교의 전파
 
  '성전 재건 후에 유대인 사이에 선지자가 없었고 그리스도의 탄생시까지 계속적인 역경에 처한 것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다른 성전이 세워지리라는 약속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에서 보이듯 그리스도의 강림은 단순히 하나의 민족을 위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하였기에 '우리의 구주가 나심으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유대민족은 예언대로 각국에 흩어졌다.' 결국 '하느님의 집의 영광이 처음보다 크리라고 한 학개의 예언은 성전 재건에서 실현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실현되었다.' 바로 한 민족의 종교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교회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분간없이 확장되었으므로, 이 세상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선택받은 자들과 섞이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음으로써 복음은 더욱 찬란하고 강력하게 전파되었다.' 로마의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전세계로 퍼질 계기가 된 것이다. 하느님은 거짓 신들을 위해서, 참 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박해한 그 왕들이 도리어 거짓 신들을 박해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이단자들의 반대를 통해서까지 정통 신앙이 확립된다.'는 것이다. 오류에서 구제될때에 큰 위안이 생기며, 이것은 세계의 종말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열번의 박해가 지나갔고, 적 그리스도가 가할 열 한번째의 박해 이외에는 박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최후 박해의 때는 아무에게도 계시되지 않는다.'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선험적 경험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제Ⅴ부



제 19권 : 도성의 멸망


■ 제1주제 : 최고선

 '최고선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로 288개의 학파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바로는 생각했다.' 그는 쾌감과 평안과 쾌락과 본성의 기본적 욕구를 덕성과 결합시키고 그것 중에서 어느 것을 상위에 두고 하위에 두는 것이냐에 따라서 여러 학파를 산출해내고, 마지막으로 모든 가능성을 조합하여 위의 결론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는 '학파를 만들 수 없는 차이점들을 2차적인 문제라고해서 모두 제거하고, 최고선에 대한 3가지 정의를 얻으며, 우리는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선은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며, 그 자체 때문에 원해야 하는 것이다. 본성과 덕성을 생각할때 그것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서 3가지의 선택이 생긴다. 그렇다면 '바로는 안티오쿠스와 구아카데미를 추종하면서, 최고선에 관한 세 주도적 견해 중의 어느 것을 택했는가?' 바로는 사람이 몸만도 아니요 영만도 아닌 두가지가 합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동의했다. 이중에서 덕성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활을 조절하는 기술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최고선이 자신들 안에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들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선과 최고악에 대하여 무었을 믿는가?' 영원한 생명은 최고선이고 영원한 사망이 최고 악이다. 인ㅁ간 영혼의 근원적인 축복인 감각과 지성에 있어서, 감각은 지각을 위한 것이고, 지성은 진리를 위한 것이다. 악이란 바로 이런것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은 매우 바람직하면서도 곤란과 불안이 많다.' 그러하기에 '진상을 알 수 없을 때에 인간의 판단은 오류를 범한다.' 또한 '다양한 언어 때문에 사람의 친교가 막히고, 전쟁은 소위 정의의 전쟁까지도 참화를 빚어낸다.' 우리는 여기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금생의 불안은 피할 수 없으므로, 착한 사람들의 우정도 확실히 의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원인은 우리의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금생에서 천사의 우정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은, 다신 숭배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의 기만 때문이다.'이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들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삶의 시련을 참고 견딘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된 상'은 지상의 것은 아니다. 최후의 행복은 위대한 평화를 가지게 될 종말과 관련시켜야한다.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행복이야말로 성도들의 목표이며 진정한 완성이다.' 사실 인간은 기쁨과 평화를 원한다. '맹렬한 전쟁과 소란한 사람들도 모든 피조물이 원하는 이 평화라는 최종 목표를 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법칙에 따른 질서에서 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관리자인 인간은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신의 섭리가 있다. 인간사의 '모든 소란을 통하여 자연의 법이 보편적 평화를 보존하며, 이 평화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공정한 심판자가 주재하는 방법으로 그 보응을 받는다.' 그러므로 '천지에 통용하는 질서와 법에 의해서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자가 사회에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에 반대된 인간성에 고유한 자유와 죄가 도입된 노예 상태에 대하여 의지가 약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종이 아니면서도 자기 정욕의 종이 된다. '천상 도성과 지상 도성 사이의 평화와 불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들 정욕의 신들이다. 한 신은 머리를 , 한 신을 팔을, 또 한 신은 다리를 담당하는 다신교적인 것은 우리의 생각이 유일신에게 머물러 참된 분을 찿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신아카데미파의 회의와도 비슷하게 연결된다. 그러면 '신아카데미파의 회의와 기독교 신앙의 확신은 어떻게 다른가?' 하느님의 도성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에 이러한 회의를 몹시 싫어한다. 단지 우리의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


■ 제2주제 : 행복

 '성도들은 금생에서 소망으로 행복하다.' 하느님 도성의 최고선은 완전하고 여원한 평화이며, 죽을 인간이 나서 얻고 죽어서 잃어버리는 그런 평화가 아니다. 그러하기에 금생에서 이것을 소망하는 것으로도 인간은 행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은 금생에서 단지 소망만하고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하느님 만이 희생을 드려야 하는 진정한 신인가?'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인의 맹렬한 원수이면서도, 하느님이 위대한 신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신들이 말한 대답이라고 포르피리가 전한 것'에 대해서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국민과 공화국의 올바른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어떤 집단이 사랑할 대상에 대한 합의로 뭉쳤다면 그것을 국민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자. 이 사랑의 대상은 신에 대한 것으로 만약에 사회가 이러한 경건함에 대해서 잃어버렸다면 '진정한 경건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덕성도 없다.'고 하겠다. 육신의 생명은 영혼인 것과 같이 사람의 복된 생명은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화는 하느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의 평화와, 하느님의 백성이 순례 도상에서 이용하는 평화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의 평화는 죽을 금생에서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느님이 사람을 다스리며 영혼이 몸을 다스리며, 그 다스림이 지극히 즐겁고 쉬워서 아무 속박도 받지 않게 된 생명의 행복한 상태가 우리에게 적합할 것이고, 이 상태는 영원할 것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것이다. 이와 같은 행복한 평화와, 이 평화로운 행복이 최고선일 것이다.


제20권 : 최후의 심판


■ 제1주제 : 최후심판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산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러 오시는.."날을 마지막 날, 혹은 마지막 때라고 한다.하나님은 마귀의 족속과 인간의 족속을 그 원죄때문에 진단적으로 벌하실 뿐만 아니라, 개체가 자유의지로 단독으로 한 행위도 심판하신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도 많지만 비밀리에 항상 받으며, 금세가 아니면 내세에 받는다. 악하게 사는 이가 잘 사는것 같아 보이는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다. 영원한 고통을 받을 운명이 아닌 사람들은 그 죄에 대한 일시적인 징벌을 받아서 더욱 더 덕성을 함양하도록 자극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숨겨진 것은 공정하다는 것이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숨겨지지 않는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었이 유익한고?""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내세의 심판은 선인은 복을, 악인은 화를 받아, 영원히 떨어짐이 없이 항상 가지고 있게 될 것이다. 구약에는 율법과 선지자가 있고, 신약에는 복음서와 사도서신들이 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느니라. 이제는 율법 이외에 하느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는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심판의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현재 악인과 선인이 섞여 있으니 심판의 날에 가리워 질 것이며, "세상이 새롭게 되어"질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내 말을 믿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었고...".에서 보이듯이 종말과 함께 부활이 있고 이 부활은 두개로 나뉘는데 첫째는 자비의 부활이요, 둘째는 심판의 부활이다. "내가 인자(자비)와 공의(심판)을 찬송하나이다." 첫째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은총을 받은 영적인 부활이고 금생에 있으며, 우리를 둘째 사망으로 가지 않게 보호한다. 다음은 세상 끝에 있을 부활이며, 영혼이 아니라 몸에 관계된 것이다. 첫째의 부활을 미래의 신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천년론자'들은 제7일 악식일과도 같은 천년의 세월이 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계가 지속되는 전 기간을 천년이라고 한다. 천은 10의 3승이다. 곧 10의 입방인 것이다. 결국 천은 모든 세상의 시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하겠다.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예정된 교회가 있는 미혹할 것이며, 지금은 쇠사슬과 투옥때문에 그 나라들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않된다. 마귀가 결박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전력을 다해서 유혹하지 못한다는 것이지 결코 그가 다시는 활동을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나중에 다시 마귀를 잠시 놓아줌으로써 그들의 신앙심을 시험하신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으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라." 그렇다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영원한 나라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처음에 그리스도가 오신 기간이다. 이것은 결국 현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몸만 부활하고 영혼은 부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혼이 넘어진다면 다시 일어나는 것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에는 '세상 종말에 풀려난 마귀가 곡과 마곡을 일으켜 교회를 박해하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와 저희를 소멸한 불은 악인이 받을 최후의 벌을 의미하는가?' 하늘의 불은 성도들의 강경한 저항을 의미한다. 이 열정은 적그리스도들에게는 파멸의 불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영광의 불이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 "에서 보이듯 지나가는 것은 형적이지 본성은 아니다. 종말과 심판은 이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의 본질은 새로운 속성을 받을 것이며 새로이 조화될 것이다. 우주 자체가 갱신되므로, 우리의 육신도 이에 맞춰질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우리는 새로이 써지 않음과 영생으로 옮겨져 우리는 '교회의 무궁한 영광에 대하여.'대하여 노래하게 될 것이다.


■ 제2주제 : 최후 심판에 대한 예언

 이제부터는 '사도 베드로는 최후 심판에 대해 어떤 예언을 했었나?' 그는 홍수로 멸망한 세계를 대신해 물 가운데서 보존된 하늘과 땅이 드디어 불경건한 자에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서 남겨둔 것이라고 했다.' 주의 날이 오기 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카서에서 무었이라 하는가?'에서는 "하느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두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심이라"고 했다. 이런 종류의 말씀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가리킨 것'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보응 심판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들'과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하느님의 심판과 성도들의 나라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과 '다윗의 시편 중에서 세상 종말과 최후 심판을 예언하는 구절들.'과 '최후 심판과 일부 사람들이 받을 정화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에서도 잘 나타난다.'최후 심판은 구별하므로 선인들과 악인들이 분리된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은 영적으로 해석하며, 육적인 해석의 불평은 배제하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명백히 가리키지 않지만 어떤 구절들에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하느님이 말씀하신다.'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성경에서 예언한 모습 그대로 집행하리라는 것을 의심스러워하지 않는다. 종말의 날에 산자와 죽은자로 분리되 세상이 갱신될 것이다.


제 21 권 : 영원한 형벌


■ 제1주제 : 종말과 형벌에 대하여

 나는 여기서 '논술의 순서. 먼저 멸망할 자들이 마귀와 함께 받을 영원한 벌을, 다음에 성도들의 영원한 행복을 논한다.' 우선 여기서 나는 '몸은 타는 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몸이 고통을 당하면 반드시 죽게 되는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살아있는 몸이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연계의 실례들.'은 많다. 불도마뱀은 불속에서 살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어도 사실인 것이 많다.' 이것 속에는 기적과 이적에 속하는 것도 많다. '놀라운 일들이 모두 자연의 산물은 아니며, 인간의 재주나 마귀의 간계로 생기는 것도 많다.' 그러나 '기적을 믿는 궁극적인 근거는 창조주의 권능이다.' '우리가 잘 아는 물건의 속성이 갑자기 변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에 위배되지 않는다.'일례로 태양은 하느님의 법칙대로 운행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지한 때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논의로 들어가 '지옥, 그리고 영벌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지옥의 불이 물질적인 것이라면, 비 물질적인 악령들인 귀신들을 태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불은 물질적인 것이고 영은 비 물질적인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고 있으면서 고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영들도 이런 연결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사실 '구주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영벌을 받는 것은 처음 범죄가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의 원죄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중에 자비와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제외된다. 나는 여기서 '악인들이 사후에 받는 벌은 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논박한다.' 나는 여기서 '인간성이 받아야 하는 금세에서의 일시적인 벌들에 대하여.'논하며, 인간의 삶 그자체가 온통 벌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관점에서 보았을때에는 일시적인 것이다. 이러한 원죄의 삶 자체를 벗어나는 것은 사실 현세에서는 불가능하다. '뿌리깊은 악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출하려고 하느님의 은혜가 하는 일은 모두 내세에 속하며, 내세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 진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선을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죄악에 무저항으로 굴복하기 보다는 이 어려운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은혜의 법은 중생한 자의 전 생애를 주관한다.'


■ 제2주제 : 종말의 여러 논에 대한 반박

 나는 여기서 '영원한 벌을 받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논박하며,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므로, 아무도 최후 심판에서 정죄를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논박하며, '이단자들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논박하며, '이 용서를 모든 사람에게 약속하지 않고, 정통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국한하며, 그들에 후에 많은 죄와 오류에 빠져도 그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논박하며, '믿음을 지키는 정통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패악한 생활이 지옥불을 받기에 합당할지라도, 그 믿음의 "터"가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논박하며, '자선행위를 하면서 지은 죄는 최후 심판에서 정죄를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논박하며, '마귀나 악인들이 받는 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박하며.' '하느님의 심판에서 죄인들은 성도들의 기도의 힘으로 모두 용서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 특히나 종말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모두 하느님의 의지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분이 주관하시고 그분이 관장하신다.


■ 제3주제 : 구원에 대해

 나는 여기서 하나의 경고를 하고자 한다. '이단파의 세례의 받고, 후에 악한 생활에 빠진 자들, 정통적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안에 머무르면서도 부도덕한 생활을 계속하는 자들 - 이런 자들은 성례전의 덕택으로 영벌을 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단의 분파 신자들은 하나된 몸에서 분리되었기에 같은 성례를 받아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단지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뿐이다.그렇다고 끝까지 정통의 교회에서 친교를 계속한다 하더라도 벌을 받을 타락한 생활을 하는 이들은 여기서 안심할 수 없다. 그들은 불의한 생활로 의로운 그리스도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터가 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불로 얻은 것같은 구원을 약속받은 것은 누구인가?' 정통의 그리스도 인은 그리스도를 터로 모셨으며, 이것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타락한 생활이 비록 그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더라도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하고 어두운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역시 죄를 지음으로, 우리는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서 계속 기도해야 하며, 우리가 그들에게 잘못을 한것을 하느님을 통해서 용서를 받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


제 22 권 : 하느님 도성의 영원한 행복


■ 제1주제 : 천상도성에 이르는 길


 마지막으로 나는 천상 도성의 영원한 행복을 논한다. '천사들과 인간들의 창조에 대하여', 나는 이것이 하느님이 창조한 최고의 것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영원불멸한 의지에 대하여' 논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선하고 악한 일들이 모두 그분께서 예지하신 결과로 가는 길임을 밝힌다. 사람은 비록 땅에 발을 붙인 동물이지만 창조주의 뜻에 부합하면 하늘로 들어가기에 합당하며, 하느님을 버린 자들은 마찬가지로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이것에서 '성도들은 영원한 복을, 악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ㅇ,로 나는 '인간의 지상적인 몸은 천상거처로 옮겨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현자들을 반박한다.' 인간의 몸은 육체의 한쪽면과 영의 다른 한면이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살이 되어 지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천상에 기거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으로 '일부 사람들은 믿지 않으나 온세계 사람들이 믿는 육신 부활에 대하여.'말할 수 있다. '로마 사람들은 로마 건설자 로물루스를 사랑했기에 신으로 만들었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사랑하였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믿게 된 것은 하느님의 권능의 결과요, 사람이 설복한 결과는 아니다.' '세계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도록 기적이 있었으며, 세계가 믿게된 지금도 기적이 그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에게서 일어나며, 이중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자들이 행한 기적들은 그에 대한 믿음을 증가한다.' '하느님이 경배를 받으시도록 많은 기적을 행한 순교자들은 자기가 신으로 인정되도록 몇가지 기사를 행하는 귀신들보다 훨씬 더 존경을 받을만 하다.'


■ 제2주제 : 부활의 형태

나는 여기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3. 낙태아들을 죽은자로 인정한다면 그들도 부활에 참가할까?
 : 알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부활한다면 유아와 같은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것만 말할 수 있다.

14. 유아들은 장성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가?
 : 알 수 없다. 무에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솜씨라면,  필요시 몸에 덧붙여주실 방법이 없겠는가.

15. 모든 죽은 자의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은 부피로 부활할 것인가?
 : 그리스도는 부활때 자신이 죽기 전의 몸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장 완전한 시기의 몸을 가지고 부활하리라는 것 뿐이다.
 
16. 하느님 아들의 형상을 성도가 본받는다는 뜻에 대하여.
 :"하느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는데에서 속사람에 대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내세에서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17. 여자들의 부활한 몸은 여전히 여성일까?
 : 그리스도는 "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며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추론해보자면 시집과 장가라는 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18.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충만한 몸인 교회에 대하여.
 : 하느님이 인간을 사도나 혹은 선지자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주심은 성도를 온전히 보존케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다.

19. 금생에서 신체의 아름다움을 손상하는 결함들은 부활시에 모두 제거될 것이며, 신체 본연의 소재는 그대로 있으면서 그 속성과 분량이 변경되어 신체를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20. 우리 몸의 소재는 아무리 흩어질 것이라도, 부활시에는 다시 결합될 것이다.
 : 부활시 어떠한 몸을 가지느냐에 대해서는 논란할 필요가 없다. 신체나 연령은 같지 않더라도 행복의 면에 있어서는 천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21. 성도들의 육신은 신령한 몸으로 변하리라.
 :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지만 우리가 품은 희망으로 하느님을 찬미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희망이다.


■ 제3주제 : 영원한 행복

 '인류는 그 처음 죄의 당연한 보응으로 불행과 재난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거기서 구출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원죄가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방해하기에, 하느님의 자비가 없으면 우리는 여기서 헤어날 길이 없다. 또한 '선악간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금새의 불행과는 별개로, 특히 의로운 사람들의 노고에 따르는 불행에 대하여.' '금생은 저주를 받았지만 창조주께서는 여러가지 축복을 채워주셨다.' 인류의 역사는 크게 두강이 흐른다. 하나는 인간의 원죄에 의한 악의 강이며,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선의 강이다.이것은 종말의 날에 합쳐질 것이며, 다시 고난을 통해서 다시 분류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예언된 바와 같이 온 세계가 몸의 부활을 믿는데도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고집에 대하여.'이야기 하고자 한다. '영혼이 행복하려면 여러 종류의 몸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포르피리의 의견을 플라톤은 반박한다. 최고 신은 신들에 대하여 그들은 결코 그 몸에서 축출되지 않으리라고 약속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과 포르피리는 그 상충되는 의견을 서로 양보할 수 있었다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플라톤이나 라베오나 심지어 바로까지도 서로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었다면, 부활에 대한 진정한 믿음에 공헌할 수 있었으리라.' '하느님의 도성에 있을 영원한 행복과 안식'은, 그때에는 어떤 악도 없고, 어떠한 선도 부족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찬양할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있을 것임으로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도성에는 모든 시민에게 한결같은 자유의지가 있고 아무도 그 자유의지가 분열되지 않으며, 모든 악에서 해방되어 모든 선으로 충만하며, 영원한 기쁨을 끊임없이 즐기고, 과거의 죄와 벌은 잊되, 해방된 것과 해방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고 한 유혹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하느님을 저버렸으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동참을 유도함으로써 신들이 되도록 도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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